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로교 사상사 요약
제1장. 서론
1. 한국 개신교는 성경의 권위 문제와 밀접한 연관 속에서 태동하고 성장 발전해 왔다. 때문에 성경의 권위 문제는 곧 한국 기독교 존속과 성패의 문제였다.
2.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간하배 교수-한국의 전후 장로교 논쟁은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논쟁.
논쟁의 중심주제는 성경의 권위, 특별히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론
3. 선교 초기의 한국교회, 특별히 장로교회는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였다. 완전축자영감에 기초한
성경의 권위와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확고한 확신을 가졌던 장로교 선교사들의 산물.
4. 20세기 중반까지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역사사료는 선교학적인 관점에서 쓰여졌다. 대표적인 두개의 작품은 백낙준 박사의 「한국개신교사」, 곽안련 선교사의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방법」이다.
백 박사는 기독교사는 그 본질에서 선교사이다. 또한 반드시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한국개신교사도 선교사 가 되어야 한다. 곽안련 선교사는 한국교회 역사 연구를 위해 선교-종교적 접근방법을 제시하였다.
5. 1950년대 한국교회 역사사료의 극적인 변천, 첫 번째는 정성천 박사의 “한국 개신교의 분열과 연합”
-현대자유주의 사료를 위한 기초작업을 놓아줌. 둘째는 김양선 목사의 “해방십년사”이다.
한국교회를 이해하는 평가 기준을 성경의 무오성과 축자영감에 두고 한국 개신교의 모든 과거 사건을 해석
6. 1950년대에 김재준은 성경의 무오성과 축자영감을 거부함. 신앙과 행위 문제에서만 무오할 수 있으며,
과학적인 면에서는 무오할 수 없다고 주장.
라저스와 맥킴의 주장 -성경의 저자들은 신앙과 행위 문제에만 성경을 오류없이 기록한 것이지 과학적,
역사적 문제들에서는 무오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샌딘-성경의 원본 무오설은 기독교 역사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성경관이라고 주장.
용어상 불오(infallibility)를 무오(inerrancy)와 구별하여, 성경은 불오하지만 무오하지는 않다고 주장함
7. 1940년 복음주의 운동을 근본주의, 신복음주의, 개방적 복음주의 세 단계로 나누었다.
탁월한 바르트주의자인 블러쉬 - 성경이 최고의 권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최고의 권위라고 주장.
성경의 무오설을 거부하고, 복음주의를 로마카톨릭을 포함한 에큐메니칼 상황에서 정의
데이튼 - 성경의 무오설 반대, 복음주의 뿌리를 웨슬리안 및 오순절 전통에서 찾았다.
8. 한국 장로교회내에 있었던 성경관에 대한 논쟁으로 교회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로 나뉘어졌다.
박창환, 이장식, 홍현석, 김재준 교수 - 성경의 완전영감을 부인
유동식-“한국 신학의 광맥”-그의 해석은 한국 교회의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역사사료의 이정표.
-성경의무오설과 완전축자영감설을 근본주의자들의 전용물로 오해.
주재용-자유주의 교회사가. 칼빈이 성경에 대한 축자영감설은 결코 주장하지 않았으며, 칼빈은 성경에
오류가 있음도 인정했다고 말함.
9. 한국 개신교 선교가 1884년에 시작했고, 최초의 한국 장로교 신학교가 1901년에 설립되었지만, 한국교회 에서 실제로 학문적인 면에서 신학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는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신학지남이 출판되 던 1918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한국 장로교 독노회가 1907년, 총회가 1912년에 형성.
제2장. 한국 개신교 전래 배경과 선교활동
11.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고, 쇄국정책도 무너지고, 을사조약을 시작으로 외국과의 통상조약과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선교의 문호가 열리고 기독교도 함께 한국에 전래됨. 선교와 통상의 문호를 열러준 중요한 계기 는 1866년의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 방화사건이다.
12. 토마스목사(27세)는 문정관들에게 한국 정부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항의를 하기도 하면서, 목적은 통상과 선교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자신이 천주교가 아니라 야소성교를 전하러 왔음을 밝힘.
13. 1882년 신미양요, 강화도에서 미국과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 1876년 일본과 강화조약이 체결.
14. 푸트의 요청으로 민영익 사절단으로 미국 방문.
15. 그리피스가 한국 「은둔의 나라」를 1882년 출판하여 한국 소개
16. 1884년에 감리교는 (스크랜튼, 아펜젤러)를 한국의 선교사로 파송함
17. 미국 북장로교는 (죤 헤론, 언더우드, 알렌)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
18. 공식적으로 한국의 선교문호를 여는데 직접적으로 기여한 사람은 (감리교 목사 존 가우처)이다.
1884년 2주 동안 한국을 방문하여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함. 김옥균을 한국에서 만남으로 국왕 허락.
19. 알렌 - 최초로 한국에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 1884년 9월20일 제물포에 입항.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민역익 건의로 제중원 개설됨.
20. 북장로교의 언더우드, 미국 감리교 소속 스크랜튼,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5년 4월5일에 인천항에 도착함.
21.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와 메어리 데이비스)-부산을 중심으로 선교
22. 남장로교회의 선교-(테이트, 레이놀드, 전킨, 메어리 테이트, 데이비스, 레이번, 볼링)이 (1882년) 11월 3일 한국 도착.
23. 캐나다 장로교회의 선교- 1888년 (게일) 선교사.
24. 침례교 창시자 (펜윅) 1889년에 한국 입국함.
