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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심리학

까망쑤나 2010. 5. 24. 00:46

분석심리학


제1장 분석심리학의 방법론적 전제


 1.심리학적 전제


  분석심리학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심리학설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관찰하고 스스로의 마음의 움직임을 진지하게 살펴간 사람의 경험을 토대로 역은 가설이다. 그러므로 융은 자기는 흔히 말하듯 철학자가 아니고 경험론자이며 자기의 입장은 현상학적인 입장이라 말한다. 

  경험이란 그런데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운 어떤 것을 동화해 가는 과정이므로 비판적인 고려 없는 경험이란 실상 무의미한 것이다.

  현상학적 입장이란 일어난 일들, 경험한 일들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사실’을 중심으로 한 작업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말하는 진실Wahrheit이란 사실Tatbestand이지 판단Urteil이 아니다.

  가령 단군신화에 곰이 여자가 되어 신과 결혼한다든가 기독교 도그마의 성모마리아가 처녀로 잉태하여 아기예수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심리학의 입장에서 살펴야 할 것은 그러한 관념이 인간심리 속에 존재 하는가 않는가하는 사실이며 이러한 관념이 거짓이냐 진실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융의 입장이다.

  이런 태도는 인간의 윤리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규준이 심리학의 추구하는 바가 아니라는 사실에도 반영된다. 분석심리학은 무엇이 선이냐 악이냐를 사회규준에 맞추어 따지거나 인간이란 이렇게 살아야한다고 일반적인 방향을 제시하며 설교하는 학문이 아니다. 분석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속에 무엇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나가고 거기서 얻은 사실을 바탕으로 각 개인의 의지와 의욕의 방향을 살펴본다.  이런 점에서 분석심리학은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심리학과 달리 실제적인 응용심리학의 특성을 띤다.

  융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마음의 의사Seelenarzt임을 자처하였거니와 인간 심리를 해석하는데도 그 해석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냐 아니냐 하는 것 보다 그 해석이 그 당사자에게 어느만큼 효과적이냐에 역점을 둔다. 정신적인 어떤 것이 작용할 때 그것은 진실이다.

 융은 누차 심리학에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처럼 어디에 의거해서 판단할 만한 곳이 인간심리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심리란 그것이 나타나는 현상과 구별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심리란 심리학의 대상인데 불행하게도 동시에 그 주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심리학과 무수히 많은 철학이 가능하다. 인간에 관한 학설이란 그 학설을 제창하는 학자의 성격, 관심의 방향, 한마디로 주관성에 의해서 많은 영향을 입으며 문화와 시대정신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유일절대의 심리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인간 마음의 본질에 관해서 ‘이것이 옳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융은 옳은 것Wahres 보편타당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주관적으로 발견한 것을 자세히 묘사하여 그것에 ‘옳은 표현’wahrer Ausdruck을 부여하도록 힘쓰려 한다.

  혼이 있는 심리학Psychologie mit Seele을 주장하는 융은 ‘혼’의 독자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정신적인 것은 원초적인 경험에서 보나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 반드시 주관적인 것, 인위적인 것에 내포되는 개념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객체적인 것ein Objektives, 스스로 사는 것, 그리고 그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정신이 있다. 우리는 불쾌한 감정을 더러는 좋은 감정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꿈을 마음대로 없애거나 만들어 낼 수 있거나 그 내용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가 의지로 막고자하고 바라지 않는 환상이 우리의 이성의 울타리를 넘어 마구 침범하기도 한다. 우리의 마음은, 모든 인간의 정신적 산물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생각을 만들어 낸 주인이 아니라 그 생각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다. 놀랄만한 발명, 예술가의 착상, 어떤 개념들은 내가 의식에서 만들어낸 것이기 보다 그 관념이 나에게 온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객체정신Objekt psyche은 이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이러한 견해가 실존분석가들이 비판하듯 자아의 기능을 거의 무의식 혹은 객관정신의 힘에 예속되는 기능으로만 보아 자아의 자유로운 결단을 무시하는 설이라 판단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융은 자아의 결단 없이는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에 동화해 가는 과정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다. 그는 다만 자아의식을 넘어선 무변의 정신세계의 특징을 지적함으로써 인간정신의 전체성die Ganzheit에 시야를 돌리는 것이다.

    

2.다른 학파의 학설과의 관계


  융의 분석심리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학설은 첫째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며 둘째로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이다.

  융은 그 자신도 말하듯 결코 프로이트의 적수가 아니다. 무의식의 발견이라는 프로이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고 인간 의식 너머에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분석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은 공통의 바탕 위에 있다. 또한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에 동화해 가는 과정이 인간의 성숙에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점도 양자가 같다. 다만 분석심리학은 무의식의 기능과 내용에서 정신분석학설과 다른 견해를 가지며 무엇보다도 융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프로이트의 인간심리를 보는 관점에 있다.

  그 첫째는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학파에서 인간을 너무 지나치게 병리적인 측면과 그 결함의 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무의식적인 투사나 선입관념이 전혀 없는 학설이란 이 세상에 없겠지만 자신은 적어도 큰 편견, 무의식적 무비판적인 전제에서 정신현상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고 융은 주장한다.

  이리하여 융은 심리학의 대상을 신화와 종교, 철학, 소위 심령현상에 이르기까지 인간정신의 모든 소산에 확대한다.

  프로이트 학설 가운데 융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그의 리비도Libio설이다. 프로이트가 리비도를 성적인 본능과 거의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성적이 아닌 정신적 에너지조차도 성적인 충동으로 환원하게 되었고 그 결과 다양한 정신현상을 어느 특정한 하나의 충동의 변종인 듯이 설명하게 된 것은 잘못이라는 점이다.

  프로이트의 인과론적 결정론-현재는 과거의 원인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생각은 그의 리비도설에 반영되어 리비도의 발전단계라는 것을 가상하여 유아에서 시작되는 소위 정신성적 발달psychosexual development에 관한 설을 내세우게 되었고 융은 이러한 진화론적 결정론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여 이러한 발전단계의 신뢰성을 비판하고 있다. 가령 아기가 젖을 빠는 행위는 분명 긴장의 해소, 만족과 관계있으나 그것을 성적인 행위와 관계 지을 아무런 이유도 없다. 인간에게는 성 이전에 배고픔과 음식을 섭취하고자 하는 기능이 있으며 유아기에는 오직 그러한 영양섭취의 기능Ernahrungsfunktion만 있다. 먹는 것이 첫째로 쾌락을 주는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있어 성욕이 중요한 것이었다면 프로이트와 함께 일하다가 융보다 먼저 프로이트의 성욕중심설을 반대하고 나간 아들러A.Adler에게는 권력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인간의 충동이었다.

  아들러는 모든 정신현상은 오직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준비라 생각한다. 노이로제 현상은 모두 우월성이라는 최종 목표를 향한 여러 준비수단에서 비롯된다.

  우월성의 목표는 근원적인 열등감을 대상하기 위하여 일어나며 이것은 어린시절부터 생긴다. 또한 무의식에 억압되는 것은 성욕이 아니고 권력의지라 함으로써 프로이트의 쾌락에의 충동을 권력의 충동으로 대치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정신적 외상을 중요시하고 그 외상으로 말미암은 고착, 결과적으로 일어나는 성격발전의 왜곡을 논하는 결정론적, 진화론적, 인과론적 접근방법을 썼다면 아들러는 과거와의 관련성을 무시한 미래지향을 중요시한 점에서 목적론적 접근방법을 사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융은 이 양자의 극단적인 인과론과 목적론을 다같이 비판한다. 인간이란 오직 과거의 생에 묶인 어쩔 수 없는 과거의 포로도 아니고 역사를 잃은 미래에의 의지의 화신만도 아니다. “정신이란 이것이냐 저것이냐Entweder-Oder로 파악되기 보다는 이것이기도하고 저것이기도 한 것Sowohl-als-auch”이라는 것이 융의 관점이 여기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분석심리학에서는 일관성, 명쾌한 단정, 합리적 설명 같은 것을 찾기 어렵고 항상 어두운 면과 밝은 면, 창조와 파괴의 양극의 관계가 설명되는 만큼 합리적이고 직선적인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따라서 그러한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불만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인간심리를 명쾌하게 단정적으로 설명했고 알기 쉽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심리의 전모를 기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생각이다. 정신의 마지막 실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오늘날 정신의 비밀은 이미 해결되었다는 식으로 단정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피상적인 판단이다.

