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

초대교회사 요약

까망쑤나 2011. 11. 30. 03:44

초대편 *
1. 기독교의 요람
1)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B.C 4C 헬라적 이념은 결국 서로 다른 국가들의 신들을 동일시하여 혼합하고자 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으므로,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헬라니즘을 유일신을 신봉하는 이스라엘인들의 신앙에 대한 위협으로 생각하였다. 알렉산더의 정복으로 부터 A.D 70년 예루살렘 멸망에 이르는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헬라화하려는 압력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하나님과 전통에 충실하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끊임 없는 대결이었다. ex) 제2세기 마카비 형제의 투쟁

① 바리새당- 일반 민중들의 당, 율법중시; 일상생활의 모든 경우들에 율법이 적용될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토론(율법주의적이라는 비난함) 로마의 통치와 헬라주의적 위협 아래의 새로운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의 고유 신앙이 적용되도록 노력함, 최후의 부활과 천사의 존재들을 주장.
② 사두개당- 유대 귀족층에 속하였으며, 정치와 종교 양면에 모두 보수적, 종교문제에 있어서도 로마인들의 후원을 통해 유지하였던 성전에 관심을 집중.
③ 에센파 - 사회일반으로부터 격리되어 율법을 순종하기를 추구하였으며, 세상의 종말이 가깝다는 강렬한 기대를 품음(금욕주의적). 윤리적 유일신앙(하나님은 한분이시며 바로 이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예배 뿐만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요구하신다는 것)이며 종말론적 소망- 메시아 대망,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재건하시고 평화와 정의의 왕국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이 성취될 것을 확신하였다.
2) 디아스포라 유대인
① 로마 전역에 새로운 신앙 전파
② 구약의 헬라어 번역(셉토아진트, 70인역)
③ 알렉산드리아 필로는 이교 철학의 정수가 히브리 성경과 일치함을 증몀
3) 희랍-로마세계
① 여러 종교들을 무차별 혼합하는 종교적 혼합정책(혼합절충주의; 만신전)
② 황제 숭배
③ 플라톤- 초기 기독교 사상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 이원론적 체계와 영혼불멸과 영혼의 선재와 회상에 의한 지식의 획득과 선의 이데아사상 등이 있다.

2. 사도적 교부의 신학
1) 로마의 클레멘트
① 반발을 꾀하는 자들(고린도교회)에게 권면, 즉 구약성경과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우주의 본질적인 조화이론. 클레멘트의 기독론은 구세주의 선재, 로고스를 말함. 육체에 대한 영적 중요성을 강조(교회의 선재)
② 기독교가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여서 도덕주의나 율법주의로까지 진전함.
2) 디다케- 예배학의 역사
교회조직의 역사적 근거로 디다케는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중시하는 원시적인 체계가 교회 내에서 서서히 발전하고 있었던 계층적 교권조직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3)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인성, 성령강조
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육신하신 것을 부인하는 가현설주의자들(Docetists)과 유태주의자들을 반대. - 계시 이론에서 영향받음
② 교회를 하나로 보았으며, 그는 최초로 '카톨릭교회'라는 용어를 사용
③ 감독의 중요성 역설(교회적이고 목회적인 데 관심)
④ 성찬중시 - 그리스도와 연합
=> 특정한 신학의 학파까지는 전진하지는 않았으나, 어느 정도의 신학적 학파 혹은 경향으로 발전하기 시작( 안디옥학파, 라틴학파, 알렉산드리아학파)

3. 희랍 변증신학자(신앙의 수호자,최초의 조직신학자)
-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풀기 위해 기독교 신학을 조직화하고 로고스 이론을 정립하는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과 고전적 문화 사이에 대화를 갖기 시작하였다. 기독교의 점진적인 헬라화에 기여함.
* 위험성- 교회의 신앙을 정의하면서 초대 기독교인들이 생각조차 못했던 로고스 이론이 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한 채 발전되자 심각한 신학적 논쟁을 야기시킴.
1) 제2세기의 박해 - 헛소문과 모략
① 트라잔과 플리니 사이의 서신 - 기독교인들은 법원에 소환되기 전에 범한 범죄 때문에 처벌받는 것이 아니라 로마법원들에 대한 모독 떄문이라는 것 - 법원의 권위가 이를 요구, 황제에 대한 예배를 거부함으로서 그의 통치권 자체를 거부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② 기독교인들은 무식한 대중들로서 이들의 교리가 지혜의 허울을 쓰고 있으나 결국 어리석고 자기 모순에 가득차 있다는 것(유대인들로부터 이어온 야만인들의 종교)
2) 순교자 저스틴
① 희랍철학자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던 사상들을 십분 이용하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로고스의 산물이라고 했고 이 로고스는 우주의 이성적 원리일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서 서문에 나오는 선재적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모든 지식은 그리스도의 선물로 보았다.
② 중기 플라톤주의자로서 또한 동시에 기독교인으로서 스토아 철학의 요소에다가근본적으로 플라톤적인 철학을 가미 했는데도 항상 완전한 진리는 성육신한 말씀에서만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③ 기독교 신앙과 이교 철학, 그리고 구약성경과의 관계를 밝혀 줄뿐 아니라 초대 기독교 예배, 특히 세례와 성찬에 대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참여하는 자를 양육하는 현재적 음식(그리스도의 피와 살) - 헬레니즘과 유 대교에 대해서 기독교적인 해석을 내려보려는 노력(이레니우스 신학에 영향)
3) 안디옥의 데오필루스
삼위일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기독교 저술가

4. 초기의 이단들: 도전과 응전
1) 유태적 기독교(에비온주의)
구약의 율법을 복종하는 것이 마땅할 뿐만 아니라 바울은 참 신앙을 배교한 자이며, 그리스도는 시작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으나 율법을 완수하는데 있어서 도덕적으로 특출하였기 때문에 아들로 인정되었다고 보는 견해(양자설), 예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알리시기 위해 선택한 인간에 불과하며 이 땅에 주어진 율법을 순종하도록 인류를 부르는데 있다. 율법은 에비온주의적 영성의 핵심이며, 이들은 비록 피의 제사는 드리지 않았어도 할례와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였다.
2) 영지주의
어떤 일관된 체계의 교리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체계들로 부터 서로 다른 요소들을 종합하여 진리를 찾고자하는 제 2세기에 성행했던 각종 종교적 이론들을 총망라하는 혼합주의적인 성격을 가진다(페르시아 이원론, 동양의 신비주의 종교, 바벨론의 점성술, 헬라철학등).
① 개인적 구원을 추구
② 영이 이 세상에 떨어져 물질의 포로가 되었다. 영을 육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데 이것은 지식(그노시스)를 통해 가능하며, 이 지식은 영원자의 계시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신비적인 조명을 뜻한다(깨달음). 따라서 초월적인 영적 세계로부터 우리에게 해방의 계시를 전달해 줄 사자가 와야하는데 그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이원론(육과 영3을 구분)
③ 인간 안에 있는 선은 영안에서만 찾아 볼 수 있고 몸은 악한 것으로서 이러한 상대적인 힘은 영원한 대결상태로 있다. 그래서 몸을 영에게 복종시켜서 엄격한 훈련과 금욕적 삶을 영위하고, 또는 몸이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는 극단적 금욕주의와 자유방임주의가 나타났다.
④ 물질의 세계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고, 악한 존재가 실수를 범한 결과로 생성된 것으로 보고 이 세상의 사물들은 단순히 가치없는 것이 아니라 악한 존재들로 본다(유출설).
⑤ 하나님을 인간에게 알리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는 육체로 오시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은 진정한 의미의 신체적인 몸이 아니고 다만 몸을 가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며 그의 고난과 죽음도 참된 것이 아니라는 가현설을 주장 함.
3) 마르시온
마르시온의 신학은 영지주의의 이원론과 동일한 파생적 의미의 이원론이다.
①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리고 성부이신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인 여호와와는 다른 존재로 본다.
② 신약성경의 정경을 최초로 이룩한 인물(과장된 바울주의)
③ 조직적인 면- 교회를 세움
④ 그리스도가 참 인간이었음을 부정
4) 몬타니즘
① 2몬타누스의 윤리규범은 매우 엄격하여 교회가 세속사회의 요구에 점진적으로 동화되어가는데 대한 반항으로 출현함.
② 윤리적 규범은 급박한 종말론적 기대에 근거함
③ 신학적으로는 몬타누스주의자들이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가 최종적으로 끝났다고 하는 교회의 주장을 위협함
5) 군주신론
① 역동적 군주신론-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신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던 비인격적 권능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신성의 통일성을 보전하려는 이론을 지칭하면서 부른 개념 (그리스도를 단순한 인간보다 약간 우월하게 설명)
② 양태론적 군주신론- 그리스도의 신성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여 아버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을 받았다는 이론이 성립(성부수난설)
<정통교회 반응>
① 사도적 권위: 이단대처 도구로써 사용했던 각종 방안들, 즉 신약성경 정경, 신앙의 규범, 신조, 그리고 사도적 계승등을 총괄적으로 종합한 최종적인 주장
② 고대 가톨릭 교회로 성장케 되었다(사도적 계승,경전,신조).
③ 교회의 신앙을 조직적으로 요약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으며 이 규범에 따라서 교회의 신앙자체와 신앙을 보완해 주고 설명해 주는 각종 교리 사이의 구별의 필요성이 커짐: 신앙의 규범, 신조

5. 이레니우스
1) 영지주의를 성경적 입장에서 논박하고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이 연속성이 있음을 주장(창조와 구속) ... 인간과 세상에 큰 의미가 있는 창조에 큰 관심(창조는 시작된 것으로 봄)
2) 타락- 인간이 본래 가졌던 완성을 잃어버린 것이기보다는 자신의 성장(성숙할 수 있는 여지, 신화(divinization))이 저해되는 것을 뜻함. 그리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 혹은 악을 선택 - 동방사상
3)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창조와 구속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근거로 보며, 인간의 궁극적 목적과 원형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인간들 가운데 거주하며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이며, 이 사역을 총괄갱신-다시 활성화-이라고 부름, 그리스도가 성육신함으로써 만물을 총괄적으로 갱신하는 데서 가장 크고 최종적으로 표현됨, 그리스도의 최초의 승리는 부활이 아니고 성육신이다.
① 성육신은 이 세상 역사의 새로운 시작이며 창조의 계속이며 완성이다.
② 사탄에 대한 승리를 포함하여 우리의 해방까지 뜻 한다.
③ 교회는 총괄갱신의 사역 속에서 중요한 역할-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으로 사탄정복

결론) 그의 신학은 개인적인 의견보다는 성경과 교회의 교리에 근거하고 있음으로 반복적으로 신학적 갱신을 도모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고 하나님의 계획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총괄갱신, 교리에 따른 폭넓은 우주적 견해로 인해서 이레니우스야말로 역사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가한 최초의 기독교저술가라고 말할 수 있다.

