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기 신학
- 이사야 40-55 -
목차
Ⅰ. 서론
1.제2이사야서 - 생성 배경 /
2.제2이사야서 - 신학특성 /
3.제2이사야서 - 저자 /
Ⅱ. 본론
1.제2이사야서 제1탄 - 재구성 /
2.제2이사야서 제1탄 - 시기와 장소 /
3.부록: 네 번째 하나님의 종의 노래(사52:13-53:12) /
4.제2이사야서 제2탄 /
Ⅲ. 결론 : 신학적 성과
1.실패한 역사에 대한 신학 작업 /
2. 신학적인 역사 해석 /
3. 제국신학의 좌절 /
4.하나님의 영광과 삼권분립 /
Ⅰ. 서론
1.제2이사야서 - 생성 배경
예레미야서나 에스겔서와는 달리 “제2이사야서”는 눈에 뛸 만한 대작은 아니다. 그보다는 전승된 이사야서 안에 있는 한 단락이다. 이사야 40-55장이 주전 8세기 예언자 이사야가 아닌 다른 저자에게 귀속되는 독자적인 작품이라는 것은 하나의 역사 비평적 가설이다. 되덜라인(C. Doderlein 1775)과 아이히혼(J.G. Eichhom 1783)이 처음으로 이사야 40-66장의 독자성을 인식한 후, 둠(B. Duhm 1892)이 다시 이사야 56-66장을 분리함으로써 이사야서는 이사야(사1-39), 제2이사야(40-55) 제3이사야(56-66)라는 세 개의 작은 책으로 구분되었다. 이 가설은 성서학 밖에서조차 두루 수용되다가 최근에 이르러서는 다시 이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R.J. Coggins 1998) 세 부분이 전승사적으로 또는 편집사적으로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열띤 논쟁 가운데 있으며, 아직도 최종적인 설명은 나오지 않았다.
논쟁이 되는 질문은 무엇보다도 제2이사야가 처음부터 원 이사야(대략1-32장 범위)의 후속편으로 저작되었는가(H.G.M. Williamson 1994), 개별문서로서 추가적으로 초기에(U. Berges 1998, 548-551: 5/5세기) 아니면 후대에(O.H. Steck 1985, 80: 3세기) 원 이사야와 통합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사야 40장에 표제가 빠져 있다는 것과 예를 들면 이사야 40장과 6장 사이에 있는 양식, 내용적인 많은 특징들은 전자를 지지해 주고(Williamson 30-40; R. Albertz 1990, 242ff. 참고), 이사야 40:1-2와 52:7-10 사이를 묶어 주거나 40:6-8과 55:10-11(이에 대해서는 아래를 보라) 사이를 묶어 주는 뚜렷한 통합편집적인 단락 구별은 후자를 지지해 준다. 어쩌면 문제의 해결책은 우리가 제2이사야라고 부르는 개인 또는 집단이 이사야 후대의 제자들이지만(사50:4-9와 8:1-4, 16-18; 30:8-10의 특징들) 처음으로 독립적인 문서를 저작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 문서는 후대에 계속되는 편집사 과정에서 그때까지 있었던 이사야 전승인 이사야 1-32과 통합되었다.(제2판 참고).
두 번째 문제는 제2이사야와 제3이사야서의 관계다. 엘리거(K. Elliger 1933)는 제3이사야가 제2이사야의 제자로서 이사야 56-66장을 저작했을뿐만 아니라 이사야 40-55장을 편집했다는 데서 출발했으나, 그 사이에 세 번째 책은 완전히 다른 저자의 본문들이 좀 더 느슨하게 통합된 것으로 밝혀졌다. 제3이사야서의 가장 오래된 핵심을 보여 주는 이사야 60-62장은 제2이사야와 매우 밀접한 언어적이고 내용적인 특징들을 담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사야 60-62장이 제2이사야의 기본 자료보다 후대의 것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사야 40-55장의 일부가 60-62장보다 늦게 저작되었거나 셋째 부분이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O.H. Ste가 1992, 123-125; U. Berges 1998, 545; J. Werlitz 1999,342-343 참고).
2.신학특성
네 예언서, 신명기적 예레미야서, 그리고 에스겔서 다음으로 큰 제2이사야서는 포로기에 생성된 예언서다. 제2이사야서는 앞의 책들과는 매우 다른 언어로 되어 있어 그들과 또 다시 구별된다. 신명기적이지도 제사장적이지도 않은 시편적인 색채를 강하게 띤 예언적 언어다. 내용적인 차이 또한 뚜렷하다. 네 예언서가 강하게 재앙극복(정화심판)을 다루었고, 그 외에 신명기적 예레미야서는 처음으로 희망찬 새 출발의 관점을 한 걸음 열어주셨으며, 에스겔서가 재앙에서 벗어나 미래의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충족시켜야 할 기준들을 개진하고자 했다면, 제2이사야는 처음부터 밝고 환한 어조로 새로운 구원시대의 출현을 선포한다.
사40:1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 하나님이 이르신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에게 외치라: 실로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실로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 그의 온 죄로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느니
이와 마찬가지로 책의 구조에서도 신학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신명기적 제2예레미야서(렘1-45장)에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그 끝에 있고(렘39장) 에스겔서에서는 모든 것이 거기로 흘러들어가며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나오는 중심을 차지하는 반면(겔24장; 33장), 제2이사야서는 이미 서두에서 예루살렘 멸망을 회고한다. 즉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며, 야훼 사랑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 때문에 제2이사야서의 중심에는 전환점을 의미하는 바벨론의 멸망이 있고(사47장), 그 끝에는 기적 같은 시온의 재도약이 있다(사49-54장). 이렇듯 제2이사야서는 포로기 예언서 가운데 순수하게 구원예언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 이는 제2이사야가 시대적으로 포로시대말과 포로 이후 초기에 속한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이로써 제2이사야는 시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포로 이후 초기의 두 구원예언자, 학개와 스가랴(1-8장)의 책과 일맥상통한다.
