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사실과 진실 표명(고후1:12-24)
1. 단편적 이해 - 바울은 표리부동한 인간이다? ①성경에 사용된 단어를 뒤집으면 그 말씀의 상황이 나온다. 고린도교우들은 바울이 ‘세상에서’ ‘교우들에게’ ‘거짓으로 행했다’고 비난한다. 특별히 문제가 된 것은 바울의 ‘정직함’과 ‘지혜’에 심각한 도전이다. 그들은 단순한 여행계획으로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으로 평가 절하한다. ②바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고린도교우들이 이렇게 적대감을 표출하는가? 바울은 여행 계획 변경으로 강한 비난을 받고 있다. 사소한 사건에서 본질을 흔든다. 지도력이란 세워지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지도력이 세워지려면 ‘눈물, 땀, 피’를 흘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작은 흠’이다. ③우리는 바울의 여행계획과 변경과정을 찾아보자. ❶바울은 고린도에서 선교활동을 한다.(행18:1-11) ❷바울은 마게도냐, 아가야(고린도), 예수살렘에 가기로 작정한다.(행19:21) ❸바울은 고린도교우들에게 편지로 방문 계획을 알려준다.(고전16:5-8) 고린도와 에베소교회가 안정되면 바울은 아시아 → 마게도냐 → 아가야 → 유대를 거쳐 철수하겠다고 작정한다. ❹고린도교회의 사정악화로 ‘근심으로’(고후2:1) 예정에 없던 고린도를 ‘불쑥’ 방문했다. ❺바울은 예정된 방문계획을 편지로 취소한다.(1:23, 2;4) ❻바울은 원래 계획대로 먼저 마게도냐로 갔다가 그 다음에 아가야로 가기로 했다. 고린도교우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방문계획대로가 아닌 오락가락이다. ④이미 고린도교우들은 바울의 단편적 사실, 그러나 종합적 판단으로 냉소적이다. 사건은 먼저 사실 규명을 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을 확정해야 내면을 말할 수 있다. 사실은 부분적으로 알 수는 있다. 그러나 제3자가 전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13-14) 고린도교우들이 ‘바울은 경솔하다’ ‘바울은 육체를 따라 계획했다’고 판단한다.(17) 고린도교우들은 바울을 짓밟아 버린다. 2. 바울의 자랑 - 하나님의 성품은 순수하고 투명하다. 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①[바울의 양심선언] 바울은 고린도교우들에게 ‘양심으로 증언’한다. 칸트는 양심을 내적 법정1) - 하나님의 법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의 양심에 사랑과 정의가 있고, 권위, 빛, 힘, 생명이 있다. 바울은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 한다. 엄청난 비난을 받는데 그래도 양심이 작동한다. 바울은 어떻게 심각한 도전에 예리한 이성과 풍부한 감성이 작용하나요? ②바울은 스스로 양심의 법정에 서서 고린도교우들에게 증언한다. 바울의 자랑은 그가 이 세상에 산다는 점이다. 이 세상은 유혹, 시험, 시련이 있는 곳이다. 현재 이 세상에 살아 있기에 고린도교우들에게 편지를 쓴다. 오해에 대한 바울의 해명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 빛이다.”(마5:13, 14)라고 하신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장소이며, 활동의 대상이다. 그런데 세상과 다른 사람이다. ③바울은 이 세상에 어떤 방식으로 사는가? 바울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플로테스’는 ‘거룩함’보다 ‘순결함, 솔직함, 정직함, 관대함’이 원뜻에 가깝다. ‘에릴리크리네이아’는 ‘순수함, 투명함’을 의미하는 단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바울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상향평준화하여 실천한다. ④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 양심의 행방불명이다.2) 인간에게 양심을 없애보라. 가장 추악하고 비참한 존재로 전락한다. 양심 없는 지식은 간지고, 양심 없는 힘은 폭력이고, 양심 없는 기술은 악의 뿌리다. 양심이라는 감시자가 없다면 인간은 추잡한 짐승이요, 흉악한 악마로 전락한다. 바울은 왜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라고 할까? 육체의 지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예’를 ‘아니오’로 둔갑하고, ‘진실’을 ‘거짓말’로 포장하고, 적당히 눈가림으로 일하면 된다. 신전의식이 전혀 없는 생각, 말, 행동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자랑이 무엇인가? ⑤바울은 육체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다스림, 인도하심, 보호하심, 공급하심으로 산다.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의 삶의 원동력, 활력이다. 그는 1 + ∞의 공식으로 목회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란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삶이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요8:32)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⑥바울의 해명은 “내가 너희에게 인간적 꼼수를 쓴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만약 육체의 지혜로 꼼수를 쓰면 참으로 부끄럽다. 지금 해명이 아닌 회개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도 이렇게 지성과 감성이 작용하는지 알 수 있다. 바울의 담대함은 어디서 나오나요? 바울의 자랑은 어디서 나오나요? 그의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고, 그의 양심이 바로 하나님의 법정이다. 고린도교우들은 냉담하지만, 바울은 편지를 쓰는 순간에도 훈훈하다. 3. 바울의 기대 -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13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①고린도교우들은 사도 바울을 얼마나 알까? 그들은 바울을 ‘대강’ 이해했다. 그들은 단순히 여행 계획을 읽고, 아는 정도로 발끈한다. 그것은 바울의 전부가 아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선택된 주제에 집중한다. 바울은 곁가지를 치지 않는다. 바울은 논쟁의 핵심을 정확하게 잡고 간다. 그간 서운했던 것을 늘어놓는 자리가 아니다. ②바울은 고린도교우들이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이라고 한다. 고린도교우들이 사소한 문제에 흔들리는 이유다. 그들이 모래 위에 지은 집인 원인이다. 바울은 선택과 집중이다. 한 가지를 선택하고 집중적으로 반복/되풀이 교육이다. 바울은 교우들에게 잡탕으로 다양한 공부가 아니다. 핵심을 완전히/확실히 알기를 바란다. 14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③바울은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정곡을 꼭 찍어서 지적한다. 