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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신학 정문식 목사

까망쑤나 2011. 4. 18. 23:55

조회 수 3885 추천 수 254 2003.10.21 07:04:06
정문식 목사 *.107.204.138
목회 신학

      서론: 목회신학이란 무엇인가?
  목회 신학은 목회자의 직무와 기능을 취급하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한 분야이다.
그것을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목회신학은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노출의 추이를 취급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목회자의 역할과 과업, 의무, 그리고 업무에 관계되는 결과들을 다루는 점에서 목회의 한 분야이다. 이것은 실천신학의 독특한 하나의 형태이다.
동시에 조직신학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목회신학은 목회의 직무와 자질에 대하여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목회의 과업에 있어서 그것들을 총체적인 관계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목회신학은 각 분야들을 통합하여 향상된 목회 수행을 유도하는 목회이론을 제공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다른 분야들과는 차이가 있다.


         제1부 목회자가 되는 길
  
       1. 목회적 주체성의 발견
①중심이 확고한 목회
목회자의 다양한 활동은 하나의 중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다. 목회신학은 현대용어로 이 중심을 파악하고자 하며 동시에 이 중심과 관계된 모든 기능을 검토하고자 한다.
목회에 있어서 중심을 이루는 주체성의 상실은 목회를 수행하고 통일을 꾀한다는 명목으로 각 분야들이 지나치게 세분화된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목회신학이 제시되어야 할 이유이다.  
목회의 주체성에 대한 이와 같은 혼란 중에서 가장 놀랄 만한 사례는 현대의 목회상담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는 목사의 혼동된 해석으로 인해서 극단적인 직업화가 시도되고 있다는 데 기인한다.
목회가 식어버린 주원인은 목회의 주체성이 애매모호 한데 있거나 목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혼동하고 있는데 있다.  해결책은 전통적인 목회의 예지 안에서 건실하게 다시 뿌리를 내리는 일이다.
②목회에 대한 총괄적인 비전
이제까지는 여성도 안수목회에 전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표준적인 전제의 하나로 포함시킨 전반적인 목회신학은 시도되지 못하였다. 우리는 보수적인 견해를 더욱 유념하면서 그리스도교 목회에는 남자와 여자가 모두 신성한 목회에 부르심을 받을 수 있다는 성적 포괄성을 노할 것이다.
③목회의 근원에 대한 탐색

     목회신학의 방법
  목회신학도 하나의 신학이기 때문에 목회신학은 이미 잘 형성된 신학과 똑같은 방법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즉 역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잘 알려진 세 가지 자료, 즉 성서, 전통, 이성, 그리고 경험을 잘 이용하는 것이다.
  성서는 목회직무와 그 기능을 이해하는 데 주요한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목회신학은 성서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목회신학은 문화적 상황과, 정치적인 맥락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변의 풍조를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다.

     왜 목회가 필요한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바르게 보살피는 것을 배우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수치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교회를 통하여 인간에게 사역하시고 또한 인간인 대리자들, 즉 보통에 지나지 않고 결점 투성이며 자만에 빠지기 쉬운 사람들을 말씀과 성례전의 사역에 부르셔서 교회를 위해 사역하도록 선택하신다는 사실이다.

       2. 목회에의 소명

     내적 부르심: 자아검토
  목회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식에 관하여 스스로 자문해 보는 일은 끊임없이 계속되거나 아니면 가끔씩 대두된다. 만약 소명의식이 가끔 일어나거든 서두르지 말고 좀더 큰 확증과 계속적인 징후를 얻기 위하여 경청하기를 계속하라 그리고 스스로 자문할 때 솔 직하라 나의 지적 능력은 소명을 감당할 수 있는가 나는 완전한 문장을 쓸 수 있는가 비판적으로 생각 할 수 있는가 성례전을 해석할 줄 아는가?  그리고 나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 그리고 병든 자들을 돌보기 위하여 어느 정도까지나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가?  만약 필요하다면 나의 생명 자체까지도 희생적으로 드리려는 나의 의도를 얼마나 깊이 성찰하였는가?  또한 참 제자의 직분에 필요한 십자가를 짊어지고. 또한 세상에 대하여 죽으려는 자발적인 의도가 목회에 필요한 것은 아닌가?

     외적인 부르심
  외적인 소명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사역할 후보자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평가함으로써 내적인 부르심에 대한 최초의 직감을 검토하고 확증하는 일이다.
외적 소명을 부여하는 대리기관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이며 이는 곧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는 보통 사람들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것은 합법적으로 인정된 안수 이전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서둘러 안수할 필요는 없다.

     장애 요소들
  통념에 따르면 하나님은 목회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목회에로 부르시지 않으신다고 한다.  건강이 나쁘거나, 신체적인 결함이 있거나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거나, 또는 의사전달 능력이 없는 경우 목회직무에 부여된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여러 가지 목회자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가 심하게 결여된 안수후보자는 그 자신이 안수위원회에 나가기 전에 스스로 자신을 검토해 보는 것이 좋다.

     특별한 섭리
목회를 하려는 후보자에게는 어디에 길이 열려있고 또는 어느 길이 닫혀 있는가를 평가하는 일은 직감적으로 볼 대 중요한 일이다.  또한 극적인 경험과 사별, 대학입학, 대형사고, 또는 실연이 개인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져 자신이 목회에로 부름 받았다는 해석을 내리도록 끼어들 수도 있다는 것을 판단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어떠한 점에서 그러한 사건들이 개인의 천직을 선정하는 데 섭리 적인 인도일 수가 있는가. 비록 소명에 대한 해석은 천차만별일지라도 목회에로의 부르심을 강력하게 느끼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섭리적인 손길이 자신을 지시하고 인도하신다는 느낌을 체험한다.  가령 전투경험이나 미적 극치에 도달한 경험이나 또는 거대한 사회적 불의에 항거하는 체험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목회에 대한 단호한 결심을 내리게 된다.


        3. 안수의 의미

    1. 왜 안수를 받아야 하는가?
안수에 필수적인 것은 목회의 은사를 받는 일과 이 은사를 받게 되는 의식이다.  이 의식에는 두 가지 주요한 계기가 있는데 하나는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중재의 기도이다. 안수는 내적 은혜와 외적인 행위가 결합하는 것으로 내적 실체는 하나님의 은총을 영접하는 일이고 외적인 사건은 기도와 함께 손을 얹어 안수하는 일이다.
목사안수는 오직 한 번뿐이며 마치 세례를 반복해서 받지 않는 것처럼 목사안수도 반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안수는 평생에 걸친 언약의 관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안수는 가볍게 들어설 수 없는 하나의 엄숙한 계약행위이다. 안수는 전 세계와 세대를 넘어서서 사도적 전통을 계승하여 안수후보자를 “구별하여” 성직에 취임시키는 공식적인 의식이다.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은 옛날부터 축복을 간구 하거나 헌 물과 회생을 드릴 때, 또는 병고칠 때, 뿐만 아니라 한 개인에게 성직의 사명을 공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부여할 때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히브리 전통은 경사스러운 경우마다 시행하였다.(창38,4 신34.9 레24장)
예) 모세도 안수함으로써 여호수아에게 사명을 부여함 (신34:9)
이러한 전통이 전승되어 사도적 전통을 지켜나가고 또한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력과 유사성을 견지시킬 수 있는 인물을 선정하여 자격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예수와 사도들에 의하여 계속 사용함

     안수식은 필요한가?
안수직은 목회가 잘 수행되고 목회의 질서를 잘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성령님의 선물로 간주되고 있다. 안수식의 효과적인 숨은 의미는 교회의 간절한 중재의 기도로, 성령께서 이 목회 위에 권능을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적인 면은 손을 얹어 안수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사건으로 외부에 나타난다. 중재의 기도는 하나님에게 이러한 은사를 끊임없이 부어주실 것과 성령께서 항상 함께 계시기를 간청한다.

