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교회의 속성, 구별, 표시
그리고 정치 형태
(The Attributes, Distinctions, Marks
and Forms of the Church)
Ⅰ. 교회의 속성들(The Attributes of the Church)
개신교(Protestant Church)에서는 교회의 속성을 기본적으로 무형 교회(invisible church)에만 돌리고, 제2차적으로 유형교회(visible church)를 통하여 교회의 속성들이 나타나는 것을 기대한다. 교회의 속성은 거룩성·사도성·일치성을 포함한다.
1. 교회의 거룩성(The Holiness of the Church)
교회의 거룩성이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온전한 거룩을 향하여 나아가는 성화(Sanctification)를 가리킨다. 개혁 신학에서는 거룩을 객관적 의미에서의 거룩, 주관적 의미에서의 거룩, 성별적 의미에서의 거룩, 봉헌적 의미에서의 거룩으로 구분한다.
(1) 객관적 의미에서의 거룩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므로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중보적 의를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가시켜 주시고(imputed), 성부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선포해 주시는 칭의(Justificaton)의 행위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를 덧입음으로 성도라 부르심을 받았다(롬 8:33, 벧후 1:1).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신분상 의인이다. 이것을 구원론에서는 칭의라고 한다.
(2) 주관적 의미에서의 거룩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실제적으로 죄를 떠나 성별되며, 온전한 거룩을 향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거룩이다. 이것은 성도들의 생활의 거룩이다.
칼빈(Calvin)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교회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교회는 매일 전진하지만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즉 매일 매일 전진하지만 거룩이라는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한다…”23) 이것은 성화의 과정이다. 성화는 육체를 따라 행치 아니하고 성령의 뜻을 따라 행함이요(갈 5:16), 죄에 대하여는 점점 죽고 의에 대하여는 점점 사는 것이요(갈 2:20),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이요(골 3:9, 10), 죄의 성질을 전면 개조하는 것이요(고후 5:17),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일(갈 4:19)이다. 이것을 구원론에서는 실제적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한다.
(3) 성별적 의미에서의 거룩은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성별된다는 의미에서의 거룩이다. 여기서 “세상”(아이온 aiwn; an age, a period of time; 한 시대)은 악하고 패역한 시대를 가리킨다. 성별적 거룩은 악하고 패역한 이 시대의 생활양식(life-style or pattern)으로부터(세속으로부터) 떠난 성별된 거룩이다. 성별된 거룩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이다.
우리 주님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셨다. 주님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성화시킨다고 하셨다(요 17:17, 19; 엡 5:26;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이 말씀을 읽고, 명상하며, 지키려고 순종할 때 우리는 점진적으로 성화된다.
4) 봉헌적 의미에서의 거룩은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거룩이다. 이 봉헌적 거룩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봉헌적 거룩에로 이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물은 흠없는 산 제물이므로 우리의 거룩은 성별적, 봉헌적 거룩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고 하셨다.
사도 베드로는 신약 교회에 대하여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벧전 2:9)고 하였으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전 3:16, 17)고 하셨다.
2. 교회의 사도성(The Catholicity of the Church)
교회의 사도성이란 사도들의 신앙고백과 역사적 전통성을 말한다. 사도들의 신앙고백은 교리의 사도성이요, 역사적 전통성은 조직의 사도성을 뜻한다. 개신교에서는 말씀의 사도성, 사도적 교리의 계승을 강조한다.
개신교(Protestant Churches)에서는 교회의 사도성을 전 세계에 편만해 있는 무형 교회(invisible church)에 적용시킨다. 왜냐하면 무형 교회는 이 지구상의 모든 시대, 모든 참 성도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교리의 사도적 계승을 말한다. 그러나 개신교 교회들이 모두 교리의 사도적 계승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 이유는 상당수의 교회들은 배교와 불신앙으로 타락되어 정통 교리와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서 멀리 이탈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조직의 사도적 계승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개신교는 어느 교파를 막론하고 16세기 마틴 루터(Martin Luther) 종교개혁 이후에 탄생된 교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지구상에는 교리의 사도성과 조직의 사도성을 계승하는 참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가? 이와 같은 중요한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이란 매우 어렵다. 다만 교회의 표시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비교적 말씀이 바로 전파되고, 성례가 바로 거행되며, 권징이 바로 시행되며, 배교와 불신앙에 대항하며 영적 전투에 임하며, 참 예배(열린 예배의 반대)를 드리는 교회는 참 교회요, 교리의 사도성을 계승하는 교회라고 할 것이다.
천주교(Catholic Church)에서는 교회의 사도성을 천주교에서만 국한한다. 주장한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천주교만이 사도들로부터 계승되어 온 교회이며, 교황과 감독들은 사도들의 합법적 계승자들이고, 그것의 교리도 사도적 전통에 기인하므로 사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또 주장하기를 천주교만이 전 세계에 편만해 있으며, 수(number)에 있어서도 모든 개신교 교파들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많다고 하면서 사도적 교회를 가견적 조직체(visible organization)에 적용시킨다.
