※ § 소중한 자료

학교교육의 문제점

까망쑤나 2010. 11. 29. 13:58

요즘 한국사회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 중 하나가 교육의 문제일 것이다.

그럼 교육은 왜 중요할까? 그것은 우리의 미래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은 지금 당장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미래가 걸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럼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 어느 하나의 문제라 딱집어 말할수 없겠지만 공교육의 붕괴가 가장 큰 문제라 생각한다.

공교육이란 무엇일까? 원래 훌륭한 국민을 육성한다는 공공적인 목적을 위하여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설립 ․운영하는 학교교육 또는 이에 준하는 학교교육으로 보통의 의미로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설립 ․운영 ․관리하는 국 공립학교의 교육만을공 교육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의 넓은 의미로는 공교육에 준하는 사립학교의 교육도 공교육에 포함시키고, 공교육은 과외와 같은 사교육과 구별하는 뜻으로 쓰인다.

즉 공교육은 우리국민 누구나 빈부의 격차없이 공적으로 받을 수 있는 교육을 일컫는다. 이것은 다시말해 우리 국민모두의 질을 결정하는 교육이 되는 것이다.

그럼 공교육의 붕괴 이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그건 누구 한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학생, 학부모, 교사, 학습방법, 학교,등등 우리 사회 모두의 문제일 것이다

 

현상1

1. 학생들의 공교육의 대표적 장소인 학교를 이탈하고 있다.

 

1999년

2000년

2001년

합계

중학생

3,124

4,095

5,765

12,984

고교생

1,956

2,624

4,075

8,655

(실업계 고교생)

(203)

(227)

(292)

(722)

합계

5,080

6,719

9,840

21,639

 

가정사정, 품행 및 학교생활부적응 등으로 연간 약 6만명의 중고생들이 학교를 떠나고 있고, 또 약 1만명의 아이들이 유학․이민 혹은 검정고시로 상급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학교를 자진 퇴학하고 있다. 초등학생들까지 합하면 일년에 학교를 떠나는 숫자는 약 8만여명을 초과한다. 한국교육개발원 학생변동상황 2001년 통계에 의하면 초등학교 장기결석자 935명, 질병 4,090명, 이유가 언급이 안된 기타 9,709명이다. 즉 초등학생 14,734명이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통계이다. 중학생 17,270명, 고등학생 49,699명이 여러 가지 이유로 학교를 퇴학하고 있다. 중학생 가운데 3,852명이 가정사정문제, 428명이 품행문제로 5,475명이 학교생활부적응으로 5,475명으로 각각 퇴학하였다. 고등학생 가운데 17,246명이 가정사정문제로, 2,340명이 품행문제로, 20,702명이 학교생활부적응으로 각각 퇴학하였다. 그 중에서 실업계 고등학생이 가정사정문제 64.8% (11,180명), 품행문제 86.1% (2,015명), 학교생활 부적응 75%(15,522명)를 차지하여 실업계고등학교의 황폐현상을 숫자로 나타내주고 있다. 전국의 중고등학생이 2001년 한해에 학교생활 부적응으로 퇴학한 학생 26,177명, 가정사정으로 퇴학한 학생 21,098 명, 유학․이민으로 퇴학한 학생 9,840명 등 66,699명의 중고생들이 공교육의 전당인 학교를 떠났다는 문제가 한국교육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유학․이민으로 인한 퇴학 (1999-2001) 단위: 명

출처: 1999-2001 한국교육개발원 교육통계 학생변동상황을 분석정리

 

 