     안수의 책임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도록(딤후2:15)힘쓰며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딤후2:15) “말에나 행실에나 사랑에나 믿음에나 순결에 있어서”(딤전4:12) 믿는 자에게 본이 되며 “모든 선한 일을 할 만한 준비를 갖추도록”(디도3:1)하며. “참고 온유(딤후2:23이하)하면서도 절도 있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4. 목회직무에 있어서 여성의 위치
  빌4:2-3은 여성도 교회의 지도자 위치에 포함되어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롬16:1-16에 바울은 남자들을 언급하는 것과 함께 주안에서 “동역 자들”로 여러 여자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바울이 사명을 주고 가장 많이 의지하였던 동역 자들은 여자라는 사실이다.  선교 초기 이미 여자들이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분명히 수행한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문제점
  역사적인 의견의 일치가 결여된 문제라고 간주하고 있다.

     권리인가 아니면 의식인가?
  여성의 성직취임을 반대하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전통주의자들은 전통의 계승과, 예배의식의 표현. 그리고 충실한 해석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당당하게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성의 안수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제공하려는 일은 바로 이 세 가지에 근거하고 있다.  여성안수에 대한 끊임없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증거는 성서와 전통, 이성 그리고 경험으로부터 여성의 안수를 찬성하는 편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제2부 목회의 직무
    
        5. 핵심적인 유비로서의 목양
     목회자란 무엇인가?
“목회자”는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부름 받아 안수식을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하나님의 자기 노출에 전적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양육하도록 따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에 소속된 하나의 구성원이다.
다라서 목회직무는 기술적으로 레위적인 제사직의 직무와 구별되는 것으로, 레위적인 제사장직의 직무는 그리스도교 목회에서는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 동물제사와 의식에 관한 율법을 포함하고 있다.
  
     목회적 권위의 역설: 봉사로서의 지도력
  목자의 권위는 독특한 것이다. 목자의 권위는 상호성에 바탕을 둔 능력에 기초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 권위는 합당하게 형성된 명백한 공감을 필요로 한다.  목회의 권위는 경찰이나 법관처럼 강제력이 아니라 오히려 계약적 신뢰, 염려와 보호, 상호협력, 상호 공감에의 기대감에 근거를 둔 권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목회의 권위나 위엄 또는 목자의 지도권을 이야기 할 때마다 이러한 것들은 힘의 강제적인 방식이 아닌 친절하고 공감적인 인도를 통한 설득력 있고 참여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특별히 복합적이며, 특이하며 묘한 어감을 지닌 권위 개념이다.

     목회 직무의 자연 발생론적 근거
  그리스도의 목회 직무는 역사적인 계시에 기초한 신앙공동체의 독특한 산물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는 자연적 또는 사회적 충격이나 힘. 또는 인간의 사회적 경험을 통하여 발견되는 필요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
  은총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연을 통하여 역사 한다.  이 점이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의 기본적인 주장이다.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칼빈 모두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목말라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자연적인 능력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교의 목회는 그리스도의 목회와 함께 시작된다.
  예수의 지상 사역으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교 목회의 기본을 배우게 된다.  예수의 목회에 관한 비전과 실천은 그리스도교 목회의 모든 비전과 실천에 중요한 것들이다.  만약 목회가 예수 자신의 의도와 실천을 계승하는 것으로 명확히 확립하지 못한다면 핵심적인 신학적 전제를 상실하게 된다.
  예수는 시사적인 목회의 개념을 교회에 남겨 주셨다. 예수는 자신이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을 불러서 제사로 삼았으며 그들이 오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가르치고 양육하여 사도로 세우고 자신은 언제나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면서 그들을 세상에 내 보내었다.  이런 과정은 목회로 인도하는 과정으로, 후일에 가서 교리로 형성되었으며, 이 교리는 안수 목회에로의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준비.  그리고 사명을 부여하시는 일들을 체계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
    1. 예수께서 사도의 직분을 예비 하셨다.
    2.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사명을 위임하시었다.


        6.목회의 직무와 은사

     목회의 직무들
목회의 직무를 집사, 장로, 감독등 세 가지로 보는 보편적 전통의 흐름인 가장 중추적인 부분을 따르려고 한다.


     집사
  집사 직무의 시초는 예수가 갈릴리에서 사역한 때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눅8:1-30)
여자들의 헌신적인 청지기 직무는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는”(행2:45)곧 이어 나타나는 사도들의 삶의 표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눅8:1-3은 귀중한 본문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남성이 지배하여 온 집사 직무는 예수의 지상 목회 기간 동안에 열두 제자들의 일시적인 생활의 필요를 은밀하게 충당하여 온 이 여자들의 직무에 유비 되어 생겨났다고 주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장로 직무가 집사 직무보다 먼저 생겨났으며, 또한 집사 직무의 존재와 그 해석은 목회의 “고위직무”에 달려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대적으로 보면 집사 직무가 장로나 감독 직무들보다 앞서고 있다. 목회의 직무가 생겨나게 된 사건들의 순서가 사도행전2장과 6장 사이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바울의 전통은 에베소서3:7-9에서 집사의 직무를 묘사하고 있다.
집사직무의 모습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 자신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막10:45)  집사를 의미하는 동일한 단어가 목회를 하고 있는 여자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여성의 안수에 관한 문제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장로
  일곱 집사(행6:7)를 임명한 직후에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하였다. 후에 가서 딛1:5-6에서 ”각 도시의 장로들“에 관한 개념이 다시 나타난다.
장로 직무의 네 가지 기본적인 자격요건
    ①흠잡힐 데가 없는 성품
    ②결혼 생활의 충실
    ③훌륭한 부모가 되어 “믿는 자녀들”을 두는 것
    ④“비방 받지 않는 상황”
  장로들은 회중 가운데서 전반적인 목회의 임무, 설교하고 가르치며, 빵을 떼고 부활을 증거 하였다
장로라고 번역하는 희랍어 단어는  “사제”, “원로”, “통치자”, “장로”, “사회자”,와 같이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감독
  감독 직무의 자격을 나열해 놓은 곳 두곳이 있는데 (딤전3:1-7, 딛1:7-9)
교회의 선교의 효과가 전적으로 감독의 직무에 달려 있는 만큼 감독은 상당한 수준을 요구하며 감독은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왜곡하는 이로부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보호하는 일, 또는 주변 세계로부터의 도전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보호하는 일에 관계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나무랄 데 없는 성품의 소유와 교리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 또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오해할 요소가 있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가르침을 전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목회의 은사들
  사도직의 은사- 목회의 첫 번째 은사는 사도직이다.  사도의 일차적인 의미는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명백한 사명을 받은 대사 또는 사절로서 보냄을 받은 충분히 준비되고 권위를 부여받은 사자라는 데 있다.(눅6:13, 눅24:46-48)
  오늘날 목회는 예수와 사도들을 자신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구자이자 선하게 양을 치는 전형으로서의 예수와 대화 하고 있으며 예수의 목회가 주는 의미를 통하여 처음으로 자신들의 목회 과업을 발견하고 또한 목회를 수행하였던 사도들과도 대화하고 있는 셈이다.

     예언의 은사-특별한 영감의 특수한 목회로서 이미 계시된 사건의 의미를 분별하거나 또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장차 계시될 사건의 의미를 밝혀주는 특수한 목회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특수한 그리스도교 목회를 독특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비쳐 주신다는 사실은 성 폴리캅이나 성 안토니, 성 프란시스, 존 번역, 파스칼 등의 생애를 통해서 분명히 증명되고 있다.

     복음 전하는 은사-그리스도교인이면 누구나 다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복음전하는 데 놀라운 효과를 내는 남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본다.  그들은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적의 은사-이적을 행하는 능력은 신약성서를 통하여 개인의 내재적인 능력의 증거가 아니라 유한한 수단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 한 증거로 간주되고 있다.