3.저자
포로기의 모든 구원 예언처럼 이사야 40-55장의 구원 예언도 익명으로 되어 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예언자들과 같은 무게를 지닌 예언자적인 인물 ‘제2이사야’가 학계에서 가정되고 있는데, 이는 철저히 의문의 여지가 있는 임시조치로써 줄기찬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단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본문들에 대하여 기꺼이 구체적인 인물의 저자를 갖고 싶어하기 때문일 것이다(R.J. Coggins 1998, 91은 이렇게 비판적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인물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이사야 40ff.장 뒤에 한 개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40:6상반절을 1Q Isa와 칠십인경의 읽기 형태로 읽을 때 암시될 뿐이다. “한 목소리가 말하기를 외치라! 그때 내가 말했다 무엇을 외치리이까?” 그 대신 맛소라 본문은 3인칭 단수를 전하고 있으며 이로써 되물음의 주체가 불분명해진다. 사람들이 말할 때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40:1-2의 위로하라는 위탁이 2인칭 복수로서 한 집단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맛소라 본문을 지지해 준다(48:20의 선포 위탁과 견주어보라). 이와 유사하게 이중 가치를 지닌 상을 세 번째 하나님의 종의 노래인 50:4-9에서 보여 주는데, 이 노래는 몇가지 이유로 네 개의 노래 가운데 유일하게 개인으로서의 예언자를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독특하게도 여기서는 다음과 같다. 아도나이-야훼가 내게 학자의 혀를 주사 … 아침마다 그가 나의 귀를 깨우치사 나로 하여금 학자들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두번 다 ......<림무딤>). H.G.M 윌리엄슨(1994, 107f.)이 제대로 파악했듯이 이것은 제자들에게 이사야가 그들 가운데서 그의 메시지를 봉인했었다(사8:16)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여기서 화자는 제자들과 한 동아리에 속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화자는 예언자 이사야가 8세기에 거느렸던 제자 집단의 후계자들 가운데 다시 등장한다. 이렇게 몇 가지 사항이 제2이사야에서 하나의 예언자 학파를 인식할 수 있다는 D. 미쉘(Michel)의 이론을 지지해 준다. 이 책의 독특하고 강한 시적 언어를 만들어낸 구원예언자 ‘제2이사야’의 존재가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는 그는 기쁨의 메시지를 전할 책임을 느끼고 이를 포로 후기까지 진행시킨 한 집단의 대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적 언어와 예언적 언어가 독특하게 혼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집단이 제사장이 아닌 제의 요원, 다시 말하면 특히 성전 가수의 후손(특히 C. 베스터만 1986.11이 그렇게 생각한다)이거나 제의예언자의 후손이라고 또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눈에 뛸 정도로 시온신학이 차지하는 자리는 예루살렘 성전 관리 집단을 훨씬 더 직접적으로 지시해 준다. 이로써 제2이사야 집단은 기원상 포로기 이전 예레미야의 가장 쓰라린 대적에 속했던 민족종교주의당의 후계자 측근에 속하게 된다. 또한 - 요시야 시대에 예언적으로 수정한 앗수르 편집을 통해 - 포로 이전 후기에 저항하는 자들에게 야훼가 예루살렘을 바벨론으로부터 구원하리라느 sgmnla방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던 이사야 전승의 방향 설정도 이를 지지해 준다. 예언적 영감을 받고 또 초기 페르시아 시대라는 주변 정치 상황의 영향 아래 있던 제2이사야 집단이 초기의 민족적인 관점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Ⅱ. 본론
1.제2이사야서 제1탄 - 재구성
Albertz는 제2 이사야서가 두 개의 종결부, 이사야 52:7-10, 11-12와 55:6, 8-9, 10-11, 12-13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 다른 더 작은 보충들에도 불구하고 - 두 개의 판본(Editionen)이 계속되었다고 가정한다. 「첫 번째 판(Dtjes E1)은 이사야 40:1-5, 9∼52:12의 본문을 포관하게 된다. 두 번째 판(Dtjes E2)은 40:6-8과 55:10-11로써 하나님 말씀의 지속과 영향력에 딱 들어맞는 새로운 경계를 표시해 준다. 이로써 이 책은 완전한 크기로 성장했다. 주고 받는 대화의 구조가 5절과 3상전반절에서 외치는 소리에 대한 프롤로그로 구성되어 이사야 6장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6:4,8) 이 단계에서 제2이사야서는 동시에 이사야서로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로써 제2이사야 E1의 본문 - J. 베얼리츠(1999)에게서 약간 벗어나 - 과 그 구조는 다음과 같은 윤곽을 보여 준다. 여기서 RE1의 고유양식들은 고딕체로, 제1판 편집자가 삽입한 본문들은 기울임체로 강조하였다(도표를 보라).
