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예루살렘 교회(사도행전 1-12장을 중심으로)
남전우 GMTC 교수
들어가는 말
역사적으로 지상 최초의 지역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이다.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역사적 관점에서의 예루살렘 교회를 추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의 기록은 사도행전에 남아 있다. 사도행전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지만 사건 전부를 역사적 관점에서 기록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선택적인 자료들을 정제한 것으로 특별한 관점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해석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도행전이 기술한 예루살렘 교회는 영속적으로 지역 교회의 모범과 모델이 된다.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를 이스라엘 공동체의 연속선상에서 탄생한 것으로 이해한다. 모세가 이끌던 광야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예루살렘 교회의 모형이다. 누가는 스데반의 입을 통하여 이스라엘 공동체를 광야 교회라고 불렀다(행7:38). 그리고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의 원형을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찾고 있다. 실제로 예루살렘 교회의 기반이 되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동체의 구성원들이었다. 그러기에 모세와 이스라엘 공동체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공동체에서의 본질적인 요소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나타나는 본질적인 요소들과 일치한다.
동시에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가 이스라엘의 유대주의를 극복하여가는 과정을 서술한다. 특수주의에서 보편주의로 가는 불연속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전과 율법에 대한 재해석이 그러하다. 하나님은 장소에 제한 받지 않고 어느 곳에서나 계시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의 울타리를 넘어선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히브리파 유대인들로 제한되었고 그들 가운데 세워진 지도력은 사도들이다. 사도들의 임무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방에서 교회를 시작하는 일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더해짐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헬라파 지도력을 창출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명은 유대인 교회의 부흥과 더불어 이방 선교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서 보여주는 예루살렘 교회는 우리에게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인 선교를 준비하고 수행하는 과정은 우리에게 교회가 어떻게 선교를 준비하고 역할을 감당해야 할지를 보여준다. 본 소고는 선교라는 주제를 중심적인 관점으로 놓고 사도행전 전반부의 내용을 고찰하여 교회의 선교적 원리들을 제시해 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I. 예루살렘 교회의 배경과 출발(행1:1-2:47)
AD 1세기 당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유대인의 인구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여 적게는 50만에서 많게는 100만 정도로 추산하고 팔레스타인 밖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수는 본토 유대인 수의 5배 정도로 본다. 그럴 때 예루살렘의 거주 인구는 10만에서 30만 정도로 추산한다. 당시의 예루살렘은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의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중심지였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대망의 중심지였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은 부활과 최후의 심판이 일어날 성지로 여겨졌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이 현존한다고 여기는 성전이 있었다. 성전에서 제의와 기도가 드려졌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뿐 아니라 로마세계에 흩어져 사는 모든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의 종교적 구심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인들에게서 난 것이지만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받았고 이방인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누가는 이점을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의 선교에 있어서 등식화 시키고 있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교와 대립적이거나 배타적인 관계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교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누가는 설명한다. 만민을 위한 이스라엘의 선택을 연속적인 관점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곳은 당연히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어야 했고 성령이 강림하여 교회가 시작한 곳도 예루살렘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에만 중요한 곳이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중요한 곳이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성전을 긍정적으로 본다.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다른 복음서보다 예루살렘을 더 강조한다. 예루살렘에 대하여 마가복음에서는 11번, 마태복음에서는 13번, 요한복음에서는 13번 언급하는데 비하여 누가복음은 33번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60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사용된 빈도가 다른 복음서 보다 월등히 많은 것만 보아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굴더는 “예루살렘은 누가의 신학적 우주의 중심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은 구조적인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잉태되고 태어난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에서 성장해 가는 것을 추적하고 있다. 복음의 모태인 예루살렘은 성장을 위하여 극복되어야 할 장소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시고 인류 모두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시고 모든 곳에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갈릴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120명가량의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시작되었다. 오순절에 천하 각 나라에서 예루살렘에 순례를 왔던 헬라파 유대인들이 이들에게 복음을 듣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구성원은 히브라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들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모형은 모세에 의하여 애굽을 나온 광야의 이스라엘 교회(행7:38)이다. 애굽에 내려간 야곱과 그의 12명의 아들을 포함한 70인의 자손인 이스라엘은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왔고 첫 번째 오순절에 시내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한 후 교회 공동체가 되었다(출19장). 오순절의 ‘강한 바람 소리’, ‘불의 혀’, ‘방언’은 광야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강림하시던 때의 ‘우뢰와 번개’, ‘빽빽한 구름’, ‘나팔소리’의 평행 구조로 하나님의 강림하심의 반복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공동체가 예루살렘 교회의 원형이다. 예수님이 선택한 12사도(눅6:12-16)와 예루살렘으로 내려간 70인(눅10:1)을 바탕으로 모인 그들에게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의하면 예루살렘 교회의 사명은 분명하게 확정되었다. 예수께서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이 점을 분명하게 명령 하셨다. 누가복음은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8,49)고 하였고 사도행전은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은 오랜 동안 이 명령을 확실하게 깨닫지 못했거나 오해하였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에 대하여 논쟁이 있은 이후에는 이방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하게 인식하였다(행11:18).