     병고치는 은사-모든 목회자들은 육신의 불편을 제거하여 영적 성장의 가능성을 증진시키도록 부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육신에 영향을 끼치도록 영혼을 치유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방언의 은사-이 은사를 이해하는 데 지침이 되는 두 가지 주요 본문 구절은 행2장은 오순절 지칭, 고전12장, 14장은 고린도 교회에 제기된 분파와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데서 바울은 한 성령에 의한 여러 가지 은사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가르치는 은사-양떼를 양육하기 위하여 목회자는 필연적으로 가르치는 교사이어야 한다.

     관리하는 은사-그리스도교 목회의 은사에 대하여 성서가 시사하는 또 다른 모습은 “청지기의 모습”(이 말에서 경제학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즉 자원을 올바로 보존하고 분배하는 일이 맡겨진 자의 모습이다. 청지기는 관리인이자 보호자이며, “집안의 일을 맡은 사람” 이다.

     왜 목회가 필요한가?
  1.정당하게 세워진 그리스도교 목회는 하나님 자신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2.예수 자신이 사도들을 불렀고 그 전통 위에 사명을 주어 역사상에 나타난 후대의 목회가 사도적     전통에 합당하도록 마련하셨다.
  3.예수 자신이 친히 가르친 일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 생생하게 계속 이어져야 하는 주님의 살아      동행하는 일을 통하여 예수 자신은 방법을 제공하려고 하며
  4.평신도는 그리스도의 전체 목회에 참여하고 있으나 평신도들이 이 세상에서 헌신할 수 있도록 도     와주기 위하여 그들을 대신해 특별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셨으니 혹은 사도로, 혹은 예언자     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었다.


         제3부 목회자의 활동과 그 동기

        7. 예배 공동체의 목회자
  목회자의 사회적 기능이 제아무리 다양하다고 할지라도 목회자는 공개적으로 흔히 예배의 지도자로 동일화된다.  목회자는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들은 명백한 공적 임무와의 관련 속에서 생각하게 된다.

       제사장의 직무란 무엇인가
    예언자와 제사장의 차이점
  1.예언자는- 하나님 편에 서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여 주며
  2.제사장은- 사람들 편에 서서 하나님에게 간구한다.

    제사장과 일반 사람들의 차이점
  제사장은 인간의, 전적으로 인간의 말을 하나님께 아뢰고 혼동과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지금 여기에 있는 공동체와 함께 그리고 이 공동체를 위하여 대신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그 공동체의 기도를 들으시고 중재하여 주실 것을 겸손히 간구한다.
안수목회와 충실한 평신도 사이에는 머리털같이 엷은 경계선이 있으나 이 경계선은 금강석만큼이나 단단하다. 이는 곧 안수식을 통해서 영적 은사를 받게 되고, 은사 받은 사람은 설교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며, 전체 교회의 이름을 대신하여 활동하며 또한 사도적 전통의 권위를 가지고 사역하도록 사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안수식을 통하여 일반 세례교인에게는 부여되지 않은 거룩한 직무가 안수 목회자에게는 부여된다. 따라서 목회자는 개인의 인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무에 의하여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생생한 상징이 된다.

     대표적 집례자이지 유일한 인도자는 아니다.
  회중의 예배인도자로서 목회자는 예배 전체를 구성하고 연출하며 사회를 보는 책임을 지고 있으며, 이는 통상 예배위원회를 통하여 평신도들과 상의하여 수행된다.  대표적 예배인도자는 예배를 전적으로 준비하여야 함은 물론이고 예배의 공동체가 다함께 기도하고 신앙을 고백하며 확신을 얻고 헌신하는 일에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러한 예배의 행위 가운데서 목회자는 “집례자”. 즉 기도하고 증거하며 하나님께 헌신하는 가운데 회중을 한 목소리로 통일시키는 사람이다.  회중은 경외와 찬양과 고백에 있어서 참석한 모든 마음들을 하나로 묶을 대표적인 하나의 목소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을 대변하는 사람은, 내적 소명과 외적 확증에 의하여, 요구되는 기도를 인도할 수 있으며 훈련을 통하여 정화된 사람이어야 한다고 회중들은 기대하고 있다.

     집례자-(“목회자”, “제사를 맡은 종”) 하나님의 제단에서 제사장적 의식이나 희생 의식을 맡은 사람이다. 특별히 성찬식에서 회중 대신에 이 의식을 거행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쓰여 졌다.


        8. 세례와 성례전의 목회
     몸을 씻는 것과 먹는 것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거듭나고, 성례전을 통해서 영양을 공급받고 지탱하며, 우리가 소망 하는 바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성화(거룩한 생활로 성숙하는 것)된다. 이와 같이 중요한 성례전을 잘못 이해하거나 또는 성례전을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목회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가혹한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세례의 목회
  세례의 목회사역에 관한 성서적인 근거는 마태복음28:19의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삼위일체의 하나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라는 지상 명령이다. 따라서 제자직과 세례는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제자를 삼기 위해서 우리는 세례를 주고 가르친다.
  세례는 믿는 자가 옛 행실에 대하여 죽고 새로운 행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상징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성례전의 목회
  성례전의 목회는, 비록 성만찬 식을 집행하는 것이 분명히 그 핵심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성만찬 식을 거행하는 것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  마치 세례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참여하는 시작인 것처럼 성만찬은 지속적인 성장에 필요한 자양분을 공급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나누는 예전이다.
  목회자가 성만찬의 목회에 관하여 올바른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 안에서 양육하고 영혼을 돌보는 모든 요소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결론
  목회자가 하는 일의 내용과 근거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성례전의 생활을 회피해버리거나 무시할 수가 없다. 이는 목회의 심장부에 해당된다. 목회자의 활동 중에서 가장 목회를 분명히 설명해 주는 것들은 죄에서 깨끗케 하고, 세례를 주며, 공동체가 수고한 열매를 받아들여 봉헌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축사하며, 떡을 떼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제공하는 일이다.


        9. 설교를 통한 말씀의 목회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다.  설교란 교회가 그것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제공하고 있는 계속적이고도 공적인 증언으로서 대부분 예배를 통해서 제공되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신앙을 증거 하는 것이 된다.  설교는 본질적으로 계시되어진 말씀을 증거 하는 기록된 말씀을 해설하고 해석하며 응용하는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진리를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로 옮기는 것이다.

     설교의 대상은 무엇인가?
  설교는 말씀이 하나님 앞에선 회중들의 닫혀진 양심에 전달되는 것이다.  설교는 경험에서 경험으로 전달된다.  그러나 설교말씀 가운데서 설교자는 단순히 그 자신의 권위나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설교란 듣는 자와 성서 사이에 다리를 연결해 주는 입으로 말하는 말씀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최선의 설교란 성령께서 듣는 자에게 깨달음을 주셔서 우리의 부족한 노력으로 인간의 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하더라도 성령께서 듣는 자에게 깨달음을 주시기를 진지하게 기도한다
     설교는 고정적인가 아니면 변하는가?
  설교는 변하나 동시에 언제나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에는 언제나 참고해야 할 연속성이 말씀 안에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그리고 내일도 언제나 동일하시다.
훌륭한 설교는 지금 듣고 있는 청중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갈증을 채워주며 그 때의 열망에 부응하고 사회 문화적인 전제들과 연관되어야 한다.  설교는 그리스도교의 역사적인 기억들을 생동력 있게 회상함으로써 성서와 전통을 통해서 소외된 현실에 빛을 던져주고 도전해야 한다.

     설교의 형태와 내용
  설교의 형태 또는 모양은 설교의 핵심 또는 그 내용과 일치하여야 한다.  설교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설교에 접근하는 방법이 결정된다.  설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대부분 전통적인 개신교의 견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단정적으로 대답하고 있다.
  설교는 이러한 의미들에 대한 개인적이고 체험적인 확증이며, 또한 이 의미들이 우리의 시대에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그것들이 우리의 상황에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밝혀주고 있다.
  스28:11 “책을먹으라” 이 말씀은  말씀으로 주어진 전승을 완전히 소화하라는 명령이었다.  따라서 설교를 할 때 우리는 성서의 말씀을 완전히 소화하여 주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 되도록 하라는 분부를 받았다. 성서의 생명력과 관계성을 상실한 성교는 쉽사리 자아 중심적인 변덕과 기만 그리고 감상주의에 사로잡혀 버린다.