제2이사야서의 제1판 사 40:1-52:120 (Dtjes E1)
40:1-5, 9-11* 프롤로그
40:L1-2
40:3상후-5
40:9-11
백성과 시온을 위로하라는 부탁
야훼를 위한 길을 예비하라는 부탁
선구자 지도: 시온에 야훼의 도착(골라와 함께)
야곱/이스라엘-부분(40:12-49:13*)
40:12-31 도입
40:12-15,16,17,18,19f.,
40:9-11
논쟁: 야훼의 전능과 선하심
선구자 지도: 시온에 야훼의 도착(골라와 함게)
야곱/이스라엘-부분(40:12-49:13*)
40:12-31 도입
40:12-15,16,17,18,19g.,
21-31
논쟁: 야훼의 전능과 선하심
41:1?42:13 단락 Ι
41:1-4,5,6-7,8상, 8하,
9,10-13,14-16,17-20
41:21-26, 27, 28f.; 42:1-4,5-9
42:10-13
첫 번째 쟁론: GV, HZ, HZ, HA
두 번째 쟁론: GV, 첫 번째 GKL, 주석
종말론적인 찬양노래
42:14?44:23 단락 Ⅱ
41:14-26,18-25*; 43:1-3상,
3하-4(?), 5-7, 8-12
43:14-15
43:16-21, 22-28*; 44:1-4,
5, 6-8, 10f., 12-17, (20),
21f. 44:23
모음집, 첫 번째 쟁론: HA, GI, HZ, HZ, GV
모음집의 중심: HA: 바벨론에서의 해방
모음집, 두 번째 쟁론: HA, GI, HZ, GV 삽입됨:
우상문제와 경고
종말론적인 찬양 노래
44:24?48:21* 단락 Ⅲ
44:24, 26하전1,하전2,26하후-28상,28하;
45:1상전1,상전2, 2-4,5, 6-7
45:8
첫 번째 쟁론: 고레스 신탁, 수정됨
종말론적인 찬양노래
45:11상,12-13하전,14-15
18f.20상, 21-23, 24f.
46:1-2, 304, 5, 6f.9-11,12f
47:1-2, 5-8상,10-15
48:1상하전, 3, 6-7상, 8상,
11*,12-16상
48:20-21
두 번째 쟁론: 실현된 왕의 신탁 GV: 민족
가운데 생존자를 초대함
세 번째 쟁론: 바벨론 신의 붕괴
네 번째 쟁론: 바벨론의 붕괴
다섯 번째 쟁론: 새 왕을 통한 새로운 구원
이주 명령, 종말론적인 찬양노래, 이주
49:1-13* 단락 Ⅳ
전환
49:1-4, 5, 6, 8-12
49:13
두 번째 GKL, 주석: 귀향을 부탁
종말론적인 찬양노래
시온/예루살렘-부분(49:14?52:12*)
49:14?50:2* 도입
49:14-21; 50:1-2
반박하는 시온의 위로
50-52* 단락 Ⅴ
50:4-9, 51:4f
51:9-10, 17, 18, 19, 52:1f.
세 번째 GKL, 1차 2차 GKL 주석
명령시: 탄식과 시온에게 깨라는 외침
52:7-12 종결
52:7-10
52:11-12
야훼가 시온으로 돌아옴, 야훼의 왕권 확립,
종말론적인 찬양노래
귀환하라는 외침
약어: GI: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말씀, GKL: 종의 노래, GV: 민족들에 대한 심판말씀,
HA: 구원선포, HZ: 구원약속/구원신탁
2.제2이사야서 제1판 - 시기와 장소
제2이사야서의 생성 장소에 관하여서는 전통적으로 주로 바벨론으로 견해가 기울고 있다. 제2이사야서에 있는 많은 것이 바벨론을 가리키고 그 외의 것은 예루살렘을 지적한다는 문제는 오늘날 비교적 간단하게 해결된다. 즉 좀 더 정확히 관찰해 보면, 예루살렘과의 관련성은 프롤로그와 두 번째 부분(40:1-2, 9-11; 49:14-15; 51:17-19; 51:2-3; 52:7-10, 11-12)에 집중된 반면, 바벨론의 유래에 대한 증거들은 야곱/이스라엘 부분에 제한되어 있다. 이제 이 책 자체가 위로의 메시지가 바벨론에서 시온으로 전달되는 길을 보여 주기 때문에(48:20-49:14), 편집사 또는 전승사 가설은 제2이사야 집단이 본래는, 41-48장에 통합된 대부분의 전승 자료들의 출처인 바벨론에서 활동하였으나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활동을 계속했다는 견해를 열어놓고 있다. 그러니까 제2이사야 E1은 귀환한 예언자집단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저작되었을 것이다.
