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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심방, 권위

까망쑤나 2011. 6. 3. 18:35

주여, 이 땅에 평화를.../ 목회자의 심방, 권위
2002-12-27 10:41:49   read : 2396

주여, 이 땅에 평화를...


▲/로이터 뉴시스
성탄절을 맞아 파키스탄 동부 라호르에서 교회에 괴한들이 수류탄을 투척해 3명이 숨지고 최소 10명이 부상한 데 이어 26일에도 테러가 발생, 3명의 소녀가 숨졌다.

이번 사고는 지난 26일 펀잡州의 라호르시에서 북서쪽으로 110km 떨어진 다스카 인근 교회에서 발생했다.

이 테러로 인해 3명의 소녀가 숨지고, 14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이중 3명은 목숨이 위독한 상황이다. 이번 사고는 두명의 무장괴한이 예배를 드리던 교회에 폭탄을 투척해 발생했다.

이 사고의 피해 가족들과 3명의 소녀의 유족들이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모습.

이영선 기자 yslee@ch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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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 치료하는 심방

오성춘

교역자는 심리 상담자나 정신과 의사들이 가질 수 없는 독특한 기회를 가진다. 여러 가지 전문 직업인들 중에서 교역자들만이 아무 때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심방할 수 있는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환자가 아무리 병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의사는 그 환자가 병원을 찾아와 치료를 부탁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치과의사가 집집마다 방문하여 치 통을 앓고 있는 사람이 없는가 하고 묻는다면, 이것은 직업 윤리상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변호사의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가 먼저 변호사에게 연락하여 약속하지 않으면 변호사는 어떠한 도움도 제공할 수 없다. 그러나 목사는 어떠한 초대가 필요 없이 가정을 심방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사가 심방 해주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심방을 해주지 않으면 오히려 무시 받고 있다고 느낀다.
모든 전문인들 가운데서 오직 교역자들만이 도덕적 확신과 신앙 전통에 따라서 봉사 의 대가를 받지 않는 유일한 직책이다. 고대 에큐메니칼회의 가운데 하나인 칼케돈회 의는 어떤 성직자도 사업이나 또는 세상적인 직업에 종사할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이 결정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떤 대가를 기초로 하는 전문인들과 교역자들을 철저히 구별시키고 있다. 교역자는 교인들의 자유로운 헌금이나 교회의 지원 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고난 당하는 자를 심방 하여 봉사하는 대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자유로이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찾아가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교인들은 자기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에는 언제든지 자기들의 영적인 안녕을 위하여 방문해 달라는 백지 초대장을 교역자들에게 발송해 놓고 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자기들에게 위기가 닥쳐 올 때에 교역자가 방문하여 도움을 베풀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가 안수를 받아 구별하여 세움을 받을 때에 그는 가정을 방문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보고, 어려움에 처한 자를 돌아보아 적절한

때에 영적인 조언을 제공하도록 위임을 받은 것이다.
심방에는 많은 은총과 인내와 위탁이 요구된다. 신실한 목사는 소문나지 않게 조용히 가난한 자들의 주거지와 환자의 병상과 고독한 우울증 환자와 알콜중독자와 고통스러운 문제로 씨름하는 신실한 자에게 기꺼이 찾아가며, 슬퍼하는 자를 찾아 희망을 주며, 죽어 가는 자를 찾아 그에게 안식을 제공한다. 목사가 자신의 교역을 바로 하고 있는지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빈틈없는 보살핌에 의해서이다(디모데후서4:5).
목사는 심방을 통해서만 교인들의 열망과 갈증과 도전들을 배울 수 있으며, 교인들의 현실적인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희망과 두려움에 깊숙이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심방을 통해 목사는 교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인간 문제의 밑바닥에 들어가서 적절한 도움과 격려를 제공하며 교인들의 욕구와 갈등과 욕망에 도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심방의 의미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백성을 찾아오사 구원하셨듯이(누가복음1:68)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대신하여 도움이 필요한 교인들을 방문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나누어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친히 육신을 입어 인격을 가 진 한 인간으로 우리를 찾아오셨듯이 우리도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 특히 절실한 필요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우리의 목자 장이신 예수님께서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도록 찾아다니듯이 목사들도 안전한 양떼들을 두고 위험에 직면한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마태복음18:12). 사람들을 심방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인간 심방의 모델을 따라 잃은 양을 찾으며, 죄를 구속하며 고통을 치료하는 교역의 한가지 방법이다.
심방 또는 방문을 의미하는 단어는 히브리어 파카드, 헬라어로 에피스코페오 , 라틴어로 비지따레인데 이 단어들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시험하여 검토하고 증명하다.
(2)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자세히 미루어 살피다.
전통적인 목회심방은 이 두 가지 요소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즉 목사는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 하여 그들이 신앙 안에서 성장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검토하며, 현재의 신앙 상태와 가정의 문제들을 자세히 살피어 그에 합당한 하나님의 은총을 전달한다.
마태복음 25장 36절은 이러한 심방의 뜻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준다.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 구절에 나오는 두개의 동사, 돌아보았고와 와서 보았느니라는 심방자가 먼저 솔선하여 행동을 취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안디옥 인근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수일 후에 바나바에게 말