6. 터툴리안
주후 207년경에 아프리카 교회공동체를 떠나 몬타누스주의자가 되어 당시 교회들이 느슨한 데 대해 비판함.
1) 개종후 법률가로서의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문체로 기독교 변호 <변명> <이단을 논박2하는 취득시효>등 ... 터툴리안의 신학의 근거는 법률교육과 그의 철학적 배경들이다.
* 취득시효: 회부된 재판의 내용을 문제삼지 않고 재판의 진행 그 자체를 문제시할 때 쓰는 용어, 33상대편이 재판절차에서 벗어났으므로 재판이 더이상 계속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반대의견 => 이단들의 이론 자체를 논의하자는 의도가 아니라 정통에 반대할 권한 자체가 없다고 부인하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교회만이 성경을 소유하고 해석할 권한을 가진다.
2) 법률적 용어로 삼위일체 이론 전개 - 하나의 본체에 세개의 위격
# 신적 경세(economy)의 주장: 하나님은 한분이시나 우리가 경세라고 부르는 섭리 아래 계신다. 그러므로 한 분 하나님은 아들이 있다. 군주국 아래에서 한 분이시다(유기적 유일신론).
3) 영의 유전과 원죄의 유전 이론(원죄와 타락론 중시)
# 유전설- 원죄는 부모로부터 몸을 물려받듯이 부모로부터 어린이들에게 유전된다(어거스틴).
4) 라틴 기독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율법적 특성을 강화시킴- 형식적, 구체적, 실제적이다.

7. 알렉산드리아 학파: 클레멘트와 오리겐
1) 클레멘트
① 기독교의 진리와 희랍철학의 진리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이해
ⓐ 철학을 희랍인들에게 준 것은 유대인에게 율법을 수여한 것과 동일한 목적이라고 주장했으며, 이것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시녀의 역할에 불과하다.
ⓑ 신앙에 있어서 지식도 필요하다.
② 해석학의 주된 도구- 우의적 성경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
# 성경의 여러 의미를 구별하고 탐색- 신플라톤 철학의 영향
③ 하나님이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이제는 더이상 창조하시지 않고 만물의 보존과 증식은 태초에 정해 놓은 자연적 질서에 따라서 이루어진다(완성).

2) 오리겐
① [헥사플라]- 성경의 원문이 무엇인가 밝혀내기 위해서 여러 성경 번역판들을 모아둔 책
[제일 원리]- 조직신학적 저술
②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연결시키고자 시도함.
③ 성부와 성자의 관계- 아들의 신성과 영원성 중시(아들의 영원한 산출)- 종속설, 영원한 출생.
④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왔고, 시작부터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므로 피조물이 아니며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영원하다.
⑤ 속성교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 너무나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전자 의 행동이나 조건이 후자에 그대로 미치며 후자의 경우도 전자에 그대로 미치게 된다.
⑥ 종말론- 명상에로의 복귀(하나님과 조화를 누리면서 교제를 가졌던 본래의 상태), 만인 구원설을 강조
⑦ 두개의 창조
ⓐ 신적인 명상을 게을리하여 타락 -> 제2의 창조사역
(인간의 회복노력-기독교가 수행)
ⓑ 순수하고 영적인 것(창조) - 물질적인 것(형성)-> 죄의 결과
ⓒ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타락 -> 타락한 존재를 수용하기 위해 형성
⑧ 성서해석 - 영적해석=> 알레고리적인 해석
# 오 리 겐 # * 클 레 멘 트 *
신 중 심 말씀론을 그의 신학의 중심
- 이교도철학과 기독교 계시의 접촉점
아버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함 조명자로서의 말씀론 강조
- 성경보다 플라톤주의적 특성을 지닌 - 말씀으로부터 특별한 조명을 받은 자
하나님으로부터 시작 만이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귀족적 기독교로 빠질 위험 내포)

# 오리겐- 1) 폭 넓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응집력이 있는 그의 신학적 체계(동방신학의 가 장 근본적인 근원)
2) 담대한 이론

8. 3세기 서방신학
1) 변절자들에 관한 문제: 시프리안과 노바티안
① 시프리안이 변절자들에게 교회의 교제에 다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자 노력한 이유는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머리의 승리에 함께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는 교회의 본질적 특성은 진리이며, 분파주의자들을 반대하면서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그 통일성은 감독권에 있다고 보았다.
② 노바티안의 입장은 시프리안보다 더 엄격하여 사건의 핵심이 순수성, 혹은 용서하는 사랑 중 무엇이 교회의 특성으로 우선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노바티안은 전자의 입장을 따랐다.

9. 오리겐 이후의 동방신학
1) 사모사타의 바울
① 역동적 군주신론 -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별을 강하게 함으로써 유일신론을 보전하고, 이에 따라 아버지는 하나님이라고 주장,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단지 하나님의 지혜 혹은 권능으로 거주한다고 주장. 예수 그리스도를 "순수한 인간"으로 보았다.
cf) 양태론적 군주신론(사벨리우스주의): 말씀은 아들과 동일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한 신성을 아버지 그 자신으로 봄으로써 "성부의 수난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제2안디옥회의: 말씀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고 하는 이론 정죄

2) 오리겐주의 신학
① 그레고리 - 아들의 영원한 신성 강조 ... 우파 오리겐주의
② 디오니시우스 - 좌파 오리겐주의, 사벨리우스주의의 위협에 대처하기위해
* 동일본질- 이 개념은 서로 구별이 뚜렷한 3위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뜻은 없고 하나님의 3중적 속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쓰는 용어.
cf) 서방에서는 터툴리안의 시대 이후로 본질이라는 용어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공통된 신성을 뜻하고 위격이라는 용어는 3위의 각자를 뜻하는 말로 사용
-- 4세기 후반까지 동방과 서방의 의사 전달의 장애요소로 남아있다가 쌍방의 장기간의 걸친 치열한 논쟁 후 명확하게 되었다.
③ 루키안 - 아리우스의 스승
- 역사적이고 문법적인 주석방법은 후일 안디옥 학파의 특성이 되었 으며 주된 관심은 표현의 정확성을 추구하려는데 있다.
- 좌파 오리겐주의자로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을 강조했으며 아들은 어떤 의미에서 신성을 지녔는지 분명히 설명치 못함

10. 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회의
- 4세기, 콘스탄틴은 박해받는 교회를 관용받는 교회로 바꾸어 놓았으며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2뒤로 총회받는 교회로 바꿔 놓았다.
① 수도원 - 은자들 고행활동
② 예술, 건축분야 새롭게 발전(교회당)
# 부정적인 결과 #
① 대량적 개종은 교회의 도덕적 삶과 신앙의 확신의 깊이를 얄팍하게 함
② 황실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신학이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됨(정치적인 차원이 신학적 논쟁에 새롭게 덧붙여짐) 1) 아리우스 - " 구세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피조물이다."
① 알렉산드리아에 소재한 한 교회의 장로로 안디옥의 루키안의 제자, 좌파 오리겐주의의 대표자
②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알렉산더와 충돌 /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지지
③ 과격한 종속론 주장
④ 절대적 유일신 사상에서 시작하여 아들은 아버지의 유출이 될 수 없고 아버지의 본질의 일부분도 될 수 없고, 혹은 아버지와 유사한 또 다른 존재(유사본질)도 아님을 주장

2) 니케아 회의(325)
① 황제: ⓐ 하나님의 통일성보다는 제국의 통일에 더 큰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가능한 대로 최대한 감독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형식을 만들어 보려는 심산
ⓑ 논쟁이 오고가는 사이에 황제가 개입해서 아들의 신성을 분명히 밝 히기 위해서 신조 안에 "본질공존체(동일본질)"라는 단어 삽입을 종용함
=>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 조성되지 않고 출생하신, 아버지와 한 본질(homoousios)' / 대부분의 감독들이 사벨리우스주의를 더욱 더 경계
② 비판: 아버지와 아들의 통일성은 도외시하고서 아들의 신성을 언급하는데 더 치중한 점(서방), 동방교부들은 아들의 신성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절대적 통일성-양자 간의 근본적 구별을 무시한 통일성만 주장, 니케아 신앙형식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성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이 사벨리우스주의에 흘렀다는 의심을 삼