II. 예루살렘 교회의 본질적 요소들(행3:1-6:7)
(1) 사역적 동력 - 권세와 능력
먼저 예루살렘 교회의 모형인 광야의 이스라엘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는 소명을 받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면서 자신을 믿지 않고 또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를 여호와 하나님께 털어 놓았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이 보낸 사역자임을 믿고 그의 말을 듣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모세에게 이적을 행할 능력을 주셨다. 모세는 그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말씀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였다(출4:1-9). 그 후 줄곧 모세는 이러한 능력을 사용하여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다.
예수님도 권세(eksousia)를 통하여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셨다. 예수님이 나타내 보이신 권세는 말씀과 행동의 능력이다. 예수님은 일과 말에 능한 선지자였다(눅24:19).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은 복음서 서두에서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가르치심과 귀신을 내어 쫓은 사건을 통하여 가르침의 권세(눅4:32)와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눅4:36)를 보여준다. 이에 예수님의 소문이 사방에 펴졌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다. 마태복음 초반부 역시 예수님의 권세가 주제어라 할 수 있다(마5-9장).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볼 수 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능력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의 기본적인 동력이었다. 오순절 성령강림 시에 일어난 역사와 방언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놀람과 의혹에 휩싸였다. 사도들은 그러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삼천 명이 세례를 받고 제자가 되는 열매를 거두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는 지속적으로 이 능력을 발휘하며 복음의 열매를 거두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일으키자 모든 백성들이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다. 베드로는 기이히 여기며 놀라는 그들에게 복음 설교를 하였고 그로 인하여 믿는 자가 남자의 수만 오천 명이 되었다 (행4:4).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표적과 기사를 많이 행하여 백성들이 칭송을 하였고 남녀의 큰 무리가 믿음으로 나왔다고 말한다(행5:12-16)). 예루살렘 교회의 선교의 동력은 행동과 말씀의 능력이었다.
모세의 사역이나 예수님의 사역에서 볼 수 있듯이 불신의 세상에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는 길은 권세와 능력이다. 예루살렘 교회 역시 권세와 능력을 통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열매를 거두었다. 권세와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의 임재나 현존을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한 시대에 일어난 사건 자체가 오늘날에도 형태 그대로 재현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권세와 능력의 본질이 하나님의 임재나 현존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형태는 다르게 나타나 다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날에 나타나는 권세와 능력의 형태는 예루살렘에서 나타났던 것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을 통하여 놀람과 의혹을 갖게 되어 복음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된다면 능력의 본질은 같은 것이다. 권세와 능력은 예루살렘 교회를 비롯하여 그 후 모든 교회에 있어서 선교의 기본적인 동력이다.
(2) 외부적 문제 - 훼방과 핍박
모세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애굽에서 이끌어 낼 때 최대의 훼방꾼은 바로였다. 바로는 모세의 사역을 훼방하는 것을 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핍박하였다. 그래서 모세에게는 시련과 투쟁이 있었다. 결국 승패는 능력 대결로 결말지게 되어 여호와의 능력을 덧입은 모세와 이스라엘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그 후 이스라엘 공동체는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침략과 도전을 받았다. 하나님에게 받은 소명을 수행하는 선지자들 역시 훼방과 핍박에 시달렸다. 훼방과 핍박을 만난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을 의뢰할 때는 승리하였고 그렇지 않을 때는 패배한 것이 구약 성경의 일관된 교훈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연단하셨고 또 자신의 섭리를 이루어가셨다.