천주교는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 곧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해석하기를 “이 반석”(this rock)은 사도 베드로요, 베드로는 로마 천주교의 첫째 교황(Pope)이었다고 하면서 천주교만이 사도적 교회를 계승한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의 그와 같은 주장은 성경 해석과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된 그리고 근거 없는 억설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라고 사도들에게 질문하신 데 대하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사도들을 대표로 한 것이요, 자기 개인으로 한 것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반석”이 사도라고 한다면 모든 사도들일 것이요, 베드로 한 사도만은 아닐 것이다. 신약의 다른 성구는 교회의 기초를 말하면서 선지자들과 함께 사도들이라고 하였다(엡 2:20 참조).
또한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말씀을 문법적으로 고찰하면 베드로(페트로스, pe,troj; Peter)는 남성 명사로 사도 베드로를 가리키며, 이 반석(페트라, Pe,tra)은 여성 명사로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을 가리킨다.24) 히브리어 성경에 반석(바위; Rock)을 인간에게 사용한 예가 없다(삼상 2:2; 시 18:31; 사 44:8 참조). 반석은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신앙이다. 그러므로 주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을 기초로 그리스도는 자기 교회를 세우신다는 말씀이다.
천주교는 교황이 베드로의 사도권을 계승하였고 주교들도 다 사도들의 법적 계승자라고 한다. 물론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를 설립하고 조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교회를 설립하였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교회의 지도권을 야고보에게 인계하였다. 야고보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 되어 첫 사도들의 공의회를 주재하고 바른 결정을 하게 되었다. 반면에 이방 교회들 대부분은 사도 바울이 개척하고 디모데를 위시하여 감독들과 장로들로 하여금 말씀을 선포케 하고 교회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사도권을 계승하였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인물에 강조를 두지 않는다.
천주교는 사도의 인물과 전통에 치중하며 천주교만이 유일한 사도적 교회라고 하나, 그 같은 주장은 근거 없는 허설들이다. 그들은 조직의 계승도, 교리의 계승도 모두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사도적 교회가 아니다. 설혹 조직의 계승을 가졌다 할지라도 교리의 계승이 없으면 그것은 참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천주교는 물론 헬라 정교(Greek Orthodox)와 영국 교회(Anglican Church)들도 자교회(自敎會)들의 근거와 권위가 사도들로부터 직접 계승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사도적 근거와 권위를 역사와 전통에 의거한다고 주장하지만 확실한 변론을 가지지 못한다. 그중에도 영국 교회는 헨리 8세(Henry Ⅷ, A. D. 1491-1547, 영궁왕 1509-47)의 지도 아래 로마 천주교로부터 분열하여 영국교회(Church of England)를 세웠으며, 지금도 왕이 영국 교회의 교회적 원수(敎會的 元首)로 군림하고 있으니 천주교를 역사상 조직의 사도적 계승이라고 할 수 없다.
3. 교회의 일치성(The Unity of the Church)
교회의 일치성이란 만대만국(萬代萬國)의 교회가 본질적으로는 하나임을 말한다. 이 통일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통일이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내적ㆍ영적 일치, 신앙고백의 일치에 의한 통일이다. 이 통일은 제2차적으로 유형적ㆍ외면적 통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유형적ㆍ외면적 통일은 반드시 내면적ㆍ영적 통일의 자연적 표현이어야 한다. 유형적ㆍ외면적 통일은 성도들이 동일한 신앙고백과 동일한 성례의 참여와 경건한 생활을 통하여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완전한 통일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써 성취될 것이다. 내면적ㆍ영적 통일이 없는 외면적ㆍ조직적 통일만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 통일성이 아니다.
배교와 불신앙으로 타락한 전 세계 자유주의 교회들의 연합 단체인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는 “교리는 달리하나 봉사는 같이 한다”(doctrine divides, service unites)는 슬로건을 내걸고 기독교와 천주교는 물론 이방 종교들과의 연합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교리는 달리하나 봉사는 같이 한다”는 이 슬로건은 영적 분별력이 없는 수많은 자유주의 지도자들과 추종자들을 현혹시키는 마귀의 기만적 술책임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무조건적 연합은 타교파의 신앙노선ㆍ상이한 교리들·신앙들을 존중하는 것같이 생각되나, 성경 교훈에 입각하여 원리적으로 고찰하면 그것이 얼마나 비성경적ㆍ인본주의적ㆍ세속적ㆍ조직적ㆍ유형적ㆍ연합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참된 연합은 신령한 신비적 연합으로서 교리와 신조, 신앙고백의 일치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WCC 안에는 너무나 많은 각종 교파들과 상이한 각종 신앙조류가 흐르고 있어 신앙고백의 일치란 불가능하다.(교회의 일치성에 관하여는 연합의 원리를 참조할 것)
Ⅱ.교회의 구별(The Distinctions of the Church)
교회의 성격을 논함에 있어서 몇 가지 구별을 요한다.
1.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Church)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를 일명 유형 교회와 무형 교회라고도 한다. 이 구분은 어거스틴 때부터 나타나기는 하였으나, 마틴 루터에 의하여 처음으로 분명하게 발표되었으며, 또한 존 칼빈에 의하여 그의 신학에서 구체화되었다.