     설교의 통일성
   무엇이 설교의 여러 가지 행위를 통일시키는가?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는 하나님의 자기 노출의 원초적인 사건, 즉 하나님의 자기 노출의 모든 다른 것들을 보다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건인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고전2:2)고 하였다.
  그리스도가 중심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다른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몰라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설교의 권위
  설교자의 권위는 말하는 사람이 계시된 말씀과 얼마나 깊이 교통하고 있느냐에 근거하고 있다.  바로 이것을 토대로 하여 사람들은 설교자의 말을 듣고 믿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듣는 자의 권리이다.  청중들이 설교자의 설교 가운데 신빙성이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느낄 때, 즉 설교자의 설교가 믿을 만하다고 느낄 때에만 권위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다.
  청중은 설교자가 하는 말이 정당한가를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권위의 관계가 완성되어 두 가지 측면이 서로 일치하게 된다.


       10. 가르치는 장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배움의 공동체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나의 교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생명이자 윤리이며 행동의 양식으로서 세대를 초월하여 가르쳐 전수하고 이를 모든 시대를 넘어서서 끝날 까지 계속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교육이 중심을 상실하는 이유는 목회의 지도력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며, 가르쳐야 할 목사가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그 결과가 전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스도교 진리를 가르치는 소명은 목회소명 중에서 중요한 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다.  “가르치기를 잘하는 것”(딤후2:24)

     그리스도교 교사의 표본으로서의 예수
  예수는 가끔 교사로 지칭되었다.  예수는 그 자신의 제자들-가까이에 있는 소수의 친한 무리-을 가르치는 일뿐만 아니라 군중들, 심지어는 단 한 번만 들어보려던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부분의 핵심은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28:20)

     예배를 통한 학습
  결혼식이나 생일, 세례식, 견신성사나 장례식의 경우에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이 모든 경우에 목회자는 가족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언약과, 인간의 생명의 비할 수 없는 귀중한 가치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귀중함을 ,설교를 통해서 또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 가르치게 된다.
  목회심방은 본질적으로 가족과 얼굴을 맞대고 가르칠 수 있는 기회이다.  심방은 그리스도교 예배를 각 개인들에게 연장시켜 주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결론
  가르치는 사명을 가진 목회자(장로)는 이런 다방면의 노력을 모아 열매를 맺게 한다.  이런 임무를 가족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배울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는 일과, 예배공동체에서 설교하는 것과, 개교회의 여러 교과과정을 배정하고 교회학교의 교수내용을 마련하는 일과, 개인들이 그들의 세례서약을 감당할 수 있도록 교리강습을 실시하는 일을 포함하고 있다.


       11. 평신도에게 목회를 준비시키는 일
     목회를 지향하는 행정
  목회연수생들은 흔히 목회행정을 반대하는 강한 견해를 갖거나 또는 목회행정은 타락되고 진실이 없는 것으로 쉽게 간주해 버리게 되는데, 이는 그들이 목회행정을 속임수와 세상의 사업수단을 조장하는 것으로 성급하게 생각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버리는 한 “목회행정” 또는 관리의 업무는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잘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반면에 경험이 많은 목회자들은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 그들이 지도자로서 효과적으로 기능을 발휘하여야 하며 또한 교회조직의 복합적인 관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목회자는 한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직책이 아니라 현명하고도 유익한 질서를 갈구하는 공동체를 책임 맡은 직책이다.

     교회행정에 관한 신학적 성서적 근거
  교회가 말씀과 성례전과 의식의 목회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교회는 효율적인 조직을 통하여 숙련된 지도력과 명확한 목표와 재정 계획, 그리고 현명한 행정관리를 요구하고 있다.
  교회행정이란 무엇인가?  교회행정이란 신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서도 조직하고 계획하는 방법과 교회의 활동을 인도하고 촉진시키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으로, 이는 말씀을 더 효과적으로 증거하며, 그리스도의 임재를 축하하고 양떼들을 돌보며 세상에 더 많은 봉사를 하게끔 한다.  따라서 교회행정은 목회의 본래 목표에 부합되는 선교의 노력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을 강구한다.

     일반목회를 위해 평신도를 준비시키는 일
  목회자는 몸 자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상 책이다.  목회자의 일차적인 임무는 평신도들을 위하여 무엇이나 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질을 함양시켜 주는 일이다.  목회자가 전체회중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려고 하는 것은 자만이며 자기 과신이다.  이 사실과 관련해서 성서 본문 말씀은 모세는 끝도 없이 분쟁사건들을 들어주고 해결하여 왔었다. 하루 종일 사람들이 모세를 만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목회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야 할 영예를 자기가 차지해서는 안된다.  칭찬을 스스로에게 향하게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공헌이 소중함을 느끼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만 목회에 해당되는 일을 하려고 하지 말며 방치되어 온 일을 찾으라 훌륭한 목회자는 인내를 가지고 합리적이고 재치 있는 방법으로 공동체가 필요한 것을 찾아내도록 하는 것이다.

     임무의 영역
  목회자는 꼭 다루어야 할 행정책임에는 세 가지 기본적인 분야 또는 형태가 있다.
첫째로 개교 회에는 일반행정관리가 있는데 여기에는 계획을 세우는 일과 조직하는 일
둘째로 목회자는 또한 교육행정가로서 교회의 교육을 촉진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여야 한다.
셋째로 목사에게는 개교회의 일상적인 것과 관련된 일. 곧 개교회의 사업과 재정관리를 감독할 책임이 있다.

     일상적 책임에 관한 성서의 명령
  예수는 친히 교회는 선교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했다.
교회는 가르치고, 세례를 주며, 방문객들을 환영하고, 병든 자를 돌보며, 세상 모두에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행1:18, 마28:19) 신약성서에서는 가정을 다스리는 능력을 교회지도자를 뽑을 때 주요 기준으로 삼았다.(딤전3:4)

     효과적인 치리
  평신도들이 일반목회를 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준비시켜 주기 위해서 목회자는 훌륭한 행정적 지도력을 배양하는 습관을 형성하는데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한다.  이러한 지도력 가운데는 미래를 설계하는 데다 지력과 통찰력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우선순위를 배열하여 중대한 일을 빠뜨리지 않는 능력을 들 수 있다.  목회자는 적절한 배열을 통하여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각종 방안들을 서로 연결짓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행정관리의 업무를 성서 주석의 문제처럼 생각하라.


        제4부 목회상담

    목회심방
  제아무리 법적 의뢰인의 유서를 쓰거나 그의 권리를 알아내는 일이 다급하다고 할지라도 변호사는 의뢰인이 지명을 할 때까지 그의 사무실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  만약에 치과의사가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누가 치통을 앓고 있는가 하고 문의하러 다닌다면 이는 부당한 직업윤리임에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에게는 전문직업 중에서 오직 목회자에게만 교인들의 집이 개방되어 있다.  특별한 초대가 필요하지 않다.  목회자가 방문할 때면 대 부분 이를 환영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의 심방이 오랫동안 지연될 때 자기를 소홀히 하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한다.
  심방에는 더 많은 은혜와 인내와 사명감이 필요하다.  충성된 목회자는 소문을 내지 않는 가운데 남몰래 가난한 자를 찾아가며, 환자를 방문하며, 그들의 쓰라린 문제들을 진지하게 같이 나누며, 슬퍼하는 자에게 소망을 불어넣어주며, 죽어가는 사람에게 안식을 심어준다.  바로 이렇게 찾아가서 돌봄으로써 목회자는 자신의 “직무를 완수할 수” 있다(딤후4:5)
목회자는 바로 이러한 일을 감당하도록 안수 받았으며 또한 위임받았다.