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 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사도행전15:36)라고 말하였다. 목사의 직책은 그 어의대로 양떼와의 단순한 만남만이 아니라 계속적인 감독과 양육을 포함하는 목양 적 업무이다. 양과 목자의 비유는 깊은 참여 관계를 시사한다. 목자는 조심스럽게, 그 리고 지속적으로, 때로는 밤을 세워 양떼를 지켜보며,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목자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솔선하여 양떼를 돌보며 지키며, 그들과 고난을 함께 하는 참여의 관계를 통해서만 온전히 그 사명을 다할 수 이으며, 목사의 심방은 바로 이러한 의미의 사역을 말한다.
목사라는 칭호의 어의와 직책의 정체성이 바로 심방을 전제로 하는 목양의 은유에서 왔다. 양떼는 위험한 세상에 연약한 모습을 노출시킨 채로 흩어져 있다. 양떼들은 목자 와 함께 있을 때에만 강도와 이리로부터 보호받고 신선한 물가로 인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양떼를 버린 목자들에게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를 취할지니라. 보라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 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화 있을진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스가랴11:15-16).

심방의 모델 예수
하나님이 인간 역사를 방문하셨다는 성경의 중심주제는 예수님의 교역(ministry) 가운데서 기념비적으로 절정에 달한다. 누가복음은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백성을 찾아오사 구속하셨다고 기록한다(누가복음1:68). 예수님의 사역 그 자체가 인간을 찾아와 고난 당하는 자와 함께 있으면서 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심방의 역사이다. 우리는 그분이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살펴봄으로써 목회심 방에 관하여 우리가 알아야할 중요한 부분들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의 대부분은 사람들과 인격적으로 만나 직접적인 대인관계를 가지면서 행하였다. 예수님은 상처받고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만나 직접적인 대인관계를 통하여 사역하셨다. 예수님은 상처받고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만나 어떤 때는 간단하여, 어떤 때는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바로 이러한 개인적인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동트기 시작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태복음11:3)하고 묻는 세례요한의 제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너희가 가서 보고들은 것을 요한 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증거의 사건들 하나 하나는 예수님과 그들의 인격적 만남 가운데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 이제 예수님의 구원의 사건들을 몇 가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1)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셨다.
니고데모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질문(요한복음3:1-9), 사마리아 여인의 죄책의 문제( 요한복음4:1-42),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마태복음8:5-12),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요한복음4:47-50),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죽음(누가복음7:11), 가나안 여인의 귀신들린 딸의 문제(마태복음15:21-28), 음행한 여인의 문제(요한복음8:2-11) 등은 본인이나 또 는 그의 대리인(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 이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 대화하는 가운데서 해결을 얻었다. 부도덕한 생활패턴, 질병, 귀신들림, 죄책감, 영생에 대한 질문, 죽음의 문제 등 인간의 전반적인 문제들이 에수님과 만나 대화하는 가운데서 해결되었다.

(2) 예수님의 병고침의 사건들은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데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데까지 나가고 있다. 고침을 받은 문둥병 자(마가복음1:40-45), 여리고성의 소경 거지 마디매오(마가복음10:46-52), 날 때부터 소경된 예루살렘의 거지(요한복음9장1절 이하), 한 편 손 마른 사람(마태복음12:9-14), 38년된 병자(요한복음5:5-15)등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병을 고칠 뿐 아니라 새로 운 신앙의 삶으로 들어가고 있다.

(3) 예수님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 여러 마을들을 방문하시는데, 부자든 가난한 자든, 학식 있는 자든, 무식한 자든, 그의 말을 듣고자 하는 자들을 방문하였다. 그는 온갖 계층, 온갖 배경과 형편의 사람들을 구별하지 않고 찾으셨다. 예수님은 사두개인 (마태복음22:23-33), 바리새인(마태복음12:2-6), 헤롯당원(마태복음22:15-22), 로마인( 누가복음7:2), 열심당원(누가복음6:15), 세리의 집(누가복음19:1-10) 등을 구별하지 않고 방문하셨다.

(4) 예수님은 바닷가(마가복음4:1), 우물가(요한복음4:6), 길가(마가복음10:46), 장 터(마태복음20:3), 세관(마태복음9:9), 성전(마태복음26:55) 등 사람들이 일하거나 생활하는 일상적인 활동 장소에서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있다. 그리고 가정이라고 하는 인간의 삶의 중심지에서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있다. 세리 레위의집(누가복음5:29), 가나의 혼인잔치 집(요한복음2:1-12), 바리새인의 집(누가복음7:36-50; 14:1-24),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누가복음10:38-42), 문둥이 시몬의 집(마태복음26:6) 등은 예수님께 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구원하는 중요한 장이 되고 있다.

