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일생
1. 바울의 성장 과정
A. 출 생
사도행전 22장 3절에 바울은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하였다. 연대는 주후 1년경이라고 한다.( The Life and Letters of St. Paul, p.22; 도양술저.
[사도바울의 신학].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p.21.)
다소는 역사적인 도시였다. 주전 800년경 앗수리아의 샬만넷셀이 정복한 도시 중에 다소의 이름이 기술된 것을 보면 매우 일찍이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 같다.( Wiliam Barclay. The Mind of St. Paul. 서기간역. {바울의 인간과 사상}, 서울: 기독교문사, p.18.)
다소는 길리기아에 있으며 다소 중심으로 흐르는 시드너스강은 지중해와 다소 중간에서
넓은 호수 "레그마" 호를 이루고 있다. 다소 사람들은 호수 기슭에 배들이 정착할 수 있는 선착장을 건조하여 지중해를 항해하는 배들을 이곳으로 정착하도록 했으며 그뿐 아니라
그들은 길리기아 내륙지방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어 가바도기아와 갈라디아 대륙과도 빈번한 왕래가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다소는 대륙과 해상의 교통을 연결하는 동서교통의 요충지이며 무역이 활발하였다. 또한 다소는 학문의 도시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많은 학자들이 있어 다른 도시에 비하여 학구열이 컸었다. 특히 "스도이고" 학파 철학자들로 유명하였다. 그러므로 다소에는 "스도아" 철학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컸고, 그들의 사상적 영향은 일반시민에게 까지 미쳤다.
감수성이 예민한 바울은 이러한 학문적 풍토속에서 넓은 시야로 인류의 세계를 보았으며 세계의 끝까지 진출하려는 꿈을 키웠을 것이라고 본다. 그는 유대주의나 율법에 국한된 사고를 벗어나 당시 세계를 풍미했던 "노스틱" 철학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후에 그가
선교활동을 하기 전 다소에 머물러있을 때 이러한 사상과 기독교 내지는 유대교의 사상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자기 출생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가 예루살렘에서 잡혔을 때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행 21:39)고 하였다. 이런 곳에서 자라난 바울의
설교도 매우 도시적이어서 농촌적인 예수의 것과 비교가 된다.
( 바울의 설교;
① 도시건축 (고전3:11) ② 군대의 행진 (고후10:3-5, 고전14:8)
③ 노예 시장 광경 (고전6:20, 7:23) ④ 체육장의 형편(고전9:24-25)
예수님의 설교;
① 포도나무의 비유(요15:1-5) ②씨뿌리는 비유(마13:18-23)
③무화과 나무의 비유 (마24:32-33) ④ 목자와 양의 비유(요10:14-1527-28))
B. 가 족
빌립보서 3장 5절에 바울은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라고 하였다.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에서 출생한 그의 집안에 대하여는 알려진바가
거의 없지만 "제롬" 이 전해준 전승에 보면 바울의 부모는 본래 갈릴리의 마을인 "기사랄" 에서 로마군이 팔레스타인을 폐허로 만들 때 다소로 피난했다고 한다. 그는 로마 시민으로 태어날 수 있을 정도로 부요한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베냐민 지파의 혈통을 가졌고, 그 이름을 사울이라 함은 베냐민 지파에서 출생한 최초의
왕인 사울을 따라서 명명한 듯 하다. 바울은 이와 같이 부요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후에는 다 분토와 같이 버리고, 셋집에 유하며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행 28:30-31) 특히 바울의 생질은 유대인 40명이 결사대를 조직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할 때에 그는 바울을 도와 구원하였다.(행 23:16-24)
바울이 다소에서 얻은 로마 시민권은 그가 전도 여행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런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을 수 있는 조건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자들은 자기 영토 내에 거주민을 크게 두 부류로 구별하였다. ① 이탈리아의 원주민을 위시하여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로마에 공을 세운 자, ② 금전 또는 정복민과 함께 온 노예들이다. 전자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해서 특수한 인권과 권리를 허락하였다. 이것이 어떤 명예나 지위는 아니라 하더라도 로마법에는 그들에게 체포, 구금, 매질이나, 십자가에 처형할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전도여행 중에 반대자들에 의하여 빌립보 옥중에 투옥되었을 때,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자임을 밝히자 즉시 석방되었고(행 22:24-30), 예루살렘에서는 유대인의 난동으로 가이사랴에서 구금되었을 때, 억울함을 황제에게 호소하여 정당한 재판을 받기 위해 고소했던 것이다.(행 25:9-12) 고대 세계에서는 로마 시민은 영예스러운 칭호였으며 땅 끝까지 통하는 완전 통행증 이었다. 바울은
그러한 시민권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또 그것을 자랑하였다. ( William, Barclay, The Mind of St. Paul. 서기간역, [바울의 인간과 사상], 서울: 기독교문사, p.30.)