  융학설에 성장단계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나 심리기제와 같은 기계론적 해석, 노이로제의 여러 종류에 따른 상세한 병리기제를 볼 수 없는 것은 인간정신의 기계론적 해석이 정신현상의 중요한 특징인 다양성과 비합리성을 파악하는데 불충분한 것이다.

  무의식이 의식에서 억압되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성적인 욕망의 원천만이 아니라 창조적인 기능을 가진 것이라 보는 분석심리학의 입장에서 프로이트의 방어기제설이 정신분석학설에서처럼 중요시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의 무의식이 위험한 충동의 도가니가 아닐 진데 ‘방어’보다는 창조적인 것의 ‘실현’이 더욱 중요하며 정신적 상처를 찾아내는 일보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무의식의 치료기능이 더욱 중요해진다. 이리하여 분석심리학은 인간의 고통에 대하여 그 고통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가를 과거의 역사에서 살펴보는 동시에 그 고통이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장차 어디로 그를 이끌어가기를 촉구하고 있는가 하는 정신의 지향성, 목적성을 알고자 한다.

  KarenHorney, H.S.Sullivan, ErichFromm등 신프로이트학파의 학설은 어느 면 분석심리학과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비슷한 용어를 쓰고 있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들은 무의식의 근원적 유형의 작용과 무의식의 자율성과 상징보다는 개인의 갈등에 끼치는 문화와 사회의 영향을 문제 삼고 있는 것 같다.

  C.Rogers의 인간중심 학설은 개인의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인간에는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향상시켜주는 방향으로 그가 가진 모든 능력을 개발하려는 경향이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융의 인간관과 같은 관점에 있다.

  정신치료의 원리도 내담자가 왜곡된 자기상을 발견하도록 한다는 것으로 자기실현을 치료의 원리로 삼는 융학파의 정신요법과 비슷하다. 다만 L.Binswanger, M.Boss등의 현상학파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상징을 의식화해 나가는 접근보다 체험을 통한 직관적 파악에 주력한다.

  우리는 학문의 역사 속에서 늘 두 가지 접근방법, 인간심성을 안에서 보고자 하는 주체중심 접근방법과 그것을 밖에서 보고 측정하고자 하는 객관적 접근방법을 보아오고 있거니와 분석심리학은 객관적 계측방법의 결과를 경시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인간심리의 평균적인 측면을 제시하는 것이므로 개개인의 고통의 문제를 다루어가는데 있어서 통계적 결과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개인의 창조성을 집단인간의 범용성으로 끌어내리는 경우가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분석심리학은 객관적 계측적 결과를 중시하는 대표라 할 수 있는 행동주의 학파와는 다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순수한 객관적인 측정의 결과로 발견된 Eysenck의 내향성, 외향성 경향이 경험적 관점에서 세워진 융의 내향적․외향적 유형과 고도로 일치한다. 


    

제2장 연상검사와 ‘콤플렉스’론


  분석심리학파에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연상검사는 융이 1908년 케딩의 빈도사전에 의거하여 최다빈도의 단어 100개의 자극어를 택하여 만든 것인데 명사와 형용사, 부사를 번갈아 무작위 나열한 것이다.

  융의 연상검사는 흔히 쓰이는 검사는 아니다.

  융의 연상검사의 자극어가 1900년대 스위스의 어휘 빈도사전에 따라 선정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에게 실시하여 콤플렉스를 발견하는데 유용한 것이라는 사실은 상당수의 자극어가 시대적․문화적 요인에 영향을 받지 않는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증명한다.

  콤플렉스 komplex, comples란 우리의 사고의 흐름을 훼방 놓고 우리로 하여금 당황하게 하거나 화를 내게 하거나 또는 우리의 가슴을 찔러 목메게 하는 마음속의 어떤 것들이다. 콤플렉스는 잘 통합된 의식의 질서를 일시적으로 또는 장기간 교란하고, 이때 사람들은 대게 얼굴이 굳어진다든가 창백해지거나 벌겋게 상기된다든가 목소리가 떨리거나 말문이 막히거나 더듬거리거나 갑자기 횡설수설하는 등 여러 가지 눈에 띄는 징후를 나타낸다. 혹은 나도 모르게 말실수를 하거나 중요한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리거나 별안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성을 낸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어떤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콤플렉스라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감정적으로 동요하거나 흥분하게 되는 이유를 곧잘 “그 사람의 아픈 데를 찔렀기 때문이다”고 하거나 “약점”을 찔렀다고 한다. 콤플렉스란 바로 그 아픈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 뜻에서 보통 사람들은 콤플렉스를 열등의식과 같은 말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누가 무엇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 대신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콤플렉스 가운데는 열등감을 일으키고 또한 그런 열등의식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도 있지만 모든 콤플렉스가 열등의식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콤플렉스는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다. 무수히 많은 체험이 무수히 많은 콤플렉스를 만들어 낸다. 콤플렉스란 그것이 의식을 자극할 때 불쾌한 감정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렇다고 콤플렉스의 내용이 열등감과 관계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 콤플렉스는 열등감뿐 아니라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모든 감정 작용을 일으킨다.

  콤플렉스는 우리로 하여금 다양한 감동을 일으키게 하고, 그만큼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콤플렉스’란 ‘감정적으로 강조된 심리적 내용’gefuhlsbetonte 또는 '그 내용을 중심으로 한 심적 요소의 어떤 일정한 군집(群集)'Gruppierungen을 말한다고 융은 정의한다. 콤플렉스는 하나의 핵요소를 중심으로 형성되는데 이 핵요소는 강한 정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정감은 핵요소가 무의식 속에 있어 자아가 그것을 인식할 수 없으면 그 정감의 정도는 주관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이것은 특수한 심리학적 방법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에 주체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나 그 존재를 보통 때는 느끼지 않는다. 이 핵요소는 두 가지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인과적으로 환경과 결부된 체험에 의해 정해진 조건이고 다른 하나는 소인적 (素因的) 성질을 띤 그 개체의 성격에 내재하는 조건이다. 핵요소는 강한 정감이라는 심적인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심리적인 여러 요소에 영향을 주어 많은 심리적 내용 가운데서 그 정감의 성격에 맞는 몇 가지의 내용들을 선택하여 핵요소와 결부시킨다.

  이와 같이 핵요소 주변에 여러 심리적 내용을 집결시키고 연결시키는 힘을 핵요소의 배열력 이라 하고 이런 현상을 배열(配列)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여 콤플렉스를 형성하게 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라는 심각한 체험을 겪는다. 이것이 핵이 되어 죽음에 관하여 연상되는 것들이 배열되면서 하나의 응어리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은 보통 무의식속에 잠들고 있다가 죽음을 생각할 만한 상황에 이르면 자극되어 자아로 하여금 일정한 감정반응을 나타내도록 배열하는 것이다. 때때로 이러한 콤플렉스의 반응은 의지의 힘에 반하여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콤플렉스의 배열력은 의식의 통제에 구애받지 않는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콤플렉스가 그를 가지고 있음을 모른다”고 융은 말한다. 그러므로 콤플렉스를 의식화하는 것은 인격성숙에 중요한 과제가 된다.

  무의식의 콤플렉스를 깨달으려면 불쾌감과 고통을 감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체면을 존중하는 사회의 사람들은 자기의 약점이 찔리거나 아픈 곳이 찔릴 때  움츠러들거나 완강하게 반발함으로써 그것을 보고자 하지 않는다. 이런 경향은 권위주의 사회에서 더 심하지만 비판을 전통으로 삼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정도는 약하지만 일반적인 경향이다.    