예수님은 가정과 활동장소에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도 울뿐 아니라, 그들의 삶의 관절과 골수에까지 뚫고 들어가 그들의 우상숭배를 노출시키고,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생생한 의식을 일깨워 하나님께서 지금 그 순간 그들 가운 데 살아서 일하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영혼을 깊이 들여다 보시고 그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시며, 그들의 심령의 아픔과 부르짖음을 경청하시고 회개와 신앙으로 그들을 부르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방 모델은 우리에게 중요한 심방의 요소들을 가르쳐준다.

예수님의 심방의 요소들
예수님의 심방은 오늘 모든 교역자들이 본받아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심방의 요소들을 암시하고 있다.
(1) 예수님은 인간의 전인적인 삶에 관심을 가지셨다. 예수님이 찾아가서 만난 사람 들 가운데는 영적인 문제라고 부를 수 있는 문제 때문에 고난 당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의 질병, 귀신들림, 소경, 문둥병, 귀머거리, 삶의 문제 등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며 예수님은 이러한 육체적인 문제들을 만나실 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문제에 참여하셔서 구원하시고 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을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분(마태복음8:17)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삶의 문제 전반에 깊숙이 개입하셔서 그곳에 하나님의 권능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심방은 인간의 전인적인 삶의 모든 차원들을 하나도 간과함이 없이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 문제에 동참하여 하 나님의 구원을 드러내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죄에서의 구원뿐 아니라 구체적인 모든 삶의 문제들에서의 구원을 포괄해야 하는 것이며 심방은 이러한 포괄적인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나는 장이다.
(2) 예수님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구별하지 않고 만나셨고 찾으셨다. 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만나기를 꺼려하는 문둥병자를 만나주셨을 뿐 아니라 그 위에 손을 얹고 고쳐주셨으며(마가복음1:40-45), 사람들이 보기 싫어하는 소경의 눈을 마주 보고 그 의 눈을 고쳐 주셨으며(마가복음10:46-52), 경건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공식적으로 교제를 금지시킨 세리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고 마셨다. 예수님은 죄인, 창녀, 귀신들린 자, 병자, 가난한 자들을 구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바리새인, 사두개인, 헤롯 당원, 로마인, 열심당원들까지고 구별하지 않고 찾아가 만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과 다른 사람들도 만났으며, 돌에 맞아

죽어야할 죄인들도 만나셨고,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의 은총을 베푸셨다. 그러므로 목회심방은 자기나 관심을 갖고 있는 양떼들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계층과 정치적 장벽들과 경제적 이데올로기와 사회 적 신분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솔선하여 찾아가 도와야 할 것이다.
(3) 예수님은 가정심방에 중점을 둔 것은 사실이나 가정이라는 콘텍스트만을 고집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활동하고 움직이는 삶의 현장에서도 사람들을 만나 상담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했다. 예수님은 바닷가, 우물가, 길가, 장터, 세관, 성전 등 심각한 고민을 안고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그들을 도와주었다. 예수님은 어떤 때에는 공식적인 초청을 받고 심방 하였으나 대체로 장소나 형식에 매이지 않고 고난 당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디서든지 그와 대화를 나누며 치유하셨다.
이것은 목회심방이 계획적이어야 하나 형식을 뛰어 넘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은 어디든지 심방의 장소가 되어야 하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분의 구원을 선포해야 한다.
(4)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날 때에 먼저 사람들의 문제를 파악하고 그들의 문제에 따 라 구체적으로 응답하고 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하려는 근본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문제 에 대한 대처 방식은 언제나 구체적이었다. 즉 예수님은 먼저 사람들의 구체적인 상황 을 듣고 파악하는데는 힘썼으며, 그 상황에 합당하게 응답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 목회 심방에 중요한 도전을 제공한다. 오늘의 심방의 패턴은 주로 교역자가 미리 준비한 메시지를 예배를 통하여 먼저 전달하고 그후에 교인들과 교제의 대화를 나눈다. 목사가 아무리 심방하기 전에 그 교인의 문제를 바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 교인의 삶의 구체적인 상황과 심령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함께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불가능

하다.
그러므로 목사가 합당한 심방을 하기 위해서는 두가지의 준비가 필요하다. 첫째로는 대화의 기술(상담의 기술)을 먼저 익혀 어느 교인들과 만나든지 간에 그들과 대화를 통 해 그들의 마음에 공감적으로 참여하여 그들의 문제와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한 다. 아무리 유능한 의사라도 먼저 환자의 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올바른 처방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대화를 통하여 파악한 구체적인 상황과 문제와 마음에 합당한 적절한 말씀의 선택이다. 아무리 문제 파악을 잘하였다해도 그 문제에 합당한 말씀을 찾아낼 수 없다면 올바른 심방을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목사가 성경 말씀에 정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처럼(마태복음13:51-52) 천국의 서기관된 일꾼인 목사는 집주인이 창고에서 새것과 옛 것을 내어오듯이 신약과 구약 성경에서 자유로이 말씀을 내어 올 수 있을 정도를 말씀에 정통해야 한다. 그래야 문제를 파악했을 때에 곧바로 그에 합당하고 적절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