25. 한국 선교의 밀알이 된 사람은 매켄지였다. 황해도 소래에 머물면서 동학란과 청일전쟁 몸소 겪음.
26. 선교사들이 관심을 갖고 추진한 첫 번째 사업은 의료사업이었다.
27. 광혜원-제중원: 알렌에 의해 세워짐. 한국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언더우드가 교사로,
스크랜튼과 헤론, 여의사 엘러스가 합류하면서 한국 선교 활동의 근거지가 됨.
28. 두 번째로 선교사들이 추진한 선교방법은 학교 교육이었다. -1886년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세움.
29. 1886년 5월 이화여학당이 스크랜튼 부인에 의해 시작됨.
30. 선교사들이 관심을 갖고 추진한 세 번째 선교사업은 성경번역이었다.
31. 일본에서 활동하던 (이수정)의 (마가젼복음셔언회)와 중국에서 활동하던 존 로스 선교사의 한국어 번역
성경이 출간되어 었다.
32. 효율적인 성경번역을 위해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가 설립.
33. (1895)년에 마태, 마가, 요한, 사도행전이 시험번역되었고, (1900)년에 (신약전체)가 완역되었다. (1910)년에 (구약번역)이 완료되었다. -(이눌서, 김정상, 이승두) 노력이 큼. -이들에 의하여 완료된 성경을 (구역)이라고 부르고, (1937)년에 완료된 성경을 (개역)이라고 부른다.
34. 한국의 전통 종교를 외국에 소개한 인물도 선교사이다. (곽안련) 선교사는 “한국의 종교”라는 책을 저술하여 한국 종교를 체계적으로 연구.
35. 1893년 (북장로교)와 (호주 장로교) 선교회는 장로교 선교연합 공의회를 결성, (남장로교)와 (캐나다 장로교)도 함께 가담 4개의 장로교 연합 공의회가 결성됨, (미 감리교와 남 감리교)는 1920년대에 가서야 연합공의회를 결성함.
36. (1905)년에 장로교 4개 선교부와 2개의 감리교 선교부는 선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 복음주의 선교연합공의회)를 결성하였다. -“하나의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37. 장, 감의 한교회 설립은 실패하였지만 결실도 있었다.
-성서 번역은 함께 추진하여 한 성경, 한 번역의 결실을 맺었다.
-(대한기독교서회)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문서선교를 추진하였다.
-기관지의 통폐합: 1905년, 장로교의 the korea field와 감리교의 the korea methodist가 합쳐져서 (the korea mission field)로 만들어짐
-1906년, 장로교의 그리스도신문과 감리교의 그리스도인 회보가 합쳐져서 (그리스도신문)
-1908년, 장로교의 찬양가와 감리교의 찬미가가 합쳐져 (찬송가)
38. (1892)년 북장로교와 미감리교는 소위 (교계예양)이라는 선교지 분할협정을 맺었다.
-첫째, 5000명 이상의 도시는 공동점유를 한다.
둘째, 이미 선교가 시작된 5000명 미만의 선교지는 중복과 경쟁을 피한다. 그러나 6개월 이상 특별한 이유없이 중단된다면 들어가도 좋다.
셋째, 미착수 지역의 선교를 강력히 권고한다.
넷째, 교인은 자유의사에 따라 옮길 수 있지만 담임목사의 추천이 필요하다.
다섯째, 교회는 상호 존중한다.
여섯째, 조사는 선교회로부터 직접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일곱째, 문서 판매 가격은 통일한다.
39. (1893)년 북장로교가 남장로교와 협정을 맺어 남장로교회는 (남서지역, 충청지역, 전라도)를, 1998년 캐나다 선교회는 (함경도 지역을)을 분배받았다. 1909년 호주 선교회는 (경남지역)을 분배받았고, 북장로교는 (경상북도, 평안도)를 담당, 남감리교는 (강원도)를, 미감리교는 (충청도, 강원, 경기 일부)를 분배받았다.
40. 선교지 분할 정책의 긍정적인 면- 재정의 낭비와 마찰을 피하여 선교를 효율적으로 진행 할 수 있었다. 부정적인 면-수십년 동안 한 교단의 신학을 심어줌으로써 지방색으로 가속화시켰고, 분파적 성향을 낳았다.
41. 한국선교의 특징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교파가 다양하였다.
-천주교와는 달리, 쉽게 개신교 선교를 수용하였다는 점이다.
제3장. 초기 선교사들과 성경의 권위
42. 한국 장로교 형성에 크게 공헌한 네 개의 장로회 선교회는 (북장로교 선교회, 남장로교 선교회, 호주 장로교 선교회,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이다. 출신학교로는 (맥코믹, 프린스턴, 유니온 신학교)이다.
43. (1884)-북장로교 선교회의 한국선교 시작, (1892)-남 장로교 선교회, (1889)-호주 장로교 선교회, (1898)-캐나다 장로교 선교회
44. (1907)-최초의 독노회사 조직, (1912)-평양에서 총회가 조직되었다.
45. (1901)-평양의 장로회신학교
46. (1907)-감리교 협성신학교
47. 한국 선교지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맥코믹 신학교)출신 선교사들이다. -마포삼열 선교사, 소안론 선교사, 곽안련 선교사등이다.
48. 초기 선교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 몇가지
-초창기 선교 25년동안 한국의 장로교선교를 주도한 것은 프린스턴 출신 선교사가 아니라 맥코믹 출신 선교사들이었더.