예수님 역시 적대자들의 훼방과 핍박을 받으셨다. 예를 들어 사역 초기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눅5:17-6:11)은 예수님의 권세로 인하여 사역이 확장되어가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적대적으로 훼방과 핍박을 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 준다.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눅5:21’,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눅5:30), ‘금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느냐’(눅5:33),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눅6:2)는 훼방에 이어 결국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눅6:11)를 모의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내내 적대자들로부터 훼방과 핍박을 받았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다. 사역을 하는 데에 훼방과 핍박이 따라 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능력으로 그것을 물리치셨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미래에 훼방과 핍박이 있을 것을 예고하셨고 승리의 비결을 가르치셨다.
예루살렘 교회도 적대자들로부터 훼방과 핍박을 받았다(행4:1-31, 5:17-42). 예루살렘 교회가 초기에 모임을 갖던 곳은 성전이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성전 중심으로 살던 사두개인들과 제사장들과 충돌이 일어나 그들로부터 훼방과 핍박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다른 교리를 전하는 것을 싫어했고, 또 새로운 분파가 세력을 얻어 부흥하는 것을 시기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예루살렘 교인들 잡아 가두거나 재판정에 세웠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은 예루살렘 교인들은 담대하였고 현명하게 대처하였다.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는 점점 더 왕성해졌다. 훼방과 핍박을 확신과 능력으로 물리치는 것이 정답이다. 그러나 후에 스데반으로 인하여 일어난 핍박은 예루살렘 교인들을 흩어지게 하였다. 이 경우는 일견 예루살렘 교인들이 패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진 교인들을 통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사도행전은 해석한다(행8:1-4).
정도의 차이와 강도는 다르지만 역사적으로 교회는 늘 외부로부터 훼방과 핍박을 받아왔다. 심한 훼방과 핍박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교회가 위축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가져오게 하는 동인이 되었다. 교회역사에는 많은 순교자들이 흘린 피의 자취가 있다. 종교적인 이유 외에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훼방과 핍박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았다.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둔 헤롯왕의 경우(행12:1-3)가 그렇고 로마의 네로황제의 핍박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선교지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역에 따라서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 정도의 강도 높은 훼방과 핍박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선교가 위축되고 진보가 전혀 없는 것처럼 양상이 전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선교의 현장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담대하게 그것에 맞서서 투쟁할 때도 있고 또 그것을 피해 가야 할 때도 있다. 어느 경우에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선교사 개인에게 자기의 뜻을 말씀하실 수도 있고 공동체의 권위를 통하여도 말씀하실 수 있다. 그것이 성서가 예루살렘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이다.
(3) 내부적 문제 - 죄성과 연약성
예루살렘 교회의 모형이었던 이스라엘 공동체는 항시적으로 내적인 문제를 갖고 있었다. 이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대처하고 처리하는가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와 자신들의 삶이 결정되고 그에 따라 적들과 싸움에서 승패가 갈라졌다. 내적인 문제는 인간의 죄성에서 비롯되는 것과 연약성에서 비롯되는 것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죄성에 뿌리를 둔 교만과 탐욕은 늘 이들을 문제 가운데로 몰아넣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에 빠지고, 욕심으로 필요 이상의 것을 거두고, 모세와 하나님을 수 없이 거역하였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끝없이 죄로 인하여 거룩함을 잃었고 하나님의 징계와 용서를 통하여 정화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오합지졸 같은 연약한 모습에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출애굽한 후에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조언으로 일시적인 처방도 받았다. 이들은 시내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체계와 조직을 갖춤으로 비로소 강한 공동체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본성적인 연약함은 공야에서 어려움과 시련을 만날 때마다 원망으로 나타났다. 어려움과 시련, 연약함의 노출, 원망에 이은 징계와 보완, 해결이라는 도식으로 반복되는 투쟁을 통하여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 자신들의 연약성을 해결하는 길임을 배워갔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연약성과 죄성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가르치셨다. 누가복음은 이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룬다(눅11:5:17-6:11). 인간의 죄성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교만과 위선적인 것으로, 물질에 대하여는 탐욕으로 나타나는데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좇는 성화의 길이 해결책이다. 