심방상담의 몇 가지 지침들
목회심방은 교인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인격적인 대화를 통하여 그들의 삶의 현장에 공감적으로 참여하고 그들을 고난 가운데서 건져내시는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리에 따라서 몇 가지 지침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1) 모든 심방은 구체적인 교인의 삶의 현장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 교인은 다른 교인과 다른 독특한 인격을 가진 교인이요, 특수한 상황가운데 있는 교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개인의 인격적인 독특성과 상황의 특수성에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문제와 감정이 있기 때문에 목사는 먼저 그의 독특성과 특수성을 인식하고 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그의 심령에 귀를 기울여 듣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먼저 들음이 없이 말씀을 전하거나 처방을 내리는 것은 지극히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그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목회대화는 교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정도로 충분히 간접적으로, 그리고 교인에게 충분한 자유를 허용하면서 나눠야 한다. 그러나 그에게 충분히 친밀감을 보이며, 깊은 영향을 줄만큼 직접적이어야 한다. 목사는 그 교인에게 가까워 그의 영적 성장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 교인이 깨닫게 해야한다. 그러나 동시에 목사는 교인을 간섭하는 정도로 지나치게 직접성을 가질 때에는 그 교인의 인격성을 침해하는 잘못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3) 목회심방은 제사장적인 위로의 대화이어야 하지만 목사의 예언자적인 과제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훌륭한 목사는 도전하고 깨우치는 일도 진실한 사랑의 한 부분임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교인들과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위로나 격려만이 능사인 것처럼 행하는 목회심방은 진실한 사랑을 온전히 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죄를 짓고서 뉘우치며 회개하는 교인에게는 위로와 격려와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할 것이요 그러

나 죄를 짓고도 그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줄 모르며,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교인들을 깨우쳐 주며 죄를 지적하고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의 전제조건은 그 교인과 목사가 먼저 친밀한 인격적 관계형성이다. 그 교인이 저 목사는 나를 위한다는 인식이 든 후에 도전의 사랑을 전달해야 한다.
(4) 목사가 심방 하는 것은 교회로부터 위탁받은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교회를 대표한 권한과 권위를 가지고 교인을 만날 것이요, 목사 개인의 능력과 성향과 권위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목사는 지교회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 목사의 안수가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명자로서의 권위와 사명부여라면 목사는 전체교 회로부터 사명을 위임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심방은 목사 자신을 포함해서 전체 교회와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 그 교인을 염려하고 돌보고 있음을 전달하는 것이어야 한 다.
(5) 목회대화는 친밀한 교제의 대화이어야 한다. 심방은 목사와 교인간의 친밀한 인격적인 대화요,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공감의 대화요, 상호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랑의 나눔이다. 그러나 목회대화가 여기에서 머물러 더 이상의 진전이 없다면 그것은 인간들끼리의 사교적인 대화로 끝나고 말 것이다. 교인과 목사와의 인간적인 관계 발전에는 도움을 줄 것이나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인 목회대화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친밀한 교제의 대화를 통하여 그 교인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발견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6) 목회대화는 폴 틸리히가 말하는 궁극적인 목표와 예비적인 목표를 같이 달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간들은 누구나 자기의 현실적인 삶의 문제와 그로 말미암아 발생한 고난에서 구원받기를 원한다. 이러한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은 육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 경제적 또는 사회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예비적인 문제로 오는 고 난에서

교인을 구원해 내는 것은 심방의 중대한 목표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비적인 문제와 고난은 그 속에 궁극적인 질문을 내포하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영적인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교인들의 구체적 인 삶의 문제에 참여하여 그들의 예비적인 문제를 도와 나가면서 그들과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 회복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심방의 실제
(1) 목사는 철저한 심방의 계획을 작성하여 그 계획에 따라 실행해야 한다.
(2) 그러나 목사는 항상 성령님께 자신을 개방하여 성령님의 인도하는 대로 어느 가정 을 심방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따를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3) 심방한 후에 간단히 그 결과를 기록하고 그 교인의 영적 성장에 대한 의견서를 그 교인에게 보내는 것이 좋다.
(4) 목사는 교인 사정을 알되 절대로 비밀을 보장하여 그 교인의 허락 없이 교인의 사정을 발설해서는 안된다.
(5) 시간 조정을 잘 하여 심방만 하는 목사가 되거나 연구와 다른 활동만 하는 목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6) 심방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할 것이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교인들을 돌볼 것이 다.
(7) 목사는 교인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배려할 것이다.
(8) 어떤 심방은 말보다도 함께 함이 더 중요할 것이다. 말의 힘을 너무 신뢰하지 말고 함께 함의 능력을 살릴 수 있어야 한다.
(9) 교인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그 교인의 도덕적인 욕구가 무엇인지 파악하여 응답할 것이다.
(10) 중보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가정식구들의 필요에 따라 응답하는 기도를 드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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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홍정길