11. 니케아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 니케아 회의 옹호자 #
① 안디옥의 유스타티우스 - 동일본질을 주장하면서 상호간의 분명한 구별을 밝히지 못해 정죄
②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 니케아 신앙의 위대한 옹호자
③ 안키라의 마르셀루스 - 군주신론적 경향 - 정죄
=> 빈번히 패해 정치적인 면에 관심을 둔 황제의 영향으로, 유세비우스의 정치적 수완의 덕분으로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우스- 동방)
cf) 서방- 사벨리우스주의가 큰 위협이 되지 않았고 니케아 신앙고백(한 본질 세 위격) 형식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
ⓐ 성령 문제에 대해서는 커다란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단순히 '그리고 성령을'이라는 어귀를 삽입시키는 것으로 끝내고 말았다.(아들의 신성에 집중적으로 논쟁) - 아리우스주의와 성령을 피조물이라고 부르는 자들의 의견을 정죄,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를 최종적으로 확정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음.
ⓑ 363년 안디옥에서 모인 대회에서 니케아 신조를 옹호하는 선언을 했으며 동일본질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아들이 아버지와 본질에 있어서 비슷함을 뜻하며, 아들을 피조물로 바꾸려는 아리우스 이단을 정죄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 테오도시우스는 니케아주의를 지원 했으며 콘스탄티노플회의(381)를 개최토록 주선함으로써 아리우스주의를 최종적으로 정죄하기에 이름(니케아신조 재확인)
ⓓ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신격 안에서 통일성과 다양성을 좀더 명확하게 정의
--- 본체 - 사물의 개별적 존재를 언급하는 뜻으로, 본질- 같은 종류의 모든 개체들이 다같이 공유하고 있는 본질로 분리하여 사용,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 안에 3개의 본체가 있으나 한 본질만 있다고 주장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3개의 개별적 존재가 하나의 신적 본질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본질의 통일성을 말하는 신앙형식

12. 아타나시우스의 신학(니케아 신앙의 상징적 인물)
① 사변적인 성격을 띤 문제보다 독실한 신자이며 목회자(실제적이고 신앙적인 문제에 관심)
② 수도원운동 발전에 큰 영향력
③ 근본원리 - 유일신관(삼위일체), 기독교 구원관
④ 영혼-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며(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말씀을 반사시킬 수 있는 거울역할 그러나 죄로 인해 흐려짐... 플라톤적인 주제임.
⑤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라고 인간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심 -자연에 깃든 질서와 이치는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하셨으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을 통해 다스리시고 계심을 말해 준다.
⑥ 인간의 구원은 창조와 연속성이 있는데 그 이유는 타락한 인간의 구원이 재창조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죽을 운명있었으나 재창조를 통해서 선물로 불멸성을 받았으며, 자신이 그것을 따라 피조된 바 그 형상을 올바르게 반사하면 이 불멸성을 오래 간직할 수 있다.
죄란 인간 창조의 질서 안에 들어와서 인간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붕괴작용이며, 새로운 피조작업을 통해서만 쫓아 낼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만일 우리가 필요로하는 구원이 새로운 창조라면 창조자 한분만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 우리가 상실한 불멸성은 하나님 형상에 따라서 사는 존재 속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를 뜻하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구원은 일종의 신격화이다.
⑦ 하나님이 창조자라면, 또한 구세주임에 틀림이 없다(하나님의 초월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 - 하나님이 이 세상과 관계를 가지신다는 개념).
⑧ 아리우스주의에 대한 투쟁 그 자체가 아타나시우스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아들의 신성 강조)만 크게 강조하게 하였고 성령에 관한 토론은 미비했으나 아들의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성령훼방론자들이 등장하면서부터, 그는 성령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성령도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졌다고 주장함(삼위일체 정통교리 수호)
=>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 신학이 갖는 큰 약점은 삼위일체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확정된 용어가 결여된 점에 있다.
⑨ 기독론- 알렉산드리아 기독론의 특징적인 유형(속성의 교류)을 그대로 인정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불가분리의 결합)되어 있다고 강조, 이러한 연합에서 신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행동의 주체가 되었다.
#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 하나님의 잉태자임을 인정한다.

13. 위대한 캅파도키아의 교부들
... 삼위일체 교리를 간결하게 올바른 정의를 내림
# 바질은 다른 두 사람의 활동을 가능케 하는 기초를 놓았으며, 나지안주스 그레고리는 니케아 신앙을 옹호할 수 있는 언어적 규명 작업을 가장 선명하게 하고 알림, 닛사 그레고리는 두 사람이 세운 바탕에 굳건히 서서 자신의 이론을 더욱 더 간결하게 논리적 일관성을 갖게 함

1) 가이사라의 바질
① '한 본질 세 본체'라는 확고한 형식으로 이끌어 주는 첫걸음
② 성령을 더 많이 강조 - 삼위일체 교리의 발전에 크게 기여 /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본질 공존체임을 밝힘
③ 동방 수도원운동의 아버지(누이 마크리나의 영향) / 교회 예배의식의 조직자/행정면
2)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① 문학적인 재능- 설교자, 시인
② 니케아 신앙의 최종적 승리에 크게 기여
③ 참된 신학자 - 신학적 자아를 동상과 같이 맑게 닦아야 함
④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을 관계 개념(존재하는 본질의 교류)으로 이해
... 세 위격 상호간의 내적 관계에 더 많은 관심, 설명
⑤ 아버지의 특성은 낳으시지 않으신 자, 아들은 낳으신 자, 성령은 발출 - '한 본질 세 본체'의 뜻을 더 명확히 해 줌
3) 닛사의 그레고리(웨슬리의 사상과 연결)
① 신학자로써 그리고 신비적 경험의 정통 해석자로서 동방교회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 (신비주의적인 신학- 성화와 상승의 단계, 계속적으로 영구히 상승하는 단계) ... 중세 신비주의에 큰 영향
② 이교도의 철학을 더 많이 훌륭하게 이용
③ 알레고리적 성서해석(오리겐)
④ 악 - 결핍, 일종의 부정 안에만 있는 것이지 자존적인 존재는 아니다.
⑤ 지성적인 피조물과 하나님만이 엄격한 의미에서 본질적이라고 주장 - 오리겐보다 더 이데아주의자
⑥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를 통해서 볼 때에만 유일하게 삼위의 구별이 가능함
⑦ 신성과 인성의 결합 - 속성의 교류
14. 서방의 삼위일체론
--- 스토아적인 영향력은 신성의 내재를 언급했기 때문에 아리우스주의의 맹렬한 잠식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데 기여
1) 성 암브로스 - 유능한 교직자로 설교가로서 니케아 신앙 옹호
2) 칼라리스의 루시퍼
# 서방은 5세기 초반에 이르러 어거스틴과 더불어 독자성을 지닌 삼위일체 이 론을 전개하였다.
cf) 캅파도키아 교부들은 각 위격의 상이성으로부터 출발해서 본질의 통일성으로 움직인 반면에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본질적 통일성으로부터 시작해서 각 위격의 구별로 움직여 갔다.
3) 어거스틴 - 신적 관계 개념은 삼위일체 사상에 크게 기여한 두 가지 사상 의 출발점
① 성령의 발출 사상
② 삼위일체의 흔적이 피조 세계에 나타나 있다는 사상(기억, 지성, 의지)
- 창 1:26 -'우리가 우리의 모습으로 인간을 만들자'

15. 기독론 논쟁의 시작
ⓐ 서방 교회에서의 기독론 교리의 근본적인 흐름- 터툴리안 이래로 정립(두 본성 한 위격 이론)

ⓑ 동방교회-유스타티우스의 기독론의 영향 -> 안디옥 학파(역사적 예수에 더 관심)
(신성과 인성 구별(인성 강조)) -> 알렉산드리아 학파(신성,인성의 속성교류)
=> 안디옥에 중심을 둔 신학은 강한 시리아적 요소에 배어 있기 때문에 복음서의 보고들과 예수의 참된 인성을 강조하므로 헬라적 기독교와 갈등

ⓒ 안디옥 학파의 이론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말씀-육신'기독론과 비교가 되는 '말씀-인간'기독론 이라고 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말씀이 인간적 육신과 연합되었다고 주장한 반면에 안디옥 학파들은 말씀이 인간 전체와 완전하게 연결되었다고 자명하게 주장

ⓓ 캅파도키아 교부들(<->아폴리나리스)도 다른 희랍교부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구원론의 근본적인 모습이 신격화라고 생각, 아타나시우스는 이레니우스의 이론에 대한 찬성의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우리가 신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인간성을 입으신 것은 인간적인 삶에 참여 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신적인 삶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힘을 부여 해 주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16. 네스토리우스 논쟁과 에베소회의
1) 5세기의 기독론 논쟁은 안디옥 학파에 속하는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자리를 차지하였던 428년부터 시작된다... 마리아'하나님의 임신자'명칭 반대에서 시작
# 마리아는 '테오토코스' 즉 하나니의 잉태자가 아니라 '크리스토토코스' 즉 그리스도의 잉태자라고 불리워야 한다고 선포
* 네스토리우스(안디옥의 대주교 요한 지지)
<-> * 알렉산드리아 감독 시릴(로마 교구의 지원)
- 인성과 신성을 뚜렷히 구별함으로써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을 보존하고자 하였던 안디옥 학파의 전형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것(양성론)- 두개의 성품, 두개의 위격들 <-> 시릴,하나위격
2) 제3차 회의(에베소 431)- 테오도시우스2세
- 네스토리우스 정죄
3) 에베소 도적회의(449)
① 유티케스의 이론: '구세주는 성부와는 동일한 본질이나 우리들과는 동일한 본질이 아니다 라고 주장,'연합(성육신)이전에는 두 개의 성품, 그러나 연합 후에는 하나의 성품(신성)'-단성론(알렉산드리아 학파)
② 폴리비안은 유티케스의 가르침이 가현설에 가깝다고 판단 그를 정죄
#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루스가 의장이 되어 극단적 알렉산드리아주의 입장을 취해 레오 자신의 입장을 나타낸 서신을 용납하지 않고 플라비안을 정죄,/로마의 레오는 강도들의 회의라고 비난- 성육신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파괴하지도 않았는데 유티케스는 구세주의 인간성과 우리의 인간성이 동일본질이라고 하는 사실을 부인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난하였다.