  콤플렉스란 일찍이 사람들이 발을 들여놓은 일이 없는 금역(禁域)이며 사람들은 다소간 콤플렉스공포Komplexfurcht를 가지고 있다. 이런 공포는 무의식에 이르는 나쁜 길잡이라고 융은 말한다. 콤플렉스에 대한 공포감은 결국 낯선 것, 이상한 것, 새로운 것에 대한 공포감이다. 자아는 마치 어떤 새로운 사상, 새로운 학설, 새로운 유행이 들어왔을 때 보수적인 사회가 보여주는 공포감과 의혹, 불신감과 같은 것을 갖게 되며 그것을 없애버리던지 외면하려고 한다.

  여기서 편견이 싹튼다. 콤플렉스에 대한 저항으로 의식이 그의 일방성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콤플렉스는 일시적으로는 의식표면에서 억압될 수 있으나 그것이 생명현상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이상 아주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콤플렉스를 남김없이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며, 언제나 모르는 부분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것은 결국 무의식이 남김없이 다 파헤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3장 마음의 구조와 기능

                                마음의 구조


 1.자아 Ich, Ego와 의식 das BewuBtsein

  

  자아는 의식속의 정신부분이며 매순간마다 우리의 인식에 들어오는 지각, 기억, 사고 감정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일생을 통해 광범위한 자극 속에 끊임없이 몰려있어 효율적으로 그 많은 자극에 다 주의를 기울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위에 있는 것들을 선택하여 지각해야 한다. 우리에게 해롭거나 위협적인 것들과 함께 무의미하고 부적절한 사소한 자극들도 걸러낸다. 자아ego가 이 절대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감각이든 관념이든, 기억이든, 자아의 의식 속으로 받아들인다.

  의식이란 자아에 대한 심리적 내용의 관계를 유지하는 기능이며 활동이다. 의식이란 마치 피부와 같은 표면이고 그 밑에 끝없는 미지의 영역이 있다.

  의식은 다분히 외부세계에 관한 방향감각과 지각의 산물이라고 융은 말한다. 그렇다면 의식은 어떻게 생겼는가? 그것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프로이트는 초기에 무의식이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봄으로써 무의식의 자율적 기능을 축소하였다.

  융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 있던 것은 무의식적인 것이다. 의식은 무의식적인 상황에서 생겨났다. 유아기에 우리는 또는 그 이전에 ‘나, 내 자신’이라는 것을 발전시킨다. 그러므로 의식은 첫째로는 자기 신체,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식을 통해서 둘째로는 일련의 기억에 의해서 형성된다. 물론 그 뒤에 많은 것이 의식을 구성하게 된다. 정신적 기능의 분화, 여러 가지 종류의 개인적 분화 등이 뒤따른다. 사고, 감정, 감각, 직관 등 융의 이른바 정신의 네 가지 기본기능도 의식의 내용이 된다. 의식은 무의식의 산물이다. 그것은 격렬한 노력을 요하는 조건이다. 의식됨으로써 사람은 피곤해진다. 의식에 의해서 사람들은 지친다.

  자아가 없으면 인간정신의 성숙도 불가능하고 융의 개성화Individuation도 불가능하다.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화하려면 자아가 있고 의식이 있어야 한다. 의식은 좁은 것이라 하였다. 무의식은 작은 섬을 둘러싼 대양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의식은 작은 섬처럼 가만히 있는 실체가 아니고 항상 변하고 있다. 물론 무의식은 무한히 크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도 커지고 있다.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함으로써 의식은 그 시야를 넓혀가고 있다.    



 2.무의식 das UnbewuBte


  무의식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모르고 있는 우리 정신의 모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지의 정신세계-그것이 무의식이다. 무의식이라는 말은 그런 정신세계를 표현하는데 썩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그대로 쓰고 있고 이것을 ‘미지의 정신계’ 또는 ‘미의식’이라 불러도 상관없다.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자기도 모르는 어떤 것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에 불쾌감을 가진다. 무의식의 개념이 처음으로 제창되었을 때 일어난 수많은 반발과 조소가 그것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내 마음은 내가 잘 알고 남이 내 마음을 알 까닭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마음의 병을 일으키면 그때는 가족들이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으면 된다고 말하고, 환자도 믿고 여러 가지 치료를 해본다. 그러니 심리학적인 치료, 정신치료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강조한다. 그러나 노이로제 증상은 이러한 상식이 맞지 않음을 설명한다.

  환자가 괴로워하는 것은 바로 “내 마음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하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하지 않을 수없는 쓸데없는 생각, 공포, 바보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꼭 3이라는 숫자를 외지 않고서는 무슨 일을 시작할 수 없는 괴로움, 걱정할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느닷없이 엄습하는 죽음의 불안, 이것들은 다 ‘의식’, ‘나’, ‘의지’라는 것이 이미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무엇이 우리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증거이며 그것을 가리켜 무의식의 작용이라 한다.

  반드시 노이로제를 통해서만 무의식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용어가 의식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어떤 미지의 힘을 암시한다. 가령 “나도 모르게” 실수를 한다든가 “어쩔 수 없이” “이끌리는 듯한 기분으로”무엇을 한다든지 하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거니와 이것은 모두 내가 알고 있고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정신계 너머의 또 하나의 무엇이 존재함을 가리키는 것이며 융은 무의식에는 두 가지 층이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겪은 개인생활에서의 체험내용 가운데서 무슨 이유에서든 잊어버린 것, 현실세계의 도덕관이나 가치관 때문에 현실에 어울리지 않아 억압된 여러 가지 내용으로서 반드시 성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 그것을 포함한 모든 그 밖의 심리적 경향, 희구, 생각들, 고의로 눌러버린 괴로운 생각이나 감정, 그리고 의식에 도달하기에는 그 자극의 강도가 미약한 문턱 밑 지각의 내용-이 모든 것으로 구성된다. 이와 같은 무의식 층은 의식이 그러한 것처럼 개인의 특수한 생활체험과 관련되고 개인의 성격상의 특성을 이루는 것들이어서 융은 이를 개인적 무의식das personl unconscious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무의식에는 이러한 개인적인 특성과는 관계없이 사람이면 누구에게서나 발견되는 보편적인 내용이 있다.

  이러한 내용은 태어난 이후의 경험내용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 이미 가지고나오는 무의식의 층으로서 일찍이 의식된 일이 없는 것들이다.

  이것은 개인적 특성보다는 인류 일반의 특성을 부여하는 요소들이다.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뜻에서 융은 집단적 무의식daskollektive UnbewuBte이라

하였다. 집단적 무의식은 인간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근원적 유형(원형)Archetype들에 의하여 구성된다. 근원적 유형 또는 원형이란 지리적 차이, 문화나 인종의 차이와 관련 없이 존재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동유형을 말하는데, 이것은 신화를 산출하는 그릇이며 우리 마음속의 종교적 원천이다.

  무의식은 샘물과 같은 것이며 거기에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향하는 에너지가 저장되어있다. 또한 무의식은 생명의 원천이며 창조적 가능성을 지닌 것이다. 그것은 방어해야 할 위험한 충동이기보다 체험하여 의식의 것으로 동화해야 할 것들이다.

  무의식의 또 하나의 특징은 자율성autonomy이다. 무의식은 의식작용에 구애받음 없이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서 움직여 가고 있다는 견해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의식은 의식작용보다 더 항구적이며 때로는 그를 능가하는 특징을 가진다고 보며 이 자율성은 창조적 자율성이다. 무의식은 의식을 그 자율적인 힘으로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게 여러 가지 미래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무의식의 의식에 대한 관계는 대상적이다. 대상작용(代償作用)은 무의식의 중요한 기능이다. 다시 말해 무의식은 의식의 결여된 것을 보충하는 역할을 하며 그럼으로써 그 개체의 정신적인 통합을 꾀한다. 의식이 너무 일방적으로 지적이면 무의식은 정적인 특징을 띠며 의식이 지나치게 외향적이면 무의식은 내향적인 경향을 띤다.