우리는 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껏 전통적으로 숭상되던 모든 것이 일시에 그 기존의 권위를 잃어버리는 세태이다.
대통령이 자기 가방을 들고 다니며 원탁에서 각료들과 와이셔츠 바람으로 회의하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을 줄 정도로 색다른 것이었다. 권위주의 청산이란 명제는 6공화국의 과제였다. 그러나 권위의 붕괴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으로 새로운 영향을 야기시켰다. 노사분규의 현장에서 회사 사장은 노동자들에게 붙잡혀 토기뜀을 뛰어야 했고 학원가에서 교수들은 머리를 깎여야 하는 몰인정한 사회로 변모하는 모습을 본다.
계층간에 한번 대립이 생기면 도무지 화해시킬 세력이 없다. 우리에게 원로가 없다고 다들 한탄한다. 이 말은 곧 권위 있는 인격이 없다는 뜻이다.

막스 베버가 말하는 세가지 권위
국가의 권위에 대해서 막스 베버(Max Weber)는 3가지로 분류해서 말하였다. 첫번째는 전통이 주는 권위이다. 봉건 왕조 시대에 왕족이나 귀족들은 세습적으로, 그 지위와 권위를 물려받는 것이 전통이었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 일본이나 태국같은 경우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인데 일본의 국왕은 은거하면서 동식물 채집이나 하면서 살고 있지만 정신적인 지주로 계속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군부의 투쟁 속에서 태국 왕은 구데타를 막고 현정권을 뒷받침해 주는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본다. 또 왕조가 사라진 지금,우리나라에서 노인을 숭상한다든지 부모를 공경 하는 것은 전통이 주는 권위로 인한 현상이다.
두번째의 권위는 카리스마의 권위이다. 이것은 사회나 전통 혹은 문화가 아닌 신으로부터 오는 종교적인 권위이 다. 오늘날 이란의 종교지도자 호메이니는 옛날. 마호멧 만큼이나 민중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에게는 신적인기원과 능력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인식되어져,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래서 세계 도처의 건국신화마다 그 국가 지도자의 신적출현을 신화로써 미화시키고 깊이 숭배하는 것을 본다. 이런 신화가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투쟁이나 지혜에 있어서 보통사람의 한계를 넘는다는 생각이 유포될 때, 카리스마적인 권위는 생기게 된다. 이 권위는 유신정권 때부터 여러가지 박해에도 불구하고 투쟁해 온 영남지역의 K씨나 호남권의 K 씨가 카리스마적 존재로 인정을 받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법적인 권위가 있다. 그것은 그 법이 합법적으로 여러 사람에게 공인이 된 헌법이나, 또 제반 법칙들, 또는 결의들이 주는 권위이다.
쿠데타는 합법성을 파기했기 때문에 쿠데타로 집권한 정부는 정통성이 없는 정부라 하여 그 권위를 인정하여 주지 아니한다. 그 비극은 5공화국이 집권할 동안 계속 문제로 남아 있었고 결국에는 물러나야만 했고 또 집권자들은 심판을 받아야만 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볼 수 있다. 당회나 제직회에서 자유롭게 다수결로, 한 안건을 결정 했을 때, 그 결정사항은 정통성을 인정받으며 집행자는 권위를 갖게 된다. 심지어 운동경기에서도 심판이 가진 권위는 그 경기의 법칙으로 수호되고 있다. 이와같은 세가지 권위 중에서 기독교의 권위는 카리스마적 권위에 해당된 다고 할 수 있다.

권위의 기원이신 하나님
그러면 성경에서는 귄위란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권위는 영어로 Authority인데 잠언 29장 2절에서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Authority)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아 권세란 말과 권위란 말이 혼용되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민14:17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욥26:12 그는 권능으로 바다를 흉용케 하시며 이 구절로 보아 권세와 권능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는 exouia라는 말이 권세, 권위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 말은 신적 기원을 갖고 있으며 합법성도 띤 권능을 뜻한다.
어떤 경우에든 궁극적으로 권세는 창조주이신 우리 하나님께 있다. 어거스틴(Augustin)은 하나님은 신앙과 도덕의 궁극의 권위이시다라고 하였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권위이며,인간에 대해 마지막이자 유일한 권위라고 고백되어진다.
마틴 로이드 죤스(Martyn Lloyd Jones)는 그의 저서 권위(Authority)에서 권위의 문제야말로 우리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말하면서 오늘날 전 세계를 통하여 기독교회가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교회가 그 권위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로마카톨릭교회가 권위문제에 있어서 도전받지 않으며, 힘을 지닐 수 있는 비결은 자기 나름대로의 전통의 권위를 가졌다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또 이와는 정반대편에 있는 오순절교파의 성공 역시 같은 원인, 즉 권위에 있다. 왜냐하면 그 운동 안에는 일종의 확신 즉 일종의 권위적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단종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로이드 죤스는 말한다.
그는 위에서 말한 교회의 여러 분파들에 맞서는 복음주의 입장에서 성경이 제시하는 권위 즉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 기원을 두는 권위를 세가지로 고찰하였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이다.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계시라는 커다란 주제에 따라 연구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위대한 중심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였다. 히브리서 1장 2절에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하였다.
기독교의 권위는 이 예수에게서 출발한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일반종교는 그 경전만으로 존립할 수 있으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person)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기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최상의 유일의 권위이시다.
둘째, 성경은 성경의 권위를 말한다. 우리는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에 있어 유일한 법칙으로 받아들인다. 교회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세째는 성령의 권위이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님의 절대주권을 우리는 단지 내적 광명이나 감동적인 영향력 정도로만 낮게 평가하려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느니라.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성경의 권위, 성령의 권위는 교회가 추구해야 할 삼대(三大)권위라고 생각한다.