현상2

교사의 교권이 실추되고 학생과 학부모가 교사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 매스컴에서 종종 선생님께 체벌을 당한 학생이 선생님을 고발하는 경우나 촌지문제로 사회가 떠들석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한 매스컴에 등장하는 교사의 모습은 교육적 신념을 가진 존경의 대상으로서의 교사가 아닌 생활인 혹은 직업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게다가 사건과 연루된 교사의 모습은 일반인이 아닌 약자이거나 파렴치범으로 비추어 지고 있어서, 스승으로서 교사에 대한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얼마 전부터는 학생들이 교사를 경찰에 신고하는 일이 종종 보도되고 있고, 교사의 체벌에 대한 학생의 반응은 이제 범죄 신고하듯 112 버튼으로 해결되고 있다. 교단 앞에서 당당한 교사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고 작고 왜소한 모습의 교사가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학부모 조차도 교사를 불신하고 있다. 과외에 대한 언론자료들은 사교육비의 경제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부담되는 비용을 감수하고라도 자녀에게 교육을 제대로 시키려면 과외를 해야 된다고 학부모들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학부모는 학교와 교사를 믿어야 한다. 학교와 교사들이 가정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채워 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자녀를 학교에 맡겨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1999년의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학교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고 이러한 불만은 자녀의 학년이 올라 갈수록 심해진다. 학교에 만족하는 학부모는 중학교 29.1%, 인문고교 22.2%, 실업고교 20.5%에 불과했다. 70~80%의 중․고등학생 학부모들이(한겨레신문, 1999. 12. 29) 학교에 불만을 품은 채 마지못해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셈이다.

 

현상 3

사교육비의 부담이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1997년 한국소비자보호원이 만 3세부터 고등학교 재학생이 있는 전국의 5천여 가구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전 가구의 85.2%가 자녀에게 다양한 형태의 사교육을 한다고 응답하였다. 미취학 어린이부터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의 사교육은 부모의 사회 경제적, 교육적 지위가 높을수록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교육비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학원비로서 57.7%이며, 개인 및 집단 과외지도비가 15.6%, 학습지 비용이 12.4%로 나타났다(한국소비자보호원, 1997). 하지만 모든 가구가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것은 아니다. 자녀 1명당 평균 학원 수에 관한 조사를 보면, 안 보내는 가구가 29.2%, 1-2곳 보내는 가구가 52.9%, 3-5곳 보내는 가구가 16.0%, 5-6곳 보내는 가구가 1.2%로 나타났고, 자녀 1인당 한 달 평균 사교육비를 전혀 안 쓰는 가구는 16.5%, 10만원 미만은 10.2%, 10만원대 16.0%, 20만원대 20.5%, 30만원대 19.1%, 40만원대 8.1%, 50만원이상 9.6% 로 나타났다(안길찬, 2002). 이것은 또다른 부익부 빈익빈의 결과를 가져온다.

 

 

공교육 실추의 원인

우리는 앞에서 공교육이 실추되는 여러 현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럼 이러한 문제들이 일어난 이유와 원인은 무엇일까? 아까도 말했듯이 어느하나 어떤 한계층의 문제가 아니고 여러 가지 복합의 문제이지만 이 원인을 학생, 교사, 학습방법, 제도로 나누어 알아보도록 하자.

 

- 제도의 문제 -

<교사들의 잡무가 많다.>

원래 교사는 어떤 일보다 수업에 집중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있다. 실제 현직에 나가있는 교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수업에 집중을 하는 일보다 수업외적일에 더욱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수없이 밀려오는 공문들 잡다한 일들...이러한 일들을 처리하기에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교원잡무 백서」에 따르면 연간 공문서 건수가 학교별로 2000건 내지 3000건에 달한다. 그리고 그 중 필수 공문서의 비율은 20% 안팎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교사의 잡무로 이어지고 교사가 수업에 집중할수 없게한다. 그럼 교사의 잡무가 이렇게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교실안에서 학습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교장을 비롯한 학교내 교육행정관리자, 학교운영위원회, 학부모와 학부모 단체, 장학사, 교육감, 교육인적자원부 장관과 공무원들, 국회의원, 정당간부, 언론사 등 교실안 학습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불요불급한 행정잡무를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대책이 없는 한 교사들이 학습공간에서 학생지도와 교육에 전념하기는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한급당 인원수가 너무 많다.>

학급당 인원수도 너무 많아 그 많은 인원을 한 교사가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현재 한 학급당 인원수는 대략 35명정도 된다. 하지만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 한급당 70명에 육박하였다. 이렇게 많은 인원수는 교사가 아이들 하나하나 신경쓸수 없는 상황이었구 효율성에 입각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창의적 수업보다는 획일적이고 일률적인 수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학교 주변이 위험하다.>