     신학적 근거: 하나님께서 심방하셔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셨다.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아흔 아홉 마리를 남겨두고 길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선 것처럼 우리도 때로는 안전한 양떼를 놓아두고 위험에 처한 한 마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마18:12)  사람들을 찾아가는 목회심방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찾아오셔서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고 죄를 사하여 주시며, 상처를 싸매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숙고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전통적인 목회심방은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곧 신앙이 보존되어 자라고 있는가의 여부를 시험하는 것과 지금 현재 신앙이 발전되고 있는가를 현장에서 살펴보는 일이다.

     목회심방의 모델로서의 예수
  ①예수의 목회의 큰 비중은 개인 개인들과 얼굴을 맞대는 가운데 일어났다.
  ②예수의 목회에 있어서 치유는 대체로 삶을 바꾸는 의미 있는 인격적 상호작용이 수반되었다.
  ③예수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래아의 동네와 마을을 끊임없이 찾아다녔다.
  ④사람들이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곳, 살고 있는 곳 또는 일하는 장소를 찾아가서 말씀을 전함
  ⑤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하였음을 모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증거 하였다.
  ⑥서두르지 않고 제자들과 친숙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한적한 장소에서 일어났다.

     때에 알 맞는 한 마디 말씀
  심방의 목적은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신자의 개인적인 환경에 적용시켜 주는 일이다.  강단을 통해서 말한 진리는 청중들이 그 말을 사실로 믿어줄 때만 유효하다.  만약 청중들이 설교자의 실제 목회 가운데 증거를 보지 못하면 제아무리 좋은 진리의 말씀이라도 의심하게 된다. 목회 심방은 선포된 말씀을 찾아가서 서로 간에 이야기함으로써 사실로서 믿게 한다.

     왜 심방이 필요한가?
  ①오직 심방을 통해서만 목회자는 현대의 시점에서 양떼에 직접적이고도 당면한 지식을 얻게 된다
  ②심방의 목적은 바로 영적인 상담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위기가 닥치      기전에 이를 대처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다.
  ③노인들과, 환자들, 그리고 혼자서 집안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적절한 때의 심방과 자주 찾아주는      일과 심방에서 얻어지는 영적인 공급에 그들의 생활을 크게 의지하고 있다.
  ④만약 심방을 게을리 한다면 지속적인 목회 영향을 기대할 수 없다.
  ⑤심방의 목적은 목회자가 이를 통하여 각 개인을 위하여 기도를 더 잘 할 수 있다는 점이다.
  ⑥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심방을 통해서 얻게 되는 가장 현저한 유익 중의 하나는 설교의 정열이 불     붙는다는 점이다.
  ⑦목회자가 모든 사람들을 진지하게 심방하게 되면, 회중들은 심방을 통한 것이 아닐 때는 성가시     게 느껴질 이념적인 차이점들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근거 위에서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여러분 가운데서 수고하며 주 안에서 여러분을 지도하고 훈계하는 분들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살전5:12)라고 하였다.

     결론
  심방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천신만고의 경험에서 얻어진 상황에 맞는 지혜가 필요하다.




       13. 영혼들을 돌보는 일
     영혼
  영혼이란 고전적인 그리스도교의 개념에 따르면 인간의 내적인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는 중심점이다.“영혼을 다하여”(신13:3)무슨 일을 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중심으로부터 행동한다는 것을 말한다.
욥은 환난 가운데 그의 영혼이 눈물로 “녹았고”(욥30:16)또한 참으며 견디는 가운데“지쳐버렸다”(6.11)고 말하므로서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영혼이란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깊이 느끼고, 알게 되며, 의지를 갖게 되며, 또한 그것에 의하여 우리의 몸이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그 생명은 이 땅의 죽음을 면치 못할 영역을 초월한다.

     영혼을 돌보는 일에 요구되는 개인적인 자질들
  ①깊은 통찰력과 자아에 관한 폭넓은 지식이 영혼을 돌보는 일에 선행조건이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목자는 좋은 상담을 할 수 있다.
  ②비록 사소한 이야기이지만 보통 사람들을 성실하게 돌보는 일(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영혼을 돌     보는 데 근본적인 선행조건이다.
  ③영혼들을 효과적으로 돌보는 데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인간관계의 또 다른 자질이다.
  ④상황에 따른 적절한 지혜도 영혼들을 돌보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⑤신뢰할 수 있는 능력이란 믿을 수 있게 행동하는 것과 대화 가운데서 상대방에게 이미 나타나는      여러 가지 면모들을 믿는 것을 말한다.
  ⑥목회적 충고자는 총고를 해 주어야 한다.  충고는 주로 심방 가운데서 이루어질 때 최대의 효과     를 거둔다.
  ⑦성실하고, 솔직하며, 정직하고 내적으로 확고부동한(자기의 감정을 정확하게 느끼는 것)태도는 영     혼을 돌보는 일에 필요한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⑧상호간의 정당성과 심리적 기능향상과 영적 건강을 촉진시키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태도       또는 행동으로 소망, 용기, 유머, 한계점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들 수 있다.

     영혼을 돌보는 일반적인 목회
  안수목회자는 개인적인 친구로서 뿐만이 아니라 직무를 통해서 영혼을 돌보며, 양떼에게 목자로서 사역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수목회는 사도들의 증언을 대신하여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해주는 것과 중재의 기도를 통해서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대변적 기능을 맡고 있다.  평신도는 그렇게 할 권한도 없고 또 그렇게 부름 받지도, 그러한 명령을 위임받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목사는 영혼들을 돌보는 일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확고한 정신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목회의 책임
  목회를 수행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때에 도전적이고 어려운 경험을 하게 되며, 고통스런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지칠 대로 지치고 허둥대고, 마음이 괴로울 바로 그 때에 캄캄한 밤에 수 마일을 가야 할 급한 전화가 울리게 될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이러한 밤에 당하는 목회적 책임의 특별한 곤경을 아실 것이다.  영혼을 돌보는 사역에 관한 고전적인 논설들은 모두 이 일의 어려움과 미묘함, 문제의 난해한 성격, 중요한 상황에서 요구되는 지혜의 필요성에 대하여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목회자는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고 성령의 도움을 받으며 그로부터 힘을 얻는다.

     영혼들을 돌보신 모범으로서의 예수
  예수 자신이 사람들을 접촉했던 방법보다도 더 활력 있고, 분명하며, 믿을 만한 접촉방식이란 없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 주었다.  그는 어떠한 경우라도 개인들의 독특한 요구사항을 진지하게 경청하였으며, 거대한 어떤 계획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신을 위하여  그 사람 안에 잠자고 있는 가능성들을 일깨웠다.
  예수는 아무에게도 강제로 제자가 되라고 하거나 믿음을 가지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서서히 익어 가는 시간의 과정 중에서 인간이 꾸준히 성장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효과적인 목회상담을 위한 교훈
  ①해를 주지 말라
  ②자신의 영적 인도자를 선택할 수 있는 교인들의 권리와 책임을 존중하라
  ③사람들에게 시간의 여유를 주어, 과거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자아인식 또는 인간관계가 성숙할       수 있는 통찰력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라
  ④목회대화 가운데 조용히 경청하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의무라고 고지식하게 추정      하지 말라
  ⑤영성적 인격형성을 단기간의 위기해소라는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전인격의 장기적인 발전이라는       점에서 살펴 보아라
  ⑥영혼을 돌보는 목회사역의 과정이 서로 돌보아 주는 공동체 안에서 진행되도록 하여, 마치 믿고      서로  받들어 주는 공동체가 없는 경우처럼 독단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
  이러한 교훈들은 많은 위기와 경험들을 수세기 동안 다루어온 목회문헌에서 명백히 또는 암시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결론: 들어주는 목회
  소문이 하는 일이란 비난하고 저주함으로써 나쁜 소식을 되풀이되게 한다.  끊임없이 사랑은 결국에 가서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해로운 거짓 섞인 사실을 덮어주려는 방안을 구상하게 된다.
  목회자는 이러한 문제들을 들어주는 일에 불평해서는 안 된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바로 목회자의 임무이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의 활동범위이다.  비록 때로는 감정적으로 메말라 버릴지라도 이는 여전히 목회자가 하여야 할 일이다.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목회자에게 상급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목회자의 직무와 목회자 자신에게 신뢰감이 없으면 이러한 일은 일어날 수 없다.