에릭슨(Erickson)은 “루터는 이러한 구분(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을 통하여 성경에서 펼쳐 보여주고 있는 교회… 지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교회의 특성들간의 뚜렷한 차이점들을 설명하였다.”25)
가견적 교회는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 즉 신자들의 공동체 또는 회중, 총회(community, congregation or assembly)를 가리킨다. 가견적 교회는 한 곳에 다 함께 모일 수 없으니만큼 지교회(개교회, local church)의 형태로 존재한다.
가견적 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거듭난 참 신자들이 다수이나, 참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들어 있다. 실제상 가견적 교회 안에는 누가 그리스도께 속한 참 신자이며, 누가 참 신자가 아닌가를 정확히 결정짓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신자들의 신앙고백과 신앙생활을 통하여 나타나는 외형적 열매로 판단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유형 교회는 동시에 불완전한 교회이다.
불가견적 교회는 전 세계에 편만해 있는 피택자들의 총 수를 말한다(고전 1:2; 벧전 1:2; 2:9).
벌콥(Berkhof)은 불가견적 교회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신자들과의 연합은 신비적 연합이다. 성령께서 보이지 않는 줄로 연합하신다. 중생·진정한 회심·참된 신앙·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 같은 구원의 축복들은 모두가 육신의 안목에는 무형적이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다 교회의 실제적 형태들로 구성한다”고 하였다.26)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무형적이나, 교회는 추상이 아니므로 외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무형 교회는 자연히 유형적인 형체를 취한다. 이는 마치 사람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되고 그 육체를 통하여 그 자체를 표현함과 같이 무형 교회는 단순히 영혼들로 구성되지 않고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재로 구성되어 유형적 형체로 나타남과 같다.
그러나 성경에서 “교회”라고 언급할 때 대부분은 유형적 교회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 16:18)라고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유형적 실체를 가리킨다. 마태복음 18:17의 권징에 관하여 “교회에 말하고”라고 말씀하실 때 교회는 그 내용이 전달되어야 하는 회중으로 인식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좀더 구체적 진술은 일정한 지역에 있는 교회들, 예를 들면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있는 교회(행 8:1; 11:26 …), 에베소에 있는 교회(행 20:17, 28), 고린도에 있는 교회(고전1:2; 고후 1:1),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살전 1:1) 등은 모두 공간을 점령한 유형적 교회를 가리킨다.
2.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
(The Church as an Organization and as an Institution)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체와 조직체로 아울러 말한다.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유형 교회의 상이한 두 방면이다.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유기체란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조직된 모든 지체들의 기능들로 구성된 사람의 몸이다”라고 하였다.27)
국어 대사전에 의하면 “유기체는 일정한 생활 목적에 따르는 생활 기능을 가진 조직체 곧 동식물 따위 … 많은 부분이 일정한 목적아래 통일, 조직되어 그 각 부분과 전체가 필연적 관계를 가진 것”이라고 하였다.28) 다시 말하면 “유기체는 서로 의지하며 생명에 필수적인 특별한 작용들을 행하는 상이한 기관들이나 부분들로 구성된 몸이다. 유기체는 식물·동물·또는 사람의 신체같이 살아 있는 그 무엇이다.”29)
①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체로 말한다. 유형(가견적)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성도들이 지체가 되어 몸을 이룬 산 영적 유기체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우리가…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전 12:13). 이 말씀들은 교회를 산 사람(living person)의 몸과 같은 것으로 말하여 그것의 유기체임을 밝혀준다.
②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인 조직체로 말한다. 조직체는 조직된 단체를 말한다. 조직체는 그것의 직원들·관리인들·구성원들이 공통된 목적으로 함께 일하는 단체로 개인들이 체계적으로 연합한 것이다. 조직체는 비록 산 존재들로 구성될지라도 그 자체가 산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도 교회를 성전, 집 또는 거대한 건물에 비유하여 조직체로 말씀하였다(엡 2:20-22; 벧전 2:4-7).
교회는 유기체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조직체가 필요하다. 교회는 유기체 안에 있는 각종 은사들과 재능들이 조직체를 통하여 주(主)의 사역에 사용되어야 한다.
3. 전투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The Church Militant and the Church Triumphant)
전투적 교회는 현세적 지상 교회요, 승리적 교회는 천상의 교회이다.
성경은 현세 지상 교회(地上敎會)를 전투적 교회로(militant church), 성도들을 십자가의 군병들(soldiers)로,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성전(holy war)으로 묘사하였다. 성경은 믿는 일을 전쟁으로 비유하였다. 현세에서의 교회는 거룩한 전투에 소집령을 받고 현실적으로 그 전투에 참여하고 있다. “교회는 기도와 묵상에만 시간을 사용할 것도 아니요, 영적 은혜의 평화적 향락으로만 만족할 것도 아니라, 주의 전투에 종사하여 공격과 방어로 싸워야 한다.”30)
선한 싸움(holy war or good fight)이란 무엇인가?