학교 정문 앞 100미터이내와 학교 담장 50미터이내에는 청소년 유해 업소들이 들어서지 못하도록 법제화되어 있지만, 실제 초중고등학교 주변에는 유해업소들이 가득하다. 교통의 문제도 그러하다. 학교앞에서 서행을 해야 하고 경적을 울리지 않는등 조심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러지 못하다는 것이다. 치안의 문제도 그렇다. 요즘은 초등학생을 둔 부모님들이 등하교 시간마다 학교앞에서 아이들의 바래다 준다는 것이다. 학교앞조차 치안적으로 안정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일예라 할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교육인적자원부 차원을 넘어 범정부적 범사회적 차원에서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

 

-교사의 문제-

 

<교사의 자질>

앞에서 살펴본것처럼 교사의 교권이 실추되고 있다. 학생과 학부모가 교사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문제가 있지만 교사의 자질과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교사는 사람을 가르치는 직업이다. 그러기에 교사는 무엇보다도 뚜렷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아무리 풍부한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확고한 교육자적 신념 내지 교육에 대한 사명감이 없을 때 훌륭한 교사로서의 자질이 결여되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교사라고 해서 모든일에 완벽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러한 자질을 갖고 있어야 할것이다.

 

<교사의 전문성>

모든일에 완벽할순 없지만 교사의 자질과 능력성을 어느정도 갖고 있어야 한다. 물론 많은 교사들이 잘하고 있지만 일부 교사들은 그냥 오직 직업으로서만 교사의 일을 수행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이부분 또한 고찰해야 할부분이다.

 

 

-학습방법의 문제-

-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고 필요한 교육 아니라 암기위주식의 주입식 교육이다. -

일예로 우리 정규 수업과정에 12년을 공부하고도 직접 외국인을 만나면 영어 한마디 못하는 경우, 창의력 사고력 증진이 아닌 무조건 대입 수능을 위한 일방적이고도 주입식 교육 이런 것들은 아이들로 하여금 학교에 가기 싫게 만들고 학교에 적응하지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잘하게 하고 그것을 만족하고 수용하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고 그 외의 아이들은 소외받고 있다.

 

- 초중고에서 진로교육과 직업탐색교육을 도외시 하고 있다-

앞에 있는 암기식 위주의 교육과 많은 부분 겹치는 부분중 하나 이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대학진학만을위한 교육에 치중하고 있다. 20대 30대 실업자가 전체에서 67%(김경은, 2002)를 차지하는 것은 직업교육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다. 직업교육이라 하면 실업계 학교에서나 하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직업교육에 대한 인식이 낮으며, 대학으로 진학할 학생들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그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초등학교 단계에서부터 진로교육과 진로지도를 통해 학생들이 직업을 선택하고 그에 필요한 지식, 기술, 태도를 갖추도록 도움을 제공하고 있지 못하다. 대학도 적성과 소질에 따라가지 않고 수능점수에 맞추어가기 때문에 지식기반시대의 한국대학이 실업자를 양산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 교육소외계층에 대한 평생교육을 공교육이 외면하고 있다-

교육의 중요한 화두 중에 하나인 평등의 문제에 대해서 정부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교육평등이 성취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국가는 스웨덴, 핀란드 정도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공립대학은 평생교육에 대단히 소극적이다. 반대로 사립대학이 재정확충을 목적으로 평생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국에서 운영되는 학점은행제는 학사만들기 제도이지, 고등학교 이하를 중퇴한 사람들은 배려하지 않는다. 교육소외계층들은 먹고살기에 바빠 교육받을 시간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마져 국가가 내팽개쳐서는 안된다.

- 대학입시를 대학에 맡기지 않고 정부가 지배하려는 것이 문제이다 -

대학입시제도에 대한 결정을 정부가 독점하려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정부의 지배에 순치된 대학들은 전국의 학생들을 대학수학 능력시험 점수를 이용하여 별 투자와 노력없이 학생들을 선발하고 있는 대학당국도 문제이다. 고등학교가 내신 부풀리기 경쟁에 나서기 때문에 전국의 대부분의 대학들은 수능점수를 학생선발의 중요한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수능은 전국의 학생들을 한줄로 세울 뿐만 아니라 전국의 대학과 학과를 한 줄로 세워서 대학의 교육력이 아닌 수능점수에 의해 대학 서열화를 조장하고 있다.