-선교 초기부터 한국 장로교회가 보수주의 선교사들에 의해 선교가 시작되었지만 그 가운데는 자유주의 출신 유니온 신학교 출신이 있었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공존
-한국의 신학 정립에 기여한 평양신학교 교수들 외에 미국의 성경학교 출신 선교사들 또한 한국 장로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49. 초기 한국 선교사들이 확신했던 다섯 가지 근본교리는? (처녀탄생, 대속의 죽음,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역사적 재림, 성경의 무오성)이다.
50. 마포삼열(매코믹)
-매코믹 신학교 출신, 북장로교 선교사, 1890년 한국에 파송.
-1902~1924: 평양 장로회 신학교 학장, 1918~1928: 평양 숭실대학 학장, 1907년 독노회 노회장
-감리굑의 아빙돈 성경주석에 반대하여 “표준성경주석” 서문에 “성경 전체는 영감된 하난미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에 정확무오한 법칙”이라고 성경관을 밝힘.
51. 소안론(맥코믹)
-수 많은 찬송가를 작하여 한국 찬송가 발전에 공헌함.-“하늘가는 밝은 길이”
-그는 성경을 과학적인 문제까지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 성경은 물리적, 의학적, 과학적, 지리적 그리고 다른 자연과학 분야 들을 포함하여 모든 면에서 성경은 절대적으로 무오하다고 확신하였다.
52. 곽안련(맥코믹)
-40년 동안 한국 장로교회와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섬기면서 51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1902년에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파송받음.
-“성경은 세상 종교들이 소유한 바 많은 경전과 책들 중의 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곧 그 권위를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유일하고도 구별되는 책이다“
-그의 신학사상은 첫째, 철저한 보수주의자이다. 둘째, 기계적 영감설을 부인하고 완전 축자 영감설이 역사적, 전통적, 성경적 영감론이라고 확신했다.셋째, 프린스턴 전통을 따르면서도 영감과 계시를 용어와 특성상 구분하면서도 성경과에 있어서는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주장한다.
-계시의 목적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지만, “영감의 목적은 무오성을 보장하는 데 있다“
53. 이눌서(유니온)
-1892~1937: 평양신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에 헌신했다.
-완전영감과 축자영감 두 영감론이 성경과 기독교회의 교리이다. ‘기독교의 증거’라는 조직신학 책을 번역하여 사용함, 이는 핫지의 신학개요에 뿌리를 둔 보수적인 신학서적이다.
-“충족적 영감”이라는 말을 사용함- “성령이 성경 저술자의 심령을 충족히 감동하사 하나님의 점점 더 밝히 나타내시는 의를 기록하게” 하시는 영감을 말한다.
-그가 볼 때 현대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인간화”와 “세속화”였다.
54. 구례인(유니온)
-신학지남의 3개 논문: “성경관에 관한 에밀 부르너의 신학 평가” “미국의 현대신학 동향” “신신학과 구신학의 비교”
-현대신학의 옹호자들을 비판: 첫째, 초자연적인 것을 믿지 않고 성경에서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려는 그의 노력, 둘째, 세상의 기원에 대해 진화론을 수용함으로 성경적 창조론을 파괴, 셋째, 그들의 주관적 성경해석, 넷째, 복음서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들의 거부
55. 라부열(프린스턴)
-1925년 제2대 평양신학교 교장
-그는 성경은 원본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불오하고 무오하다고 확신했다. 성경의 무오성을 원본에만 국한시켰다. 이는 구 프린스턴 신학자들의 주장이었다.
-성경의 유기적 영감론을 옹호하였다.
56. 어드만(프린스턴)
-성경은 과학적으로 정확한가? 과학가와 성경, 고고학과 성경, 신학변증론, 모세오경의 진위, 성경의 주의, 구약의 확실한 증거, 성경기사의 진실성에 대한 새로운 증거, 진화론과 창세기, 진화론
57. 함일돈(프린스턴)
-1920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옴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저술함
58. 첫째, 한국 장로교 대부분의 초창기 개척자들은 분명히 성경의 권위를 확실히 믿었다.
둘째, 그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원본에만 국한된다고 보았다.
셋째, 초기 개혁주의 선교사들에게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은 주로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넷째, 비록 영감과 무오는 용어상 구분되지만 그들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다섯째, 선교사들의 성경의 권위와 영감론은 보수주의적 칼빈주의 전통, 구체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정확히 일치한다.
여섯째, 선교사들의 성경관은 이중적인 성격, 즉 성경이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 넣으신 책이라는 사실과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인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말씀이라는 양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성경의 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 완전-축자-유기적 영감설
일곱째, 고등비평을 파괴적 비평, 배도하는 길, 이단, 반 기독교라고 부를 만큰 대단히 보수적이었다.
제4장. 성경의 권위와 선교방법
59. “성경중심적인 선교방법”-1907년 최초의 장로회 독노회에서 채택한 장로교회 신앙고백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그들의 확신을 나타낸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본문의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다”
60. “네비우스 선교방법”- 장로교 선교를 위한 총체적 선교전략으로 채택한 것이 1890년의 (네비우스 선교방법)이다.
-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실제적 핵심은 자립, 자치, 자전이 아니라 (성경 연구모임 제도)에 있었다. 마포삼열 선교사의 지적: 네비우스의 두개의 위대한 원리는 (성경공부제도와 자립).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선교방법이 성경의 권위에 기초)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 (엄격한 주일성수), (성서적 보수주의와 교리주의), (반자유주의 태도)이다.