       14. 위로하고, 훈계하며, 훈련시키는 성령의 역사
  견책의 임무는 신학적으로 성화의 교리에 연결되었으며, 사람들의 실제 행동이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하는 목회적 노력과 실천적으로 연관된다.  따라서 견책의 임무는 선한 양심으로 당연히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를 게을리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만약에 내가 나의 이웃이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 자신의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잘못을 범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하자. 또한 나에게 그 잘못된 판단을 현명하고 공정하게, 그러면서도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밝혀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는데도 침묵을 지킨다면 나는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우정으로 나의 양심을 일깨워 달라”고 웨슬리는 기록하였다.
목회 상담 가는 잘못된 행위를 수사하는 수사관과는 다르다.  동시에 상담 가는 공동체에 손상이 갈 수있도록 소문을 퍼뜨리거나 또는 잘못을 폭로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동정적인 돌봄이라고 하는 맥락과는 동떨어진 비난과 조소에 불과한 것으로 선한 형제자매로서의 권면을 막기 때문이다.

     왜 견책을 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자유 때문에 죄를 범하기 쉽고, 바로잡는 일에는 상대방의 보다 넓은 시야가 요구되며, 또한 스스로 고쳐나간다는 것은 자기기만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교회는 전적으로 도덕적 내지는 영적인 몸이기 때문에 강제적인 처벌을 피하고 개인의 행동에 대한 염려와 상의에 근거한 도덕적 설득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이다.
  권면의 목적은 자기 비판적인 성찰을 일깨우고 보다 선에 가까운 행동을 하도록 함으로써 보다 큰 개인적 사회적 행복을 추구하려는데 있다.  다시 말해 그 목적은 참회하고, 깨끗해지며, 용서를 받으며, 재형성되고, 인격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권면을 받은 사람은 스스로 깨닫고 자신의 문제를 찾아내어 행실을 고치고 하나님과 이웃과 화해를 하게 된다.

     설교를 통한 권면
  권면적 설교의 내용은 목청을 높여 꾸짖거나 또는 무지막지하게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말씀에다 귀를 기울이면서 소망과 바로잡음과 회복의 말씀으로써 우리의 잘못된 행위를 지적하는 것을 말한다.


         제5부 위기목회

       15. 목회실천을 위한 신정론(神正論)
  신정론이란 엄청난 고난의 사실 가운데서 하나님은 올바르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정론의 기능은 악이 계속 존재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속성, 특히 의와, 자비 및 사랑의 속성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돌보는 목회에 끊이지 않는 문제점
  신정론의 문제는 실제적인 목회의 여러 가지 신학적 문제 가운데서도 가장 복잡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절박한 문제이자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목회자가 어느 곳을 가든지 따라다닌다.
  목회자가 신정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목회자의 목회활동, 즉 병중에 있는 사람들, 영적으로 메말라 있는 사람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과 그 유가족들 및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의 내용이 좌우된다.  여기에는 목회자 자신의 고통, 즉 목회자의 개인적인 문제와 설교와 가르치는 문제로부터 오는 고통이 있다.  교인들이 고통을 느끼고, 일이 잘못되어 스트레스를 느끼는 목회현장으로부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이 대두된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떠한 악에서도 선을 이끌어내실 수 있다
  아담이 타락한 것은 보다 큰 구속의 계기가 되기 위한 “행운의 실수” 또는 축복 받은 재난이라고 한다. 만약에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그의 타락으로부터 보다 유익한선, 실제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구속을 제공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유다-그리스도교의 역사적 경험에서 보면 하나님은 커다란 재앙에서 가장 위대한 선을 이끌어내신다는 사실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고난이 주는 교훈
  목회자는 때때로 사람들이 고통을 통하여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어려운 상황이나 제한된 상황을 경험함으로써 동정심이 증대되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통을 유추해서 타인의 고통의 이유를 알게 된다.
  고난에 대한 현명한 목회를 위해서는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은 고난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의 수단으로 쓰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수단인가? 이는 곧 우리의 유한성과 죄를 자각케 하는 수단으로 우리를 이 세상의 결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보다 더 신뢰할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해서이다.

     고통이 가지고 있는 정화의 요소와 교육적인 요소
  징계의 본래적 의미는 직접적인 처벌이 아님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징계는 본질적으로 정하게 하는 것, 깨끗케 하는 것, 또는 정결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바는 고통을 증가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없으면 깨달을 수 없는 사실을 알게 해서 우리의 기쁨의 능력을 증가시키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하시며, 우리자신은 한정된 자유 안에서 책임을 져야 하며, 잘못될 수도 있는 도덕적 대행자임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고 계신다.  따라서 자유의 결과로 무엇이 일어나든 지간에 그것은 우리에게 도덕적인 교훈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가르쳐 준다. 경험이 많은 목회자는 고통은 이러한 점에서 영적인 훈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징계가 우리를 깨끗케 해준다면 훈련은 우리를 가르쳐 준다.

     노력이 지니고 있는 가치
  토인비에 의하면 사회 역시 그러하다.  사회가 도전을 받게 되면 그 사회는 분발하거나 아니면 퇴보하게 된다. 노력 없이 성장이란 없다.
  헤겔은 이것을 역사적 논리의 핵심으로 보았다.  역사의 전체는 곧 투쟁하는 이성의 전개 과정이고 안티테제의 작용에 의한 갈등을 통해서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사상이나 국가, 또는 의식의 형태가 일단 성립이 되면, 이는 반대되는 어떤 견해 또는 힘의 도전을 받게 된다.

     변화는 아픔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들은 갈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위안의 요소를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최상의 도덕적 영적 교훈은 좌절을 이기고 장애물을 극복하는 데서만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은 확실히 생활 속에서 단련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시험된 인간의 자유를 원하시지, 천박하고 연약한 자유, 또는 전락의 고통과 결코 싸워본 일이 없는 단순히 이론적인 자유를 원하시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신정론은 악과 고난은 단순히 또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타락하게 하고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게 되며, 더 좋은 선-책임을 감당하는 도덕적 자유인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16. 질병에 대한 목회
    환자에 대한 일반적 목회
  신체적 질병을 앓는 사람들에 대한 목회사역은 고난당하는 자들에 대한 평신도들의 일반적 목회의 맥락 속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와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환자들을 방문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곤궁에 처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고 표현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마25장)라고 마지막 심판에 관해 날카롭게 언급하고 있다. 병든 이웃을 방문할 때 사실상 우리는 이웃들의 곤궁 속에 조용히 숨어 계신 익명의 그리스도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시원한 냉수 한 그릇이 갈증 난 입술을 적실 때 그 냉수는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 하나님이 찾아주신 것과 같이 우리도 육신의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보아야 한다.

     질병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고통과 질병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인간을 괴롭혀 왔다. 종교는 이러한 잠재적인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면제시켜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은총이란 이러한 질고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와 달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의 고통 가운데 하나님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계시다는 사실, 즉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인간의 모습으로 가능한 한 온전하게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시며, 심지어는 죽기까지 우리와 함께 있으려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대담하게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명백해 졌다.
  질병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운명이나 종말이라고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장하고 교정될 수 있는 수단.  또는 우리의 한계성과 집단적인 책임으로부터 또는 그것에 관해서 배울 수 있는 수단으로 허용된 것이라고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목회는 특별한 치유를 위하여 신앙을 부수 화시킴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하지는 않지만 선한 양심으로 치유를 위하여 기도한다.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
  칼빈은 병들었을 때가 목회의 사역이 “가장 필요한” 때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고난에 처했을 때, ‘병에 들었거나, 다른 죄악으로 인해 고통을 받거나, 특히 사망하는 순간에는 개인은 일생 가운데서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심판과 절망에의 유혹으로 인한 양심의 압박을 가장 크게 받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자아성찰이 깊어지고 자기의 노력을 수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종종 생겨난다.
  목회자는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를 대표하여 찾아온다.  이때 목회자는 환자를 돌보며, 그의 고난을 덜어주고, 치료의 과정에 도움이 되는 자원들을 제공해 주기 위함이다.