대학 본고사 금지를 법령으로 제정한 것은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온 천하에 천명했던 한국 정부가 아직도 통제만능의 교육 후진국임을 자인한 셈이다. 지난 정부가 대학의 본고사를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한 것은 규제완화와 대학의 자율권 확대를 강조해 온 그 동안의 정부정책을 스스로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대학 본고사를 보지 못하게 하니, 대학들은 면접구술고사를 보고 면접구술과외라는 신종 사교육사업이 생겼다. 학업계획서와 자기소개서를 점수로 반영하니 그것을 돈을 받고 대신 써주는 곳도 생겨났고 돈이 없는 부모를 둔 수험생에게는 치명적인 제도이다. 1시간도 아닌 20여분정도의 면접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날 수 있는 지금의 본고사 대체용 구술시험은 빈곤계층의 수험생들에게는 매우 불리한 제도이다.

 

해결책

 

- 권위주의적 통제와 획일적 교육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 암기식 위주의 교육 )

조심스럽지 못한 진단 중의 하나가 권위주의적 통제, 획일성, 주입식 교육 등 기존 한국교육의 파시즘적 성격에 학교붕괴의 기본 요인을 두는 주장이다. 한국교육의 가장 큰 문제가 획일적 통제와 주입식 교육이고 더 이상 그러한 획일성과 통제에 학생들의 저항에 의해 학교붕괴 현상이 빚어진다는 것이다. 여전히 그러한 문제점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한 그러한 점들이 교육관계의 위기를 불러오는 일정한 조건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교육의 파시즘적 성격을 학교붕괴의 주된 요인으로 보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과정이 구분되는 모든 책임을 어떤 하나의 문제점에 몰아버리는 ‘전가’의 성격이 짙다. 여기에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요인을 파악하려 하지 않는 게으름이나 혹은 공교육 자체를 억압적, 획일적 체제로 파악하려는 시장적 관점에 대한 투항이 숨어 있다.

공교육은 어떠한 형태로든 사회적 수준의 교육과정, 집단적 교육관계, 교육과정에서의 교사의 주도권과 일정한 통제력을 필수로 한다. 따라서 학교 교육은 아이들이 좋아하고 재미있어하는 것만으로 구성될 수는 없으며, 일정 시간 동안 일정 공간에 있어야만 하며, 교육과정의 진행을 위한 기본적인 요구와 통제를 필요로 한다. 일정하게는 재미없거나 스스로 충분히 의의를 못 느끼는 것도 해야 할 때가 있으며 하고 싶은 것도 참을 수 있는 때도 필요하다. 또한 교육과정의 진행을 위해 교사에게는 교육적 권위를 부여해야만 하며 가능한 인성과 가치관 형성에 도움을 받는다면 더욱 좋다. 재미와 자유에 대한 최소한의 제한은 이처럼 공교육, 아니 교육 자체에서는 불가피하다. 나아가 모든 조직과 사회적 실천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아이들에게 부가되는 통제와 지루함이 인간적, 교육적으로 인정, 배려되는 수준과 방식인가의 문제이며 우리는 그러한 기준 속에서 학교교육의 파시즘적 성격을 논해야 한다. 학교교육이라는 사회적, 집단적 교육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정한 통제와 다양성과 흥미의 한계까지 문제 삼는다면 그것은 교육의 사회적 조직화와 공공성의 원리, 나아가 공동체의 규범까지도 부정하는 것이 된다.

 

 

3) 교사집단의 무능과 무지, 게으름 때문 ?

 

아이들이 교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단절감을 느끼며 수업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이 교사집단의 무능과 무지, 게으름 때문이라는 주장도 적지 않다. 그 때문에 교육과정의 파행화라는 학급붕괴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매번 교실에 들어가서 똑같은 말을 토씨도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하는가 하면, 몇 년을 써먹어 너덜해진 공책을 똑같이 베껴 판서한다. 교무실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정부에서 지급한 컴퓨터로 프리셀과 고도리를 치며, 표정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에 나태함이 잔뜩 배여있다.’