제2이사야 E1의 생성시기와 장소에 대한 설명은 제2이사야E1을 이해하게 하는 열쇠를 제공해 준다. 제2이사야 E1는 539년 이후의 오랜 기간 동안, 즉 고레스의 바벨론 정복과 신바벨론 제국의 멸망 후에 쓰였다. 제2이사야 집단이 이전에 승리를 향해 가는 젊은 페르시아 왕에게 - 그는 550년 메대의 수도 악타바나를 정복했고, 547/6년 전(全)소아시아를 정복했다 - 좋게는 20년에서 25년동안 걸었던 희망은 성취되지 않았다. 반대로 고레스는 전부를 바벨론 카드에 걸었으며, 539년 10월 29일 그가 바벨론 성에 반격도 받지 않고 입성했을 때는 “벨과 나부가 그의 통치를 흡족해 하고 그들의 마음의 기쁨을 위해 그가 통치하기를 원했던” 신마르둑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자로서 마르둑 제사장들의 환영을 받았다. 고레스가 유대 골라를 지지했는지, 했다면 어느 정도였는지에 관한 의견은 분분하다. 고레스는 느부갓네살이 약탈해간 성전 기구들을 돌려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성전재건을 추진토록(사44:26하*), 야훼의 유일무이함에 대한 지식을 온 세계에 관철시키도록(45:6) 야훼가 이스라엘 때문에 고레스를 불렀고(45:4) 그에게 승리를 선사했다는(45:2-3) 제2이사야 집단의 선포는 사건들이 진행되면서 처음으로 분명한 반박을 받게 되었다. 기대한 바처럼(47*장) 바벨론은 정복되지도 굴복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바벨론 도성은 페르시아의 네 왕들의 거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반대로 예루살렘은 계속하여 폐허 가운데 있었다. 525년에 캄비세스의 이집트 원정으로 비로소 대제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유다는 페르시아의 정치적인 이익 때문에 처음으로 주목되었다. 그러니까 제2이사야 집단은 오랫동안 실망과 기다림과 실패를 겪어야 했다. 그들의 선포는 539년 이후의 정치적 발전에서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 많은 의심과 거부와 무관심에 부딪쳐야 했다. 522년 가을에 가우마타 봉기로 인한 혼란 이후 제국의 해방을 위해 제국정책을 적합한 새 토대 위에 세우고 제국 민족들에게 더 많은 자립성을 확보해 주고자 준비되었던 사람, 다리우스가 페르시아 왕권을 장악함으로써 그들의 선포가 더욱더 열광적으로 되었다(42:6-7; 49:8-9). 제국에 있는 유대 민족 집단에게도 귀환과 재건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열리지 않았는가? 드디어 야훼는 그 백성의 해방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시 역사하신 것 아닌가? 정치적 전환이 가능해 보인 이 시점에서 예언자 집단이 야훼께서 놀랍게 구원하기 위해 간섭하리라는 새 소식을 널리 전하도록 야훼의 평화의 사도(41:27)로서 골라의 선발대를 예루살렘으로 급히 앞서 가게 했다면, 그들은 귀환계획을 위해 땅에 남은 자들을 얻고자 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그들의 예언을 한 권의 책으로 요약하리라는 결정도 일깨우고 고무시키겠다는 설득작업의 목표에 기여했다.
이 책은 뚜렷하게 문학적인 크기를 보여 주고 있지만, 언어와 어법에서(많은 명령형, 많은 질문들, 교체하는 목소리, 언어적으로 상상적인 광경들) 구어적인 의사소통의 법칙을 강하게 따르고 있기 때문에, 기타이(Y. Gitay 1980, 190ff.)와 하드마이어(C.hardmeier 1989, 163)의 주장대로 외적인 낭송을 위해 정해진 낭독문학이라고 생각된다. 삶의 자리로서는 예를 들면 애가와 민족 말씀의 일부가 쓰인 매일 저녁의 집회(...<them>)를 감안해 볼 수 있다. 동시에 이 책의 구조와 목차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바꾸어가며, 일부는 성가대에서 공동으로(찬양노래) 낭독되었다는 것이 매우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가벼운 극으로 상연되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폐허 상태인 도성 유다에서 이 책을 낭독하는 것은 충격적인 재앙이 있은 후 66년만에 땅에 남은 자들 가운데 두드러지게 나타난 대 희망의 기회에 놓인 저항과 불신, 그리고 무기력과 절망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포로들은 특히 대체로 초기 고위층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땅에 남은 이들에게 수천 포로들의 귀환에 대한 상상은 전혀 감격적이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해 두어야 하낟. 이것은 그들이 다시 옛 소유권증거와 지도권을 요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실제적인 문제들이 또한 쌓여 있었다. 전쟁의 붕괴 아래 고통당하고 있는 가난한 땅 어디에서 이들은 기숙할 것이며 어떻게 생계를 꾸려날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유다에 있는 책임자들이 골라와 다리우스와의 담판에 참여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에 동의했으며 백성의 다수가 송환 프로그램을 지지했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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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록: 네 번째 하나님의 종의 노래(사 52:13∼53:12)
본래는 절정의 대단원 이후에 후속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이사야 52:13∼53:12에 나오는 이른바 네 번째 하나님의 종의 노래는 분명히 더 이상 중심구조(찬양노래)가 아닌, 제2이사야 E1의 어투와 결합되지 않은 부록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하나님의 종의 노래는 53:1의 주요어 야훼의 팔로써 소급되어 대단원(52:10)과 관련을 맺고 있고, 첫 번째와 두 번째 종의 노래에 대한 암시를 보여 주기 때문에(52:13에 대하여 42:1-6 참고; 53:4에 대하여 49:4 참고)제2이사야 E1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에 반해 이사야 54-55장과의 연관성은 매우 적으므로 제2이사야 E2보다는 먼저 생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53:1-11상전반절의 긴 우리 보도와 틀을 갖춘 하나님의 말씀(52:13-15; 53:11상후화-12)으로 정리된 구조가 보여 주듯이, 이 노래는 하나의 독립된 수사적 단위로서, 제2이사야 E1과는 별로도 낭송되거나 상연되었을 것이고 이것과 느슨하게 관련되어 생겨났다. 이것은 49:8-12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차적인 도입을 통해 추후에 49:7로 판본(Edition)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네 번째 종의 노래가 49:1-6*의 두 번째 종의 노래에 대한 또 다른 주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말해 둔다. 비록 우리가 이 긴 본문을, 그렇지 않으면 충분히 통찰된 판본의 구조를 망가뜨릴 것이기 때문에, 그 끝에 갖다 붙일 수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편집적인 지시, 특히 49:6의 지시와 52:10의 주요어 지시를 통해서 “노래”를 잘 이해할 수 있는 확실한 열쇠가 있다. 이 노래는 민족들에 대한 종의 우주적인 기능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이다.