     목회에 따르는 위험의 정도
  목회사역이 요구되는 장소가 어느 곳일지라도 목회자는 굳건한 믿음으로 그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  소방수나 전투원이 그 지역을 회피할 권리가 없는 것처럼 목회자도 그곳을 피할 “권리”가 없다.
페어베이언은- 목회에 따르는 위험의 윤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매우 위험한 극단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목회자가 위험한 현장을 피하는 것은 직무유기이다”라고말을 하고 있다.

     환자에 대한 목회의 준비
  불안해 하거나, 근심스런 표정으로, 또는 긴장한 채 찾아가서는 안 된다.  적절한 시간이 나도록 기다려라, 병중에 있는 교인의 필요에 방문을 맞추어라.

     환자와의 목회적 대화
  ①자주 방문하되 시간을 오래 끌지 말라
  ②혼자 심방하여 개인적인 대화를 많이 가져라
  ③신체적인 불편이 없는가 세심한 주의를 하라
  ④말을 매끈하게 하는 것보다 기도의 따스함이 더욱 중요하다
  ⑤성서의 말씀을 이론적인 주장보다 효과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직접 연결시켜 준다.


       17. 가난에 대한 목회
     자비: 인간의 것과 하나님의 것
   굶주린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소외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일과 유비 하여 이해할 수 있다.  가난한 자를 정의하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필요한 재원이 없고 또한 쉽사리 그것들을 취득할 수 없는 사람이다.  가난한 자는 우리의 보살핌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곧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보살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점과 똑같으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없는 존재이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는 호소는 비록 안수목회에만 해당될 뿐 아니라 교회 전체의 일반목회에도 해당된다.
    
     성서의 주제
  구제를 조건 없이 자비로운 의도에서 하라는 명령에 따라서 교회는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고 보살피는 신명기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으며, 일면에서는 이를 조금 변형시키고 있었다.  신명기 율법은 “너희는 해마다 씨를 뿌려 밭에서 거둔 소출 가운데 그 십분의 일을 떼어”(신14:22)라는 말씀을 성도들이 지킬 것을 요구했다.  이와 같은 철저한 사회적 헌신 이외에 여기에는 또 다른 법 즉 “칠년에 한 번씩 남의 빚을 삭쳐 주어라. 빚은 이렇게 삭쳐 주어야 한다.”(신15:1-2)는 법이었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모습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 있다.

     가난한 자를 위한 목회적 공명
  가난한 자에 대한 목회적 책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목회자는 우선 자신의 태도에 대한 자아검토, 즉 계급적 이해나 편견, 사적인 복리를 위해 우상숭배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 참된 행복을 위해서 재산의 중요성을 과대평가 하려는 유혹이 자기 안에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검토하는 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에 관한 초기 문서에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터툴리안, 싸이프리안, 크리소스톰, 암브로스, 어거스틴과, 사도헌장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이 반복해서 주장하는 주제들은 과부들을 공평하게 돌볼 수 있는 방법과 자선기금을 모으고 분배하는 방법, 부자는 구 받을 수 있는가의 여부, 감독의 직무는 어떻게 가난한 자를 구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또한 집사는 어떻게 고아들을 돌아보며 입양은 어떤 것이며 또 어떻게 하는가 하는 방법과 가난한 청년을 어떻게 기능사에게 맡겨 교육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십일조를 내야 하는지의 여부와, 금식일에 수집된 돈을 배분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가난의 정도
  토마스 아퀴나스가 구분한 가난의 세 가지 정도, 즉 일상적 가난, 일시적 가난 및 장기적 가난으로 구분한 것을 살펴보자
  ①가장 흔한 형태의 가난은 일상적 가난으로 최소한의 생계비밖에 공급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찾      아볼 수 있는 것이다.
  ②일시적 가난이란 생계를 지탱하는 조건이 일시적으로 심한 위협을 받는 상태를 지칭한다.
  ③장기적 가난 또는 만성적인 극단적인 빈곤은 최소한의 호구지책의 방편이 없는 상태가 되거나 그      러한 상태가 계속되는 것, 도는 재원이 결핍되었으나 그에 대한 획득수단이 없어서 생필품이 절      대적으로 부족한 상태를 지칭한다.
  해결책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 자신에게서 야기되는 장애요소들을 치료하여 그들이 사회 생활 가운데 생산적인 사람, 자신들을 돌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예방조치를 취해 주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 대한 목회상담
  가난한 자를 영적으로 인도하는 어조와 자세는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마음속으로부터 같이 나누는 데서 출발된다.  이 단계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도덕적 양심과 영적 성장에 관한 지침을 제공하는 교육적인 기능을 더하고, 그 위에 또한 그들을 위로하는 영혼의 사역이 뒤따라야 한다.

     결론: 부로 인한 죄의식과 가난으로 인한 불안
  부자에게는 죄의식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는 반면에 가난한 자에게는 불안이 보다 더 큰 유혹이며 문제일 수 있을 것이다.  부자는 활동할 수 있는 재력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에는 책임이 따르며, 또한 그로 인해서 부정적인 측면들을 기억해야 하는 중압감을 가지게 되는 반면에 가난한 자들은 책임을 져야 하는 세상의 물질을 부자들만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에 있어서 목회적 돌봄은 육체적인 필요에 대해서만 아니라 도덕적인 양심과 우상숭배 및 영적 성장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는다.


       18. 죽음에 대한 목회
  우리가 새로 태어난 아기를 안아 보거나, 죽음에 임박한 사람의 손을 잡아볼 때 근본적인 경각심, 즉 생명은 고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임종은 인간사 가운데서 가장 엄숙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의술과 목회는 서로 다른 시각에서 죽음을 보고 있다.
  목회는 생명을 보호하고 연장시키려는 의술의 노력을 뒷받침한다.  목회는 죽어 가는 사람에 대한  보호를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고, 그와 그 가족들의 의식을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에다 밀착시켜준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으며 이 사랑은 십자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의 희망 속에서 계속 이어지며 그 은총이 우리의 연약함을 완전케 하신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목회자의 도움을 요청하는가?
  병이 깊어져서 죽음이 임박했을 때 목회자에게 신속하게 알리고 그러면 그는 곧바로 가보아야 한다. 갑작스러운 죽음이나, 나그네의 사망 또는 교인의 친족이 사망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목회자는 그 당사자 또는 가족과 이미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목회자는 결국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시련 가운데 나타나나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고귀한 가치를 사람들에게 밝혀주는 일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위기에 처해서 가족을 잃고 침묵 가운데 모여 있는 사람들 속에 목회자가 참여해서 환영받는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자 목회의 특전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목회자를 찾아오는 이유는 몸을 고칠 의사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몸을 고쳐야 할 의사가 속수무책이고 또한 죽음의 권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죽음의 비밀을 통하여, 또는 이것을 넘어서서 소망을 가르쳐주는 목회에다 사람들은 눈을 돌린다.

     목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목회자는 인간적인 단절의 와중에서 해석자로서 또는 상담가로서 아니면 신체의 모든 기관들이 최종적인 제약을 받을 때 희망과 신앙의 근원으로서 임종 전이나 후에 친히 함께 해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신자들은 법적인 요구사항이나 물질적인 필요에 따라서, 또는 단순히 사회적인 관례에 따라서 목회자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그들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목회자가 입회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적절한 때에 말씀을 주기를 바라고 있다.
  환자 곁에 서서 끈질기게 “같이 있어주는 것” 이기도 하다.  자발적으로 밤을 새우며 환자를 지켜보고 기도하는 언약의 성실성은 하나님 자신의 우리를 향한 언약의 성실성임을 환자에게 보여주고 또한 그것을 상기시키는 일이다.