그리고 제자들의 연약성은 다른 인간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한 염려로 나타나는데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 것이 해결책이다. 누가복음의 이 가르침이 제자 개개인에 대한 것임에 비하여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공동체 내지는 교회 공동체내의 연약성과 죄성에 대한 대처의 길을 가르친다(마18장). 소자의 실족 문제 제기와 그 해결책을 담은 잃은 양의 비유(5-14절)는 공동체의 연약성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죄를 범한 형제의 문제와 용서에 대한 문제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15-35절)의 가르침으로 해결책이 제시되는데 이것은 공동체의 죄성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문제가 죄성과 연약성에 기인하는 것이며 또 공동체의 내부적 문제 역시 죄성과 연약성에 기인하는 것임을 간파하고 그것에 대하여 대처해야만 함을 가르친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도 내부에서 공동체의 거룩성을 해치는 죄의 문제가 일어났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과 교회를 속이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행4:32-5:11). 구약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일어났던 아간의 사건(수7:1-26)과 비슷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문제를 철저하게 다룸으로 공동체의 거룩성을 회복하였고 교인들과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행5:11).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연약성의 문제(행6:1-6)는 다양한 구성원으로 인하여 구조적으로 취약성을 노출한데서 일어난 문제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주류는 열 두 사도를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토박이 히브리파 유대인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하여 대형화됨으로 구조적으로 취약한 점들이 드러났다. 고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약자인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 빠지는 일이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는 헬라파 교인들이 히브리파 교인들을 원망하는 데까지 불거졌다. 문제의 본질은 구조적 취약성이다. 그래서 문제의 해결은 취약한 점을 파악하여 보완하는 것이다. 히브리파 출신인 사도들은 자신들은 말씀 전하는 사역에 전념하기로 하고, 교회의 모든 제자들을 소집하여 구제 사역을 담당할 일곱 사람들을 선택하게 함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들이 선택한 일곱 사람들은 헬라파 유대인들로 추정된다.
(4) 하나님의 섭리적 준비
예루살렘 교회는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동질성이 약함으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길 수 있는 취약성이 있었다. 실제로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 빠짐으로 원망이 일어났다. 히브리파 지도자들의 현명한 대처로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 내부적 연약성을 보완함으로 교회가 강해졌다. 이것이 내용에 대한 일차적 해석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이방선교라는 빛 가운데, 그리고 사도행전 전체적인 안목으로 조명하면 좀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교훈을 해석해 내게 된다. 이 해석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사도행전의 교훈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헬라파 교인들의 부상은 사도행전 후반부에 언급된 로마제국, 이방의 땅 끝을 향한 선교를 이루기 위한 전략적인 준비인 것이다. 예수께서 히브리파 열 두 사도들을 세운 것이 교회를 시작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면 예루살렘 교회의 구조적 취약성을 해결하기 위하여 일곱 명의 헬라파 지도자를 세운 것은 이방 선교를 위한 그릇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는 현실적으로 대두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몰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예루살렘 교회를 통하여 다음 단계를 예비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헬라 문화권인 로마제국을 선교하는데 적합한 사람들은 헬라 문화권의 사람들이다. 바로 헬라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은 히브리즘과 복음 그리고 헬레니즘을 모두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일곱 명의 헬라파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제2의 지도자 그룹으로 선정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미래에 있을 이방 선교를 위한 선교적 구조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구제사역을 위한 명목으로 선출된 일곱 지도자들은 후에 그 일 보다는 복음 전도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다. 스데반과 빌립의 경우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선교지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역시 자신이 속한 사회의 상황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교회는 구조적 취약성을 계속하여 노출하게 된다. 교회가 그것을 잘 파악하고 대처를 해가면 튼튼하게 성장해 갈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성장이 멈추는 연약한 교회가 될 밖에 없다. 이 단원의 끝을 맺는 요약 구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6:7)는 이러한 문제들을 잘 해결한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을 말해준다. 오늘날 교회의 부흥의 원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원리에 충실하여 성장하는 교회는 부흥과 더불어 선교를 위하여 준비시켜 가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교회의 부흥과 더불어 선교적인 준비를 이루어 가게 하는 것이다.