성경이 말하는 권위들
그러면 교회 안에서 교회의 제도가 주는 권위는 없는가 또 교회 안에서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정직한 신앙인의 태도인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문제이다.
물론 우리는 성경말씀의 권위가 절대적이고 어떤 제도가 그 말씀의 권위와 함께 서 있다면, 그 말씀의 권위 만큼 이나 그것의 귄위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은 그러한 자리에 서야 한다. 우리는 권위주의 청산의 시대에 살면서 교회 안에 주께서 주신 직분의 권위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하는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은 권위가 존중되어야만 하는 관계를 여러 장에서 강조하였다.
가령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세가지 종류의 권위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에 있어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했다. 두번째로 부모의 권위에 자녀들은 순종하라고 말씀한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처럼 사도는 한 자녀를 양육하기 위한 권위가 아버지에게 있으며 부모가 합당한 원리 하에 권위를 행사할 때, 자녀들이 사랑으로 순종해야함을 강조한다.
세번째는 주종관계이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이 주종관계는 하늘에 계시는 상전과의 관계를 근거로 하기에 종은 상전을 섬김에 있어 언제나 주께 충성하는 입장이어야 한다. 또한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권세들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자들의 복종은 세상의 권세잡은 자들에 대한 복종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타락한 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는 위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유다서는 기록하고 있다. 유다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람들의 잘못은 불순종하며 말을 듣지 않고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 것이다.

성경이 부여한 영적인 권위
그러면 성경이 우리의 영적 지도자, 양의 목자들에게 허락하신 영적 귄위는 어떠한 것인가.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말씀은 히브리서 13장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 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자녀들이 어떤 부모를 만났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신앙이 결정되어지고 학생이 어느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평생 전공하는 학문이 정해지는 것과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신앙의 영적 지도자를 만나느냐, 또 그 지도자와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달라진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지도자와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좋은 지도자를 만나서 인간적으로 좋은 관계 때문에 한없이 그의 신앙이 잘 자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지도자와의 잘못된 인간관계 때문에 신앙생활마저도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두 부류의 지도자가 있을 수 있다. 과거에 말씀을 가르치고 바로 인도하던 지도자였으나 이미 이세상을 타계한 지도자가 있고, 지금 현재 섬기고 있는 교회의지도자가 있다.
요 근래에는 과거의 유산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그 잔재를 부정하는 것이 영웅시되는 시대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믿음의 사람들은 과거의 교훈을 멸시하지 말고 영적인 유산을 받아서 계승하라고 말한다. 지금의 우리는 나 스스로, 나 혼자의 힘으로 자란 것이 아니라 기독교 2천년의 전통 속에서 오늘 여기에서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 없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혁명이라는 말이다. 기독교에 혁명은 없다. 다만 개혁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신앙인은 과거의 귀한 유산을 헛되이 버리지 말고 아름답게 받아서 간직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일이 없는 거짓된 권위를 교회가 고집해서는 안된다. 가령 예를 들다면 목사는 제사장의 신분이 아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신 바이다. 모든 제사장은 예수님으로 끝이 났다. 목사는 제사장이 했던 몇가지 일들 가운데 형태적으로 비슷한 일들을 수행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므로 목사에게는 제사장적인 축복 권이 없다. 교회를 대표해서 하나님앞에 기도를 드리는 일은 있지만 옛날에 제사장이 가졌던 축복권은 없다. 성경 적이 아닌 것은 배재해야 된다. 그러나 아울러 우리가 또 배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통치체제에 불법적으로 도전하는것, 이것은 더 악한 일이라는 것을 상기하여야 한다.
요즘 학원에서 소요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스승을 폭력과 멸시로 대하는 아픈 모습을 보게 된다. 데모로 인해 건물과 집기가 불에 탄 것이야 다시 세우고 페인트칠을 새로 하면 되지만, 한번 무시되고 멸시된 스승의 이름은 회복할 길이 없다. 이것은 가장 영광스럽고도 중요한 만남을 가장 더럽고 추한 모습으로 마주쳐 버린 사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그 원인이야 어떻든 그 현상에 대해서 우리가 심히 가슴 아파해야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설득과 양보
스승을 만나는 것은 운명이라는 말이 있다. 영적인 지도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운명이라는 말 보 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을 쓴다. 하나님의 섭리로 만난 이 만남을 어떻게 하면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가장 복되고 아름답게 관계를 지속시켜 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를 향한 깊은 교훈의 말씀이 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유익이 없다는 말은 완곡법으로 상당히 부드럽게 표현한 것인데 사실은 강한 뜻, 너희에게 무서운 저주가 된다는 뜻이 있는 단어이다. 지금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함께 교회를 섬기고 있는 지도자,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아직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지도자들을 성도들이 어떻게 섬겨야 하는 지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고 우리를 인도하는 자들이 인간적으로 부족함을 갖고 있고 연륜의 짧음이 드러날 때, 마음에 순종이 안될 수 있다. 권위에 순복하고 싶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순종과 복종의 자세여야 한다. 순종이라는 말의 뜻은 설득되어 진다는 뜻이다. 그 사람이 설명하는 것에 설득 되어져서 그에게 동의하는 것이순종이다. 복종은 양보한다는 뜻을 가졌다. 내 생각은 그의 의견과 같지 않고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나 그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의 교훈이 이전의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의 교훈과 같기 때문에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직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으나 그의 인격을 신뢰함으로 그에게 순종하고 따를 때 복종이라는 말을 쓴다.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다 아는 내용을 가르치고 이미 들었던 말씀을 줄 수 있다. 나보다 어린 나이이고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뒤에서 비난하는 대신에 그에게 순종하고 복종한다면 그것은 훌륭한 아량이며 성도의 깊은 유익이다.