C. 교 육
바울의 가정은 대표적인 바리새인의 가정으로 엄격한 가정교육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유대 법으로는 다섯 살이 되면 성경 공부를 시작하고, 열 살이 되면 율법 전승들을 공부해야
한다고 규정짓고 있다. 바울도 이 규례를 따라 다섯 살 때부터 성경을 배웠으며 열 살 때에 유대교의 중요한 문헌들을 암송하였으며 또한 천막 만드는 기술도 함께 익히게 되었다.
유대교의 사상은 생각과 행동을 함께 할 수 있는 교육 지표를 갖고 있다. 이러한 유대교육의 목표를 본다할지라도, 이념과 실천 즉 생활 교육의 병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이 선교사역 과정에서 학창 시절의 직업교육은 그의 선교생활에 크게 기여했던 것을 잘 알 수 있다. (행 18:3, 살후 3:8) 바울은 율법을 더 배우기 위해 "가말리엘"에게 보내졌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자기 내력을 이야기한 것을 보면(행 22:3), 예루살렘에 오랫동안 거주한 것으로 말했다.
그가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바울의 스승은 아들 "시몬 가말리엘"이 아니고 그의 아버지인 "가말리엘 1세"였다. 그는 베냐민 출신으로 바리새주의자의 거두였고, 특히 그는 개종자에게 후대함으로 그 이름이 높아졌다.( 전경연외, [신약성서신학]. 서울:대한기독교서회, p.171.)
바울은 고향을 떠나 유대 예루살렘에서 율법교리의 교육을 엄하게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행22:3; 빌3:5-6; 갈1:14.)
이것만 보아도 바울은 완전한 교육을 받은 율법자이며 인정 받은 법관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항상 자기 자신을 뛰어난 유대인임을 자랑하였다. 바울을 출생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빌 3:5) 즉 그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표시로서 선민의 표시를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이라는 것과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선택받은 민족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로마서 11장 1절에서도 재삼 강조하였다. 또한 바울은 혈통적으로 볼 때 단순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그는 이스라엘의 귀족이었다. 또한 그는 바리새인이었다. 즉 그는 충실한 유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별된 사람"중에 한사람었다.(갈 1:15)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으며 율법을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 한 자이다. 오직 율법에 따라 살고 사고하는 것이 그의 생활이었다. 비록 그가 헬라문화권에 살고있었지만 일반 "디아스포라"처럼 헬라리즘에 동화되지는 않았다.( William Barclay. The Mind of St.Paul 박문재역. [바울신학개론]. 서울:크리스찬 다이제스트. pp.14,16.)
D. 성 격
바울의 성격은 강직하고 열정적이었다. 그가 노한즉 추상같고 평시에는 온화한 봄날같았다 한다. 이런 성격은 회심 전이나 회심 후에나 변치않았다. 회심 전에는 이런 성격으로 기독교인을 박해했고, 회심 후에는 또한 이런 성격으로 전도하였다. 그는 이런 성격으로 회심 전에는 스데반을 박해하였고, 또한 회심 후에는 베드로를 면책하였다.(행 8:1,갈 2:12) 그리고 교회 안의 교인이라도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거짓 사도요","저주를 받은 자들이요","개"들이니 삼가하라고 했다.( 고후11:413-15; 갈1:8; 빌3:2.)
이런 일은 그의 성격이 악해서가 아니라 열정적이고, 강직한 데서 오는 것이다. 이 강직한 성격과 인격은 결국 십자가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 바울의 힘있는 말한마디 한마디는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서 유대인의 죄를 회개시키고, 이방인의 마음을 감화시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였다. 그이 이 강직한 성격은 전도 여행시 당한 많은 박해와 환난을 이길수 있었다. 그가 말한바와 같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죽인 것을 몸에 질머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니라,"(고후 4:8-10) 바울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예수의 생명이 그 몸에 있어서 넘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희랍인 이상으로 조직적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같은 치밀한 조직이나, 로마서와 같은 당당한 논설은 도저히 그시대사람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과 사랑을 소유하고 있었다. 자신을 가리켜 "죄인의 괴수" "사도중에 지극히 작은자라" 또한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하였으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였다.( 딤전1:15; 고전15:913:13; 롬8:39; 고전15:31.)
결국 그에게는 풍부한 지, 정, 의가 믿음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 훌륭한 사도로서 신학자도 되고, 전도자가 되어, 동서남북으로 좇아다니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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