  정신을 의식, 무의식으로 이분하는 것은 인공적인 것이고 편의적인 것이다.



 3.그림자 Schatten


  심리학적인 의미에서 그림자란 바로 나의 어두운 면, 즉 무의식적인 측면에 있는 나의 분신이다. 자아의식이 강하게 조명되면 될 수록 그림자의 어둠은 짙어지게 마련이다. 선한 나를 주장하면 할수록 악한 것이 그 뒤에서 짙게 도사리게 되며 선한 의지를 뚫고 나올 때 느닷없이 악한 충동의 제물이 되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만을 하고자 하고 자기는 옳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나쁜 것’에 대한 유혹에 빠지기 쉽다. 위선자라든가 이중인격자란 바로 자기 마음속의 검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못하는데서 온다. 낮에는 점잖은 의사이나 밤마다 포악한 괴물로 변하는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는 의식적 인격과 무의식적 인격의 이중성을 표현하는 좋은 예이다. 하이드는 의사 지킬의 그림자가로 하 수 있다.

  민간설화에 나오는 많은 대극적 인물-이를테면 ‘흥부 놀부’, 콩쥐 팥쥐‘, ’가짜와 진짜‘ 등 무수한 쌍들이 바로 인간정신의 의식성과 무의식성, 명(明)과 암(暗)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자는 의식의 바로 뒷면에 있는 여러 가지 심리적 내용으로 열등한 인격과 같은 것이다. 그림자는 본래부터 그렇게 악하고 부정적이고 열등한 것이 아니라 그늘에 가려 있어서, 다시 말해 무의식 속에 버려져 있어 분화될 기회를 잃었을 뿐이며, 그것이 의식되어 햇빛을 보는 순간, 그 내용들은 곧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림자의 부정적인 측면은 대게 상대적인 것이다.

  그림자shadow는 가장 강력하지만 잠재적으로는 해로운 원형이다. 그것은 인류의 조상으로부터의 원시적 동물 본능을 포함하고 있어 가장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양측이 모두 표현되어야 하는 가장 선한 국면과 악한 국면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특히 문제시되는 원형이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그림자는 사회가 사악하고 죄를 짓는 것이고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충동을 포함한다. 그런 까닭에 그림자는 어두운 측면으로서 다른 측면들과 조화롭게 진보되기 위해서는 약화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런 동물적이고 원시적인 충동을 억압하지 못하면 사회의 관습이나 법률과 충돌하기 쉽다. 그러므로 문명세계의 인류가 되기 위해 그림자의 힘을 제어해야 하지만 그들을 완전히 억압해 버리면 그것이 가진 바람직한 특질을 감소시키거나 파괴시킬 염려가 있다. 그림자는 동물 본능의 근원일 뿐 아니라 자발성, 창의력, 통찰력, 그리고 깊은 정서 등 완전한 인간성에 필수적인 성격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림자가 완전히 억압당했을 때 성격은 극히 가치 있는 과거의 본능적 지혜로부터 완전히 차단당하여 무기력하고 생기가 없어진다고 융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림자를 완전히 억압하여 사람의 행동을 세련시키고 그림자가 긍정적으로만 표현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건강한 성격을 갖기 위해서는 여기서도 역시 성격의 한 부분을 배제하고 다른 한쪽 면, 혹은 부분만을 지나치게 억제하거나 발달시킬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우리가 이제껏 살펴 본 바와 같이 서로 상반되는 것들이 조화롭게 섞이고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융의 건강한 성격 이론의 기초가 되고 있다.

  자아(ego)가 그림자(shadow)의 지배력을 조절하여 양면이 균등하게 표현될 때 그 사람은 생기 있고 박력있으며  삶에 열의를 갖게 된다. 그리고 정서와 의식이 다같이 강력하므로 정신적 육체적 영역에 모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고 반응할 수 있다. 융은 그림자가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의 동물적 본능의 몇몇 표현이, 창조적인 사람들을 그렇게 생기 있고 폭발할 듯 활력 있게 보이게 하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림자가 완전히 억압되어 있을 때는 성격이 단조롭고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자기 본성의 어두운 부분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마저 있게 된다. 나쁜 동물적 본능은 억압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자아(ego) 속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위기나 취약기가 오면 지배권을 다시 장악할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무의식부의 지배를 받게 되는 건강하지 못한 상태가 된다.



 4.외적인격과 내적인격


  (1)페르조나 Persona


  페르조나는 참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가 ‘어떤 사람이 무엇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 서로 타협하여 얻은 결과다. 페르조나는 내가 나로서 있는 것이 아니고 남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를 더 크게 생각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진정한 자기self와는 다른 것이다. ‘페르조나’에 입각한 태도는 주위의 일반적 기대에 맞추어 주는 태도이며 외계와의 적응에서 편의상 생긴 기능콤플렉스funktionskomplex이다. 그것은 환경에 대한 나의 작용과 환경이 나에게 작용하는 체험을 거치는 동안 형성된다.

  우리나라 말 가운데 ‘페르조나’에 해당되는 말은 ‘체면’, ‘얼굴’,‘낯’과 같은 것이다. 어른의 체면, 남편의 체면, 교육자의 체면, 숙녀의 체면 등 그것은 모두 어떤 사회집단이 그 집단의 특수한 성원에게 한결같이 요구하는 일정한 행동 상 규범이며 제복과 같은 것이다. 체면이라는 말은 ‘사명’, ‘역할’, ‘본분’, ‘도리’라는 말로 바꾸어도 같은 설명이 성립된다.

  페르조나는 집단공유의 보편적 원칙이기 때문에 때로는 어느 집단에만 적용되고 다른 집단에는 적용되지 않는 행동양식이다. 인류학자나 문화정신의학자가 관심을 가지는 ‘문화적 특수성’이라고들 부르는 것이 여기에 관련된다.

  집단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 자아는 차츰 자기도 모르게 집단정신에 동화되어 그것이 진정한 개성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자아가 페르조나와 동일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집단이 요구하는 역할에 충실히 맞추어주는 사람이 된다. ‘페르조나’와의 동일시가 심해지면 그의 내적인 정신세계와의 관계를 상실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게 되고 그 존재조차도 잊어버린다. 갱년기 우울증은 그 심리적 요인이 그 사람이 페르조나와 지나치게 동일시 해왔기 때문에 무의식이 자아의식의 일방성을 대상하게 될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인간정신으로 하여금 하나의 전체가 되고자 하는 무의식의 작용이 의식의 경직된 일방적 태도를 과보상하게 되면 자아의식의 기능을 정지시키기에 충분한 장애가 생기는 것이며, 우울증상은 그것을 통해서 밖으로만 향해온 자아의 시선을 안으로 돌리도록 하는 목적의미도 가지고 있다.

  페르조나는 마음(心)seele이 그러한 것처럼 하나의 관계기능beziehungs-funktion이다. 심령이 자아와 무의식의 깊은 곳을 연결하는 기능을 가졌다면 페르조나는 자아로 하여금 외계와 관계를 맺게 하여 주는 기능이다.

  페르조나는 가상(假相)이다. 그러나 그것은 없애야 할 것이라기보다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자아의 궁극적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지각은 페르조나를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수단이라고 보고 거기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페르조나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페르조나와의 맹목적인 동일시가 문제되는 것이다.



  (2)아니마 Anima, 아니무스 Animus


  아니마Anima, 아니무스Animus란 무의식에 있는 내적 인격의 특성을 말하며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를 아니마,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특성을 아니무스라 부른다. 이때 말하는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것은 사회적인 통념을 넘어선 보편적, 원초적 특성을 말한다.

  남성에서의 아니마는 기분mood, 정동emotion으로 나타나고 아니무스는 생각, 의견meinungen, opinion으로 나타난다.