(1) “선한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고린도전서, 10: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혈과 육”(하이마 카이 쌀카, ai`ma kai sarka, Blood and flesh; 피와 살)은 피와 살로써 우리의 몸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은 사람을 치고 밟고 하는 몸싸움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한다”고 하였다(고후 10: 3)
(2) 선한 싸움은 육신의 부패성과의 싸움이다.
육신의 부패성이란 우리 몸 안에 내재하여 있는 죄의 성질을 말한다(롬 3:12, 23; 5:12; 7:5, 14, 18; 갈 5:16, 17, 19; 6:8, 12). 죄의 성질을 일명 육신의 정욕 또는 육신의 소욕이라고 하였다(벧후 2:18; 요일 2:16). 우리 인간 안에 내재하여 있는 죄의 성질ㆍ죄성은 악성이다.
육신의 부패성, 죄의 성질에서 나오는 죄의 항목들은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5:19-20과 갈라디아서 5:19-21에 기록된 항목들은 모두 죄의 성질, 육신의 부패성에서 나오는 죄들이다. 육신의 부패성과 “싸운다”는 말씀은 팔레(palh; a wrestling, struggle, fight, combat; 씨름ㆍ분투ㆍ싸움ㆍ공격)로써 씨름하는 사람들이 씨름하듯이 죄의 성질에서 나오는 죄들을 하나씩 하나씩 또는 동시다발적으로 씨름하여 고군분투하여 싸워 이기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간한 신앙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 ‘싸운다’는 단어는 현재 명령형이다. 헬라어 문법에서 현재 시상은 현재와 현재 진행형을 다 포함한다. 따라서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말씀은 선한 싸움을 중단함 없이 계속 싸우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휴전이 없다. 이 세상 떠날 때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은 계속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 속에 죄의 성질이 없는 사람 어디 있는가? 육신의 부패성에서 나오는 죄들; 우상숭배·호색·원수 맺는 것·분쟁·시기·질투·분노·당을 짓는 것·교만·원망…. 그런 죄들을 씨름 선수가 씨름하듯이 싸워 이겨야 한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나가야 한다. 더욱 자신을 이기고, 더욱 성도가 서로 사랑하며, 관용하며, 불쌍히 여기며, 더욱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과 진리를 세워나가도록 해야 한다.
(3) 선한 싸움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이다.
에베소서 6:12,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니라” 하늘에 있는 타락한 천사들 곧 사단의 무리들인 악령들 곧 마귀와 귀신들을 가리킨다(막 5:9; 요일 2:13) 본절에 ‘하늘’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천국이 아니라 공중을 가리킨다. 사단과 그의 무리들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교만하여 타락되었음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천국에서 좇아내었다. 사단과 그의 무리들은 공중으로 쫓겨난 이후부터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 되었다.
악령들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육체적 질병을 주기도 하며, 사람들을 불신앙의 길로 유혹하기도 하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하나님을 반역하게도 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거나 또는 타락시킨다. 오늘날 교회를 타락시키는 소위 열린 예배도 악령의 역사이다.
(4) 선한 싸움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의 싸움이다.
에베소서 6:12,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란 악의 세력들, 불의의 세력들들 가리킨다. 옛날 애굽의 바로, 바벨론, 앗수르, 로마제국, 중세시대 천주교의 박해, 히틀러, 공산주의 독재자들(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등등). 지금의 이슬람 과격파 등등.
(5) 선한 싸움은 신앙의 원수들과 그들의 사상·이론·활동과의 싸움이다.
고린도후서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유다서 1: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의는 불의와 같이 할 수 없고 빛이 어두움과 사귈수 없고, 그리스도는 사단과 같이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정통 보수 교회 성도들은 신앙적으로 길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신앙생활을 같이 할 수 없다.
자유주의자들의 에큐메니칼 운동, 신오순절주의자들의 현대 방언과 신유의 은사, 신복음주의자들의 타협주의ㆍ관용주의ㆍ포용주의ㆍ타락된 예배(열린 예배)…, 등을 찬동하는 사람들과는 길을 같이 갈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는 그들의 길과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바른 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 정통 보수 신앙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한, 성경을 믿는, 성별된, 전투적, 그러면서도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순종하는 교회이다.
Ⅲ. 참교회의 표시들
(The Marks of True Church)
만일 교회(교파, 교단)가 하나뿐이고 그 교회가 성경을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소유하고, 정통 복음진리를 전파, 수호하는 보수 근본주의 교회라면 어느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여부를 규명할 필요성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들이 많이 있으나 그들 중 상당수의 교회(교파)들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기 때문에 어느 교회가 참 교회인지 거짓된 교회인지 그 진실 여부를 가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약 120년이 좀 지났지만(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 선교사 내외 입국, 1866년 9월 2일 토마스 목사 입국, 순교) 오늘날 한국 교계는 장로교(70이상), 감리교(4), 성결교(2), 침례교(5), 오순절 교파(8), 그리스도의 교회(3), 구세군, 복음 교회, 루터교, 나사렛교, 성공회, 구교(천주교)와 기타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통일교 등의 각종 이단들이 있다.