61. “성경중심의 교회교육” -성경 공부반을 통해 성경의 진리로 전교인을 교육시킨는 조직
62. “성경중심의 신학훈련”--초기 한국선교의 교육적 골격은 (성경학교와 신학교)였다.
63. 장로회 신학교 교리적 강령 제1조:
“우리는 신구약 원본의 초자연적 영감과 무오성을 믿으며 그것들을 신앙과 삶의 모든 문제에서 최종적 권위로 받아들인다”
제5장. 자유주의와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
64. 자유주의 사상은 장로교 선교 초기부터 보수주의와 함께 병존하고 있었다.
65. 1910년대에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쳤다고 고소당한 사람은? (윌리암 커 목사-오번선언에 서명했던 인물)
66. 1916년 황해노회는 (김장호) 목사의 초대자격을 심사했다. 모세의 홍해 기적을 밀물과 썰물의 자연적 현상으로, 오병이는 각자 도시락을 가져온 것으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것은 얕은 물을 걸으신 것으로, 예수님의 재림은 미래에 일어날 역사적 사건이 아닌 것으로 말했다.
67. 김장호 목사는 사회적 진보와 기독교의 진보를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기독교의 복음을 당대의 상황, 현대의 시대적 진보와 조류에 따라 상황화하여야 한다고 주장.
68. 그는 또, 기독교의 성경은 (비과학적), (비현대적)이라고 비판함
69. (오번선언)-미국 북장로교 총회는 5가지 근본교리들을 재천명했고, 이에 반대하는 현대주의자들이 오번선언을 통해 총회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의 주장은,
-성경의 무오와 완전신뢰를 공격하고, 동정녀 탄생, 신적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대속의 죽음, 육체적 부활, 초자연적 기억들은 단지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다.
70. 자유주의 원천은 (감리교 선교회와 감리교)였다. 장로교 선교회는 보수적, 수구적, 그리고 극담에 기우는 경향이었지만, 감리교는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이었다.
71. 감리교 유동식 교수의 20세기 초엽의 감리교의 특징
-감리교회 안에서 (신학운동)이 눈뜨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상이 (개방적이요 진보적)이었다
-(민족문화)에 대한 강한 관심사였다.
72. 양주삼 목사는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고 믿었다.
73. 감리교도들은 (유교)와 기독교를 조화시키려고 했다.
74. 1930년대에는 (신앙)과 (신학)을 구부하려는 현상이 감리교 내에서 일어났다.
- 정경옥 교수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
- 정경옥 교수: (양식비평)을 1934년 한국 교계에 처음 소개한 사람
75. 감리교 내의 자유주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길을 통해 한국 장로교회에 침투했다.
(연합사업) (적극 신앙단과 같은 초교파 단체들) (감리교내의 자유주의 한국 학자와 서양의 자유주의 신학사료) (선교지 분할 협정)
-이 중에서 (선교지 분할 협정)은 자유주의 사상을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옮겨주는 자연적 가교가 되었다
76. (근대교육)-한국에서 서양 자유주의의 큰 원인이었다.-(과학)과 (종교)는 모순된다고 봄
77. (캐나다 선교회)-서양 현대주의와 자유주의를 소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함
78. (스캇, 프래지어, 맥도날드)같은 선교사들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79. 본토 (캐나가 장로교회)가 (회중교회)와 (감리교회)와 연합하여 (캐나다 연합교회)를 형성한 후 선교의 주도권이 보수주의 손에서 자유주의자들에게 이전되었다.
80. 한국의 자유주의 영향력있는 다른 루트는 (일본 신학의 자유주의 사상)이다.
-(칼 바르트)는 1920년대부터 유일한 신학자로 여겨질 정도였다.
81. 일본의 영향 속에서 탄생한 진보주의 사상가-(채필근, 송창근, 김재준)
82. (김재준)-한국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83. 1934, 1935년 총회에는 장로교 보수주의 사상을 공격하는 5가지 논제를 다루었다.
(창세기 저작설, 여성의 권리, 기독공보, 적극신앙단, 아빙돈 주석)
84. 서울 남문교회 김영주 목사-창세기 모세 저작권을 부인함
85. 성인 중앙교회 김춘배 목사-여성의 권리에 대해 총회에 도전함
86. 적극신앙단-1932년 신흥우의 지도아래 형성되었다. 이는 (미국적 서구적 조류)를 타고 출발하였다.
86. 기독신보 문제-적극 신앙단원이 전필순이 편집인 되어 자유주의 글이 실림. 이에 총회는 기독신보를 대신하여 기독교보를 발행하기로 결정함
87. 아빙돈 주석-번역자 대부분이 감리교 학자들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집대성
88. 1934년과 1935년 두 총회는 한국 교회에 몇가지 중요한 과제를 가져다 주었다.
첫째, 총회의 결정은 성경을 축자적으로 무오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변호했던 보수주의자들이 지배적이었다.
둘째, 총회는 언급한 세명 (채필근, 송창근, 김재준)의 자유주의자들이 신학지남에 글을 싣는 것을 금지시킴
셋째, 아빙돈 주석의 출판은 총회가 복음주의적 주석의 출판을 결정할 만큼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의 학술연구를 촉진시켰다. “표준성경주석”, 박형룡의 “현대신학 난제선평”이 출간됨
넷째,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론을 둘러싼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대립이 두드러짐
89. 1930년대 이전의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북장로교선교회 및 선교사들) (현대 세속교육) (카나다 연합교회 선교회 및 선교사) (일본 및 서양 자유주의) (감리교 선교회와 선교사)로부터 왔다.
