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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 집단 무의식 이론

까망쑤나 2010. 10. 25. 02:21

융의 집단 무의식 이론

출처: 《현대사상의 키워드》 98년 7월호 中 융의 집단 무의식

옮긴이: 이혜숙(kaya)



"자네에게 고백했던 말을 다시 글로 써보고 싶어서 펜을 들었네. 특히 자네로 인해서 내가 앞날을 믿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군. 나는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불필요한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네. 그 때 자네보다 내 일을 더 완벽하게 계승하고 완성시킬 사람은 없을 것이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융에게 보내는 편지〉 中


# 신비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1875년 생으로, 스위스 호숫가의 케스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개신교 개혁파 목사인 요한 파울 아힐레스 융과 그의 아내 에밀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융은 자연과 함께 하는 삶, 돌, 식물, 동물과의 교류, 물이 발휘하는 매력에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나의 청소년기는 신비라는 개념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비의 개념은 융의 일생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융의 일생은 프로이트가 개척한 무의식의 대륙을 더욱 풍부하게 개간하는데 바쳐졌다. 융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발전시켜 '집단 무의식'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렇다면 집단 무의식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일까?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일까?


우리 민족의 역사에는 많은 신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신화는 우리 민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 어느 민족에게나 모두 신화가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공교롭게도 이러한 신화들은 이야기의 기본 구조가 일치하는 것도 많을 뿐더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거의 같은 경우도 꽤 많다. 알에서 태어난 주몽이 나중에 자라서 고구려를 건국하게 되는 우리나라의 설화나 늑대가 키운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를 건국하게 되는 로마 건국신화가 비슷하고, 기독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불교 등등 어느 종교에서든 찾아볼 수 있는 구세주에 대한 기다림도 그렇다. 심지어 중국의 강시와 서양의 좀비, 아일랜드의 레프러컨과 우리나라의 도깨비같은 민간의 미신도 캐릭터와 발상이 서로 비슷하다.


이처럼 각기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진 여러 민족들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공통적인 요소들을 많이 품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혹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융과 같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융이 보기에 그런 공통적인 현상들은 우연이 아니라 오히려 필연에 가깝다.



# 시공간을 넘어 지속되는 동일한 무의식 : '원형(原型)'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한 계기 중 하나는 꿈이다. 환자들이 꾸는 꿈은 평소의 의식적인 상태에서는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고 환자 스스로도 알지 못하고 있던 측면을 보여준다. 그전까지 심리학자나 정신분석 의사들은 꿈이라는 것 자체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그것도 의식의 연장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꿈이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주장하며, 무의식은 나름대로 엄정한 체계를 갖추고 있고, 더 나아가 의식이 빙산의 일각이라면 무의식은 빙산 자체라고 말한다. 주요 저작 가운데 하나가 '꿈의 해석'일 정도로 프로이트는 꿈을 중시했다.


융도 역시 꿈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정신과 의사였던 융은 환자들의 꿈 이야기 중에서 공통된 이미지들이 있다는 것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각기 살아온 배경과 처한 환경이 다른 환경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꿈에는 영혼, 악마, 대지, 야만인, 성자 등등의 이미지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환자들이 말하는 그 이미지들의 형상조차 서로 서로 상당히 비슷한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꿈에 나타나는 환자들의 환상이나 상징은 고대 설화나 신화에서 보이는 것들과도 놀랍도록 비슷했다.


융은 이렇게 시공간을 넘어 동일한 이미지들이 반복하여 출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을 가졌다. 이렇게 공통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은 각각의 개별적 경우들의 배후에 뭔가 근본적인 것이 있을 것이라는 연상을 가능하게 했다. 이를테면 그 근본적인 것이 원본의 역할을 해서 이미지의 사본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여기 융은 그 복사본들의 원본, 개별적 경우의 배후에 있는 근본적인 것을 '원형'(archetype)이라고 부른다.


원형이란 각 개인의 심리에 내재해 있는 역사적이고 집학적인 기억의 본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원형은 인간 심리의 본성을 규정하는 초인격적 인간 심리 구조이다. 즉, 인간 개인으로서는 이 원형을 거부할 수도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다는 것이다.


융은 인간의 원형이란 마치 다른 동물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동물들은 처음부터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본능을 지니고 태어나서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몸을 추스리고, 언어를 배우고, 사회생활을 배워서 제대로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가기 위해 거의 20여년이 소요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인간에게 동물의 본능에 해당하는 것이 전혀 없지는 않다. 인간에게는 생물학적 본능보다 오히려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본능이 큰 작용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융이 말하는 원형이다.