17. 칼케돈회의(451)
# 알렉산드리아학파, 안디옥학파, 서방 교회의 기독론 - 다 같이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음을 강조하지만, 이 연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리한다.
① 디오스코루스와 유티케스를 정죄 / 레오 서신 낭독
② 터툴리안 주장을 다시 반복한 것으로 '한 위격 안에 두 개의 성품'이 존재한다.
③ 명백하게 표현한 신앙의 정의 반포(알렉산드리아파-단성론(신성), 안디옥파(양성론)의 양 극단을 모두 배척하고 과거 결정된 사항들을 확인(325-니케아 회의, 381-콘스탄티노플회의, 431-에베소회의) - 혼란이나 변화나 분리나 분열이 없는 두 성품, 이러한 통일성은 서로 다른 두 성품의 구분을 파괴하지 않고 양쪽의 속성이 보전되어 양자는 한 위격과 본체속에서 연합됨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신성에 있어서 동일하게 완전하시고, 인성에 있어서 동일하게 완전하시고,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고, 이성적 영과 몸을 동일하게 가지신다. 그는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고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나 죄를 제외하고 우리와 똑같다.

# 중세편 # - 수도원주의와 교황 제도
1. 어거스틴의 신학
- 신앙에의 험한 여정 -
① 마니교 - 키케로를 읽던 중 뛰어난 언변과 스타일만으로는 미흡하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름, 그래서 이를 위해 마니교를 찾음
ⓐ 인간의 상황 - 빛, 영적인 것과 암흑, 물질이 혼합된 결과로 구원을 위해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분리시켜 영혼이 순수한 빛인 광명의 영역으로 다시 귀환하도록 준비해야 한다.
ⓑ 어거스틴이 가지고 있던 두가지 문제를 해소시켜 주는 듯 했다. 성경은 수사학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문체와 표현들로 가득차 있었고 악의 근원에 관한 문제
=> 마니교의 답변: 성경-특히 구약-은 실제로는 광명의 영원한 원칙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 / 악도 이러한 광명의 원칙의 피조물이 아니라, 반대로 암흑의 원칙의 소산이다.
② 신플라톤주의자- 마니교의 이원론과는 달리 신플라톤주의는 궁극적으로 오직 하나의 원칙만이 존재한다고 주장, 이처럼 형용할 수 없는 궁극적 존재에 보다 가까운 실체들은 보다 우수한 것이며, 그로 멀리 떨어질수록 열등한 것이다. 악은 궁극적 존재로 부터 멀리 벗어남으로서 성립하는 것, 악은 비록 실재하는 것이긴 하지만, 사물이 아닌 궁극적인 존재의 선으로 부터 어긋나버린 하나의 방향인 셈이다.
③ 암브로즈의 설교- 풍유적 해석
#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 밀란 정원에서 회심 - '성 안토니의 생애'
- 암브로즈에게 세례를 받고 수도원적인 고행의 삶으로 경건생활과 학문연구, 명상, 규칙적 생활
④ 마니교에 대한 논쟁 -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 이 의지는 우리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으로 비록 자유의지가 악을 산출할 수 있더라도 의지는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 좌우 된다.
# 악의 근원을 인간과 천사들의 의지들에 의해 취해진 옳지 못한 결정들속에서 찾을 수 있다.
=> 어거스틴은 악의 실재성과 선하신 하나님에 의한 만물의 창조를 둘 다 주장함

2.도나투스주의자들과의 논쟁
① 기원-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박해 때 모든 성경을 반납하라는 명령 - 대부분의 교회지도자 - 도피하거나 순교 혹은 반납함.
② 박해가 끝난 후에 박해 기간 중에 성경을 건네 준 자와 이런 사람에게 안수받은 감독들의 권위에 대한 질문이 일어남 - 안수의 효용성 문제
③ 북아프리카 교회지도자들(어거스틴)은 감독의 교권적 행동은 개인의 순수성에 의존하지 않고 그 개인이 감독으로서 갖는 직임과 안수례 그 자체에 의존(사도계승성)한다고 봄 <-> 도나투스
ⓐ 교회의 본질 - 도나투스주의의 교회론: 경험적인 거룩성에 근거, 교회에 속한 모든 교인들은 이곳 지상에서 현재적으로 거룩해야 한다. 그리고 이 거룩성도 사랑의 실천에서보다는 지나간 박해 기간 동안에 어떠한 태도를 지녔는가에 따라서 평가된다. <-> 어거스틴: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라는 이론을 발전시킴- 알곡과 쭉정이
ⓑ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
# 정당한 전쟁- 전쟁은 정당한 목적이 있으면, 즉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합법적인 당국에서 일으킨다면,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과정에서도 사랑의 동기가 내재한다면 그 정당성이 인정됨
ⓒ 성례전
# 도나투스자들은 키프리안의 권위에 의존해서 오로지 교회안에서 행한 성례전만이 효력이 있다고 주장했으나(어거스틴)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서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들만이 성례전을 효력있게 집전할 수 있다고 주장함.

3.펠라기우스주의와의 논쟁
① 어거스틴은 자유의지보단 예정과 은총을 강조
② 자유의지 - 펠라기우스의 신학은 마니교의 도덕적 결정론에 대한 반동
#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동일한 목적으로 출발했으나 어거스틴은 자유의지를 옹호하면서도 은총의 절대적인 필요를 철회하지 않으려 했지만,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따르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
③ 펠라기우스는 창조의 은총(자연의 은총)과 더불어서 계시의 은총을 강조- 하나님은 계시로써 인간들에게 갈 길을 보여 주신다는 생각, 용서의 은총-인간의 의지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해 주는데 국한되어 있다.
④ 유아들은 무죄하기 때문에 세례가 필요없다(유아 세례반대).
⑤ 아담의 죄는 그 자신에게만 손상을 입혔을 뿐이며 전 인류를 손상시키지 않았다(원죄 부정)
⑥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죄를 극복하고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

( 어거스틴 )
① 지식론- 인간의 이성은 영원한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자체적인 능력에 의해서 혹은 감각이 전해주는 자료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조명으로 지식을 받아들인다(조명론).
② 하나님- 절대적인 진리, 즉 모든 진리의 근원, 삼위적 본성
③ 창조-1> 우주를 무에서 창조(선한 창조)
2> 모범설- 이 세계를 창조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미리 알고 계셨다. 하나님의 이성 속에 영원 전부터 만물이 존재했다는 뜻(씨앗이성)
④ 시간- 1> 창조
2> 시간은 오직 현재뿐이다. 곧 수직적 시간(카이로스)
과거는 다만 현재의 기억이요, 미래는 다만 현재의 기대(기다림)이다 ... 오로지 현재만이 직접적으로 시야를 제공해 줄 뿐이다.
⑤ 악 - 악은 선의 부정 / 선의 결핍
⑥ 자유의지론- 선을 택할 수도, 악을 택할 수도, 죄를 지을 수도, 안지을 수도 있는 중도적 선이다. 아담이후 자유의지의 잘못된 선택으로 악이 세상역사에 들어온 것으로 해석, 타락이후 죄를 안 지을 가능성을 상실하고 죄 짓는 가능성 밖에 안 남게 되었다. - '갇혀진 자유의지'
⑦ 예정과 은총(신앙의 시작) - 인간은 은총의 도움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 밖에서 활동하셔서 우리의 의지가 움직이게 하신다. 갇혀진 자유의지 상태이므로 하나님의 선택, 곧 예정에 의해 인간이 구원되며, 예정된 자는 끝까지 보존하신다는 것을 강조 / 구원받을 자의 예정- 불가항력적인 은총 (하나님이 스스로의 주권적인 자유와 활동으로 결정) /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활동하시는 양식

#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의지를 증진시키고 강하게 하시고 자극을 주셔서 의지 자체가 아무런 강요에 의하지 않고서도 선을 의지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혼자만도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과 더불어서 구원한다."- 부드러운 강요 / 구원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의 은총이 활동(견인)
⑧ 원죄 - 유전설
⑨ 교회- 보편성, 통일성(사랑), 사도성, 거룩성
# 교회의 거룩성- 키프리안과 같은 견해인데, 이 세상에서는 알곡과 쭉정이를 구할 수 없다고 보며(혼합된 몸),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모든 신도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시간의 끝에 가서 거룩성을 완성시킨다는 뜻이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구별
⑩ 성례전 - 그 자체로서 효력
# 세례는 거룩한 삼위일체, 세례받는 삶, 집전하는 사람으로 구성되지만 죄를 씻어 주는 분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⑪ '신국'- 종말에 가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위에 건축된 하나님의 도시만이 남게 될 것이다.