이 교회들 중에는 보수 근본주의 교회들, 신복음주의 교회들, 신비주의 교회들(오순절 교단들) 그리고 이단들이 다 들어 있다.
자유주의 교회들은 자유주의 교회들의 연합단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아세아지역교회협의회”(CCA), 그리고 전 세계 자유주의 교회들의 연합체인 “세계교회협의회”(WCC) 등에 정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으며, 그들은 신앙고백이 일치하지 않는 교회들이 세속적·기구적·조직적 일치 운동(연합 운동, Ecumenical Movement)을 주장하고 있다.
신복음주의 교회들은 보수교회라고 자칭하면서 배교와 불신앙에 대하여 전투적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으며, 신앙고백이 일치하지 않는 교회들과의 혼합전도를 지향하고 있다.
신오순절주의 교회들은 비성경적 현대방언, 신유의 은사 등을 주장하고 있다. 천주교를 비롯한 온갖 이단들의 활동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성도들은 참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위한 의무일 뿐 아니라, 특권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는 처음부터 배교와 불신앙 그리고 이단 사설들로 인하여 많은 신앙적 손상을 입어 왔을 뿐만 아니라 핍박도 많이 받았다. 유대인 공의회는 선지자들을 핍박하여 죽였고 마침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초대교회들은 외부로부터의 핍박과 내부로부터의 신론과 기독론을 중심으로 한 이단사설이 횡횡하여 신앙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중세 유럽 교회는 조직적으로는 천주교로 단일화 되었으나 교권이 득세하여 신앙적·교리적 오류와 과오를 범하게 되었다. 근대에 이르러는 인본주의에 기초한 자유주의자들이 득세하여 교회를 세속화시켜 왔으며, 반면에 감정적인 면을 고조하는 신비주의도 득세하여 우리의 신앙을 파괴하고 있다. 겸하여 온갖 이단 집단들까지 우리의 신앙을 파괴하고 있다. 그러기에 참 교회 여부를 규명하는 일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면 어떤 교회가 참 교회인가?
(1) 말씀의 진정한 선포(The True Proclamation of the Word of God)
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선포되는 교회이다. 말씀의 진정한 선포는 종교개혁자들이 가장 중요시하고 강조한 대목이다. 이 시대는 더욱 그러하다. 말씀 선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구속사역이다. 말씀이 바로 선포되는 교회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말씀이 바로 선포되는 교회는 구원의 기관으로 사명을 감당한다. 어느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바로 선포하는 교회인가는 참 교회, 올바른 교회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표준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무결하게 선포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비록 그것이 우리의 소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 지상에서는 불가능하다. 다만 상대적 의미에서 말씀의 순수성과 정통성이 선포되면 그 교회는 참 교회라고 할 것이다. 참 교회는 말씀을 바로 전파·변호·수호한다. 말씀이 바로 선포되기 위해서 말씀을 문자적·문법적·역사적(전통성) 해석에 근거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변질·왜곡 또는 부정되거나 행함이 신앙에 근거하지 않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다.
(2) 성례의 정당한 거행(The Right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참 교회는 성례(세례와 성찬)가 바로 시행되는 교회이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참된 교회의 두 번째 표시는 성례의 정당한 거행이었다. 말씀이 바로 선포되는 교회는 성례를 바로 거행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성례는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는 곳에 성례들이 속화되지 않는다. 성례는 말씀으로 받은 은혜의 외적 표와 인(sign and seal)이므로 말씀과 성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이다(고전 10:16-17, 21; 11:23-29). 따라서 우리는 천주교의 화체설, 루터교의 공재설, 쥬윙글리의 상징설 등을 반대하고, 칼빈의 영적임재설을 주장한다.
(3) 권징의 성실한 시행(The Faithful Exercise of Discipline)
참 교회는 권징이 바로 시행되는 교회이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참된 교회의 세 번째 표시는 권징의 성실한 시행이었다. 신자들은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하는 신앙의 표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하는 도덕적, 윤리적 행위의 표준도 있어야 한다. 물론 신자들의 도덕적·윤리적 행위의 표준은 신앙과 교리에 근거해야 하며, 신앙과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야 한다. 그런데 지상 교회는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도덕 윤리적ㆍ신앙적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자들 가운데는 육신의 연약함이나 환경의 지배, 사단의 시험과 유혹 등으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범하는 때가 있으니 권징이 필요하다.
권징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나 필요한 일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권징의 목적에 대하여 기술하기를, “교회의 권징(징계, church censures)은 범죄하는 형제들을 바로 잡아 돌이키게 하며, 다른 형제들의 범죄를 저지하며, 덩어리 전체를 해칠 누룩을 제거하며, 그리스도의 명예와 복음의 고백을 변호하며, 교회에 임할지 모를 하나님의 진노를 막기 위하여 필요하다”라고 하였다.31) 권징은 교회의 순수성을 보전하기 위하여 절대 필요하다.