권위자의 경성함
그러면 인도하는 자들이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혼을 위해 경성한다. 경성한다는 말은 깨어있다는 뜻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파수꾼이 잠을 자지 않음과 같은 뜻이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제일 어려운 것은 개인적으로,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밤중이나 새벽이라도 중환자실에서 연락이 오면 황급히 달려가야 하고,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입시의 중압감으로 쓰러지면 그곳에도 가서 기도해 주어야 한다. 또 어떤 때는 한밤중에 임종이 다급한 성도를 방문해서 아침이 되어서나 병원을 나서는 때도 있다. 무겁고 피곤한 걸음으로 심방을 하러 갈 때는 즐겁지 않을 수 있으나, 한 영혼 이 주님을 영접하고 평안하게 눈을 감는 모습을 보면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이러한 깨어 있음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자지 못함이 있다. 영혼이 잘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쉴 때 같이 쉴 수 없으며 다른 사 람들이 사는 똑같은 모습으로 살 수 없다. 영혼이 깨어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영혼이 침략을 당할까 영혼이 잘못된 길로 나갈까 영혼이 타락할까 잠을 자지 못한다. 이것이 목회자의 길이다. 목회자의길은 잠을 자지 못하는 길이다. 늘 긴장해 있어야 한다. 항상 신중해야 하며 대충, 쉽고 적당하게 넘어갈 수가 없다. 또 진실한 목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임무를 회계해야 한다. 계산을 해야 한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의 이윤을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네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므나를 남겼나이다.이렇게 회계할 날이 온다. 하나님 앞에서 보고해야 될 책임이 목자에게 있다. 하나님이 그를 세웠기 때문이다.