  아니마 원형이 지니고 있는 기분의 성질은 어둡고 밝은 여러 뉘앙스를 띠고 있어서 꼭 이것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아니마는 마치 우리나라의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에 나오는 선녀처럼 붙잡기 어려운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화하기 쉽지 않다. 아니마가 의식되지 않아 미분화 상태에 있으면 그것은 원시적인 감정과 통하게 된다. 그것은 침착하고 이성적임을 자랑하는 남성으로 하여금 폭발적인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이 순간 그는 부정적이 아니마negative anima에 사로잡힌 것이다. 아니마가 통합되지 않고 무의식 속에 너무 강하게 배치되면 그는 무의식적인 자극에 쉴 새 없이 영향을 받아 여성화되어 요변스러운 남자, 변덕스러운 사람이라는 평을 받게 된다. 때로는 분방한 추측, 질투, 의혹에 사로잡혀 부인을 괴롭히는 수도 있는데 그것은 남성이 바로 완전무결한 호남(好男)의 페르조나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아니무스가 미분화되면 ‘따지는 버릇’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자기의 생각이 정당하다는 것을 미리부터 정해놓고 시작하는 의논이므로 아무도 이론(異論)을 제기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확고부동한 의견’의 형태를 취한다. 이로정연(理路整然)한 논리적 판단이 아니고 자기의 의견을 증명하기 위한 궤변이다.

  이런 부정적 아니무스는 남성의 아니마를 유혹해서 토론장으로 끌어들이지만 결국 남성은 자기의 미분화된 아니마-분노animositat에 사로잡혀 화를 내고, 여성은 ‘무엇이나 바르게 아는 신’으로서의 아니무스로 하여금 “미안하지만 내가 또 옳았다”고 말하게 함으로써 파장을 하게 된다. 그런 뜻에서 대게 아니마는 비합리적인 감정이며 아니무스는 비합리적인 의견이다.

  부정적인 아니마는 자신이나 타인을 깍아 내리는 작용을 한다. 부정적 아니무스 역시 파괴적인 작용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잘 분화된 아니마가 창조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듯 잘 분화된 아니무스는 남성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지혜의 원천이 되어 그들의 추상적 사물에 의해서 흐려진 시야에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다.

  아니마는 영원으로 향하는 이념에의 열정이다. 아니마가 투사되는 곳에 주목할만한 역사적 감정이 일어난다. 그런데 아니무스에는 이와 같은 역사적 감정이 없다. 아니무스는 현재와 미래를 더 많이 생각한다.



5.원형론


  원형은 인간의 전 정신을 사로잡는 원초적 폭력urgewalt이라 할만한 것이다. 이 힘은 자아로 하여금 통속적인 인간적인 영역을 뛰어넘게 한다. 자아의 힘은 원형과의 접촉을 통하여 팽창되거나 과장되고 자유를 잃으며 원형의 크나큰 세력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것은 창조적인 방향이든 파괴적인 방향이든 자아를 구속하게 된다.

  원형이 일으키는 감정은 평범한 감정이 아니라 누미노즘Numinosum(신성한 힘)을 내포한 감동 또는 충격이다. 그것은 초인적이며 또한 비인간적인 충동이다.

  원형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인간정신의 보편적이며 근원적인 핵이다. 그것은 태어날 때 이미 부여되어 있는 인간의 선험적 조건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답게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은 문화적인 전통과 관련된 인간관, 또는 가치관의 차이를 넘어서는 것이다. 원형은 시간과 공간의 차이, 지리적 조건의 차이, 인종의 차이를 넘어 선 보편적인 인간성의 조건이다.

  갖가지 원형의 총체로서 무의식은 모든 인간체험-우리가 아직 모르는 시원의 체험을 포함한-의 침전이다. 원형의 내용은 상image으로 나타난다. 여러 가지 ‘현상’을 통해서 그 ‘현상’을 일으키는 본체의 존재를 추측한다. 그러므로 융은 원형 그 자체Archetypus an sich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고 하였다.

  원형이란 그자체로 비어있는 형태적 요소이며 선험적으로 주어진 여러 관념유형을 산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대를 이어 전승되는 것은 관념Vorstellungen들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Formen이라고 융은 말한다.

  본능Instinkt은 원형과 뿌리를 같이하는 현상이다. 본능이란 융에 의하면 인간에게 있어 고도로 복잡한 행동을 일으키는 합목적적인 충동antrieb이라한다. 성본능만이 본능이 아니다. 인간에게 있어 규칙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본능과 원형이 문제된다. 다만 관념상으로 볼 때 본능은 고태적 충동이며 원형은 하나의 관(觀이)라고 구별하여 설명된다. 전자가 인간의 복잡한 행동을 일으키는 충동이며 정감이라면, 후자는 그 복잡한 행위를 선험적으로 파악한 견해, 또는 관조의 특수한 양식들이다.

  사실상 본능과 원형은 관념상으로는 구별이 되나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생명현상에 속하며 집단적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원형상은 발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들의 꿈에 나타난다. 그것은 합리주의 사고가 지배하고 있는 정신세계보다는 비합리적 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류의 문화유산 속에서 발견된다.

  원형은 자아의식이 무의식을 보지 않으려고 외면하거나 억압할 때 오히려 강력한 힘으로 의식의 문을 두드린다. 원형의 기능은 ‘목적의 선험적 소유로써’ 이루어짐을 융은 지적한다. 미리알고 어떤 일을 시킨다는 말이다.

  원형상은 개인적 무의식의 내용처럼 의식의 일부로 동화시킬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자아는 그 영향 아래에 자기를 맡기거나 그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을 구별하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어느 경우에나 자아의 오만을 피하고 경건하게 무의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른바 ‘주의 깊은 고려religio’의 태도가 바람직하다.

  융은 또한 청년기에는 반드시 원형상의 분석을 요하지 않으나 중년 이후의 사람에게는 특히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대극의 문제gegensatz-problem를 해결하는 원천이 여기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6.자기 Selbst와 자기실현 Selbst verwirklichung


  (1)자기원형 Archetypus des Selbst


  자기(自己)selbst란 의식과 무의식을 통튼 하나인 그의 전부를 말한다. 이것이 원형으로 다루어지는 이유는 전체가 되고자 하는 힘이 원초적으로 인간에게 조건지어져 있다는 견해에서 온 것이다. 인간의 무의식에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전체가 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다.

  정신적인 발전의 목표는 자기(自己)selbst인데 이 발전은 융에 의하면 직선적인 발전이 아니라 자기의 순환적 발전Circumambulation이다.

  자기원형은 지남력(指南力의) 원형(元型)으로서 우리가 정신적으로 혼돈chaos에 빠져있을 때 방향을 가리켜 주는 것이다. 그것은 질서ordnung를 형성하며 혼돈으로 하여금 우주kosmos로 전환케 한다.

  자기원형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상징을 보내서 자아로 하여금 전체로서의 생을 발휘하도록 촉구한다. 때로는 저절로 의식에 충격을 가하여 창조적인 인격의 변환으루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2)자기실현 Selbstverwirklichung

           

            자기실현의 과정                 자기실현의 과정     


  자기원형이 한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 자신이 되게끔 하는 인간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근원적 가능성이라면 ‘자기실현’은 이러한 가능성을 자아의식이 받아들여 실천에 옮기는 능동적인 행위를 말한다. 여기에 자아의 결단과 용기와 인내심이 필요하며 이것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의식과 무의식의 합일이 가능해진다.

  자기실현은 다른 말로 개성화라고도 한다. 진정한 개성을 실현한다는 뜻이고  그 사람 자신의 전부가 된다는 뜻이다.