어느 시대, 어느 교파, 어느 교회도 권징을 시행함에 있어서 등한시하거나 또는 그것을 남용·오용할 때는 세속화 또는 성별(聖別)을 위한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에 계시된 권징의 원리와 각기 교회가 정한 권징조례에 의하여 권징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징을 강조한다(행 20:28-30; 고전 5:13; 갈 6:1; 엡 5:6, 11; 살전 5:14; 살후 3:14-15; 딤전 1:20, 5:20; 딛 1:10-11, 3:10; 계 2:14, 15, 20). 오늘날 다수의 세속화된 교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슬로건만을 내걸고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고 권징을 시행치 않음으로써 교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타락될 수밖에 없다.
(4) 배교와 불신앙에 대한 전투적 입장(Militant Position against
Apostacy and Unbelief)
개혁주의 신학자들 다수는 참 교회의 표시를 논할 때 말씀의 진정한 전파, 성례의 정당한 거행, 권징의 성실한 시행만을 거론한다. 그러나 말세지말의 참 교회의 표시는 위의 참 교회의 표시들과 더불어 배교와 불신앙에 대한 전투적 입장을 취하는 교회이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을 변호, 수호하기 위하여 전투적 입장을 취하여야 한다. 그러나 금일의 다수의 교회들은 불행하게도 배교와 불신앙에 대한 전투적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다. 배교와 불신앙에 대항하여 전투적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기존 신앙마저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보전하기 위하여, 복음을 수호하기 위하여 신앙적 전투에 개입해야 한다.
(5) 참 예배(True Worship)를 드리는 교회
(제8장 예배-예배의 본질. 예배의 대상. 예배자의 자세 참조할 것)
참교회의 표시들에 대한 신앙고백서들
(Confessional Witness to the Marks of the True Church)
아우구스벅 신앙고백서(Augsburg Confession, 1530)
제7조,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교회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교회는 복음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성례가 그 복음에 따라서 올바르게 거행되는 성도들의 회합(assembly)이다.”
제네바교회 신앙고백서(The Geneva Confession, 1636)
제118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올바르게 구별하기 위한 적절한 표시는 그의 거룩한 복음이 순수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전파되며·선포되며·받아지며·지켜지는 교회, 성례가 적절하게 거행되는 교회이다 …”
불란서 신앙고백서(The French Confession of Faith, 1559)
제27조, “우리는 어느 교회가 참 교회인가를 조심히 그리고 세심히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참된 교회라는 명칭이 많이 남용(오용·악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회는 그의 말씀과 그 말씀이 가르치는 순수한 종교에 순종하는 일에 하나가 된 신실한 회합체라고 말한다 …”
제28조, “…그러므로 우리는 교황의 집회들을 정죄한다.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이 추방되었고, 그들의 성례전은 부패되었거나 거짓된 것으로 변했거나 파괴되었으며, 모든 미신들과 우상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
벨기에 신앙고백서(The Belgie Confession, 1561)
제29조, “…참된 교회를 인식하기 위한 표시는 다음과 같다. 만일 교회가 순수한 복음의 교리를 설교하고 있는지,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대로 순수한 성례전을 지속하고 있는지, 교회의 권징이 죄를 벌하기 위하여 바로 시행되는지, 모든 것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이러한 표시로써 참된 교회를 확실히 알게 된다…”
Ⅳ. 교회 정치의 형태
(Forms of Church Government)
교회사를 고찰해 보면 교회(교파)마다 어떤 일정한 정치 형태가 있어서 교회를 다스려 왔으며, 그와 같은 교회 정치 형태들은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성경에 근거한 정치 형태들이다. 그러면 성경에는 어떠한 교회 정치 형태들이 암시 또는 제시되었으며, 교회들은 어떠한 정치 형태를 택하여 교회를 다스려 왔는가? 교회 정치 형태들은 일반적으로 감독정치·장로정치·회중정치·무교회정치 등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교회들은 이 정치 형태들 중 어느 하나를 택하여 교회를 다스려 왔다. 교회들은 각기 선택한 정치 형태가 그 교회로서는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상기 교회 정치 형태들을 개별적으로 고찰하고 과연 어떤 교회 정치 형태가 가장 성경적이고 이상적인가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1. 장로정치(Presbyterial Government)
장로회 정치란 교회를 대표하는 장로들에 의하여 다스리는 정치를 말한다. 그런데 장로교에서 교회를 대표하는 장로는 강도와 치리를 겸한 장로(목사)와 치리 장로(장로)로 구성되어 있다. 강도와 치리를 겸한 장로를 목사라 하고, 치리 장로를 장로라 한다.
장로정치는 A.D. 1645년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에서 인준한 의회 민주정치로서 장로교회들, 개혁 교회들, 초기 플리못 형제 교회들(Plymouth Brethren Church)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영국과 미국의 정치 제도는 장로 정치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32) 장로정치는 감독들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감독정치도 아니요, 반면에 회중들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회중정치도 아니다. 장로정치는 감독제를 억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회원들 전체에 의한 치리를 배척한다. 장로정치는 노회가 파송한 목사와 교회가 선출한 장로들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일종의 대표 기구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정치이다.
장로교 정치 구조는 개교회ㆍ노회ㆍ총회 등으로 조직되어 있다. 그리고 당회ㆍ노회ㆍ총회는 모두 치리기관이다.