‘날마다 학생들과 함께 지내는 교사들이 학교붕괴 현상을 미리 감지하여 예방하지 못한 원인은 무엇인가? 분명히 교사의 무감각과 무능에 그 원인이 있고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교사가 너무 형편 없이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이 대체로 수업을 재미없어 하는 것은 맞다. 그리고 이런 지리한 수업에 권위 부정, 단절감 등이 더해져 ‘파행’을 불러오는 조건이 되는 것도 맞다. 그러나 일상적 조건과 파행의 원인, 계기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학교수업(뿐만 아니라 사교육조차도)이 다수의 아이들에게 대체로 재미있었던 적은 예전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예전보다 교사의 지적 수준이 떨어지고 게을러졌다는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교사들의 전반적 수준과 노력은 지속적으로 향상되고 진전되어 왔다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교육과정의 파행이 나타나는 것에는 다른 요인과 계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 견해에는 잘못된 사실 파악과 전제, 책임 전가들이 숨어 있다. 우선, 학교붕괴는 형편없는 수업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학교붕괴는 대체로 수업의 질 이전에 학습에 대한 의지나 욕구 자체의 저하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 학교붕괴는 자발적 학습의지나 욕구에 비해 교사의 지적 능력이 떨어지거나 형편없기 때문에 수업을 거부, 회피하고 권위를 부정하는 행위들로 구성되는 현상이 아니라 대부분 수업 자체가 싫고 그것을 강제하는 상황을 참아내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나마 대체로 일정한 자발성을 기초로 하는 사설학원 등의 사교육에서도 교육실천의 소외 현상이 심화되고 있음은 학교붕괴 현상의 핵심 지점이 ‘교육관계의 형성’이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의미한다. 둘째, 교사집단을 파악함에 있어 과도한 왜곡과 책임 부여가 함께 나타난다는 점이다. 교사집단의 실상을 파악할 때는 극단적인 사례나 상황을 일반화하여 무능하고 나태한 집단으로 몰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많고 다양한 아이들을, 심지어 학습의욕이 전혀 없는 아이들까지 포괄하여 재미있는 수업을 진행하고 아이들과 충분한 의사소통을 이루어야 하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사집단은 이 주장에서 매도하는 것처럼 무능, 나태하지도 않으며 또 요구하는 것만큼 다수의 교사가 ‘슈퍼, 엘리트, 탤런트’할 수도 없다. 학교붕괴 현상은 학교교육이라는 사회적 교육과정을 수행할만한 능력과 요건, 의사를 갖추고 있고, 좀 더 좋은 교육실천을 행하고픈 다수의 교사들이 접하게 된 새로운 ‘위기’적 상황인 것이다.

 

4) 대량 생산 체제인 학교 자체의 문제이다?

 

“산업화 단계에 형성된 학교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은 경제 성장이 어는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면서이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삶의 분화가 심해지고 사회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기존의 학교체제에 위기가 오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가 확산되고 또래 집단 문화가 형성되면서, 또한 소비가 중심이 되는 후기 근대적 상황으로 가면서 아이들은 더 이상 획일적인 대량생산체제에 맞추어서 만들어진 학교를 참을 수 없게 된다.”, “한마디로 시대가 더 이상 지금과 같은 학교체제를 감당할 수 없으며, 감당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 조한혜정, ‘근대의 보편적 양상으로서의 학급 붕괴와 한국적 특수성’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 현재의 산업사회적 학교모델이 ’정보화‘로 대변되는 후기산업사회에서 제대로 유효하지 못하다는데 있다.’

- 전종호, ‘학교붕괴현상에 대한 교육주체의 의식조사연구’

 