이사야 42:1-4에서 야훼는 포로 상태의 이스라엘을 민족들에게 도움을 주는 법의 중재자로 제시하였고, 49:6에서 야훼는 포로 상태의 이스라엘에게 세계의 구원을 위한 중재자가 되라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렇게 이제 왕들과 민족들은, 이사야 53:1-11상전반절에 의하면, 회고를 통해 완전히 놀라운 것, 그들의 구원을 위한 이스라엘의 중재자 역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즉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드러나지 않은 존재로, 역사에서 참아야 했던 그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그리고 굴욕적인 멸망으로, 그들을 대표하여 그들의 모든 죄를 짊어졌던 것이다(53:4-6). 이스라엘은 야훼가 그에게로 모았던 전 세계의 죄의 짐을 말없이 저항 없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그들이 수고하지 않은 삶의 좋은 기회를 그들에게 마련해 주었다. 이렇게 네 번째 노래의 저자는 회고를 통해 자기민족의 포로의 운명을 깊이 해석했다. 이것은 포로운명에 긍정적인 의미를 최초로 세계사의 틀 안에서 부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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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겪는 고통의 운명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인 의미는 먼저는 야훼가 분명하게 그의 종을 향하고, 그를 ‘죽음’에서 다시 소생시키며 그를 다시 회복시켰다는 데서 알 수 있었다(사53:10; 겔37:1-15을 견주어 보라). 왜냐하면 죽었다고 믿은 백성이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은 비로소 다른 민족들로 하여금 놀라고 비판적으로 자기를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노래의 저자는 이스라엘이 민족들을 위해 희생하였기 때문에 야훼는 앞으로 그의 백성을 높여서(52:13), 그들이 세계 민족 내에서 동등하고 존중된 일원이 되게 할 것이라는 확신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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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하나님의 종의 노래의 부록을 통해 증가된 제2이사야서 제1판은 제2이사야 E2를 통해 현재의 범위(사 40-55*장)로 확장되었다. 그 편집자(RE2)는 54-55*장을 새로 포함시켰고, 이를 네 번째 하나님 종의 노래를 사용하여 틀을 이루는 들으라는 요청(나를 들으라! 그 유사한 것)을 지닌 경고들(51:1-2, 7-8,[21]; 55:1-5)에 놓았다. 특히 그는 40:6-8*을 삽입하여 그가 만든 책 전체를 두르는 새로운 틀을 만들었다(55:10-11). 이 새 틀은 온갖 저항에 대하여 하나님 말씀의 항상성과 영향력을 공공연히 드러내 보였다(44:25, 26상 참고). 마지막으로 RE2는, 익명의 말하자면 하늘에서 부르는 소리를 삽입하여 프롤로그를 이사야 6장과 유사하게 함으로써(40:3상전, 6상전; 이와 6:4,8을 견주어 보라), 원이사야서(대략 1-32*장의 범위)를 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지시하게 했다. 이사야가 듣고 수행해야 할(6:9-11) 천상회의에서의 심판결정은 제2이사야 집단에 대한 위로 임무(40:1f., 3-5)를 통해 분명하게 철회되었다. 그리하여 제2이사야 예언은 이사야서의 일부가 되고 여기서 하나님의 계획으로 가득 찬 역사활동의 새로운 시기가 동텄다.
※Albertz가 재구성한 제2이사야 E2은 반 우쇼트(J. van Oorschot 1993, 241294)의 이차적인 시온층(R2)을 대폭 따르고 있고, 이것은 다시 베르게스(U. GBerges 1998, 385-411)의 두 번째 예루살렘 편집과 크게 일치한다. 제2이사야E2의 구조는 제2이사야E1를 많이 의지하고 있다. 편집 본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제2이사야서의 제2판 사40:1-55:13 (Dtjes E2)
40:1-11 프롤로그
40:3상전,6 ,8
하나님 말씀의 지속성
6장과 균형
40:12∼49:13*
야곱/이스라엘 부분
44:25, 26상
45:9-10, 11상,13b
47:3-4, 8하-9
예언자 말씀의 확립
민족들에 대한 논쟁
시온에 대한 상응 프로그램으로서의 바벨론
49:14∼55:5*
시온/예루살렘 부분
51:1-2, 7-8, 12-151, 20-23; 52:3, 54:1-3, 4-6, 7-8, 9-10, 54:11-12, 14-17상
55:1-5
경고,논쟁
시온데 대한 축복과 영원한 구원
시온의 놀라운 재건
초대, 구원을 받아들임
55:6-13* 에필로그
55:6, 8-9
55:10-11
55:12-13
경고, 논쟁
하나님 말씀의 효과
기쁨으로 순례
제2판은 시온으로 책의 무게를 옮기기 때문에, 그 장소는 예루살렘일 가능성이 높다. 시간사적인 뚜렷한 특징들이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연대를 설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유다는 외부의 대적으로 인해 새로운 위협상태에 있었고(사51:12, 13; 54:14-47) 계속하여 백성이 너무 부족한 상태였다는 것(51:1f.; 54:1-3)이 뚜렷하다. 이것은 성전건축의 종결(주전 515년)과 성벽건축(445년) 기간에 매우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제3이사야서의 연대는 그렇게 멀리까지 내려가지는 않는다. 가장 오래된 부분들(사60∼62장)은 늦어도 5세기 전반에 속한다. 이 부분이 이사야 54∼55장을 전제하므로(예를 들면 사55:5과 사60장을 비교해 보라) 제2이사야E2의 연대는 6세기 말이나 5세기 초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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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이사야서 제2판의 특징은 예언적인 메시지가 재차 상당한 저항과 의심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삼세대 예언자 제자 RE2가 그의 책을 둘렀던 새로운 틀은 투쟁의 노선이 변경되었음을 알게 해 준다. 즉 되묻는 예언자 제자가 처음에 받았던 메시지는 모든 지상 권세에 대한 야훼의 말씀이 관철되리라는 확신이었다(사40:6, 8; 51:7, 12를 견주어 보라). 즉 야훼는 이방의 점쟁이나 땅의 지혜자의 말과는 반대로 예언의 말씀도 이루실 것이다(44:25, 26상). 끝에서 RE2는 그의 확신에 야훼가 직접 그의 말씀의 수확에 대해 염려하신다는 표현을 더했다(55:10-11). 최종적으로 야훼의 구원계획을 수행하는 것은 이제는 고레스도, 다리우스도 아닌(44:28상; 48:14), 바로 예언자의 말씀이었다(55:11). 여기서 제2이사야 집단이 정치적이니 무대에서 내려와 순전히 종교적 차원으로 돌아왔음이 명확해진다.