(1) 개교회 당회(Session of local church)
개교회(local church)는 일정한 지역의 성도들로 구성된 유형적ㆍ조직적 교회를 말한다. 그리고 개교회를 감독하고 다스리는 교회의 대표 기구를 당회(session)라 한다. 당회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어 있으며, 당회장은 원칙적으로 목사가 맡는다. 목사는 교훈과 치리를 겸한 영적 지도자이므로 목사가 당회장이 되는 것은 성경의 원리이며 교회의 유익을 위한 합리적인 규례이다.
(2) 당회의 권한과 임무(Authorities and duties of session)
① 교인들의 신앙과 행위를 감독한다. 당회원들은 그리스도의 권위와 명령에 순종하여 사명감을 가지고 섬기는 자의 자세로, 즐거운 마음으로 교인들의 신앙과 행위를 감독한다(살전 5:12, 13). 장로들은 영혼의 감독자들이다. “감독자”(evpi,skopoj; overseer, bishop, guardian, superintendent; 감독관·보호자·관리자·사관)는 높은 망대에 올라가 졸지 않고 주의 깊게 경계하는 자이다.
② 교인들의 입회와 퇴회에 관한 사무 일체를 관리한다. 신입(새로 등록하는 교인), 전입(타교회로부터), 전출(이명 혹은 이전) 등 전체 교인들의 출입동향과 학습·입교·세례 등 신분에 관하여 신앙적으로 그리고 행정적으로 관리한다.
③ 장로와 집사를 임직한다. 당회는 성경원리, 장로교 정치 문답조례, 교회 헌법 등에 의거하여 장로와 집사를 임직한다. 당회는 장로와 집사의 자격이 구비되고, 맡은 직분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들을 택하여 임직해야 한다(딤전 3:1-13; 행 6:3-8).
현대 많은 교회들이 개인의 학벌·사회적 지위와 명성ㆍ인물ㆍ물질 등에 치중하여 직분을 맡기는 것은 인본주의적 처사이며, 이로 인하여 직분을 맡는 자신과 교회에 막대한 신앙적 피해를 가져오는 실례들이 수없이 많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위반하는 죄이다.
④ 각 기관을 감독하고 신령한 유익을 도모한다. 각 교회는 대소에 따라 여러 기관들이 있다. 당회는 각 기관들(주일학교ㆍ유치부ㆍ유년부ㆍ초등부ㆍ중등부ㆍ청소년부ㆍ청년부ㆍ장년부ㆍ전도회ㆍ선교회ㆍ성가대ㆍ제직회ㆍ당회ㆍ교회 부설기관 등)을 총 감독하고 신령적 유익을 도모한다. 감독은 각 기관의 자율적 활동을 제재함이 아니라 지도ㆍ계몽ㆍ선도한다.
⑤ 예배와 성례를 주관한다. 예배는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난 신자가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 신앙고백, 뜻과 정성이 담긴 헌신, 감사의 예물들을 통하여 존귀와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며 봉사하는 행위이다. 성례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그리고 거룩한 예식이다. 성례는 세례와 성찬을 포함한다. 당회는 예배와 성례를 주관한다.
⑥ 대내외 교회 업무를 관할한다. 개척교회 설립 및 보조, 선교사 파송 등 대내외 교회 업무를 총 관할한다.
⑦ 권징을 시행한다. 권징은 범죄한 자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하는 데 그 의의와 목적이 있다. 갈라디아서 6:1에서는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셨다.
권징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이유는 자신들도 다 불완전하고 부족한 자들로서 범죄자를 상대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당회는 범죄자들을 대할 때에 그의 영을 사랑하는 마음과 형제의 짐을 같이 지는 정신과 자신도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을까 하여 삼가 조심하며 교훈과 경계를 받으며 권징을 시행해야 한다.
⑧ 노회에 총대를 파송한다. 당회는 교회를 대표하여 장로들을 노회에 파송한다. 당회가 노회에 총대를 파송할 때에는 윤번제로 파송하는 것이 좋다. 어떤 특정인들만이 총대로 계속 파송되면 교권주의가 배양될 우려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금 한국 교계의 상황은 일부 교권주의자들만이 노회 또는 총회의 총대로 계속 나아가므로 교권주의의 부식, 교회의 타락과 부패가 만연하게 되었다. 노회나 총회의 건의 안건의 성격에 따라 그 문제 해결을 위한 적격자, 전문가를 총대로 파송하는 것도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절대 필요하다.
⑨ 노회에 청원 한다. 개 교회 자체적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나 해결할 수 없는 치리건 또는 소송건 같은 문제들의 해결을 위하여, 또는 공동적으로 할 일들에 관하여 당회는 노회에 청원할 일들이 있다.