2. 어거스틴 이후의 서방신학
1) 오렌지 회의(529)
① 인간이 솔선하여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다는 가능성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되어야 할 필요성 역설
② 펠라기우스적인 자유의지론 거부
③ 구원으로써의 예정교리 인정하나 악의 예정사상은 정죄
④ 성례제도라는 형식과 선행을 강조 - 카톨릭주의와 연결(중세)

2) 보에티우스
① 위격, 본질, 존재의 개념의 사용과 삼위일체론에 큰 의의를 지닌 개념들에 대해서 폭넓게 설명함으로써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위격을 합리적 본성의 개별적 본질이라고 정의 내림.
② 고대철학을, 특히 논리학과 연결해서 신학을 하게 하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③ 보편 문제에 접근- 보편이 실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재론자'라고 부리고 보편은 단순한 이름에 불과하고 실재는 개별적인 것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유명론자'라고 부른다.

3) 위대한 그레고리 교황(540-604)
① 교황권의 확장과 강화
② 교회 갱신- 교직자가 된 후 결혼금지 및 교직 매매 금지, 중요 직위에 수도사 채용
③ 롬바르드 족의 침입으로부터 로마 구출
④ 중세 형성에 전반적인 기초 제공/ 대중적인 신학 만듦
⑤ 연옥설 주장/ 성자, 성모 예배 주장
⑥ 성만찬은 희생의 반복이며 산 자, 죽은 자 모두에게 효력이 있다.
⑦ 동서교회의 교량역할을 수행

4) 샤를마뉴 대제(찰스 대제)와 신성로마제국
# 천년왕국(하나님의 도성)을 유럽사회에 실현하려는 '기독교세계'의 이상을 가짐=> 중세를 정치적 힘으로 기독교화하는 세계제패의 야욕을 꿈꿈
① 영토확장하고 제국을 형성, 교회 보호-후원
② 교세확장- 군사원정과 함께 선교
③ 교황을 최고의 성직자로 취급
④ 수도원 운동의 개혁 및 부훙시킴, 성상숭배금지
⑤ 동로마 황제와의 단절, 서방제국의 교황의 신권정치를 확인하는 의미
⑥ 교회의 관리와 치리의 개혁
⑦ 수도원의 개혁 및 부흥- 베네딕트 수도원 규율로 체계화
⑧ 교회 건물, 관습 그리고 예배의식의 개혁
⑨ 교리적 개혁- 미케테우스로 인해 사벨리우스주의가 발현하자 이를 퇴치하다가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빠짐, 필리오케 문제 해결
⑩ 교육개혁

3. 제4차부터 제6차 에큐메니칼회의 사이의 동방신학
1) 콘스탄티노플 회의(553)- 저스티안 황제
- 단성론자들 정죄/ 칼케돈 신조에 대한 재 확인으로 정통 교리를 삼음
2) 제 6차회의(콘스탄티 노플회의)-681 -> 기독론 논쟁 최종적으로 해결
- 그리스도는 양성을 가졌으나 신의만 가졌다는 단의론 정죄하고 그리스도에게는 두 개의 본성적인 의지가 있다는 이론을 채택(칼케돈회의에서 주장한 대로 두 본성은 하나씩 고유한 의지를 갖는다는 것이다.그러면서도 두 본성이 하나의 위격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
3) 디오니시우스- 신비주의적 신플라톤주의(중세 신비주의에 큰 영향)
- 존재론을 가지고 신과의 결합을 설명
4) 이슬람의 확산

4. 카톨링 문예부흥
① 기독론 논쟁: 양자설
② 예정론에 대한 논쟁
③ 마리아의 동정성에 관한 논쟁
④ 성체성사 논쟁 - 성만찬에 관한 논쟁
⑤ 영혼에 관한 논쟁 - 영혼의 비물질성과 개별성
⑥ 필리오케(Filioque) 논쟁 - 성령에 관해서 '아버지로부터 발출하신다.'
⑦ 사적 참회제도의 발전
⑧ 교황권의 확대
# 요한 스코투스 에리게나 - 범신론적이며 신과 만유를 동일시 함

5. 암흑시대(9세기말-11세기)
- 투르의 베랑가(이성을 권위 위에 놓음)와 캔터베리의 란프랑(이성을 권위 수레에 연결): 성체성사 논쟁

#11세기에 이루어진 성체성사 논쟁
① 화체설의 확립
② 12세기의 문예부흥의 길을 염(이성)
=> 성체성사 문제는 신학에서 이성을 폭넓게 사용할 수 있는냐 하는 특수 형태의 문제이다.

6. 12세기의 문예부흥(중세 스콜라 신학의 학자들)
# 신학 활동(수도원 -> 도시 성당학교)

1) 선구자:캔터베리의 안셀름(스콜라주의 시대의 문을 염), 1093-1109
①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셨나?'에서 객관적인 속죄론에 근거한 이론 전개
-> 만족설 주장(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신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② 신앙우위론(신앙이 이성보다 우선한다)- 믿음을 근거로 할 때 앎에 이르게 되는 것
③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 창안 '독백'
④ 대속적 속죄관 주장

2) 피터 아벨라드
① 아리스토톨 철학에 기초하여 객관적 속죄론에 반대되는 주관적 속죄론을 주장 -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근거하기보다, 그가 이루신 화해에 우리도 사랑의 참여를 함으로써 속죄함을 받는다고 해석, 곧 인간의지의 주관적 공로와 노력이 전제되어야 함
=> 보편적 개념 (개념주의)/ 도덕적 감화설
② 이성으로 믿음에 이른다.- 내가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한 다음에 포착 않되고 파악 않되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말한다(인간의 선행과 노력 강조).

3) 성 빅토
① 아벨라드와 버나드의 극단을 통합
② 합리적 신학을 하지만 학문의 한계를 인식하고 신앙생활을 강조
(신비주의적 요소 + 어거스틴)
③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 - 하나님을 보는 것

4) 피터 롬 바르드
① 중도적, 보수적, 종합적 신학 사상으로 중세 후반에 많은 영향을 끼침
② '조직신학 총론' 저술
③ 아벨라드 영향- 신앙의 딜레마는 이성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

5) 크레르보의 버나드
① 아벨라드 반대
②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③ 12세기 시토회 수도원의 성공적인 영향력을 끼침.

# 12세기의 이단과 분파
1) 왈도파 - ① 교회의 인정없이 설교했다는 이유로 파문
② 칼빈주의 기독교로 정착(1532년 종교개혁을 받아들임)
③ 자국어로 설교, 여목사제도 인정, 산상수훈을 강조, 연옥설 부인
2) 카타리파- '순결하다'라는 뜻
① 이원론 주장(가현설): 물질과 영혼을 대립시키며 물질을 악의 근본으로 삼음
② 로마교회의 예전, 성직체제 반대(기독교의 근본 진리와는 상이)
③ 성을 죄악시하고 생식과 관련된 음식을 금함(엄격한 금욕주의)
④ 최대의 파벌인 알비젠스파는 유아세례, 십자가 사용,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예전, 화체설등을 반대

7. 십자군 운동의 의의
1) 원인: 637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사라센 칼리프를 1071년 셀주크 터어키(회교도)가 예루살렘 점령, 성지 회복 결의
① 1092년 니케아를 점령하고 동로마 제국을 위협
② 동방 황제 알렛시우스가 교황에게 원조 요청
③ 교황 우르반2세는 십자군 조직 결의(클레멘트 종교회의)
④ 동방무역의 이권이 걸린 상인들이 응원

2) 경과-십자군 승리: 1차, 화친: 3, 6차,
패배:2, 7, 8차, 엉뚱한 결과:4, 5차

3) 실패원인: ① 교황- 군사통솔권 미비
② 귀족, 기사의 이해 관계, 목적이 상반됨.
③ 최고 목적인 종교열이 식어지고 재물을 약탈하기 위한 불순한 동기가 작 용하여 인근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함
④ 동방무역의 이권이 걸린 상인들의 불량한 목적

4) 장점: 유럽 사회의 일대 변혁
① 종교적- 교황의 권위 저하, 재정수입증가로 교황권 강화, 유럽제국의 단결 촉구
② 정치적- 왕권 강화, 중앙 집권적 국민국가로 발달
③ 사회적- 봉건제도 몰락과 상공업 발달, 지중해 연안 도시 번영(해운업), 무역과 문화 교류, 도시발달
④ 문화적- 상호문화의 교류(서방, 비잔틴, 이슬람), 르네상스의 초래 및 스콜라 철학의 촉진

5) 단점 - 경제파탄, 국민의 아성, 소아가 싸워 이긴다는 설(소년 십자군운동)
# 콤네누스 아래의 동방 기독교
① 동서방 보편교회의 재결합 시도
- 파스칼 2세는 동방교회가 서방교회에 무조건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이 결렬됨.