야훼가 포로 이후 세대와 맺고자 한 영원한 새 계약의 신뢰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RE2는 이미 계속하여 영원성을 주장했던 다윗에 대한 지속적인 은혜약속을 끌어와(55:3-5; 시89:50; 삼하7장과 견주어 보라) 그것을 백성과 예루살렘에게로 전이시켰다. 이것은 위험했다. 왜냐하면 영속에 대한 야훼의 보증이 다윗 왕조의 멸망이나 스룹바벨에 의한 왕조복구의 실패와 뚜렷하게 반박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RE2는 포로전 시대에 약속된 다윗 왕의 세계통치(시2:7-8)를 우주적인 증인직의 방향으로 재해석했다(사55:4). 이 증인직은 야훼에 의한 민족들의 정치적인 항복에서 이미 나타났지만, 제2이사야 집단이 비로소 포로시대의 이스라엘의 기능으로 발견했던(사43:10, 12; 44:9) 본래의 종교적인 목표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다윗 약속의 이러한 중단되지 않은 효력은 이제 이스라엘과 시온의 우주적인 증인직이 실현되었다는 데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전혀 알지 못하는 민족들까지도 이스라엘은 초대할 것이며, 이방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놀라운 하나님을 알고자(사55:5) 시온으로 올 것이다. 왕의 정치적인 세계통치의 자리에 이제는 야훼를 대신하여 전세계를 위한 백성의 종교적인 증인직이 나타난다. 시온에서 무릎 꿇은 민족들의 자리에(시 46:7-11) 자원하여 끊임없이 행하는 민족들의 시온 순례가 들어설 것이다. 전 세계의 예루살렘 순례에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디아스포라도 참여하게 될 것(사55:12-13)이라고 RE2는 제1판의 종결을 받아 들였다(5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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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2를 통한 다윗 계약의 ‘민주화’는 여호야긴 후손의 회복에 대한 신명기적 예레미야서의 의구심에 그 대응물이 있다(렘22:24-30 참고). 이로써 제2이사야 집단은 정치적 문제에 관한 열띤 논쟁에서 사반 가문개혁당의 후손 편에 서 있고,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자 했던 포로 출신 집단(신명기 사가 역사거, 에스겔 학파, 스가랴)이나 땅에 남은 집단(학개)에는 대립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제2이사야”를 상기시켜 주는 JerD3에 있는 구원 말씀이 수용된 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예레미야 31:33의 마음에 새긴 토라 관점이 이사야 51:7(Dtjes E2)에 수용된 것이, 제2이사야 집단이 귀향한 이후 팔레스타인에서 예레미야서의 후대 전승자들과 가까웠음을 지지해 준다. 제2이사야서 두 개의 판에 나타난 성전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도, 시온 신학에 반하는 이비장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RE2가 포로기 이전 제왕 신학과 성전 신학의 우주적인 구원기대에서 제국적인 면을 깍가 낸 방식은 제2이사야 집단이 포로사건의 인상 아래 세 세대 동안 예루살렘 성전관리들의 국가 종교적인 이전의 입장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다시 한 번 분명히 보여 준다. 포로시대 이후에는 그 어떤 것도 그 전과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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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결론 :
- 신학적 성과 -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포로시대처럼 그렇게 신학적인 성과가 풍부한 시기는 없다. 후대 유대교와 기독교에 크게 각인시킨 근본적인 요소들이 포로기에 새로 형성되었거나 완전히 새롭게 발견되었다. 매우 철저한 죄의식, 관습의 진지함, 초종교성, 보편성과 부분적으로는 유토피아적인 성격이 그것이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강한 활동의 시간적인 폭과 그 근본의 무한함이 결코 그렇게 강하게 경험된 적은 없었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쓰라린 고통을 겪고, 77년이란 긴 포로 시기(주전597-520)처럼 그렇게 감동적으로 환영받은 적은 없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분노했을 때는 파괴하며 긍휼로 다시 일으키는 의로운 심판자, 야심에 찬 역사의 통솔자, 모든 민족과 모든 신들의 주이자 세계의 창조자, 정녕 유일한 신이다. 포로 경험 없이는 이스라엘에 엄격히 문자적 의미로 단일신론이 결코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며, 포로 경험 없이는 이스라엘은 국가종교의 한게를 결코 넘어서지 못했으며, 포로 경험 없이는 세계선교라는 사고가 그 가운데서 결코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포로사건 없이는 우리가 아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교체될 수 없는 형태로의 이 세 종교는 없었을 것이다.