학급붕괴는 한국교육의 파시즘적 성격이나 교사의 무능, 나태의 차원을 넘어서서 변화된 사회문화적 조건과 대립되는 공교육체제 자체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견해도 등장한다. 앞서의 주장들 보다는 사회구조적 인식이 좀 더 심화된 논의이다. 교육운동 내에서는 주로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이러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던 견해들 - 학교의 억압성과 획일성, 교사의 무능과 나태 등을 주요 요인으로 보는 견해들 - 도 궁극적인 논리적 귀결은 이 주장과 연결된다. 왜냐하면 그 같은 견해들이 실제로 부정하는 것은 파시즘적 억압성과 획일성만이 아니라 공교육의 집단적 교육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정한 권위와 통제 자체이고, 또한 모든 혹은 다수의 교사가 세대차를 충분히 극복하고 그 다양한 아이들과 항상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결국은 학교 자체의 한계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교 자체의 한계에 기본 요인을 두는 경우 그것은 곧 학교의 해체나 공공적 원리의 포기를 주장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실제로 이들은 직접적으로 ‘학교외의 대안을 마련하거나 완전히 재구조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로는 산업사회적 모델이 아닌 정보사회에 맞는 모델을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곧 시장화된 교육을 의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 이르러서 학교붕괴와 공교육 자체, 나아가 사회변화를 바라보는 관점 상의 대립 지점이 분명해진다. 그들은 학교교육이 담보해야 할 민중의 교육권과 교육의 공공성을 순식간에 포기하고 있으며 또한 학교체제와 대립되는 무한 경쟁, 개인주의와 소비 만능의 잘못된 시대적 성격과 문화적 흐름마저도 그대로 인정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신자유주의와 거의 완전히 동일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신자유주의에서는 기존 학교체제를 획일적이고 경직된 것으로 부정하면서 정보사회에 걸맞는 체제로서 ‘시장화된 교육’ 내지는 ‘학교의 해체’를 주장해 온 바 있다.

입장과 관점만의 문제뿐 아니라 학교 자체의 한계를 지적하는 견해에는 몇 가지 잘못된 판단들이 전제되어 있다. 우선은 공교육의 성격을 획일성과 경직성 그 자체로 그야말로 ‘경직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사회문화적 상황을 파악함에 있어서도 학교체제와 대립하는 요소들을 다른 측면이나 요소들과 구별하지 않은 채 막연한 전체로서 파악하면서 ‘필연적인 것’, ‘주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첫째, 공교육 자체를 획일적인 대량생산체제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동일한 방향의 사회적 관념과 일상에 대한 태도까지 지배하고자 했던 파시즘교육을 획일적이라고 하는 것은 모르겠으나 공교육이라는 사회적 수준의 교육과정 자체를 산업사회적 모델로 치부하면서 획일적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과도한 매도이다. 학교교육은 공공적 교육실천이라는 일반성 하에서 학교나 학급의 수만큼이나, 교사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게 전개된다. 사회적 수준의 교육과정 역시 국가 수준, 지방 및 지역 수준, 급별 수준, 학교별 수준에서 다양화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공교육에 다양함이 불충분하다고 해서 공교육 자체가 획일적일 수밖에 없다고 단정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도 이들에게는 집단적 교육과정 자체가 획일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경제적, 사회적 다양성만큼 학교가 다양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학교교육(초중등)의 기본 임무가 사회적 인간 형성과 교양 형성에 주안점이 두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시대와 문화적 흐름에 대한 이해 역시 단선적이다. 현대사회의 특징을 개별화와 다양화, 세분화로만 파악함으로써 학교의 공공성과 시대 및 문화 전반을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분화, 다양화, 개별화되면서도 사회적 연관은 심화, 확대되며 공유의 필요성 역시 더욱 커진다. 우리는 현대사회의 주된 흐름을 이러한 양 측면의 결합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오히려 사회가 갈수록 개별화, 세분화되는 만큼 학교교육과 같은 사회적 조직화와 학교를 통한 ‘공동체적 인간형성’의 의의와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셋째, 공교육과 대립되는 새로운 사회문화적 요소와 지점을 분명히 해야한다. 변화하는 사회와 아이들의 모든 것이 학교체제와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체제와 대립하는 사회문화적 요소는 오히려 부분적일 수 있다. 단지 사회와 아이들의 변화에 교육이 따라야만 한다는 주장은 어떤 요소들이 학교체제와 어떻게 대립되는지, 결합의 문제인지 아니면 극복과 해소의 문제인지에 대한 판단없이 학교 자체를 부정하는 매우 무책임한 태도이다. 또한 그것은 공교육 위기의 일정한 조건으로 작용하는, 욕망 중심의 개인주의적 소비문화가 지닌 반공동체성과 반인간성에 대한 투항이기도 하다. 이 같은 투항에는 그것이 대세이고 필연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의 정글사회가 현실적 대세라고 해서 우리는 살벌한 구조조정과 대량실업, 비인간적 물질주의와 경쟁, 모든 인간적 가치의 상품화 등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아니다. 그것은 극복의 문제이다. 더구나 신자유주의가 현대사회 자체가 아니라 단지 현재 헤게모니를 지닌, 반드시 극복해야할 특정 조류인 것처럼 공교육과 대립하는 지점 역시 현대사회 자체가 아닌 특정한 사회문화적 조류에 불과하다. 우리는 바로 그 지점을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학교체제 자체와 대립하고 있는 것은 사회와 아이들 전체가 아니라 현대사회의 한 쪽 측면인 분화와 개별화만이 특화되고 물신화된 반공동체적 문화적 경향에 불과하다. 그 외의 많은 변화의 요소들은 학교 자체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결합과 수용의 문제인 것이다.