6) 문제점
① 서로의 목적과 성향이 달랐다.
* 서방- 동방의 성지들을 기독교인의 수중에 다시 수복하고 로마교구를 세계교회 전체를 장악하는 통치기구로 올려놓고자 함(교황청의 절대적 권위 주장), 일체의 세속 권력으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주장
* 동방- 제국의 안보와 번영, 고토회복을 노림, 독립교회를 원하는 헬라인의 자주성, 정부와 협력아래 교회의 지방자치제를 요구하는 경향
② 신학적인 문제보단 정치적인 문제
cf) 11세기 이후 Filiogue-성령이 나오는 과정을 표현한 용어(성자를 통해)를 로마교회가 사용하자 동방의 거센 항의로 정치적 싸움으로 변함, 황제 레오3세(725)의 성상 타파주의로 콘스탄티노플과 로마의 갈등, 1054년 로마 교황 레오 9세가 파문서 성격의 편지 보냄으로 동서교회가 분열

# 제4차 십자군 원정의 결과
① 비잔틴 제국의 최후와 교회의 쇠퇴
ⓐ 콘스탄디노플의 황폐화
ⓑ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의 권위는 모스크바 대주교로 대체
② 동방의 라틴제국 수립 모색의 일환으로 제국의 삼등분 결정
③ 라틴 교회의 득세

8. 도미니크 학파
# 도미니크 수도회- 성도미닉(1170-1221)
① 자기부정과 걸식수도(양식구걸)
② 설교, 교육 강조, 높은 주지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귀족적인 냄새를 풍김
=> 알베르트 마그누스, 아퀴나스, 에크하르트, 타울러, 사보나롤라 등이 배출
③ 그들은 진리를 외치고 사수하면서, 이단을 분별하는데 앞장서는 종교재판 요원들이 되기도 함

# 프란시스회- 성프랜시스(1182-1226)- 민중의 존경을 받는 교단
① 절대적인 청빈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음
# 중세의 최대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플라톤적 방법으로 만물에 참으로 존재하는 자는 신이라고 이해, 범신론적인 경향(그리스도의 중재 무시)

1) 대 알버트- 종합적 사상체계를 만들려고 함
2) 토마스 아퀴나스(중세 스콜라주의를 집대성한 신학자), 1225-1274
① 스콜라 철학의 대표자요 카톨릭 교회의 대 선생
② 하나님과 인간의 기원과 그 운명에 대한 지식 - 이성과 계시라는 두 길
③ 신관: 계시에 의한 삼위일체
④ 신존재 증명방법론
ⓐ 역사 속에 움직이는 것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최고의 동자(FIRST MOVER)
ⓑ 한 것들을 통하여 소급해가면 최고의 선
ⓒ 세상의 모든 원인들을 축해 들어가면 최고의 원인
ⓓ 세상의 등급들을 찾아 소급하면 최고의 등급
ⓔ 설계로 부터의 증명- 모든 만물은 하나의 질서있는 목적에 봉사
⑤ 구원론- 예정론을 믿음
⑥ 성례- 7성례 주장
# 화체설- 성만찬의 냄새, 모양, 색, 맛은 변함이없는데 떡과 포도주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성별기도 후)
⑦ 회관- 교회는 구원의 기관
⑧ 연옥설 주장 , 마리아의 원죄 없음과 무죄임신설 주장
# 자연현상과 창조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으려는 인간적 사변을 중요시 여기는 신학, 즉 이성의 추구와 선행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이르는 신학 (자연신학)- '신학대전'


# 현대편 # - 종교개혁에서 20세기까지
1.중세시대의 종말
중세가 점차적으로 몰락해가는 것은 16세기 초의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나면서 시작되었다. ①새로운 민족들이 일어나서 주권적인 국가를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요구는 황제와 교황의 권한에 맞서서 충돌을 빚었다. ②상업과 화폐경제의 발달과 함께 도시가 성장했으며, 교황과 황제 그리고 고위 성직자와 지주들은 지금까지 누렸던 통치력을 보전할 수 없었다. 또한 농민들은 혁명을 일으키기에 좋은 토양을 만났다. ③이와 때를 같이하여 전통적인 교권적 계층구조는 위신과 힘을 잃고서 휘청거렸다. 이러한 교황권의 쇠퇴의 과정 속에는 교황청의 아비뇽 이전, 서방의 대분열, 교황청을 휩쓴 이탈리아의 문에부흥정신 등이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④학문과 명상과 관조에 전심전력하는 학자적인 신비주의자들을 들 수 있다. 평신도들도 기독교의 본래적 모습 속에 깊이 참여했으며, 또한 통찰력을 갖고 주시하게 되었다. ⑤중세가 강요하는 통합이 절정을 이룰수 있었던 것은 만물의 궁극적인 통일이 있다는 대전제에서 가능했는데, 즉 보편은 참이며 개인의 개별적 존재보다도 더 명확하게 주어진 상태로 거기에 있었는데 이제는 개별자에 대한 강조가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서 재차 도입되면서 위의 신플라톤적인 사고를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15,16세기의 뚜렷한 특징인 인문주의 운동을 들 수 있다. 이 운동은 활자와 인쇄술이 발명되었고, 건축, 그림, 조각 등 고전적인 관심이 고전문학에 대한 재현으로까지 이어졌다.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Erasmus)는 1516년 희랍어 신약성경을 출판했고, 예수님의 단순한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는 데 만족하였다. 그는 성경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자유롭게 벗어났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합리적으로 온건한 질서있는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그리스도의 철학"이었다. 이 철학은 진리는 하나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서, 그러므로 참된 지혜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하나님이 활동하신다고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중세 서방 기독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온화한 비분파적 개혁자들의 맨 마지막이라고 볼 수 있다.


2-1.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이모저모
1)영적순례
그는 분위기의 변화에 민감하여 가끔씩 우울한 상태에 빠지곤 했으며, 보통 젊은이들보다 신앙심이 더 컸던 것 같다. 처음에는 모범적인 수도사가 되고자 노력했지만, 로마로 순례여행을 갔을 때 유물들이나 공로를 얻는 수단들이 타락한 것을 보고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했던 모든 생활을 회의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죄를 결코 모두 다 고백할 수 없다는 문제가 심각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그는 낱낱의 죄에 대한 용서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맡김으로 구원이 있다고 가르치는 신비주의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는 1512년 신학박사가 되었고, 1513-1515까지 시편을 강의했고, 1516년에는 로마서를 강의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민거리였던 것은 죄와 은총, 의와 사랑에 얽힌 것이었다. "어떻게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루터와 같은 더러운 죄인인 사람에 대해서 당신의 진노를 거두실 수 있겠는가?"하는 물음이었다. 이에 대해서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면서(롬1:17) "나는 하나님의 의란 의로운 자가 하나님의 선물, 즉 믿음에 의해서 산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의해서 계시된다는 것이다. 즉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믿음에 의해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수동적인 의'(the passive righteous- ness)인 것이다." 여기서 루터는 하나님의 은총의 우위성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측에서는 악한 의지와 심지어는 은총에 대한 반항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은총보다 앞서지 못하는 것이다.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서 알브레히트에게 허가된 면죄부 판매(1506년 이래 발매되고 있었음)는 표면상으로는 재정난으로 인해서 얼마 동안 공사가 중단된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을 완성하자는 데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알브레히트는 자기 관할 구역안에서 이득금의 반을 차지하기로 되어 있었다. 오직 하나님과의 올바른 인격적 관계만이 구원을 가능케 한다고 확신한 루테에게는 그러한 가르침은 참종교를 그릇되게 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1517년 10월 30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속죄권의 그릇됨을 반박하는 95개의 신조를 게시하였다. 일반적으로 공격의 대상은 교황이 아니라 면죄부 판매를 위한 설교자들이었다. 또한 그는 학문적인 연구문서의 의도를 다지고서 라틴어로 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일어번역이 되고 인쇄가 되어서 전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 토론'(the Heidelberg Disputation)을 벌이는 과정에서 루터는 신학에 접그나는 방법을 총괄적으로 정립하였다. 그는 두 가지 신학의 방법, "영광의 신학"(Theology of Glory)과 "십자가의 신학"(Theory of Cross)을 제시했다. 그는 전자는 하나님의 업적 속에 나타난 면에서 하나님 자신을 보려고 하는 것이고, 후자는 하나님을 고난과 십자가 안에서 볼 때에만 하나님을 정당하게 말할 수 있고 경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이 계시 속에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모습 즉 고난과 십자가 안에 보여 주신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데, 루터는 이것을 참된 신학이라 보았다.
1519년 요한 엑크(John Eck von Ingolstadt)와 라이프찌히 논란(Leipzig debate)을 벌이면서 루터는 성경의 권위는 교황이나 회의의 구너위보다 우위에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교황과 회의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1520년에는 '기독교인의 자유'(The Freedonm of Christian),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Address to the German Nobility), '교회의 바벨론 포로'(The Babylonian of the Church)라는 세 논문을 썼다.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루터는 교황이 세속의 지배자나 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부인하면서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는 회의의 소집자는 교황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루터는 교회의 성례전체계를 공격하였다. 이 논문에 의하면 3개의 성레전(세례,성체성사,고해성사)만 있을 뿐이며, 화체설과 미사의 희생적 의미를 부인했다. 동시에 그는 모든 신자들의 사제직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교황 레오는 마틴 루터를 정죄했으며 그를 따르는 자들까지 함께 출교하였다. 국가의 행동은 1521년 웜스(Diet of Worms)에서 확정했다. 찰스는(이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음) 루터를 의회에 불러들이는 것을 머뭇거렸으나 프레데릭과 다른 사람들은 루터에게 변호할 수 있는 정당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의회는 결국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하나의 교회의 일원이 아니라 이단의 무리로 간주하였다.

2)루터의 주요 이론
①하나님의 말씀은 루터에게 있어서는 성경을 뜻하고 성육신하신 주님이시다. 루터가 지향하는 실천적인 목표는 "성경의 분명한 의미"와 위배되는 전통적인 견해들과 행습을 거절하자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서 전통도, 교회도, 신학자도, 모두 성경의 권위로 복음의 참된 의미를 통해서 되돌아가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루터의 견해에 반대해서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은 교회가 성경을 창출했으며 정경을 결정했기 때문에 교회가 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고 잇음을 나타내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루터는 최우선적인 권위는 성경의 정경이 아니로 성경 속의 복음이라고 생각했으며 복음이야말로 성경을 해석하는 표준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복음은 성령의 깨우치심을 통해서만 깨닫게 되기 때문에 성경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루터는 전통의 권위를 중시하는 로마 카톨리과 성령의 계시가 보다 앞선다는 과격파 종교개혁자들과 싸우게 되었다.