1.실패하나 역사에 대한 신학 작업
실패한 역사 포로시대의 이스라엘이 계속되지 않고, 거꾸로 정치적인 재앙이 그 역사를 신학적으로 작업할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불변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에배(시44; 74; 79; 89; 애5)와 공적 회합(애1; 2; 4)에서 탄식과 죄 고백으로 시작하여, 포로기 이전 심판예언자(호세아, 아모스, 이사야, 미가, 하박국, 스바냐, 예레미야, 에스겔)에서 신명기 사가의 역사서(DtrG) 그리고 회고적인 예언서들(네 예언서, 신명기 사가 예레미야서, 에스겔서)까지 수용하는, 두 세대에서 세 세대까지 이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전혀 밝혀지지 않은 포로기의 어둠 가운데선(주전 562년부터) 바벨론에 있는 이전 가문의 동아리 민족종교주의당의 후손들이 이주에서 시작하여 땅에서의 추방까지 공적인 첫 이스라엘 역사를 저작하는 일을 시작했다는 그 자체가 이미 놀라운 과정이다. 게다가 그들이 그렇게 보호막 없이 공개적으로 백성과 왕들을 혹평하고, 여ㅓ떻게 야훼에 대한 그들의 죄가 멸망으로 이끌었는지를 역사의 과정으로 증거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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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시대의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조심스럽게 - 인간적으로 매우 이해할 만하다 - 다루는 것에 만족스러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또 하나의 놀랄 만한 일이다. 신명기 사가와 상치했던 다른 집단들이 있었다. 그들과 신학적으로 매우 유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네 예언서의 신명기적 편집자들은 호세아와 이사야의 뜻을 따라 무기정책과 게약정책을 이스라엘과 유다의 중심 죄 가운데 하나로, 그들에게 야훼가 대 정화심판을 통해 물질적인 기초를 단번에 제거했다고 비판했다(호 5:11-14; 10:13f.; 미5:9f., 13; 습1:16). 예레미야서의 신명기적 편집자들은 예언자들에 가담하여 사회적 잘못이 결정적으로 성전의 멸망으로9렘7:9-14), 또 예루살렘 정복으로(렘 34:8-22)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정치적 재앙에 본래 죄 있는 자들의 이름 명명하기를 꺼리지 않았으며(21:1; 36:23f., 26; 37:3, 13, 15; 38:1), 시드기야로 하여금 화를 불러일으키는 정치를 하도록 추궁했다는 종교적 민족주의의 신조를 가진 관리들과 장교들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고(37:17f.; 38:14-28), 그들의 대적, 즉 당시에 예레미야를 옹호했고 야당으로 추방되었던 사반가문 개혁당을 일일이 거명함으로써 그들이 복권되기를 기대했다(36:12, 14, 25). 여기서도 당연히 인간적인 관심들이 흔들리면서 자기 조상들의 회복과 이전에 확립했던 것에 대한 자기 지도권을 다루었다. 그러나 그 이상이 언급된다. 즉 모든 죄인들은 솔직하게 고백해야 했고, 일차적으로 죄가 있다고 고백한 사람들은 거명되어야 하고 이로써 새 출발에서 같은 실수를 다시는 번복하지 말아야 하며 그 가문들은 실제적인 회개 없이는 다시 노를 저을 수 엇었다. 그러므로 이전에 홀대받고 증오의 대상이 된 심판 예언자들에게 궁극적으로 필수적인 개방성과 의미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유산으로 정확하게 하나님이 열어 주신 구원의 기회가 궁극적으로 어긋나고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되었던 회개로의 전환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내는 일이 중요했다. 놀랍게도 포로기 예언서들의 모든 신명기적 편집자들은 여기서 신명기적 역사가들이 어쩔 수 없이 듣고자 했던 같은 결과에 이르렀다. 즉 심판에언자들의 메시지가 충격과 폭력으로써 침묵했을 때,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은 더 이상 저지될 수 없었다(암2:11f.; 7:12∼8:2; 렘 11∼20). 이 평가의 유추는 분명했다. 즉 이제 모두가 보호받지 않고 심판예언자의 근본적인 탄식에서 제외될 때만, 모두가 근본적으로 이전의 실수와 잘못들을 중단할 때, 이스라엘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회가 있었다.
이렇게 포로시기 동안 서로 다른 이스라엘 지식인층 집단 사이에 폭넓게 있었던 죄와 죄인에 대한 토론은 이스라엘에 잘못 흐른 역사에서 제대로 된 가르침을 끌어내고자 하는 진지하고 참여적인 시도가 실제 있었다는 놀라운 예다. 그러한 시도들은 보통 말하듯이, 일반적으로 실패로 선고받지 않았다. 포로시대의 논쟁은 오히려 매우 창조적인, 근본적으로는 백성의 생존에 이바지한 자기 백성의 죄의 역사와의 관계에 대한 성과적이 srkfmcla이다. 그것은 잊으려 하는 지속적인 소망과 지금처럼 그냥 그렇게 계속하고자 하는 강한 경향에 반대하는 희망으로 가득 찬 외치는 항의이다. 동시에 모든 포로기 신학자 집단들은 새로운 시작은 단순한 죄의 고백과 회개를 통해서 강요될 수 없음을 의식했다. 새로운 시작은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서만,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할 때(렘29:10-14*; 31:31-33; 사40:1f.; 44:21f.) 보증될 수 있었다. 그러나 죄의 고백과 회개 없이는 새로운 출발은 전해 기회로 인식될 수도(사44:21f.), 붙잡힐 수도 없고, 마찬가지로 다시 놓쳐 버리고 만다. 실제적인 출발은, 하나님의 은혜가 값지기 때문에, 값싸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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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회가 계속하여 에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하는 은혜에 대해 설교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잘못이나 과거의 죄만을 간신히 인정하는 정도로만 한다는 것은 도특한 현상이다. 그러니까 독일의 개신교 국교회는 유대인에 대한 그들의 죄를 조심스럽게 고백하기까지 수세기 걸렸다. 아우슈비츠로 이끈 전 기독교적인 죄 역사에 대한 작업을 다시 한 번 수행하게 될 것인가? 구약 이스라엘에서 죄에 대한 작업 과정은 세 세대가 결렸기 때문에 필자는 이 희망을 아직 완전히 포기하고 싶지 않다.