III. 예루살렘 교회의 선교적 요소들(행6:8-9:31)
(1) 올바른 신학
스데반은 사도들에 의하여 봉사의 일을 위하여 세워진 헬라파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후 스데반의 역할은 복음 전도자와 변증가로 나타난다. 헬라파 유대인들로 구성된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변론을 하였는데 지혜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하는 스데반을 당하지 못하자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을 충동시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세웠다. 그들이 내세운 제목은 하나님과 모세를 모독하여 성전을 헐고 모세의 규례를 고치겠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스데반은 공회에서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았다. 7장 전체는 스데반의 긴 변론이다. 47절까지는 유대인들 모두가 알고 믿는 내용으로 아브라함부터 솔로몬까지의 일이다. 2-8절은 아브라함, 9-16절은 요셉, 17-44절은 모세, 45-53절은 솔로몬과 관련된 내용이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과 현현이 예루살렘과 성전이 세워지기 이전에 여러 장소에서 있었음을 먼저 설명한다.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의 소원으로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되었다. 스데반은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 하신다”(행6:48)고 주장하였다. 스데반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변증한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주의의 기반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말이다. 그리고 스데반은 그들의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스데반은 너희들이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다’(행:53)고 하였다. 율법주의에 대하여 비판한 것이다. 이것 역시 유대주의의 기반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주장이다.
스데반의 변론의 내용은 이미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게 변증한 내용으로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의 지도자 격인 스데반의 입을 통하여 공회 앞에서 행해진 것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사도행전이 한 장이나 되는 지면을 이 일에 할애한 것도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복음이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장소적인 제한을 벗어나서 전 세계로 뻗어나갈 신학적인 근거를 선포한 일이다. 또한 유대인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보편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율법문제에 대한 것은 예루살렘 공의회(행15장)에서 다루어지기에 스데반의 변론에서는 문제 제기로 끝난다.
결국 스데반은 순교하였다. 스데반의 변론을 받아들일 수 없던 공회는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서 죽였다. 이어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하였다. 사도 이외의 사람들은 대부분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다. 이런 일련의 사태는 훼방과 핍박을 극복하지 못한 예루살렘 교회의 패배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 중심에 머물렀던 예루살렘 교회가 더 넓은 세계를 향하여 나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흩어진 이들로 말미암아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 사태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이 사도행전의 해석이다. 스데반의 변증은 복음이 예루살렘 성전 중심이 아니라 온 세계에 흩어져야 함을 선포한 것이다. 이러한 변증은 이방인 선교를 향한 이론적 기반의 한 축이 되었다. 이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스데반의 주장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는 선교 신학의 정립이라고 할 수 있다.
올바른 신학의 정립이 선교를 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는 교회와 선교 역사를 통하여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예루살렘 공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율법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은 순전하게 전해지게 되었다. 로마제국에서의 초기 기독교는 유대주의와 헬레니즘적인 사상들과 투쟁하였고 후기에는 기독론에 대한 투쟁이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선교신학의 부재는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개신교 선교가 부진했던 원인 중의 하나로 지적되었다. 20세기부터 복음에 대한 해석에 대한 신학적 이견들은 선교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가 힘을 얻고 있는 오늘날에 신학, 특히 선교신학이 올바른 방향에서 정립되고 발전되어야 함은 강조되어야 한다.
(2) 선교적 사역
빌립 역시 사도들에 의하여 봉사의 직무를 위하여 세워진 헬라파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빌립 역시 봉사자이기보다는 전도자로 나타난다. 그는 사마리아인에게 복음을 전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존재였다.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능력을 행하고 그를 통해 복음을 전하였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고 복음을 받아 들였다. 사마리아의 복음 전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자들을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하였다. 교회의 문을 여는 사도들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리고 빌립은 유대교 개종자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디오피아 간다게의 내시는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다. 이 내시는 유대교에 입교한 자로 혈통은 이방인이지만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인인 중간적인 존재였다. 이 사람은 이사야서 53장을 읽고 있었지만 깨달음이 없었다. 빌립은 말씀을 해석하여 주었고 복음을 깨달은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다.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은 회당에서 율법을 공부하였기에 복음을 깨닫기가 쉬었다. 후에 바울은 이방선교의 시작을 유대교 회당에서 출발하였는데 이러한 이방 개종자들 중에 회심자들이 많이 생겼고 이들은 이방인 선교에 큰 역할을 하였다.