 

5) 아이들이 문제다 ?

 

보수적이거나 경험적인 차원에서는 이 지점에 착목하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이 견해는 앞의 주장들과는 경향을 완전히 달리한다. 학교붕괴 현상을 야기하는 직접적 행위의 주체들이 아이들인 것은 현상적으로 맞지만 아이들에게 책임 소재로 돌리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정당하지 않다. 우선, 사회적 차원에서 아이들은 주로 영향력을 능동적으로 행사하기보다는 사회적 제 요소나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 주체이다. 아이들에게 요인을 찾는 것은 문제의 근원을 덮어 버리거나 애매하게 만들고 사회적으로 힘이 없는 아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이들에게서 문제의 근원을 찾는 것은 ‘아이들도 문제있고, 어른들도 문제있고, 사회와 학교도 다 문제있다’는 식의, 사실은 아무런 문제 지적도 못하는 선문답에 불과하다. 요인 지적은 아이들에게 문제를 야기하게 하는 사회적 요소와 힘을 찾아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둘째, 다수의 아이들을 문제 삼는 것은 사실 지적에 있어서도 부당하다. 다수의 아이들이 다 문제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이들을 나누어 놓고 보면 여전히 아이들은 대체로 착하고, 순진하다. 문제는 그럼에도 집단적 교육관계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못하게 하는 제 요소들인 것이며, 여전히 소수이지만 일탈이 늘고 있고, 일탈의 수위를 상승시키는 요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현상적 차원에서 아이들에게 요인을 찾는 것은 자칫하면 아이들의 자율성 자체를 봉쇄하고자 하는 파시즘적 처방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문제의 근원을 찾지 못한 채 손 놓고 바라보게 되는 ‘무대책’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2. 학교붕괴를 어떻게 볼것인가 ?

 

학교붕괴에 대한 논의가 이처럼 방만하고, 혼란스럽게 전개되고 공교육의 공공성마저 부정하는 견해들이 나타나는 것에는 학교붕괴라는 현상이 지니고 있는 사안의 ‘범위’와 ‘성격’을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저마다 다른 지점에 주목하게 되는 탓도 크다. 특히 학교붕괴라는 새로운 현상에 기존의 모든 교육 문제들까지 싸잡아 집어 넣고 사안의 범위를 지나치게 확장시키는 경향이 많이 나타난다. ‘학교붕괴’라는 말 자체도 이러한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학교붕괴 현상을 학교교육이 안고 있는 총체적 문제점과 동일시해버리고 만다. 논의의 방만함은 문제의 지점을 애매하게 하면서 ‘학교교육 정말 문제있다’라는 기존의 인식을 양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결국 앞서 지적한 것처럼 엉뚱한 곳에 책임을 돌리거나 학교 자체를 부정하게끔 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이후의 논의를 위해서는 사안의 범위와 성격을 먼저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1) 학교붕괴는 집단적 교육과정의 파행 현상이다.