교회는 누구를 집중적으로 알아야 할까? 교회는 지체이므로 몸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사람은 알아야 믿는다. 아는 만큼 믿는다. 핵심을 알아야 한다. ④고린도교우들이 바울을 비난하는 것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교우들이 바울을 완전히 알았다면 아마도 “매료”되었을 것이다. ‘보물’ 찾은 느낌이다. 바울은 교우들에게 “부분”에서 “전체”로, “단편”에서 “완전”히 알기를 바란다. 바울은 교우들이 알기를 갈망한다. 귀와 눈이 열려서 알기를 소망한다. ⑤바울의 집중/반복 교육은 성도들을 반석 위에 굳게 세우는 과정이다. 바울의 기대는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이다. 바울은 좋은 나무에 아름다운 열매가 주렁주렁 달릴 것을 바라보며 자랑한다. 바울은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그들이 바울을 알면 그들의 자랑이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다. 아름다운 나비 세상을 그리워한다. 고린도교우들은 바울의 자랑거리가 되었을까? 그리스도인은 변화와 성숙이다. 4. 하나님께 의존된 바울의 변덕 - 하나님께 신실함 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①바울의 확신이 무엇인가? 바울은 그들이 부분에서 완전히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을 확신한다. 지금은 표면적인 이해이지만 서로 내면적으로 이해할 날이 온다는 진실이다. 또 바울의 확신이 무엇인가? 그 날이 오면 바울이 고린도교우들을 자랑하는 날이 온다는 확신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우들이 사도 일행을 자랑스럽게 여길 날이 온다는 확신이다. ②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하려는 목적이 무엇인가? 바울은 고린도교우들과 만나는 기회를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함’라는 단어로 쓴다. 바울은 그것도 한 번이 아닌 두 번이나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고자 하였다. 바울이 여행을 하면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우선 고린도부터 갈 계획이었다. ③첫 번째 은혜는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다. 고린도인들에게 가장 큰 은혜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은혜는 그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서는 것이다. 믿음 안에 견고하게 서는 것이다. 이방인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과 생명관계가 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다. 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④바울의 여행 코스 : 고린도 ⇨ 마게도냐 ⇨ 고린도 ⇨ 유대였다. 바울은 현재 있는 곳(에베소)에서 마게도냐를 방문하는 길에 한 번 고린도에 갈 계획이다. 또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유대로 가는 길에 다시 고린도에 방문할 예정이다. 17a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⑤바울은 12절에서 어떤 사람인가? 그는 세속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바울의 수사의문문 :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그는 “내가 경망스럽게 계획하였다고 너희가 말하지 않겠지?”라는 의미다. 그는 수사의문문으로 자신의 신실성을 강력하게 표현한다. 17b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⑥바울은 12절에서 어떤 사람인가? 바울은 생각 없이 방문계획을 했다가 취소하는 것이 아니라고 다른 용어로 설명한다. 바울이 사용하는 육체는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인간의 욕심이다. 바울은 자신은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명한다. ⑦바울은 一口二言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는 오락가락이다. 이는 表裏不同이다. 예수님도 마5:37에서 마음과 말이 다른 것을 악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바울의 거짓 양심인가? 사람 사이에서 약속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변개된다면? 5.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시다. 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①바울은 이 논의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바울은 자신의 신뢰성의 근거를 하나님이라고 제시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 누가 신실한가? 하나님께서 一口二言하였느냐? 하나님은 언약에 충실한 분이시다. 바울은 세속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람이다. 바울이 이런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고린도교우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러지 않으시기에 一口二言하지 않는다.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②바울 일행은 고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분인가?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아니오”하였을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예”라고만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하고 기도하신다. 그때도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예”만 하셨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어떻게 하나?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복음의 본질이 바뀔 수 없는 것처럼 변덕스러울 수 없다. 바울은 온갖 오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신실하신 주님의 종의 길이다.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③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성취되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구원의 약속을 변개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다. 이런 신실하신 하나님께 “아멘”으로 화답하여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세다.