  개성화 또는 자기실현은 첫째, 집단정신과 나의 삶의 목표를 구별하는데 있다. 구별은 하나의 자각된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결코 집단정신-페르조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아의식의 형성과 강화 및 페르조나의 형성은 한 인간의 성장과정에 필수적인 초기의 발전과정이며, 개성화가 그 사람의 전체를 실현하는 것인 이상 그의 모든 정신세계에는 페르조나도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자기실현은 자아가 사회적 역할과 맹목적으로 동일시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자아성숙의 궁극적 목표가 페르조나가 아니라는 자각으로 나의 사명과 집단정신을 구별하되 사회적 의무와 규범의 필요성을 자기의 전체성에 합치되는 때로는 능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때로는 여기서 물러나 안의세계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자기실현은 간단히 말해서 농부로 하여금 농부로, 서양인으로 하여금 서양인으로, 한국인으로 하여금 한국인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자기실현이 되면 될 수록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갖출 것이다.

  자기실현은 무의식을 의식화함으로써 가능하다. 자기분석은 결코 유쾌한 작업은 아니다. 때때로 그것은 전혀 자아의 욕구나 의지에 반해서 실천되어야 한다.



제4장 심리학적 유형론


 1.일반적 태도의 유형


  (1)외향형 der extrovertierte Typus, extroverted type

  일반적 태도-중요한 결정이나 행동의 대부분이 주체의 의견에 의하지 않고 객관적인 상황에 의해서 좌우될 때 외향적 태도라 하고, 이런 외향적 태도가 습성화되어 그의 생활의 일정한 특징을 이루면 외향형이라 한다.

  도덕적인 행동기준도 사회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요구, 즉 일반적인 도덕관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는 정확하게 사회에 순응하나 또한 이와 꼭 같이 정확하게 사회와 더불어 파멸한다. 여기에 외향형의 제약이 있다고 융은 말한다.

  외향형은 외향적인 태도가 일방적으로 극단화될 때 자기의 주체를 소홀히 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주관적인 사실로 가장 소홀히 되는 것은 신체이다.외향형은 이상한 신체 감각이 나타나야 비로소 여기에 관심을 가진다.

  신체적 이상은 흔히 일방적 외향적 태도의 무의식적 보상작용의 하나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주관적인 것을 아주 무시하고 객관적인 상황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 도 없다. 건전한 외향형에서는 항상 적당한 보상을 내향적인 작업을 통해서 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장기인 객관적 현실에 대한 참여가 건설적이고 유익한 방향으로 실시되는 것이 보통이다.

  

  (2)내향형 der introvertierte Typus, introverted type

  똑같은 사물을 볼 때 외향적인 사람은 객체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을 주로 보지만 내향적인 사람은 객체의 인상이 주체 안에서 형성한 것에 의거해 사물을 본다.

  내향적인 의식의 태도에도 물론 외적인 조건을 인식하는 능력이 있지만 언제나 그 판단과 행동에 결정적인 것은 주관적인 속성이다.

  객관적인 태도가 우연성에 의해 변할 수 있는 것처럼 주관적 태도도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하나도 절대적이기 보다 상대적이다.

  건전한 내향형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며 이에 입각해서 판단, 행동하려는 사람이며 자아에 매달리는 사람 아니다.

  그러나 내향형은 자아를 자기와 혼동해서 뒤바꾸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아를 자기의 위치로 무제한 높인다. 다시 말하면 자아의 판단을 극대화하고 그것이 절대적임을 주장하게 된다. 이때 그는 그의 장점인 무의식에의 깊은 통찰을 못하게 될 가능성이 생긴다.

  그의 단정적이고 강하게 일반화하는 표현양식을 통하여 마치 그가 모든 다른 의견을 처음부터 배척하기나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게다가 모든 객관적 소여(所與)를 선험적으로 지배하는 주관적 판단의 결연성, 경직성만으로도 강한 자기중심주의라는 인상을 풍기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러한 유형에 따르는 편견이나 선입관념을 극소로 줄이려면 각자가 자신의 무의식적 경향에 대하여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향형이 자기 자신에 입각해서 사물을 판단하고 이에 따라 행동할 때 그는 이 세계와 인간의 마음의 심층을 깊이 있게 통찰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내향형이 자기의 전인격인 자기 자신에 입각하지 않고 단지 의식의 중심인 자아에 사로 잡혀있게 되면 의식의 경향은 독선과 자기중심적인 오만에 사로잡히고 객체에 대한 관심과 고려를 무시하게 된다. 그 결과 모든 객체와의 관련성은 무의식에 억압된다.

  극단적인 내향적 태도에 의하여 생기기 쉬운 전형적인 신경증은 정신쇠약증(신경쇠약증)psychasthenie이다.



 2.정신의 4기능과 기능유형

                    에난치오드로미 현상(대극의 반전)

  (1)사고 Denken, thinking


  사고라 하면 판단작용이 수반되어야 한다. 단순한 연상 작용의 결과는 엄밀하게 말해서 사고가 아니다. 그러나 사고에는 능동적인 사고 작업과 저절로 일어나는 수동적인 사고 작업이 있다. 전자는 어떤 목적으로 향하여 방향 지어진 사고로서 의지적 판단작용이며 합리적 기능이지만, 후자는 일종의 직관적 사고라 할 만한 것으로 비합리적 기능이다.

  사고가 분화한다는 것은 그것이 고태적(古態的)인 것과 혼동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고는 판단작용인데 판단은 평가기준을 전제로 한다.

  외향적 판단에서는 주로 객관적 관련성에서 빌려 온 평가 기준이 유효하고 결정권을 갖는다. 그러므로 사고가 외향적이냐 내향적이냐 하는 것은 판단이 어떤 기준에 따라 이루어지는가, 그것이 주관적인 원천에서 나왔는가 밖에서 매개된 기준에 의해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다르다.

  또 하나의 구별 점은 결론의 방향인데, 사고가 주로 외적인 방향을 취하는가 내적인 방향을 취하는가 하는데 있다. 생각이 종국에 객관적인 사실이나 이미 보편화된 개념으로 이끌어 지는가, 아닌가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란 아무리 객관적 소여에서 출발하고 객관적인 것으로 향하는 경우일지라도 언제나 생각하는 주체와의 관계를 맺고 있는 이상 주관적인 사고과정이 병행해서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사고과정에서의 중심이 주관적인 과정에 있을 때는 그것이 객관적인 과정에 있는 것과는 다른 또 하나의 사고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내향적 사고이다.

  내향적 사고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객관적 대상가운데서 주관적인 의미를 발견하는데 있다.

  

  (2)감정 Fuhlen, feeling


  융은 감정을 표상(表象)이나 지각Empfindungen의 2차적인 현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독립된 기능으로 본다.

  감정기능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과정이어서 외부의 자극과 전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있을 수 있는 과정이라고 한다. 감정은 사고나 마찬가지로 이성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판단의 한 양식이다. 그러므로 합리적 기능이다. 지적인 판단과 다른 것은 개념적인 관련성을 형성하지 않는다는 데 있을 뿐이다.

  감정은 감각뿐 아니라 사고, 직관 등 다른 기능과 섞여있는 수가 있다. 이런 혼융상태는 특히 감정이 미분화상태에 있을 때 잘 일어난다.

  융은 또한 평범한 구체적 감정과 추상적 감정을 구별한다. 구체적 감정은 어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주관적 개인적 평가를 하지만 추상적 감정기능은 어떤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감정상황을 규정한다.

  외향적 감정에 있어서는 객체적 기준이 그 감정 판단의 근거가 되고 내향적 감정에서는 주체의 기준이 판단의 근거가 된다.

  내향적 감정은 주체에 입각한 감정 판단을 한다. 그것은 비록 “세계가 무너져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스피노자Spinoza의 명언과 같은 숨은 확신 속에 나타난다.

  감정이란 결국 지적인 개념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융은 말한다. 왜냐하면 사고는 감정과는 반대 극에 있어 서로 상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3)감각 Empfindung, sensation


  감각이란 물리적 자극이 인식을 매개하는 심리기능이다.  지각perzeption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감정과는 순수한 의미에서 별개의 독립된 기능이다.

  감각은 사고나 감정처럼 이성의 법칙을 통한 판단이 아니다. 그런 뜻에서 비합리적 기능이다.