 

우선, 사안을 분명히 해야한다. 학교붕괴라는 이름하에 사람들이 주목하는 현상은 이러저러한 요인(학교붕괴 현상은 매우 복합적인 요인에 의한다.)속에서 나타나는 아이들의 학교나 수업의 거부, 회피, 통제에 대한 불응이나 저항 등에 의해 정상적인 학교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이다. 수업과 과제에 대한 태업, 지도 불응과 공공연한 저항, 일상적 미등교나 불출석의 증가 등이 학교붕괴의 대표적 현상들로 거론되며 그로 인한 수업과 학생지도의 불능 상태로 요약된다. 이러한 현상들은 직접적으로는 학교에서의 집단적 교육과정을 지도하려는 교사의 통제권을 일부 또는 다수의 학생들이 무시, 회피, 거부 또는 저항하는 것에 의해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학교붕괴 현상은 ‘학생들에 의해 교사의 지도력이나 통제권이 거부, 회피당함으로써 나타나는 교육과정의 파행 현상’으로 규정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결국 학교붕괴는 그 동안 학교를 매개로 형성된 기존의 교사-학생간의 교육관계가 새로운 차원의 위기를 맞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3.중도탈락이 늘어가고 자의로 학교를 떠나는 청소년들이 늘어나면서 생긴 것이 대안학교이다. 1999년 12월 교육부가 ‘학교 중도탈락자 종합대책’의 일환으로 발표한 대안학교 설립계획은 대안학교의 설립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곽병선, 2000). 이 같은 학교는 주로 계절 또는 주말 프로그램이었던 반면, 1997년 3월 한국의 상설대안학교라고 할 수 있는 산청 간디학교가 개교하면서, 그 후에 영광의 성지학교 등 본격적인 대안학교가 설립되었다. 1998년에는 간디 학교와 성지학교를 포함한 6개의 대안학교가 정규 고등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99년에는 4개교, 2000년에는 1개교가 추가되어 현재 11개교가 운영되고 있다.

또한 대안학교의 확산과 더불어 학교를 벗어나려는 또 다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데 가정학교(home schooling)운동이다. 학교에 자녀를 보내면서 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판단 하에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직접 교육시키려는 움직임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학생의 학교이탈 상황은 교육현장 붕괴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대안교육을 서술적인 의미에서 기존의 교육과는 다른, 더 좋은 교육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 대안교육은 어느 시대에나 늘 있었다. 대안학교의 확산과 더불어 최근 기존 학교체제의 동요를 보여주고 있는 움직임으로는 탈학교 운동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자연발생적으로 종래의 학교 질서에 공공연하게 저항하거나 이를 거부하는 행위가 일어나고 있는데, 과거와 달리 이러한 행위들이 점차 사회적으로 용인되어간다는 점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점차 학교를 떠난 아이들에게 관대해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학교에 대한 신뢰가 낮아짐으로써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의 편을 들어주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세에 편승이라도 하듯 최근에는 당당하게 학교의 교육방식을 거부하고 자퇴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으며, 이들은 일부 성인들의 지원아래 학교 밖의 길을 공동으로 모색하기 위한 모임을 만들고 자퇴를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자퇴를 적극적으로 권유하기까지 하고 있다(탈학교모임친구들, 1999). 아직 미미하기는 하지만, 의도적으로 탈학교 운동을 전개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일단의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탈학교실천연대’는 교육문제의 대부분이 학교라는 제도 자체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탈학교’를 실현하기 위하여 학력폐지 운동, 탈학교 학습네트워크 건설 운동(교육통화시스템의 실험, 다양한 학습공동체 구성), 학교개혁 운동 등을 실천하고 있다(이한, 1998). 한편, 이러한 방식의 실험은 지역사회의 대안적인 교육활동과 결합되어 새로운 실험 형태인 ‘교육문화협동조합’을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조합원들의 공동 출자와 화폐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역통화’의 운영을 통하여 교육과 문화의 공동 향유를 위한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교사의 교권이 실추되어 교단이 불안정하고, 학부모들은 학교를 불신하여 공교육이 사교육에 밀리고 있다. 그래서 학부모들은 과도한 사교육비 부담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교육소외계층의 자녀들은 교육사각지대로 내몰리고 있다.

 

중고생 합계

중학생

고교생

(실업계 고교생)

1.사망-퇴학

892

287

605

319 (52.7%)

2.건강(질병)-퇴학

1,171

338

833

339 (40.7%)

3.가정사정-퇴학

21,098

3,852

17,246

1,1180 (64.8%)

4.품행-퇴학

2,768

428

2,340

2,015 (86.1%)

5.학교생활부적응-퇴학

26,177

5,475

20,702

15,522 (75.0%)

6.검정고시-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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