동물이 조상에게서 본능을 물려받는다. 앞서 각 민족들의 신화가 놀라우리 만치 유사하다는 점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인류 공통의 원형이 있기 때문이다. 원형은 인간 개인이 처한 문화 및 시대와 무관하게 심리의 본성을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 인류의 먼 과거에 대한 기억 : 집단 무의식


어떤 개인도 원형을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원형은 당연히 무의식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개인적인 무의식과는 다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이 유아기에 경험한 내용이 의식에 억압되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원형은 모든 개인의 경험을 초월하여 개인의 경험보다 앞서 존재하는 초인격적 본질이다. 모든 개체의 안에 내재하고 있지만 동시에 개체를 넘어서는 무의식, 그래서 융은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1890년 이후 프로이트가 인간의 무의식을 연구한 이래 무의식은 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저장되는 곳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융은 인간의 무의식은 이런 개인적인 차원의 무의식 뿐만 아니라, 인류의 먼 조상, 더 나아가 인류 이전의 선행 인류 및 동물의 조상 때 습득된 이미지로 구성되는 집단 무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집단 무의식은 본능과 마찬가지로 타고나고 물려받는 것인데, 어떤 계기를 통해서 의식의 층으로 올라오면서 구체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집단 무의식은 이처럼 인류의 먼 과거에 대한 기억이지만, 동시에 미래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융은 신화, 종교, 철학에 집단 무의식이 상징적인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이 자기 이해에 이르러는 것을 도와주는 것을 중요한 열쇠로 이해된다. 융은 이것을 건축에 비유하고 있다.


"집단 무의식 구조 안에는 인간 심리의 원형적 건축자재들이 저장되어 있으며, 인류 전체에 집합적 기억이 축적되어 있다. 각기 다른 문화와 시대에 있었던 상징물, 이미지, 신화, 신 등이 놀랍도록 비슷할 뿐더러 환자의 꿈에 나타난 이미지들과도 비슷하다는 사실은 그 점을 증명해 준다."


다시 말해 과거의 조상들까지 포함하여 우리들 모두는 원형이라는 벽돌로 지어진 집단 무의식이라는 집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집단 무의식의 '집단'은 바로 인류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며, 일시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인간과 인류 전체가 생존하는 한 지속되는 것이다.


개별 무의식은 꿈이나 농담, 실언 등에서 징후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집단 무의식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까? 집단 무의식 역시 꿈을 통해 나타난다. 또한 집단 무의식은 신화와 종교 등, 개별 인간의 생산물이 아닌 모든 영역에 침투한다. 집단 무의식은 인간의 예술, 신화, 종교에 기록된 모든 이미지들의 원천이며 마르지 않는 저수지이다.



# 무의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설명의 도구는 언어이다. 그런데 언어는 무의식의 영역이 아닌 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의식의 언어로 어떻게 무의식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렇게 무의식을 의식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넘지못할 장벽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레비스트로스 같은 이는 근대 철학의 주체인 '나(자아)'를 중심에서 끌어내리는 작업을 통해 그 한계를 다소나마 극복하고자  했다. 근대 철학의 주체인 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데카르트)로 특정지어지는 의식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융은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 무의식적인 원형도 역시 자아라는 주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의 현실 좌표 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즉 융은 무의식적 원형이 의식에 도입되는 계기가 바로 자아라고 생각한다. 융의 자아란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를 동시에 포함하는 이중적인 존재이므로 그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융은 이중적 존재로서 주체를 분열시키고 다시 그것을 '자아'란 개념을 통해 재통합시킴으로써 무의식을 설명하지 못하는 근대철학의 주체 문제를 극복하려 했지만, 그런 설정 자체가 작위적인 성격이 다분하므로 외줄타기처럼 불안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자아를 통해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적 존재를 설명하는 융의 방식은 자칫하면 신비주의로 흐를 소지가 다분히 있다. 융이 만년에 연금술이나 동양종교의 신비로운 측면에 몰두했던 지적 편력은 그 점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융의 심리학이 과학적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너무 '문학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 융 이론의 의미


융은 '인류의 원초적 상징의 해석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무의식의 언어를 해독하고, 개체와 과정,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을 안내하고 지도하는 일종의 문법과 해석학 또는 해석의 이론을 창안했다. 한마디로 넓은 의미의 치료효과를 지닌 하나의 인식수단을 창안한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그의 업적은 무엇보다 인간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보다 심화된 인간상(人間象)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의 업적은 궁극적으로 인간에 대한 봉사라고 요약될 수 있다.


철학적으로 볼 때 융은 프로이트와 함께 무의식에 대한 탐구를 통해 근대철학의 주류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데카르트 이래 자아('모든 것을 의심하는 주체로서의 자아')의 동일성은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선험적 자아의 환상을 무참히 깨부순다. 융은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의 이중적 존재로서의 자아라는 개념을 통해 주체 문제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이 역시 의식적 주체라는 근대 철학의 기반과는 양립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투명하고 자명한 의식의 소유자로서 나에 기초한 근대철학은 설 땅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근대철학적 기반이 붕괴하고 근대철학의 주체란 미신이었음이 밝혀진 후, 인간 주체성의 문제는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데, 융의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의 이중적 존재로서의 자아라는 주체문제 해결방식은 비록 신비주의적이고 작위적이기는 하나 근대철학의 주체론을 뛰어넘는 인간 주체성 문제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또한 프로이트의 연구가 개별적 인간을 통해서 형성되고 나타나는 개인적 무의식에 그쳤던 반면, 융의 연구는 무의식의 영역을 더욱 넓혀 역사적이고 전인류적인 흐름에 까지 확장하였다.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가 미처 의식적으로 알지 못했던 인류사의 내면적 흐름, 반복되는 역사에 대해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의식에 대한 연구, 인간 사회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가 프로이트와 융을 통해 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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