②루터는 성경속에서 율법과 복음이라는 두 가지 대비점을 발견하였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지로서 자연법 안에 나타나 있고 시민법적인 제도, 즉 가족과 국가 같은 것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선하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타락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의 으지를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들에게 심판과 저주의 말씀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복음은 아무런 일이나 공로도 전혀 없이 인간에게 주시는 은총에 의한 구원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까지도 또 하나님의 은헤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인 이후까지도 율법은 완전히 제외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상태를 보여 주어야 한다.

③인간의 현재적 상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죄인이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본성이 죄에 물들어 있다는 뜻이다.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자유의지를 옹호하므로 격렬하게 공격하고 나섰다.에라스무스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란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덕 혹은 정직함 등과 같은 일종의 요구사항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는 자유의지를 긍정하면서 인간이 스스로 선을 선택할 수 잇는 것처럼 자처하는 것은 인간의 죄악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과 율법 가운데서 어느 쪽으로든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능동적으로 기쁘시게 할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며 혹은 하나님 쪽으로 향해 나갈 힘도 없다. 하나님은 말씀 속에서 자신을 말씀하셔서 우리의 의지르 하나님에게로 향하게 하신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죄악된 상태에서도 또 다시 하나님과 교제를 갖게 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의 은총이다.

④믿음에 의한 의인(Justification by faith)는 루터의 의인론 이해에 붙이는 통상적인 말이다. 무엇보다도 의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해 주시는 죄사면의 선포, 즉 우리의 죄악성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여겨 주시는 선언인 것이다.(전가된 의인)의인은 인간들의 의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고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가 그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사면해 주시고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믿기만 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받기에 합당하게 되는 것이다. 의인이라고 해서 우리가 완벽하게 되었다거나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기독교인은 지상생활을 사는 동안에 계속적으로 죄인으로 남아 있으나, 의인된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에서는 해방된 죄인이다.

⑤성례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지요로 택하신 물리적인 행위이다. 성례는 믿음과 말씀과 긴밀한 관계르 갖고 있는데, 그것은 성례의 기능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 안에서 듣는 또 다른 형태이기 때문이다. 성례에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것으로 세례와 성체성사가 여기에 속한다. 세례는 의인의 징표이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삶의 시작이며 또한 삶 전체를 이끌어 주는 지표이다. 의롭게 된 죄인들은 항상 죽음과 부활의 생활을 지속해야 한다. 성찬론에 있어서 루터의 반대자들은 주의 만찬에 그리스도가 임재하는 것은 "상징적", "영적"이라고 보면서 육체적 임재를 거절했으며, 동시에 성찬행위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행위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루터는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하여 볼 때 이와 같은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루터는 육체적인 입재가 어떻게 일어나느냐는 질문을 받고서, 자신은 그것을 모르며 자기 같은 인간은 그렇게 물어 볼 자격도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화체설을 반대하였는데, 왜냐하면 화체설은 성찬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포로가 되게 하고, 빠아과 포도주의 영속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⑥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는 사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루터는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두 왕국이라고 말한다. 양쪽 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로서 다같이 하나님의 통치에 속한다.
기독교인들은 참된 종교를 위해서 국가나 혹은 물리적인 통치를 지지해서도 안되며 또한 통치자는 교회를 시민행정의 단순한 도구로 이용해도 안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루터는 키프리안처럼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했다. 모든 기독교인은 다른 사람에 대한 제사장이라는 뜻의 만인제사장(the universal priesthood of beliv- ers) 사상을 주장했다. 복음의 공적인 선포는 두려움이 따르는 책임이므로 어느 누구드지 쉽게 맡을 성질의 일이 아니었지만, 만인제사장직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사람을 불러서 목회사역을 맡기셨다.


2-2.협화신조(Formula of Concord:1577)까지의 루터파 신학
루터파 전통에서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은 루터를 떠나서 부처와 칼빈쪽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러한 이행과 함께 멜랑히톤은 루터의 신학을 여러 면에서 완화시킴으로써 루터파 교회내에서 몇 차례에 걸친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논쟁은 협화신조로 집약되었으며 루터파 교회는 대부분 이 신조를 중심으로 재규합하였다.
1518년 멜랑히톤은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로 취임한 이후 루터에 곧바로 매료되어서 성경과 신학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루터파 신학의 체계화작업의 적임자로 1521년 '신학의 기본적인 주제들'(Loci communes rerum theologicarum)을 출판하였다. 이 책의 최초 인쇄판은 루터의 견해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1555년판과 비교해 보면 초판에 다루지 않았던 하나님, 삼위일체, 창조 등에 대해서 주석했음.) 새로 나온 '주제들'에서 특히 다르게 표현한 내용은 죄, 타락한 상태, 자유의지 등의 주제에서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초판은 죄의 부분에서 인간의 타락을 강조했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죄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려고 애쓴 흔적을 본다. 원죄를 다루면서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 그는 자유의지의에 대해서 설명함에 있어서도 루터와 관심이 다름을 역설했다. 자유의지는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의지와 하나님과 인간 본성의 타락과의 관계를 다루는 의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는 타락한 인간 안에도 여전히 남아 있으며, 후자는 인간 안에서 또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불러일으킬수 없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전혀 갖지 못한다. 의인에 관한 사항에 있어서 멜랑히톤은 루터의 가르침과는 달리 인간의 의지가 어는 정도의 역할을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우리는 인간이 한 조각의 나무나 돌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옳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심판과 위로를 동시에 느끼므로 인간의 의지를 멸시하거나 거역해서도 안된다." 멜랑히톤은 회심에는 말씀, 성령, 인간의 의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적대자들은 이것을 '신인협동론'(synergism)이라고 불렀는데 구원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홀동이 합동으로 작용해야 함을 뜻한다.
멜랑히톤은 자신이 기초한 1530년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Augusburg Confes- sion)에서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적으로 임지한다는 사실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면서 여기에 대한 반대 의견을 배격하였다. 부처와 칼빈의 실재적 임재견해(real presence)가 그에게는 더 타당성이 있게 여겨졌다.

16세기 중반 루터파내에서 일어난 논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루터파와 필립파의 정확한 구분이 있기 전의 논쟁
여기에는 반율법주의적 논쟁과 오시안더파 논쟁이 포함되어 있다. 요한 아그리콜라(John Agricola, 1494-1566)는 루터와 비텐베르크대학 시절부터 친분을 가진 동료였다. 그런데 멜랑히톤이 루터의 요구에 따라 작성한 '방문자 지침'(Instruction for Visitors)을 작성했는데 아그리콜라는 이를 공격하였다. 멜랑히톤은 신자들이 도덕적인 삶에 관계된 분야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보탬을 준다는 측면에서 저술했기에 율법을 권장했으나 아그리콜라는 이것은 로마 카톨릭주의에 양보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반대하였다. 1537년에 아그리콜라는 분명한 반율법주의 입장에서 루터와 멜랑히톤을 공격하였다. 그에 따르면 율법은 복음의 선포에 있어서 아무런 기능도 못하므로 윩법은 법정에서나 필요할 뿐 설교단에서는 언급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참 회개는 믿음을 필요로 하고 믿음은 복음을 듣는 데서 나올 뿐이므로 율법을 설교하는 데서 회개가 이루어질 수 없다. 이와 같은 입장은 협화신조에서 최종적으로 배격되었다.
오시안더(Audrew Osiander, 1498-1552) 논쟁은 그의 신학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 그는 신비주의자였는데 전반적으로 볼 때 그의 신학도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인 그리스도와의 신비스런 연합에 있었다. 이러한 사상은 대부분의 다른 개혁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무시해 버릴 경향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역사적인 계시보다는 영원한 말씀에 초점을 맞출 우려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오시안더는 구속과 의인이 동일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성육신은 타락과 관계없이 창조의 클라이막스로서 미리 예정된 것이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순종의 사실과 죄인의 의인관계를 흐리게 할 뿐이었다.
찰스황제는 1548년 '아우스부르크 휴전'을 선포하였는데 대부분의 개신교도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통적인 교리와 행습을 되살려 낸 로마 카톨릭의 문서였기 때문이었다. 개신교에 양보한 내용은 것은 성직자의 결혼, 이종성찬, 신앙에 의한 의인 등이 고작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논쟁을 거친 뒤에 멜랑히톤과 대부분의 비텐베르크 신학자들은 양심에 따라서 '수정된 아우스부르크 휴전'으 받아들이기로 했는데, 이 문서를 '라이프찌히 휴전'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해서 신앙에 의한 의인은 구해 잰ㅆ지만 다른 조항들은 대부분 종교개혁 이전의 행습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의 타협은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 '아우스부르크 휴전'을 거부함으로써 고통당하고 있던 다른 개신교도들을 감안하지는 않았다. 엄격한 루터파 지도자는 마티아스 플라키우스인데 그는 1549년 라이프찌히 협상 이후에 출판한 '휴전을 반대하여'(Against the Interim)라는 논문에서 아우스부르크 칙령을 반대한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와 같은 반대에 대해 멜랑히톤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의 구별을 강조하는 대답을 되풀이했다. 플라키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모든 것이 통제되는 속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카톨릭제도를 제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이러한 상태에서는 "기독교인의 자유"란 상상할 수 없으며, 의인의 신앙보다는 외적인 요소를 다시 강조하는 오류에 빠질 뿐이라고 역설했다. 협화신조는 멜랑히톤의 주장을 인정했으며, 동시에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규정이 해당되지 않는 상황이 있음을 인정하는 플라키우스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신인협동론 논쟁은 필립주의자들과 엄격한 루터파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의 또 다른 일면이다. '라이프찌히 휴전'은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과 더불어서 구원의 과정에서 작용한다고 제언하였다. 또한 멜랑히톤은 의지의 자유를 점증적으로 강조하기에 이르러서 인간은 나무조각이나 바위덩어리와는 구별된 또 다른 존재라고 말하였다. 이 논쟁은 자연히 의지가 회심에 참여하느냐는 문제로부터 원죄의 질문까지 번져갔는데, 그 이유는 만일 의지가 어느 정도 제한을 받는다면 그것은 원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타락의 결과로 아담은 원의를 상실했으며, 자유의지도, 심지어는 하나님의 형상까지도 상실했다. 이러한 입장은 여러 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생각은 루터의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다를 부인함과 동시에 마니교에 접근했다는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 논쟁에 대한 응답으로서 '협화신조'는 인간 본성과 원죄 사이에는 창조의 본래적 상태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적 상황에서도 구별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협화신조'는 "원죄로 인해서 인간의 본질, 본성, 실재가 하등의 차별없이 완전하게 타락했기 때문에 전혀 구별을 찾아볼 수 없다고, 심지어는 인간의 마음까지도 타락으로 말미암아서 구별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 이론은 마니교의 오류이다"라고 정죄하였다. 오직 하나님 한분께서만 인간 본성의 타락된 상태와 인간 본성의 본래적 상태를 구별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자유의지에 대하여 '협화신조'는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성령에 의해서 거듭나기 이전에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시킬 수 있는가?라느 질문에타락한 인간은 그런 능력이 없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버렸고, 그래서 이러한 인간은 오로지 악을 행할 뿐이며 동시에 하나님에 반대될 뿐이다.