2. 감독정치(Episcopal Government)
감독정치란 감독들에 의하여 교회가 다스림을 받는 정치를 가리킨다. 감독이란 헬라어 “에피스코포스”(evpi,skopoj; an overseer; 감독자)에서 인출된 직분상 명칭이다. 감독정치는 교회의 권위를 어떤 사람이나 또는 직위에 집중 귀속시킨다. 감독정치는 교회의 권위가 최고의 직위에 있는 사람이나 직위에 집중되어 있고, 직분에는 계급이 있어서 교회를 다스린다. 이와 같은 감독정치는 피라밋(pyramid) 형태의 정치구조이다.
감독정치는 주로 천주교·헬라정교·영국교회(성공회)·감리교, 그리고 감독정치의 배경을 가진 상당수의 교회 등에서 채택·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감독정치를 시행하는 교파마다 최고 권위자의 권위에 차이가 있다. 천주교 교황의 권위는 절대적이며, 헬라 정교의 대주교와 성공회의 대주교의 권위는 천주교의 교황보다 덜 절대적이며, 감리교의 대감독은 정교나 성공회의 대주교의 권위보다 덜 절대적이다.
(1) 천주교(Roman Catholic)
천주교의 정치적 구조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여 교황(Pope)→추기경들(Cardinals)→대주교들(교구장들, Archibishops/ Patriarchs)→주교들(감독들, Bishops)→신부들(Priests)→집사들(Deacons)→평신도(Lay People), 수녀들(Sisters<Nuns>)→형제들(Brothers) 등으로 조직되어 있다.
“교황”은 유형교회(visible church)의 머리로서 사도적 계승자라고 주장한다. 특히 사도들 중 수(首)사도인 베드로의 후계자로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라고 한다. 그들은 마태복음 16:17 이하의 교회의 열쇠를 교황이 부여받은 것으로 해석한다. 교황은 추기경에 의하여 추대되나, 추기경들은 교황이 임명한다. 교황의 권위는 절대적이며 임기는 종신직이다.
“주교”는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한 교구의 으뜸이며, 지방교회들의 구심점이 된다. 주교는 교황의 임명으로 다른 주교에 의하여 서품 되고, 견진성사(세례)의 집권자이며, 신품성사(사제직의 임명)의 수여자이고, 고백성사(죄 회개) 규율의 통제자이다.
“사제”는 주교를 도와 교구의 일정지역을 담당하여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을 돌보며, 하나님께 미사(예배)를 집전한다.
(2) 성공회(Anglican Church/ Episcopal Church)
영국에서는 영국 국교를 앵글리칸 교회(Anglican Church)라고 부르며 다른 나라들에서는 이 교회들을 성공회(Episcopal Church)라고 부른다. 성공회의 정치적 구조는 대주교를 정점으로 대주교(archibishop)→감독들(bishops)→사제들(priests, clergy-pastors)→집사들(deacons, leaders; 남녀) 등으로 되어 있다. 감독들은 사제들을 임명하고, 사제들의 목회지를 배치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또한 감독들은 관할 교구 내의 치리권을 행사한다. 그러나 사제들은 설교와 성례 집례 등 일반적인 임무들을 수행하나 임명권이 없다.
3. 회중정치(Congregational Government)
회중정치는 회중이 주체가 되어 교회를 다스리는 정치를 가리킨다. 회중정치는 개교회(local church)의 법적 권위를 위로는 교회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께와 아래로는 개교회 회중에게 둔다. 따라서 교회 회원들 자신들이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회중정치는 실제상 회중이 권한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어떠한 사람이나 상부 조직 단체의 행정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엄격한 의미에서 행정적 측면에서는 교역자들도 평신도들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
회중정치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머리가 없으므로 어떠한 문제도 상회로 고소하는 상소권이 없다. 여하한 토의 결의 사항도 모든 회중들이 일인 일표의 투표권이 있어 결정한다. 각 교회는 교회의 직원 선출·신앙고백서 작성· 예배 의식·재판 등에 관하여 스스로 자유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서로 연합하는 연합 공의회, 지방 협의회 같은 협동 기구들의 결의사항들은 어디까지나 선언적·조언적이므로 구속력은 없다. 회중교회는 독립적이며 자치적이다.
회중교회는 두 종류의 항존직(고정적)이 있으니 곧 목사와 집사이다. 목사 청빙과 퇴임문제도 회중이 결정한다. 집사직은 봉사직이며 동시에 집사들은 회중을 감독한다. 회중정치를 채택·시행하는 교회들은 회중교회, 침례교, 많은 독립교회들 그리고 일부 루터교 등이다.
회중정치가 바람직하지 않음은 초대교회부터 감독, 장로, 집사 등의 직분상 구별이 있어 왔으며, 직분에 따라서 권한과 임무를 수행해 왔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장로들을 임명하였으며(행 14:28), 디도에게도 동일한 일을 하도록 지시하였다(딛 1:5). 그리고 각 교회들이 행해야 할 일들에 관하여 각 교회 회중들에게 위임하거나 또는 그들과 협의하여 결정한 것이 아니라 명령하였다. 소아시아 7교회에 보낸 사도 요한의 서신들도 각 교회의 사자들(아마도 치리 장로들)에게 권면한 내용들이다
출처 :개혁주의 신앙동지회(R.P.F) 원문보기▶ 글쓴이 : 나랑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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