  우리나라 말에는 감각적인 표현이 많이 있다. ‘느낌’이니 ‘생각’이니 하는 말 가운데 상대방의 느낌에 대한 물음이 함께 포함된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감각기능에도 외향적 감각과 내향적 감각이 있다.

  외향적 감각에서 감각은 주로 객체에 의해서 결정되고, 내향적 감각에서 지각되는 것은 순수한 객체상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관적 감각은 물리적 세계의 표면보다 그 뒷면을 파악한다.


  (4)직관 Intuition


  직관이란 무의식적인 방법으로 인식을 유도하는 심리기능이라고 융은 말한다.

  “직관이란 그 파악하는 내용이 무엇이든 하나의 본능적인 파악instinktives Erfassen이다.” 감각이나 마찬가지로 비합리적 인식기능이다. 직관 내용은 감각내용이나 마찬가지로 사고나 감정 내용처럼 유도되거나 표현된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Gegebenheit이라는 특징이 있다. 우리는 직관이나 감각을 사고나 감정처럼 어떤 이성의 법칙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거치지 않고 직접 발견하고 직접 지각한다. 그러므로 직관적 인식은 확실성Sicherheit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직관은 주관적 형태와 객관적 형태로 나타난다. 전자는 주관적 영역인 무의식의 심리적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며, 후자는 객체에 있어서의 역하지각subliminale Wahrnehmung과 그 인식을 통해서 야기된 역하감정과 사고에 의거한 객관적 사실의 인식이다. 감각과 함께 직관은 사고와 감정 같은 합리적 기능이 성장하는 모체라고 융은 또한 주장한다.

  감각과 직관은 곧잘 혼동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외향적 직관형의 경우에는 외향적 감각형이나 마찬가지로 둘 다 객체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에 그것이 직관이 아니라 감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외향적 감각형에서의 감각은 직관적 관조를 방해하여 사람의 시선을 객체의 물리적 표면으로 향하게 한다. 그런데 바로 그것을 지나 그 배면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직관이다.



 3.심리학적 유형론의 응용과 열등기능


  (1)열등기능의 인식과 자기실현


  정신의 4기능 중 정상적으로 누구나 어느 하나의 주 기능 또는 우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열등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흔히 열등 기능이라 하면 언제나 열등한 채로 있는 기능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열등기능은 분화될 수 있고, 또한 전인격의 실현을 위해서는 분화되어야 할 기능이다. 열등기능의 분화발달은 자기실현Individuation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열등기능이란 무의식화 된 기능이며 무의식의 의식화가 자기실현의 핵심적인 과정이고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무엇이 자기의 열등기능인가를 아는데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은 “무엇이 나의 신경을 건드리는 가”를 아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나에 대한 지적, 비난, 비평 가운데 특히 나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감정부문인가 감각영역인가, 사고와 관련 되는가 직관에 관계되는 것인가 살펴보면 열등기능의 정체를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말이 바로 나의 열등기능을 건드릴 때 나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충격을 받거나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등감이란 바로 열등기능의 소재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런 종류의 열등감을 해소 하는 데는 열등감을 누르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열등한 기능을 분화시키는 것이 가장 긴요한 일이다.



  (2)심리학적 유형의 측정도구와 임상적 응용


  유흥의 심리학적 유형은 본래 주관적 경험적 개념이며 경험을 통하여 파악하며 성찰할 수 있는 것이다. 유형검사는 대인관계, 특히 배우자 상호관계, 교육성취도, 직업적성, 자기 자신의 성격의 성찰 등에 많이 적용될 수 있는 소지가 있고 이해하기가 쉽기 때문에 열등기능을 발견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 심성의 복잡한 문제를 유형설 하나로 해석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그것도 객관적인 계측이 지닌 제약점을 무시하고 그 결과를 절대시 할 때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심리학적 유형은 하나의 원형적 근원에서 우러나온 판단으로 유형이 성찰의 대상이 될 때 우리는 항상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게 되며 바로 그런 탐색 자체가 사람들의 자기 인식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론에 대한 비판>

  융의 이론은 다른 어느 건강한 성격이론과도 다르다. 이성(理性)과 논리의 의식적 요소를 강조하는 20세기의 이론과는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논란의 여지도 많고 초월주의, 초자연주의와 종교의 혼란스러운 혼합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대체로 융의 업적은 심리학이나 정신병리학에서보다 종교, 역사, 예술, 문학 분야에서 더 많은 인정을 받아왔다.

  융은 살아가는 의미의 부재(不在), 과거나 자연과 일맥상통하는 뿌리나 연결의 부족 등 20세기 후반기의 존재적 특성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상태에 대해 저술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성과 과학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보다 넓고 영혼적이며 철학적인 가치에 대한 안목을 잃었다.

  이런 면에서 융의 위치는 극단적이 아니고 온건하다. 그는 이성을 단념하거나 무의식의 통제에 굴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성을 발휘하되 무의식의 힘을 좀 더 잘 인식함으로써 조절하여야 한다. 이런 상반된 부분들 간의 균형과 통합에 그 관건이 있다.

  융의 외향성, 내향성이라는 개념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단순한 의식부 안의 분류라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실제로 이것은 융도 인식하고 있던 것이어서 세계를 지각하고 반응하는 것을 보다 완전하게 설명하기 위해 사유, 감정, 감각, 직관이라는 기능군을 도입했다.

  인간의 심리를 여덟 가지 심리형으로 태도와 기능을 조합시킨 것이 다양한 인간의 행동을 총괄하기에 충분한지는 의문이다. 융의 심리형은 일반적인 의미로만 적용이 가능한 것 같다(그리고 이런 것은 아마 어떤 이론이든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연구가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융의 집단 무의식에 대한 이론은 대부분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가 개인 무의식에 축적된 개인적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분명한 것처럼 내게도 여겨진다. 결국 과거에 직면해서 맞섰던 경험과 자극을 받아 생기는 변화 외에 무엇이 학습되는가? 그 경험들은 의식적으로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 존재나 행동의 영향력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정신분석이나 인간 성격 연구를 한, 다른 사람들도 언젠가 한 번은 의식에 있었으나 더 이상은 의식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경험들에 의해 본성이 영향 받을 수 있다는 증거를 제출한 바 있다. 그러나 집단 무의식이라는 사실은 내게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원시 조상들의 기억에서 우리 인간들이 항상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활동할 소인(素因)을 물려받았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런 견해는 지적(知的)으로나 정서적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는 하나 그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다. 인류의 진화는 어떤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경험이 특징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어느 시대에든 인간은 탄생과 죽음, 어머니상(像), 혹은 일종의 신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이 경험들이 융이 제시한대로 새로운 각 세대로 끊임없이 전하여지는 것인가?

  융은 자기와 환자들의 환상과 꿈속에 공통된 주제와 상징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것이 서로 다른 문화와 시대에서도 공통됨을 발견하였다. 이런 사실들은 경험의 보편성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긴 하지만 어떤 형식으로 유전된다는 결정적 증거는 되지 못한다. 인간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매 시대마다 유사한 경험을 겪고 유사하게 반응한다는 것만을 지적할 뿐이다.

  의견을 같이 하고 있는 융의 이론 중 한 가지는 중년기에 일어나는 성격의 변화를 의식한 점이다. 중년기의 사람들과 상담(counseling)할 때 융이 설명한 것과 같은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본다. 그 사람들은 삶이 진부하고 무의미하다고 불평하며 젊은 시절에 느꼈던 활력과 열정과 흥분을 갈망한다.

  중년기의 추이에 대한 발달심리학 저서를 살펴보면 그 시기가 보편적이며 불가피한 성격 변화기라는 융의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인간이 자기의 주관적 본질적 내부를 향하게 되고 이제는 부적절해진 가치와 의미를 대신할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찾는 시기이다.