제6장. 성경의 권위와 정통신앙의 변호
90. 한국 장로교 보수주의의 변증적이고 수구적인 1930년대 신학 경향은 대체로 (구 프린스턴 학파) 특별히 핫지-워필드-메이천 전통에 서있었다.
91. 평양신학교의 영향력있는 교수는 (박형룡, 1897-1979) 이 범주에 속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성경의 고등비평을 악마, 자유주의와 현재주의를 반기독교 운동과 동일하게 취급함
92. (1935년 5월 이후) ( 김재준, 송창근, 채필근)은 신학지남에의 기고권을 박탈당했다.
93. 신복윤 교수는 (박형룡 박사)의 (축자영감) (성경의 무오)는 그의 전 신학을 특징지어준다고 평가했다.
94. (현대신학 난제선평)-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들 모두로부터 최고의 변증서라는 평을 받았다.
- 이 책에서 박형룡은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 1권’) (메이첸의 ‘기독교와 자유주의’) (윌리암 그린의 변증서)등의 신학방법론을 채용하여 자유주의 문제점들을 구 프린스턴 보수신학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했다.
95. 박형룡 박사에게 영향력을 준 선교사는 (함일돈) (마포삼열) (허버트 블레어)이다.
96. (함일돈)- “성경에서 뒷받침 하고 있는 유일하고 진실된 교리체계”가 (칼빈주의)이다.
-그의 저서 (기독교 신앙의 기초) (진화론의 기초) (세계의 개혁주의 신앙)
97. 박형룡박사가 말하는 (근본주의)는
“기독교 본래의 입장을 시대환경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고수하려는 노력”이다.
(칼빈주의)와 (근본주의)를 동일시 했다.
98. 박형룡 박사가 보는 개신교 정통주의의 두 가지 근본적인 원리는?
(오직 성경만의 원리) (칭의 교리)이다
-가장 근본적인 정통주의 신학의 특징은? (성경을 영감되 그리고 신앙과 본분에 대한 우리의 정확무오한 법칙이라고 믿는 성경관)이다.
99. 박형룡 박사의 철학 박사 학위 논문 (자연과학으로부터의 반 기독교적 유추)
100. 박형룡 박사의 성경과=찰스 핫지의 성경관
“신구약 성경이 (성령의 영감) 아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따라서 (신앙과 행위)에 관한 모든 문제에서 (무오)하고 (신적권위)를 지니며, 그리고 그 결과로 (교리) (사실) 또는 (교훈)이 든 모든 오류에서 해방되었다. 현존하는 모든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를 포함하는 이 성경을 그의 (교회)에 (신앙)과 (행위)의 법칙으로 계획하셨다.
101.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경험)과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 속에서 그들의 종교적 권위를 찾았다.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의 외적 권위를 절하시키고 대신 (내면적 빛의 귄위)를 고양시킨다.
102. 슐라이어막허와 리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정통주의 성경관을 반대하는 (계시관) (성경관) (신관)이다.
-박형룡 박사는 그들의 (종교주관주의) (경험주의) (신비주의)는 전통적인 한국 장로교 신앙을 파괴한다고 믿었다.
103. (신정통주의 성경관)은 박형룡의 중심적인 비판의 대상이었다.
-신정통주의를 예리하게 비판한 신학자는 이눌서의 뒤를 이은 (구례인) 선교사이다.
-칼 바르트 신학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주제는 그의 (주관적 계시 해석)과 (성경불오와 무오사상의 반대)이다.
104. 박윤선 박사의 칼 바르트 비판
첫째, 바르트는 (역사비평학)과 (고등비평학)을 수용한다.
둘째, 그는 성경이 역사, 과학, 그리고 연대기적 문제에까지 정확하다는 (성경의 완전 무오사상)을 부인함으로 성경의 절대 권위를 거절했다.
105. 바르트는 말씀을 (선포된 말씀) (기록된 말씀) (계시된 말씀) 그리고 (살아있는 말씀)과를 구분하여 계시를 지나치게 (실존화) (주관화)시킴으로서 계시의 객관성을 부정하는데 문제가 있다.
- 바르트는 (성경의 무오성)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자체)와 분리시킨다는 의미에서 정통주의 성경관으로부터 거리가 멀다.
106. 박형룡 박사가 비판했던 또 다른 자유주의 운동은 (고등비평)이다.
-고등비평가들과 종교 진화론자들은 공통적인 배경을 공유한다 (신적 계시의 초자연적인 면을 버린다)
-따라서 성경을 (인간사상의 발전산물) (종교적 공동체의 산물)로 이해한다.
107. 박형룡 박사는 영감론에 관해서는 (완전-축자-유기적 영감론)을 주장했다.
영감의 (방법)이라는 면에서는 (유기적 영감)을, 영감의 범위에서는 (완전-축자 영감)을 변호했다.
108. (완전영감)과 (축자영감)은 구별되지 않는다.
-성경은 축자적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 신적권위로 인용된 것은 성경의 단어(말씀) 자체이다.
109. (김재준)은 축자영감은 (1609)년에 (폴라누tm)가 처음으로 제창한 영감론이라고 보았다.
110. (샌딘, 라저스, 맥킴, 말스든, 놀)등은 성경귄위의 역사적 사르침은 과학, 역사 그리고 연대기 문제에서의 완전무오사상이 아니다. 그들은 무오성의 개념을 (신앙)과 (행위)문제에만 국한한다.
111. 이들은 성경 원본의 무오성을 강조하는 성경 권위의 교리는 (1850년) 이후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고안해낸 교리)라고 주장한다.