     환자에게 임종을 알려주어야 하는가?
  대부분의 경우 목회자는 질병의 위독한 상태를 밝히는 것보다는 처음에는 이 사실을 숨기고 말을 시작한다.  이 사실을 갑자기 들려주어 놀라게 해서는 안 되며,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연히 드러나도록 하여야 한다.  목회자는 침착하게 경청하고 대화가 무르익는 절호의 기회를 주시하면서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다.
  목회에서는 목회자가 때때로 교인들에게 상황이 위독함을 알려주어야 할 책임(의사 또는 가족의 책임과는 구별이 되는)을 지는 경우가 있다.
  죽어가는 사람은 죽음이 임박한 징조를 거의 다 알고 있다. 환자는 다른 사람보다도 더 자신의 몸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경험한다.

     목회자는 임종을 준비하는 일을 도울 수 있는가?
  전통적으로 교인들이 임종을 준비하는 일을 도와주는 것은 목회의 중심적 임무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모든 전문직 종사자들이 일반적으로 임종을 위한 심리적, 도덕적 내지는 영적 준비를 갖추는 일을 도와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전적으로 임종을 앞둔 당사자의 책임으로 남게 되었다.
  목회전통이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일생 동안 내내 계속되어야 하는 일이다.

     부활신앙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목회에서 복음처럼 더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없다.  이 복음이란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죄책과 사망의 저주를 제거하시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심으로 허무와 두려움의 죽음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부활신앙이 뜻하는 것은, 하나님은 죽음에서 예수를 일으킴으로써 예수의 목회사역이 역사 속에 나타난 신적 의지의 결정적 계시라는 사실을 확증하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사건에 참여하게 되면, 우리는 곧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  이것이 부활이 의미하는 핵심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가운데서도 이 소망으로 위로를 받는다.


     그리스도교 장례예배
  그리스도교의 장례예배의 본질은 위임의 기도로서 저녁기도와 아침기도, 또는 애도로써 그 전날을 보내고 장례식 당일 아침에는 서거한 성도를 위하여 특별한 기도와 함께 진혼 성찬식을 베푼다. 중세의 관행에서는 죽은 후 3일째와 9일째, 30일째와 366일째 되는 날에 진혼 예배를 드렸다.  그리스도교의 장례예배는 세례 받은 모든 사람에게 베풀었다.

     장례의식
  장례예배는 하나님은 우리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쉬게 하시며, 우리가 사망의 골짜기를 걸을지라도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신다는 사실(시23)을 상기시켜준다.  그리스도교 장례식에 해당되는 주요한 성서의 구절은 위로의 말씀이 담겨 있는 시편 구절들(시23, 27, 39, 90, 96, 121, 130)  목회자의 임무는 사별로 위기를 맞이한 사람들에게 이 성서의 말씀들을 알맞게 풀어 해석해 주는 일이다.
  그리스도교 장례예배는 감사, 중재의 기도, 신앙의 상기, 증거, 위임으로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장례식은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가족과 친구들로 하여금 서로 협력하는 공동체가 되게 한다.


       결론 : 목회신학의 궤도
  목회신학은 목사의 직무와 자질과 기능의 문제를 다루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한 분야이다.  신학으로서의 목회신학은 성서에 의해서 증거되고 전통에 의해서 중재되고 비판적인 추리에 의해 반성되고 개인적 사회적 경험에 의해 구체화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하여 수고하는 것이다.
  목회에의 소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목회에로 부름을 받았다는 개인의 내적인 확신과, 믿음의 공동체로부터 그리스도의 몸을 섬길 수 있다고 평가받은 외적인 소명 모두를 요구한다.
  안수의 요체는 목회의 은사를 받는 것과 이 은사가 전달되는 안수의식이다.  안수식에서는 내적인 은총과 외적인 행위가 결합된다.  내적인 실체란 하나님의 은사를 받는 것을 말하고 외적인 사건이란 교회의 중재기도와 함께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하는 것을 말한다. 중재기도는 성령이 언제나 같이하여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남자건 여자건 모두 다 거룩한 목회에 부름을 받을 수있다.  만약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이 대의적인 목회를 정당하게 대표하게 된다면 성이나 기타 다른 문제로 이 대의적인 목회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남자건 여자건 모두 다 불가분하게 인간 가족 전체를 위해서 헌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을 치는 비유에 근거한 “목회자”라는 개념은 통일된 성서의 목회 상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몸과 교회의 한 회원으로서 안수에 의하여 성별되어 교회를 대표해서 말씀을 전하고, 성례전을 거행하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전적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양육하도록 세워졌다. (교사, 감독자, 예배인도자, 장로)
  맛디아를 사도로 지명한 것은 부활 이후 새로 태어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목회와 세대를 뛰어넘어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긴급한 관심에서 이루어졌다.  목회의 기본 형태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신” 예수 자신의 목회로 지속되었다.  은사들은 각각 달라도 모두는 함께 그리스도의 몸의 복합적인 통일성을 나타내 준다.
  예언자적 목회와 제사장적 목회를 하나로 통합하여 말씀과 성례전을 동시에 수행하는 하나의 통일된 목회를 하도록 하여, 공중예배를 인도하는 제사장적 직무와 종교교육과 주석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담당하는 예언자적 직무 모두를 한 사람이 집행하도록 한 것은 그리스도의 목회의 대
담한 의도이다.
  그리스도교 목회자는 신앙의 공동체를 대신해서 적절한 때에 공개적으로, 그리고 구술적으로 들을 수 있는 행위로서 하나님께 중재의 기도를 드린다.

  성례전의 목회에서 신자는 물을 통하여 성령의 권능으로 씻김을 받고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영적으로 양식을 공급받고 새로워진다.  그리스도 안의 삶은 깨끗케 하시는 씻음으로 시작하여 영혼을 돌보는 음식과 음료로 계속해서 양육 받게 된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을 뜻한다. 설교는 계시된 말씀을 증거하는 문자화된 말씀에 대해 설명하고, 주석을 붙이고, 해석하며, 재적용하는 단계로 구성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가르치는 공동체인 이상 그 목회적 직무는 하나의 가르치는 직무이다.  목회자는 공동체의 가르치는 장로이다. 목회자는 말씀선포와 예배와 성찬식을 통하여 정기적으로 또는 공개적으로 가르치며, 목회적 돌봄을 통해서는 개인적으로 가르친다.
  목회신학은 목회자의 직무를 성서적이고도 역사적이며, 또한 신학적인 관점에서, 교회의 일상적인 자원을 관리하는 청지기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교회는 말씀의 목회와 성례전의 목회, 그리고 직제의 목회가 있고 따라서 교회에는 행정적 치리(목회를 지향해서 “목회를 가능하게” 해주는)가 있게 마련이다.

  돌보는 목회사역은 평신도 전체의 책임이지만 목회자의 영혼의 돌봄은 전체교회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성례전을 베풀며, 상담하고, 훈계하며, 아픔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이는 목회자 개인의 직감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적 목회를 수행하도록 소명을 받고, 준비하고, 안수 받아 목회를 위임받았다는 사실에서 이루어진다.
  목회인도는 신자들에게 언제나 사랑을 밑바닥에 깔고 훈계를 하여 그들을 바로잡아주는 목회를 하여야 한다.

  목회적 신정론은 그 누구도 능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하나님의 비교될 수 없는 능력과, 세상에 존재하는 가공할 만한 악과 고통에 대한 현실적 자각, 이 세 가지를 동시에 결합시킨다.

  1.목회의 직무와 은사에 대하여 쓰시오.
  2.목회 상담과 치유목회는 무엇입니까?
  3.목회 심방의 필요성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