2)루터와 멜랑히톤의 신학의 차이점들
루터와 쯔빙글리가 주의 만찬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심을 놓고서 서로 의견이 불일치한 성만찬 논쟁이 배경이 되었다. 즉 상징적인 기념설과 육체적인 임재설 사이에서의 논쟁이었다. 1549년 칼빈, 부처, 그리고 일단의 스위스와 남부 독일 지도자들은 '취리히 합의'(Zurich Consensus)를 이룩했다. 이것은 쯔빙글리와 루터의 견해를 중재해 보려는 문서였지만 루터파에서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협화신조는 이 문제에 대해서 빵과 포도주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참으로 임재하며, 분배되어 있으며, 수용되어 있어서 신자나 불신자가 다같이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회개치 않은 사람들이 먹으면 스스로 정죄와 심판에 빠질 뿐이다.
성만찬 논쟁은 필연적으로 본체적 연합을 문제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서 이루어지는 두 본성의 연합에 관한 상이한 견해들과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루터파의 입장은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성을 요구하면서, 두 본성의 연합은 신성의 속성을 인성의 속성으로 문자적인 형태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전가되어지므로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matum)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신성으로부터 여러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부여받았다고 주장하였다. 반대로 개혁파의 입장은 두 본성간의 구별을 더 강조해서 속성의 교류를 좀더 제약적인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 동시에 하늘에도 있으면서 수많은 교회 내에도 존재할 수 있음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협화신조는 속성의 교류가 "행위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이고 인간이 하나님이며"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주장하였다. 또 협화신조는 위격 안에서 일어나는 연합에 의해서 그리스도은 항상 "하나님의 전능한 주권과 능력"을 소육하나 그리스도는 이것을 "겸손의 상태"에서 나타내 보이셨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거룩한 만찬에 임재해 있는 참된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 줄 수 잇으며, 이러한 나누어 줌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매우 쉬운 일이다.
결과적으로 협화신조는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의 경계선을 분명하게 그어 주는 데 성공하였으며, 동시에 루터파 내의 여러 지체들을 대부분 하나로 묶어 주었다.


2-3.루터 정통파의 신학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기독교 신학의 역사는 굽힐 줄 모르는 정통주의 기간을 거친 다음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업적을 인지하기 시작함으로써 엄격한 전통주의를 벗어나서 합리주의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17세기의 루터파 전통주의는 16세기의 엄격한 루터주의와는 달리 멜랑히톤이 말한 내용에 더 큰 가치를 두면서 그의 견해를 루터의 견해와 일치시키려고 하였다. 루터의 오직 성경만의 원리를 감안하면서 17세기 정통 루터주의는 성경의 기원, 영감, 권위 등의 문제를 크게 다루었다. 루터와 그의 동료들은 성경의 유일한 권위를 주장하였지만 나중에 일반적으로 인점하였던 성경의 기원설, 영감설 등을 말하지는 않았었다. 이 시기의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의 구별을 성경에도 적용하여, 성경의 질료는 본문 그 자체로서 글자, 단어, 귀절들로 구성되며 형상은 본문의 의미로서 하나님이 그 본문을 통해서 인간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말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이용하는 것은 루터파 정통주의의 특징이 되어 버렸다. 성경의 본문은 성령에 의해서영감을 받았는데, 영감받은 기록자는 기록하는 순간만 영감을 받을 뿐이며, 기록 이외으이 다른 행동이나 말들은 성령의 인도 아래 기록한 말씀의 권위와 동등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 점이 루터파 전통주의의 중요한 사항이었다. 그리고 정통 루터주의는 신학을 호기심에서 추구하거나 또는 하나님이 구원으로 계시하시지도 않은 사항을 추구하는 모든 시도를 배격하였다. 즉 소시니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을 신앙의 사항을 판단하는 지고의 중재자로 삼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17세기를 가리켜 "개신교 스콜라주의"라고 부르는 명칭이 생겨났는데, 17세기의 신학은 루터의 위대한 발견을 어느 정도 잃어버리고 중세 스콜라주의의 최악의 요소를 다시 만들어 냈다는 비난이었다. 모든 것을 체계화하려는 이들의 태도는 루터 자신이 그렇게도 배격했던 율법주의에 또 다시 접근하는 것이었다.


3-1.쯔빙글리와 개혁전통(Reformed tradition)
16세기 개신교 신학은 루터파, 개혁파, 재세례파, 성공회파로 대별될 수 있다. 루터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주제로 삼고서 영적 순례의 고뇌의 길을 따랐다고 한다면, 쯔빙글리(Ulrich Zwingli)는 애국적이며 지적인 사고의 길을 따랐다.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은 항상 민족주의적이며 정치적인 색채를 띠었다. 또한 그의 지적 관심은 에라스무스적인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노선을 따른다.
쯔빙글리는 기독교 인문주의자로서 성경에 접근했다. 인문주의자로서 근느 기독교의 참 본질을 재발견하는 길은 성경의 메시지를 발견해서 기독교의 갱신에 적용한 ㄴ것이라고 믿었다. 성경은 영감과는 별도로 역사적인 우선성이 있기 때문에 후대에 생겨난 전통보다도 신빙성이 있는 증언이다.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하나님 말씀"이란 성경의 의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 행동이라고 이해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하나님의 본질됨의 지식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창조자와 피조물을 나누는 현격한 거리감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학을 성경으로부터 이끌어 내기를 원했고 성경의 권위를 유일한 방향으로 삼고는 있으나, 고전에 대한 인문주의적인 이해로 인해서 그는 성경과 고전 사이에 많은 일치점이 있다고 보았다.

①섭리와 예정
쭬쯔빙글리의 하나님 관념은 절대자 관념과 연결된다. 그가 유일신 사상을 주장하는 논증은 성경에 있다기 보다는 하나 이상의 절대자를 인정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불가능이라고 보는 데 더 의존해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실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행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한분만이 만물의 일차적인 원인이시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신실함과 의로움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행하셨다. 이러한 예정론에 근거해서 쯔빙글리는 구원을 행위에 의존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논박하였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이지 인가 쪽의 노력의 결과는 될 수 없다. 그의 신학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특성은 하나님이 인간과 교제를 원하신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창조의 정수로서 인간을 만드셨으며, 인간과 교제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는 죄의 결과가 자손들에게 전달되었다고 보며 이를 "질병"이라고 일컬었다.

②율법과 복음
쯔빙글리는 도덕적 계명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의 영원한 율법과 의식법과 시민법으로 구별한다. 신약성경은 실제적으로 도독법을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복음과 율법은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 그는 루터가 경험한 율법의 의한 정죄의 감정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율법은 신성의 본질과 의지를 밝혀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가 사면되었다는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한다.

③교회와 국가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는 선택된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임체는 마지막 날까지 밝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교회는 인간들의 눈에 불가시적이다. 가시적인 교회는 불가시적인 교회에 대한 징표이며, 주어진 직무가 복음의 선포이듯이 가시적인 교회는 직급에 따라서 훈련시켜야 하는 의무와 권위를 갖는다.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정부와 예언이 다같이 필요한데, 예언이 우선적일 뿐이다. 다만 정부는 영적인 일과 거리가 먼 세속적인 상황을 통제하고 감독할 뿐이다.

④성례전
쯔빙글리는 루터파, 카톨릭주의자, 재세례파의 이론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발전되었다. 성례란 징표 혹은 에전으로서 이것에 의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군사 혹은 군사가 되려고 함을 교회에게 증명해 보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에게 알린다기보다는 교회 전체에게 알리는 것이다.

'※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국신민화 정책자료 해설  (0) 2011.12.01
한국 장로교 사상사 요약  (0) 2011.12.01
고대사  (0) 2011.11.30
신약 성경의 종교적 배경  (0) 2011.10.13
(아레오바고 요한복음 연구 - 3)   (0) 2011.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