  융의 건전한 성격의 본질에 관한 논의는 다른 이론가들만큼 분명하지는 않다. 따라서 융이 보는 건강한 사람은 어떠한지 정확하게 그려보기가 더욱 어렵다. 나는 그러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성격 특징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 그들이 자기 자신을 알고 받아들인다는 것, 타인 또한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관대하다는 것, 자신과 성격 전체를 통합해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일방적이고 다소 모호한 특성들 이상으로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 다른 이론가들은 이보다 자세하게 건강한 성격을 묘사하여 제시했다.

  융의 심리적 건강이라는 개념은 선택된 몇몇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분명하다. 자아의 인식이란 성공적으로 무의식과 충분히 대결할 여지가 있는 영리하고 충분히 교육받은 사람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융의 환자들은 모두 이 범주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대중들은 발달의 최상 상태를 놓칠 수 있다.

  융의 이론의 궁극적 성격이 무엇이고 평가가 어떠하든 간에 가장 선동적이고 도전적이었던 이론 중의 하나였음은 명백하다. 그의 저서들은 읽기가 어려운 반면, 넘치는 역사의식과 인간 성격의 감추어진 측면에 깊은 경의를 가진 그가 놀라운 천재임을 보여준다. 융의 통찰이 인간의 일반적 본질을 보여주는지 자기의 본질만을 보여주는지는 두고 볼 문제이다. 당분간 그는 인간 성격이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도록 하나의 흥미로운 형태와 모양들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





 <상담사례>


  [ ISTJ 유형의 대학생B (女) ]

  *주기능 : S,  부기능 : T,  3차기능 : F,  열등기능 : N

  *상담에서 다룬 과제 : 변화에 대한 저항


  ISTJ형의 성격적 특징은 ISFJ형의 성격적 특성과 아주 비슷하였다. B의 경우는 두 가지 성격유형의 유사점에 몇 가지를 덧붙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B는 대학에 들어와 치른 첫 학기 시험에서 모두 A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압박감과 걱정 때문에 상담하게 되었다. B는 항상 긴장감을 느꼈으며 그러한 긴장으로 인한 두통을 호소하였다. B는 모든 과목에서 A학점을 따야한다고 목표를 명확히 정해 놓음으로써 전부 A를 받지 못한 지금에는 시험과 관련된 것들(교수님들, 평가방법들)에 대해 분노레게 되었으며 스스로 설정한 기준을 달성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화를 내게 되었다.

  B는 생활전체-옷차림, 식사예법, 친구관계, 전반적인 일처리-에서 철저히 완벽을 추구했다. 예를 들면, B는 태어나면서부터 곱슬머리였는데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늘 자신의 곱슬머리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깔끔하게 머리카락을 땋았다. 친구관계에 있어서도 B의 친구들은 행동이 어떠해야 하며 몇 시 이전과 이후에는 전화를 하지 않는 전화예절을 갖추어야 한다는 등 친구관계에 대해서 엄격한 기대감을 가졌다.

  B는 스트레스로 인해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있는 어떠한 가정이나 기준, 상황 대처방식을 면밀히 검토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B가 나에게 바라는 것은 전 과목에서 A학점을 받는다는 B의 본래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명확한 방법의 제시였다.

  나는 상담이란 상담자와 내담자가 함께 문제점을 고찰하고 해결방안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면서 상담자인 내가 B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거나 어떤 결정을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B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아주 방어적이었지만 자신의 그러한 방어적 태도에 대해 의문을 갖고 고쳐 보려 고는 하지 않았다. ENFP형의 치료자들은(나를 포함) 변화를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약간의 강요도 B를, B가 굳게 지니고 있는 신념과 상황대처방식에 더욱 고착시킨다는 것을 알았다.

  상담을 실시할 때 내담자가 현재 처해있는 생활공간에서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ISTJ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아주며 그녀에게 의미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B와 나는 함께 B가 사용하는 학습기법을 조사해 보았는데 B는 학습방법에 있어서 융통성이 부족했으며 너무 자세하게 학습하였다. 학습 자료를 반복적으로 읽고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암기하려고 함으로써 과잉학습이 되었다. 그러한 학습방법은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통했지만 좀 더 난이도가 높은 대학수준(분석, 종합 등의 고도 학습수준) 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우리는 감각기능을 선호하는 B의 특성과 관련하여 지속적이고 전체적인 학습방식에 대해 논의하였다. 사실 B의 감감기능에 대한 선호경향은 지속적이고 연속적이며 단계적인 학습과 관련이 깊은데 반해 B가 수강하는 과목들 중 많은 과목이 전체적이고 비지속적인 개념과 관련된 학습이다. 그래서 나는 B에게 새로운 학습기법을 제시하는 한편 학습기법 연구소를 소개해 주었다. B는 새로운 학습기법을 실행해 보기 위해서 B가 오랫동안 지녀온 학습법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B는 지금까지 자신이 사용해온 방법들을 더욱 많이 사용하고 더욱 열심히 공부하기만 하면 A학점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학습기법연구소로 부터도 도움을 잘 안받으려고 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실시한 MBTI 검사 결과는 B의 방어적인 태도 때문에 앞서 이야기한 학습기법 문제들에만 한정되어 논의될 수밖에 없었다. B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있었으므로 만약 현 시점에서 검사의 결과를 상세히 설명한다면 B는 검사결과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지도 몰랐다.

  B와의 상담에서는 상담목표가 제한되었다. B는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음으로써 그리고 지지를 받음으로써 압박감이나 좌절감에서 어느 정도 벋어날 수는 있었지만 자신의 생활방식을 변화, 수정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A학점을 받기를 계속 고집함으로써 “학습과 관련된 주변 요소들(system)”과 자기 자신에 대해 계속 좌절감을 느꼈다. 따라서 수차례의 상담을 통해서 운동이나 근육이완 등의 압박감을 줄이는 작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으로 인한 두통은 계속되었다. B는 자신에게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은 신체적인 것이라고 결론짓고 B의 가족주치의를 설득하여 진정제를 처방받았다. 그러고서 B는 나에게 말하기를 B의 가족 주치의가 자신을 치료하고 있으므로 상담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B의 이같은 반응은 상담이란 B가 현재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처음에 B가 지녔던 사고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나는 스트레스를 통제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써 진정제 사용을 선택한 그녀의 결정을 존중해주었다. 그리고 나와 혹은 학교에 적을 두지 않은 어떤 사람과 좀 더 깊이 상담을 하도록 권하였다. 그리고 B가 자신의 스트레스를  치료할 다른 방법들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으며 앞으로도 B와 계속 상담하고 싶다고 말했다. 상담의 마지막 단계에서 B가 학교를 잠시 쉴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였다. 학교의 평가과정이 B의 압박감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와는 다른 환경이 B가 성장하는데, 그리고 B 자신의 자기병을 낮추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B는 일정기간 계속 치료를 받기위해 1학년이 끝날 무렵 휴학하였다. 휴학 후 B가 더욱 깊이 있는 상담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B의 향동은 내가 지금까지 임상적 치료에서 관찰해 온 ISTJ 형의 사람들 보다 두드러진 특성을 보였지만 몇 가지 비슷한 특징 또한 지니고 있었다. 상담에서 구체적이고 뚜렷한 결과를 바라는 점, 자기 내면의 동기나 감정을 고찰하기를 어려워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3가지 기능(F)과 열등기능(N)을 발달시키는 과정에 있는 성숙한 ISTJ 형의 사람들에게는 통찰 또는 성장치료가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추측컨대 성격유형이 B와 유사한 상담자가 B에겐 더 도움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융은 치료자와 내담자가 같은 성격유형일 경우에는 행동을 모델링 함에 있어서 야기되는 어려움이 적다고 하었다.



 <참고문헌>

 이부영, 2003, 분석심리학(C.G.Jung의 인간심성론), 일조각

 이부영, 1999, 그림자, 한길사

 이부영, 2001, 아니마와 아니무스, 한길사

   ?    1992, 성장심리학,   

 김정택․심혜숙, 1994, MBTI와 적용 삼담 사례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