‘그리스도 안’은 우리들이 예수님의 구원 능력과 권위에 온전히 복종하는 관계다.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자로서 헌신한다. 바울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임을 드러낸다. 바울은 날마다 삶속에서 복음을 전한다. 당연히 복음에 영향을 받아야 한다. 고린도교우들은 바울의 신실함을 믿는 것이 마땅하다고 권면한다. 6. 삼위 하나님 - 견고함, 기름부음, 印치심, 성령의 보증 21a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①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하게 하셨다.” ‘견고’는 물건의 구매를 법적으로 인준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복음 전파자와 듣는 자에게 그 복음 안에서 반석 위에 견고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바울을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반석 위에 세우심을 안다. 21b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②둘째, 하나님은 사도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기름 부음으로 눈과 귀와 마음의 할례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게 되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선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예’의 복음에 ‘아멘’으로 응답하여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었다.(20) 그 원인은 무엇인가? 어떻게 ‘아멘’ 할 수 있을까? 바로 기름부음(Anointing)이다. 22a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③셋째, 하나님께서 바울과 그 일행을 인치셨다. ‘印친다’는 소유권자의 소유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내 것이다.’라는 증표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그 일행을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印 치심은 “예”의 역사에 보증이며 확증의 도장이다. 22b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④넷째, 하나님이 바울과 그 동역자들에게 ‘성령의 보증을 주셨다.’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주셔서 바울이 사도임을 증거한다. 바울의 사역 가운데 나타난 표적과 기사와 능력, 설교가 성령의 능력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증으로 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예”의 응답이다. 성령의 임재, 충만으로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예수님의 승천 이후 우리에 보내 주신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아멘”하게 한다. 7. 왜 바울은 자신의 고린도 방문계획을 변경했는가? 23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①바울은 지금까지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에서 ‘나’ - 개인으로 돌아온다. 바울이 여행 계획의 변경사유 설명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바울은 맹세 의식을 사용한다. 하나님에 대한 진술을 진지하게 하고, 하나님을 증인으로 맹세의식을 한다. 바울은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라고 하나님 법정에 선다. ②그는 왜 자신의 고린도 방문계획을 변경했는가? 바울의 목회적 관심을 본다. 고린도교우들은 몇 가지 오류에 빠져서 질퍽거린다. 고린도교회에 근심거리, 마음 아픈 상황이 생겨서 바울이 가면 언성을 높여야 한다. 교회 안에서 신학적 논쟁이 얼마나 유익할까? 바울은 많이 망설였을 것이다. 바울의 선택은 고린도교우를 아끼는 마음이다. 회초리를 들기에 아직 어려서인가? 바울은 이런 함정을 피해 가고 있다. 24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③바울의 사도직 이해가 잘 표현되어 있다. 사도는 교인들의 신앙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다. 바울은 탁월한 영적 지식을 소유하고, 신비한 체험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에게 명령할 수도 있다. 교회 창설자 지위에서 군림하면 위험하다. 진실은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일 뿐이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다. ④사도는 하나님과 교인들의 일꾼, 봉사자다. 교회에서 으뜸인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다. 예수님 공동체는 섬기는 리더십니다. 그런데 지도자라고 교회를 지배하거나 주관하면 하나님과 관계 위기다. 사도 바울은 교인들의 기쁨을 돕는 자다. 성도들에게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다.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바울은 예수님의 리더십에 충실한 아름다운 제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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