권위자의 선한 동기
성도가 목회자와의 인격적 교류 없이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했다. 성도들에게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이 근심이나 조심스러움으로 이 일을 하게 말고 즐거움으로 하나님 앞에 일하도록 도와주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순종하고 복종할 뿐 아니라 그들의 선한 양심과 동기를 인정해 주라고 한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그 당시 사도들이 선한 양심으로 선한 일을 하고자 하였으나 받아주지 않았다. 고린도교회가 사도바울을 인정하 려고 하지 않았으며, 갈라디아교회가 사도바울에 의해서 전도를 받았으나 바울을 배척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고린 도전서 2장 3절에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말했다. 그의 선한 의지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걱정하고 근심했다. 이런 경우가 있다. 목사의 설교를 듣고 상처를 받는 성도들이 종종 있는데 나에게 찾아와서 불평을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목사님 그 설교나 들으라고 하셨죠 묻는다. 물론 들으라고 했다고 대답한다.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 것은 성도들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지 듣지 말라고 설교하는 법은 없다.
만약에 목사가 설교를 잘못 전했거나 말씀을 틀리게 해석했다면 물론 목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목사가 말씀을 바로 전했는데도 내가 기분 나쁘다면, 둘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말씀 없어 살든지 그렇지 않으면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설혹 만에 하나 목사가 한 사람에게 감정이 있어서 그 구절을 강해했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 님의 말씀이면 받아야 한다. 그것이 성도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회자의 선한 동기를 의심하면 안된다. 사람들은 자기의 전문분야갸 침해당하는 것을 싫어하고 또 다른 사람의 전문성을 인정해 준다. 그런데 목회에는 전문가가 따로 없는 것 같다. 누구든지 목회에는 전문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듯이 말한다.
목회자가 선한 동기를 의심받을 때 목회자처럼 외로운 인생이 없다. 목회자에게 사법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행정권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목회자의 양심이 의심받으면 목회자는 설자리가 없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서 있는 한, 위대한 신앙의 전통 위에서 있는 한, 그들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선한 동기를 의심하는 대신에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한다.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방편은 기도이다.
연약한 인생이 목회자다. 성도의 기도가 목회자를 키울 수 있고, 또 만들 수 있다.
비록 유약하고 어리고 흠집 많은 지도자일지라도 성도는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한다. 그들은 성도들을 위해 자지 못하며 성도의 영광스러움을 같이 기뻐하며 성도의 슬픔과 타락을 같이 가슴아파 한다. 그들이 기쁨과 감격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성도에게 영적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신실한 교훈과 권고를 의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세우셨고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목회자를 주셨다. 마치 자식이 부모와 인격적인 접촉 없이 자랄 수 없는 것과 같이 목회자와의 인격적인 교제 없이 성도는 성장할 수 없다.

권위는 삶의 실증으로
이상의 성경말씀은 평신도들이 목회자들을 향하여 가질 태도이다. 여기에 비해 목회자가 스스로 이룩해야 할 권위와 또 그 권위있는 삶을 어떻게 계속적으로 영위해 나갈 것인가는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이다. 그 이유는 예배시간에 설교자가 어떤 내용의 설교를 하느냐보다 어떤 설교자가 설교를 하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강단에 서기 전에 이미 80%를 한 것과 다름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목회자가 참된 권위를 갖는 것은 소중하다.
어느 교회의 성도로부터 목회자에 대한 불평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 목사님은 거짓말하는 목사입니다. 사랑에 대한 설교는 많이 하지만, 목사 사례비, 사택, 자비, 생활비, 교육비, 개인운전수 생활비를 모두 합하면 부목사 사례비보다 열배가 넘는데도 부목사 사례비를 5만원 올려주자는 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 성도가 말한 목사님은 교계에서도 열심이 대단하시다고 인정받는 분이셨고, 보수적이라고 정평이 나있는 목사님이셨다. 그러나 그 교회 안에 같이 사는 성도들에게는 그의 사랑의 설교는 거짓이었고 그 분의 권위는 성도들이 기쁨으로 순종할 수 없는 외형적인 권위일 뿐이다.
이것은 목회자에게나 성도들에게 다같이 비극적인 관계이다.
목회자에게 있어야 할 권위는 성경이 말하는 범위 안에서의 권위여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의 편리함을 위해서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은, 세상적인 권위를 이입시킨 권위는 잘못된 권위이다.
특히 유교적 가부장제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쉽게 유교문화의 전통이 주는 권위 안에 안주하고 싶은 유혹이 크다. 오랫동안 군사독재 문화에서 여기까지 온 우리는 쉽게 교회를 독재로 이끌 수 있으나 사회자체가 민주화로 가고 있는 이 때 만약 목회자들이 성경에 기초를 두지 않은 권위를 주장한다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직분의 권위 마저 무시당할 때가 있을 것이다.


또 성경이 인정하는 권위라 하더라도 베드로사도의 말씀이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5:1-3)최대의 권위는 삶의 실증에 있다. 사역자의 삶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 위에서 있을때 진정한 권위가 생기게 된다. 목회자로서 성경이 말하는 사역 뿐 아니라 성도들과 공유하는 부분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전 영역이 주님의 말씀과 같이 서 있을 때 더욱 찬란함과 더욱 존귀함으로 상급을 주시겠다고 주님께서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땅에서 살 동안도 성도들 앞에 권위 있는 목회자로 세우실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늘 강조하신 말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자 된 것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는 이 말씀 이 삶으로 실증되어질 때 그 삶은 진실로 사역자로서 아름답고 권위 있는 인생이 될 것이다.
큰 광풍과 물결을 잠잠케 하신 우리 주님 앞에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잔잔케 하는고 하고 제자들이 놀란 것처럼 저가 뉘기에 황금우상의 유혹에서도 승리의 삶을 사는가 저가 뉘기에 세속에서 물들지 아니하고 저토록 거룩한 삶을 사는가 저가뉘기에 하늘의 거룩으로 이 땅에서 사는가 하고 놀라워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처럼 능력있는 삶을 살 때 이 땅의 성도들의 시선이 목회자에게 초점을 맞추어 성도들의 삶또한 신앙적으로 더욱 성숙하게 될 것이다.

목회와 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