112. 우드브리지의 지적: 샌딘의 해석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수정되어야 한다.
첫째, 새딘은 개혁주의 신학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의존하여 프린스턴 신학자들의 성경관을 해석하고 있다.
둘째, 샌딘은 성경의 귄위를 나타내는 무오라는 용어와 불오라는 용어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둘은 상호 교차혐너서 차이없이 사용되어 왔음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셋째, 샌딘은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성경의 외증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성령의 내증을 소홀히 다루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113. 한국의 자유주의 역사가들과 성경학자들 (이장식, 주재용, 문희석)들은 칼빈도 축자영감과 무오설을 믿지 않았다고 말한다.
114. (유기적)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경 저자들을 기계적인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내적 존재의 법칙과 조화되는 방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성경의 영감은 기계적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 저자들의 성격, 재능, 교육, 교양, 용어, 문체를 그대로 사용하신 유기적인 작업이다.
115. 성경은 (역사적) 및 (과학적)진리와 결코 모순될 수 없다는 것이 박형룡 박사의 변함없는 신념이었다.
116. 박형룡 박사의 성경관 연구 결과
첫째, 박형룡 박사는 성경은 (축자적으로 영감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다
-그는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은 정통주의와 다른 신학을 구별짓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며 표준으로 간주했다)
-그의 성경관에는 성경의 이중적인 성격, 즉 성경의 신적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신적기원의 강조라는 면에서 그의 성경관은 알렉산더와 찰스 핫지에 더 가깝다.
둘째, 모든 역사적, 과학적, 연대기적 문제에서 성경은 무오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진화론)과 (고등비평)을 철저히 반대하였다.
셋째, 그는 반현대주의와 반자유주의 운동을 발흥시키고 1930년대 장로교 보수주의를 형성하는데 지배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철저한 (전천년설자)였다.
제7장. 민족의 희망과 시련: 전천년설 신사참배 반대운동
116. (전천년설과 신사참배 반대운동), (성경무오설에 대한 불변의 신앙)은 한국 보수주의 기본적인 특징의 가장 독특한 단면을 나타낸다.
117. 감리교는 (자연주의) (역사비평주의) (서양 현대주의)에 깊이 영향을 받아왔다.
-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천년주의적 역사관)의 초자연적 면을 거부해왔다.
“하나님 나라의 초자연적 개념대신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자연적 그리고 현재적)으로 이해했다.
118.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이거나 타세적이 아니라 (여기에 그리고 현재)이다.
-하나님 나라는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상에 기초한 (내적 윤리적, 종교적 힘)이다.
119.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다)라는 말은 항상 그들의 모토였다.-이는 감리교를 장로교 보수주의와 구별짓는 독특한 특징 중 하나였다.
120. 평양신학교 교수들과 신학자들은 (전천년주의 운동)을 발흥시켰다.
121. (길선주 목사) (김익두 목사) (박형룡 박사) (반윤선 목사)는 전천년주의적 종말론을 계승한 칼빈주의자들이다.
122. 길선주 목사는 (문자적 성경해석)과 (성경의 절대 무오성)을 수용했다. 그는 (임박한 재림)을 강조하고 그것을 성경적 기독교의 가장 중추적 진리라고 가르쳤다.
123. 박형룡 박사는 (역사적 천년기전 재림론)을 철저히 주장했다.
-그는 천년왕국설을 (환난 후 휴거설)이 역사적으로 더 신뢰할만하다고 하였다.
124. 참 종교는 (하나님 중심)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
- 이 점에서 (디이즘, deism:이신론) 또한 반기독교 범주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
125. (“성경잡지”)-다니엘의 예언과 계시록 연구 논문이 실렸다. 이것은 게일과 재프레이가 공동으로 편찬하였다. 한국의 평신도들에게 종말론의 신앙을 심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26. 게일은 1913년에 종말사상을 정리하여 (예수의 재림)을 출판하였다.
127. 선교사 블레어는 부룩스의 (“쥬 재림론”)을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 트윙의 (“쥬필재림”)이 1922년 기독교서회에서
홀드크래프트의 (오는 소망)이 장로회총회종교교육부에서, (말세론)이 평양시학교에서 출간되었다.
128. 전천년운동 발흥에 기여한 중요한 요인
-전천년주의 선교사들, 세대주의, 장로교 전천년설, 서양문학
-성경중심적 선교방법과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성경공부반 제도를 통한 형성된 성경관, 즉 성경무오, 문자적 해석, 축자영감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
-일본 신민통치(1910-1945), 신사참배 반대운동, 그리고 동양종교와 철학
129. (일본의 식민통치)와 (축자영감, 문자적인 성경해석)은 전천년설 운동을 발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30. 1922년 (신앙의 원리)에서 (이눌서 선교사)는 나이아가라 사경회의 14개 신앙원리를 소개했다.
- 이 사경회는 다른 근본교리들과 함께 전천년주의 종말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소개
131. (플리머스 형제단)은 19세기 미국에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 운동을 발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맥킨토시의 “창세기 노트” “레위기 노트” 초판이 번역되었다. 신약 “스코필드 관주성경”이 출판 완료되었다.
132. 한국교회를 지배한 것은 역사적 전천년설이 아니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었다. 그러나 서양 스타일은 미국처럼 (율법폐기주의) 형태는 아니었다.
133. 한국 세대주의는 미국 세대주의와 몇 가지 공통적인 특성들을 공유한다. (일곱시대 구분) (부활과 심판의 이중성) (예언의 문자적 해석과 성취)이다.