본격적인 이방인 선교에 앞서 혈통적 또는 종교적으로 중간적인 존재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 이방인 선교에 대하여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던 예루살렘 교회도 사마리아인과 이방인 개종자에 대한 선교는 갈등 없이 받아들였다. 중간자들 선교는 이방선교를 향한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선교에 있어서도 문화적 중간 지대가 있다. 예를 들면 재외 한국인 교포들이나 재한 외국인들 같은 그룹들이다. 이들은 문화적 이질성과 함께 동질성도 갖고 있다. 이들에 대한 교회의 전도 사역은 본격적인 선교를 위하여 좋은 연습이 될 수 있다.
(3) 선교사 준비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헬라파 유대인이었다.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율법을 배운 것으로 보아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이주했거나 장기 체류하던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그가 스데반의 처형에 관여하게 된 것은 스데반이 헬라파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변론하던 유대인들 중에 일원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율법에 열심인 사울은 다메섹까지 예수 믿는 자들을 추적한다. 다메섹에 거의 다 이르렀을 때 하늘로부터 빛이 둘러 비추자 사울은 땅에 엎드러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메시지를 들었다. 사울은 눈이 멀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사람들의 소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 사흘간 식음을 전폐하였다. 다메섹에 있던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는 사울을 만나라는 환상을 본다. 환상 중에 주님은 사울이 주님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자시의 그릇이라고 말한다(행9:15).
사울을 찾아가 만난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안수를 하여 성령 충만하게 하였다. 다시 보게 된 사울은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어 다시 강건하게 회복되었다. 사울은 열심히 복음을 증거 하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기를 시도하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사울의 제자들이 그를 탈출 시켰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울은 바나바를 통하여 주의 제자들과 사귀게 되었다. 사울은 예루살렘의 헬라파 유대인들과 복음에 대하여 변론하기 시작하였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하자 형제들이 이를 알고 바울을 고향인 다소로 보냈다. 이렇게 하여 사울은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하다 순교한 스데반의 뒤를 잇는 이방 선교사로 준비된 것이다. 사도 바울의 회심은 핍박자였던 그에게 주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일어난 것이지만 사울을 받아주고 돌보아 준 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한 일이다. 그리고 그를 안디옥 교회로 파송한 것도 예루살렘 교회가 한 일이다. 이 단원을 요약하는 구절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롤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는 선교의 진전을 말해준다.
사도행전 6장 8절부터 9장 31절까지 전체가 이방선교를 준비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스데반의 산헤드린에서의 변증은 이방선교의 신학적인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지역적 한계와 율법주의를 무너뜨림으로서 유대주의적 예루살렘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전 세계의 보편적 기독교로 성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천명한 것이다. 그리고 빌립에 의하여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사도행전 1:8의 말씀을 이행하는 진전이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핍박으로 흩어진 제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것이다. 지리적으로 땅 끝으로 표현된 이방 선교의 문턱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방선교를 위한 그릇이 준비된 것이다. 바로 후에 사도 바울이 되는 사울이 회심을 하고 복음의 열정을 가진 제자가 되어 고향 다소로 가서 때가 되기를 기다리는 대기자가 된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방선교를 담당할 선교사를 준비하고, 이방 선교를 담당할 이방 교회를 세우는 준비를 마친 것이다.
선교사가 되는 출발점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것이다. 소명은 개인적으로 받는 것이지만 그것을 인준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이다. 교회 공동체는 선교의 비전과 함께 구체적인 전략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선교의 소명을 받은 사람들을 발굴할 수 있고, 필요한 훈련을 받게 함으로 인격적으로나 사역적으로 자격을 갖춘 선교사로 준비 시킬 수 있다. 선교의 비전을 가진 한 지역 교회가 선교사를 훈련하고 파송하는 모든 프로그램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구체적인 전략은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선교의 비전을 실현할 수 있다.
IV. 예루살렘 교회의 선교 비전(행9:32-12:24)
(1) 지도자의 비전
베드로는 예수님이 택한 사도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이지만 여전히 유대주의적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베드로는 이방인을 접촉하는 것이 율법에 위배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사도행전 1장 8절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는 주님의 명령을 로마 제국 각 곳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복음 전할 대상을 사마리아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정도까지로 이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교인들의 인식 역시 베드로와 같았다.
새로운 인식은 하나님이 주시고 그 길을 인도하신다. 죠지 바나는 사역에 대한 비전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사역에 대한 비전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종에게 보여 주시는 것으로 현재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선명한 그림을 마음속에 그리는 것이며, 하나님과 자신 그리고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베드로의 비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와 자신의 가치관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이 있었고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민감하였다.
베드로는 시몬 피장의 집에서 환상을 봄으로 새로운 인식을 갖기 시작하였다. 정오 기도시간에 지붕에 올라간 베드로는 비몽사몽간에 하늘로부터 보자기가 내려오는 환상을 보았다. 보자기에는 율법에서 식용으로 금한 부정한 동물들이 있었다. 하늘로부터 잡아먹으라는 소리에 베드로는 속되고 깨끗지 못한 것은 먹지 못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일에 세 번 있은 후 그릇이 하늘로 올라갔다. 베드로 이 환상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골몰하는 중 역시 환상에서 지시함을 받은 이방인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이 베드로에게 도착하여 함께 가기를 청했다. 성령께서 그들을 따라 가라고 하셔서 베드로는 고넬료 집으로 가게 되었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이 위법이라는 율법보다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였다. 고넬료에게 자초지정을 들은 베드로는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시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5)고 말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받으신다는 것을 깨달은 베드로는 지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왔고 그들은 방언을 하며 하나님을 높였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환상을 보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한 걸음씩 순종해 나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자기 백성들로 삼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에게 인식의 대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2) 공동체의 비전
당시에는 이방인의 유대교 개종은 유대인들에게 화가 된다고 반대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 외 다수의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개종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개종한 이방인들은 제사장 가문과 결혼 금지, 이스라엘 본토에서 토지 소유 금지, 여호와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호칭하는 것 금지 등을 제외하고는 유대인과 동등한 신분을 갖는 것으로 인정받았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대상에서 이방인들을 제외하였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이방인들은 복음 전도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교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땅 끝까지’의 의미를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유대교에 개종한 이방인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도하는 것으로 이해했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도자의 비전은 궁극적으로 공동체와 함께 공유되어야 한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베드로를 통하여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대주의적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이들은 율법을 어긴 베드로를 힐난하였다. 베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비전을 받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그 일을 실행하였다. 그런 베드로가 공동체로부터 힐난을 받았다면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고 야단을 치고 일방적으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이방 선교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비전을 받은 지도자 베드로다. 그래서 베드로는 일어난 일을 차례로 설명하였다(행11:4). 그리고 베드로는 자기가 행한 일에 여섯 형제가 함께 하였음을 밝혔다. 유대 재판법에 일곱 사람이 함께 증언하면 그 증언은 사실로 인정된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한 자초지정에 대한 설명에 대하여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의 설명은 사실 자체로 인정받았다. 베드로는 자신이 받은 비전을 객관화하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일을 하였다. ‘베드로는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라는 말로 설명을 마쳤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11:18)고 말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교회가 이방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는 인식의 전환 순간이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는 드디어 이방선교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비전을 갖게 되었다.
(3) 비전의 실현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인하여 흩어진 예루살렘 교인들이 그 동안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였는데 안디옥에 이르러 드디어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행11:20).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파송하였다(행11:22).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나바는 이들을 양육하였다. 그 결과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안디옥 교회가 탄생하였다. 바나바는 다소에 가서 사울을 찾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다. 드디어 이방 선교를 위한 그릇과 그 그릇을 담을 공동체가 만난 것이다. 바나바와 사울은 일 년간 안디옥 교인들을 가르쳤다. 드디어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안디옥 교회는 흉년이 들어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여 헌금을 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통하여 전달했다. 물질을 서로 나누는 일은 일치와 연합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일을 통하여 선교지 교회인 안디옥 교회와 본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일치와 연합을 하였음을 볼 수 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이방 선교의 주체가 되어야 함에 대하여는 앞에서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안디옥 교회가 이방선교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 안디옥이 선교를 감당할 만한 가장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안디옥은 기원전 300년에 알렉산더의 휘하 장군 셀루커스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기원전 64년 로마에 의해 정복당한 도시로 당시 인구는 50에서 80만 정도의 도시였다. 알렉산더 정복으로 이주한 헬라인들과 원주민인 시리아인 그리고 15% 정도가 되는 유대인과 소수의 로마인 등이 주민으로 동서 문화가 혼합된 국제 도시였다. 지중해로부터 30Km 정도 내륙이고 예루살렘으로부터는 480Km 북방이다. 북서쪽으로 오론테스 강이 흐른다.