134. 성결교 전천년주의자들과 장로교 전천년주의자들의 차이
첫째, 성결교 전천년주의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가깝고, 장로교는 역사적 전천년설에 가깝다.
둘째, 장로교 전천년주의자들이 성경의 고등비평에 대해 보수적인데 반해 그들은 극단적 보수주의는 아니었다.
135. (193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신사참배에 대한 정부의 압력에 복종하고 공식으로 선언했다.
136. (1938년 9월 30일) 평양장로회신학교 폐교. 신학지남 1940년 폐간.
137. 1940년 자유주의의 중심지 (조선신학교) 설립, 김재준 등 중심인물.
138. 1935년부터 1945년까지 10년동안 (전천년설)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한국 장로교의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139.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이 설파하였던 전천년설 종말론은 (역사적인 전천년설)이라기 보다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이었다.
제8장. 성경 무오와 대분열
140. 1945년 한국 전후시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은 (성경에 관한 논쟁) (근본주의 대 자유주의의 논쟁) (혼란과 분열의 시대)로 특징될 수 있는 투쟁이었다.
141. 평양신학교가 채택한 다섯가지 근본원리는,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성경의 무오성
-대속의 죽음
-그리스도의 임박한 육체적 재림
142. 김재준 목사는 완전무오사상과 축자영감사상은 다음 관점에서 볼 때 신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갖는다.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은 성경의 영감설 및 권위와 조화될 수 없다.
-인간 저자에 의해 기록된 성경은 결코 오류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도하지 않는다.
-성경은 수많은 과학적, 역사적, 지리적, 연대기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성경무오사상은 오직 신앙과 행위, 즉 구원의 문제에만 적용되어야 한다.
143. 그들은 기독교는 고대 종교에서 발전되었다고 주장하는 W. R. Smith 의 견해를 따라 (종교진화론)을 수용하였다.
144. 그들의 사상적 창구 역할을 한 잡지는 현대와 신학, 신학사상, 교회와 신학, 신학 전망, 현존, 신학과 세계, 신학과 선교등이었다.
145. (1942) (코리아 미션 필드)에는 (교회 안의 전쟁)이라는 신학적 시사성이 있는 글이 실렸다. 이는 (첫째, 미국의 신학적 논쟁이 한국의 선교지에 즉각 반영되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준다는 사실이다) (둘째,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소개하고 아마도 후에 선교사들이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146. 메이천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북장로교 총회를 나오던 (1936년)에 한국 북장로교 선교본부에서 탈퇴하고 나왔다.
147. 진화론을 반대하는 이유는 (성경의 귄위와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해치는 위험스러운 운동이고) (진화론이 하나님의 거룩성, 인간의 타락, 주일성수 및 다른 근본적인 기독교 교리를 타괴)하기 때문이었다.
148. (박윤선, 한상동)은 고려신학교 설립의 중심인물이었다.
149. 박윤선 박사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1934~1936년까지 메이첸 밑에서 신학훈련을 받았다.
150. 발트주의는 두가지 면에서 역사적 기독교와 명백히 모순된다고 보았다.
첫째, 발트주의는 기독교의 초자연적 사건을 초역사의 범주 속에 가두어 둔다.
둘째, 발트주의는 성경의 완전신뢰성의 교리를 반대한다.
151. 1964년 발표한 (근본주의 약점)이라는 글에서 박윤선은 근본주의자들의 경건주의와 초자연주의에 대한 지나친 강조점이 기독교의 근본진리에 대한 개혁주의적 균형과는 상치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152. 1947년 4월 17일에 51명의 학생들으 그들이 받고 있는 자유주의 교육에 반대하여, 1947년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는 서양 자유주의가 한국교회에 얼마나 침투되었는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153. 김재준 목사는 성경이 자연, 역사, 과학에서까지 무오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성경의 불오를 (신앙과 행위)에 제한 시켰다.
154. 오번선언과 거기게 서명한 1293명은 성경의 무오설과 완전신뢰성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였다.
155. 1947년 9월 23일 만주에서 돌아온 박형룡 박사는 김재준 박사의 성경관을 두가지로 비평하였다.
첫째, 현대 비평학을 따라 김재준 교수는 오경의 모세저작권을 부인하여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였다
둘째, 김 교수는 성경의 무오를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성경무오와 그가 수용하는 고등비평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156. 김재준 교수의 입장-
첫째, 오경의 모세저작설을 부인하는 것은 물론 다른 고등비평학의 방법론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이 성경의 권위와는 무관하다는 것,
둘째, 그의 (제한 무오사상)이다. 그는 성경무오는 역사적 및 과학적 문제에는 적용될 수 없으며 오직 구원의 문제에만 적용될 수 있다.
“성경은 종교적 신앙과 도덕적 행위에 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으로서 온갖 다른 학문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157. 김재준 교수의 성경관은 발트의 사상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성경은 종교적으로는 무오하지만 과학적으로는 오류가 있으며, 성경은 계시에 대한 증거이지 계시 자체가 아니다는 양자의 구분은 발트주의적 이원화이기 때문이다”
158. 발트주의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역사적인 해는? (1949년)
159. 웨스트민스터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에밀 부르너를 현대주의자로 간주한다. (1941년11월4일 방한)
첫째, 그는 주저하지 않고 고등비평의 원리를 수용한다.
둘째, 그는 성경에서 인간적 요소는 신적 요소와 분리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셋째,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을 전달하는 일시적 그릇과는 구분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넷째, 그는 경험을 진리의 최고 자리에 위치시켰다.