안디옥은 로마, 알렉산드리아에 이은 로마제국의 세 번째로 큰 국제적 도시였다. 흑해부터 아프리카 북부를 방어하는 로마군단들을 통솔하는 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치안이 안정되어 있었다. 상업과 무역업도 왕성하여 경제력이 있었고 자유로운 도시였다. 예루살렘과 거리가 가깝고 아시아와 유럽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여건을 갖춘 안디옥은 로마제국을 향한 선교 전초 기지로서 가장 적합한 도시였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고 준비된 이방선교의 그릇인 사울이 합류함으로 이방선교의 준비가 모두 갖추어졌다.
사도행전 12장은 헤롯 아그립바가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투옥하는 핍박으로 끝을 맺는다. 천사의 인도함을 받아 베드로는 옥에서 탈출하여 형제들을 찾아 본 후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떠났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 하더라’(행12:24)라는 요약 문구로 이 단원을 맺는다. 물론 베드로는 계속하여 하였을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도 역할을 계속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선교라는 전략적 관점을 서술하는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의 역할은 여기서 막을 내린다.
나오는 말
예루살렘 교회에 대하여 고찰해 본 내용을 요약함으로서 결론을 맺고자 한다.
예루살렘 교회의 본질적 요소(행3:1-6:7)는 행동과 말씀의 능력, 외부적 훼방과 핍박을 이기는 능력, 내부적 죄성과 연약성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교회는 무엇 보다 이러한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선교 사역은 온전하고 튼튼한 자에게 주어지는 최종적인 몫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기본에 충실한 교회였다. 그들의 행동에는 하나님의 현존이 있었고, 그들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었다. 훼방과 핍박을 담대하게 물리쳤다. 거룩함을 해치는 죄의 문제가 생겼을 때 단호하게 대처하였고 교회 구조에 취약성이 나타났을 때 과감하게 개선하고 보완하였다.
교회를 튼튼하게 하는 기본적인 것을 충실하게 구축한 예루살렘 교회는 선교적 요소(행(6:8-9:31)를 갖추었다. 선교적 요소들은 올바른 선교의 방향성을 위한 신학의 정립, 선교 연습, 선교사를 발굴하고 준비 시키는 일 등이다. 스데반의 변증은 복음이 예루살렘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서 세계로 나가야 하는 이론적인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유인인과 이방인 사이의 중간지대인 사마리아인들과 이방인 개종자에게 복음을 전한 일은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선교를 하기 위한 훈련이 되었다. 그리고 이방 선교를 위한 선교사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세워지고, 준비되고, 선교지로 보내졌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갖고 이를 실현해 나갔다. 비전은 뚜렷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에게 받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베드로가 먼저 이방인 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고 순종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환상을 본 베드로지만 예루살렘의 유대인 형제들이 갖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견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용의주도하게 준비를 한 후에 이들에게 설명을 하였다. 결국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도 이방 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다.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이방선교에 나섰고 안디옥에 선교 전초기지를 세웠다.
예루살렘 교회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 교회가 어떠해야 할지를 성찰하게 한다. 하나님의 현현과 임재하심을 세상에 보여주는 말과 행동이 우리에게 있는가? 현대 사회로부터 오는 각가지 훼방과 핍박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있는가? 교회의 거룩함은 지켜지고 있는가? 내부적 취약성을 성찰하며 끊임없이 개선해 가고 있는가? 올바른 선교적 이론이 정립되고 그에 따른 정책은 수립되어 있는가? 선교적 사역 훈련은 이루어지고 있는가? 선교사를 발굴하여 세우고 준비 시키고 있는가? 교회의 선교적 비전은 무엇인가? 그 비전은 이루어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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