다섯째, 그는 인간의 기원에 대한 진화론을 적합한 진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창세기 창조기사를 역사적 기록임을 부인하였다.
160. 김재준 목사는 (대전전후 신학사조의 변천)이라는 강연을 통해 (마카이 박사를 배경으로 부르너 박사를 길잡이로) 이 신정통 신학사상 이야말로 가장 건전한 신학사상임을 역설하였다.
161. 조선 신학교 교수 (윌리엄 스캇)은 성경무오설과 완전축자영감설을 부인했던 영향력있는 지도자였다.
162.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나오려고 한 이유,
첫째, 박형룡은 메이첸 집단의 신학적 확신에는 강력하게 동감하고 있었지만 한국 장로교 총회와 전통적인 유대관계를 맺어온 네 개의 대 선교회와 협력을 단절하는 것은 기꺼히 찬성할 수 없었다.
둘째, 총회의 인준을 받으려고 하지도 않고 또 네 개의 선교회와 협력을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이유
163. 1951년 봄 이후, 한국 교회에서는 두드러진 내부 분열이 장로교단 내에 있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첫째, 세 개의 서로 다른 장로회신학교들을 분열시키는 이슈들이 점점 더 예리하여 짐으로.
164. 1952년 10월에 경상노회와 고려신학교 지지자들이 그들만의 노회를 열었다. 이것을 흔히 고려교단의 첫 총노회 또는 총회라고 한다.
- 346교회, 56명의 목사, 210명의 전도사를 가진 고려 총회가 공식적으로 형성되었다.
165. 1953년 6월, 한국신학대학과 김재준 목사 지지자들이 총회를 탈퇴하면서 ‘소위 법통 38차 총회’를 개최하였다. 9개 노회 48명의 대표자들이 첫 기장 총회에 참석하였다.
-그들은 1954년에 “기독교 장로회”라는 새 교단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자유 보수주의자들)이라고 칭하였다.
166. 1953년 교단 분열의 요인을 정성천 박사는 (신학적 요인과 경제적 요인)이었다고 보았다.
제9장. 결론
167. 한국장로교의 역사는 성경관에 의해 조명되어야 한다.
첫째, 소수의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초기 대부분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기독교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성경의 절대 권위)를 강조하였다.
둘째, 위의 선교사들의 불변의 확신이, 선교사역을 위해 그들이 채택하고 옹호했던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성공시키는데 중심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셋째, (성경의 권위와 무오설)은 (1930년대)부터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하기 시작한 여러 가지의 자유주의 도전과, 박형룡 박사의 응전에 있어서 결정적인 이슈였다.
-박형룡 박사의 성경관은 초대 선교사들의 성경관과 정확히 일치한다.
①성경의 무오성은 원본에 국한되며 사본이나 번역본에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
②성경고등비평은 성경의 절대 권위를 해치는 파괴적이고 위험스러운 현대신학운동이다.
③성경의 영감론과 무오설은, 전자는 완전하며 축자적이기 때문에 후자와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되어있
④따라서 성경은 축자적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적, 연대기적, 그리고 과학적인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무오하다.
⑤그러나 영감의 성격에서 그들 모두는 기계적 영감론을 거부하고 유기적 영감론을 성경적이고 전통적 영감론으로 받아들였다.
넷째, (성경의 신적 권위에 관한 절대적 확신)은 일제 식민통치 기간, 특별히 1935년과 1945년까지 약 10년동안, (전천년설 종말론)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섯째, 성경의 무오와 축자영감은 또한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장로회 신학교가 폐교되고 난 후 그 다음 해인 1940년에 조선신학교가 설립할 때 중심적인 주제들이었다.
168. 한국 장로교의 가장 큰 장점은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불변의 신념)이다.
169. 한국 장로교는 (성경무오)와 (축자영감)에 따라 그 신앙과 기독교 전체를 정의했다.
170. 한국 장로교의 부정적인 특성
첫째, 성경관에 대한 신학적 변호와 이들 (교리의 실제적인 적용-생활과 기독교회에 대한-)사이에 현저한 괴리가 있다.
둘째, 한국 교회가 (교리적 축소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지나치게 성경무오설과 완전축자영감설만 강조하여 축소를 낳음
셋째, 한국 교회는 개혁주의 전통과 명백하게 일치하기 않는 요소들이 있다. -한국 장로교회의 (세대주의)는 가장 좋은 실례이다.
넷째, 자유주의 학자나 보소주의 학자할 것 없이 (근본주의와 역사적 기독교를 구분하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171. 복음주의와 성경의 권위의 역사사료와 관련하여 볼 때, 한국 장로교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연구는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첫째,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자와의 논쟁은 엄격히 미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국제적인 현상이라는 점이다.
둘째, 1970년대 미국 복음주의 영역내에서 쟁론되어 오고 있던 성경의 무오성의 범위 문제가 한국장로교회의 1953년 대분열을 둘러싼 논쟁을 지배해론 중심주제였다.
셋째, 한국장로교 안에 성경을 둘러싼 투쟁이 미국 안에 있었던 투쟁과 완전히 분리되어 일어난 독립된 논쟁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류의 스승]그리스도교 제2의 창시자 바울 (0) | 2011.12.01 |
---|---|
황국신민화 정책자료 해설 (0) | 2011.12.01 |
초대교회사 요약 (0) | 2011.11.30 |
고대사 (0) | 2011.11.30 |
신약 성경의 종교적 배경 (0) | 2011.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