2.신학적인 역사 해석
포로기는 이스라엘의 첫 공식역사(DtrG)가 기술된 시기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신학의 절정기다. 역사에서의 야훼의 활동이 이 시기에 걸쳐 오랫 동안 없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포로기 예언자 동아리들은 그들 시대의 역사를 주의 깊게 추적했고 신학적으로 해석했다. 이스라엘은 이제 더 이상 파트너가 아니라 계속하여 상승, 하강하는 강대국(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의 희생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과거에 결코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일관적으로 역사를 세계역사로 기초했다. 포로기에 생겨나고 포괄적인 복합물들로 통합된 수 많은 이방 민족 말씀들이 그에 대한 증거물이다(사13:22*; 렘46-51; 겔25-32). 그러나 포로기 예언서들 전체, 신명기적 예레미야서 제2판(렘 1-45*)과 제3판(1-51*), 에스겔서와 제2이사야서 제1판(사40:1-52:12)은 폭넓게 역사성찰을 기술하고 있고, 거기서 모든 예언자 집단들은 야훼와 전체 세계사에 관여한 그의 백성간의 막대한 역사 드라마를 입안했다. 예레미야가 JerD2에서 이방민족들의 예언자로 부름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렘1:5).
야훼의 역사행위를 볼 수 없는 성질은 포로기 전반 시기의 중심적인 유혹을 의미했기 때문에(사40:13f., 27), 예언자 제자들 같은 역사기록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역사 흐름에서 그의 합리성과 도덕성을 밝혀내고 이를 그들의 역사해석에서 부각시키고자 노력했다. 신명기 사가 역사가들은 이스라엘의 지나간 역사를 보며 야훼의 징벌하고 구원하는 행위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타락과 회개에 정확하게 상응하고 있는지(삿2:10ff.)를 작업했다. 그들에게는 항상 제 때에 타락의 결과가 경고되었다(수23; 삼상 12; 왕상 9:1-9 등)고 역사서를 기초함으로써, 그들은 신의 역사 행위를 맹목적인 운명의 힘의 측면에서 제거했고 거기에 분명하게 이해할 만하고 도덕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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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선에서 JerD2의 편집자들은 모든 민족과 왕정에 적용되고 있다는(렘18:7-10) 야훼의 역사행위에 대한 합법적인 법을 썼다. 어떤 때는 야훼는 한 민족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생각했고, 어떤 때는 구원을 베풀고자 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야훼는 자신의 의도를 선포했다. 이로써 야훼는 그 백성에게 그에 맞게 행동할 기회를 주었다. 즉 백성이 회개하면, 야훼는 재앙을 내린 것을 후회할 준비가, 구원의 제안을 발로 차 버리면 백성으로부터 구원을 다시 거둘 준비가 되었다. 이로써 예레미야 제자들은 야훼의 역사행위에 뚜렷하게 교육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동시에 그들은, 신명기적 역사가의 역사구조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결정론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했다. 분명히 우연적인 사건들, 즉 자유롭고 특히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결정과 심판결정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인간에게 맹목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에게 여전히 그에 대해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을 마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막대한 우주적인 포로기의 역사신학은 제2이사야 집단이 대표했다. 그들은 전적으로 이사야 전승의 노선에서 야훼의 역사행위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함으로써(사 46:9-11), 야훼가 이스라엘을 두 세기 전부터 역사에서의 그의 행위를, 야훼의 유일신성에 대한 중심 증거수단을 위해, 자신의 에언자를 통해 선포하게 했다는 경험을 강조했다. 예루살렘의 멸망뿐만 아니라, 고레스의 상승도 이로써 신의 계획의 한 부분이었고 야훼의 역사에서의 주도권을 나타내 주었다(41:22f.). 게다가 제2이사야 집단은 야훼의 이스라엘과 시온에 대한 구원계획을 이름을 들어 페르시아왕 고레스와 연결시키기를 꺼리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의 예언을 고레스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어떤 근본적인 것도 감행하지 않은 주전 539년 후의 것으로 파악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예언자 집단은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49:4, 6과 견주어 보라) 흔들리지 않고, 계속하여 역사에서의 야훼의 계획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동시에 그들은 야훼가 사로잡혀간 이스라엘과 함께 아직도 어떤 것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고, 골라의 권리와 구원의 중재자라는 혁신적인 생각에까지 미쳤다(42:1-4; 49:6). 그들은 세계사의 진행을 그들이 자신의 제국정책을 마찬가지로 법에 기초하고자 한 다리우스가 하나님에 의해 부름받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것(42:5-9; 45:11-13*; 48:12-16상)을 발견했을 때까지 기대에 차서 관찰했다. 그리고 그들은 귀향과 재건이라는 주어진 구원 기회가 파악되고 정치적인 현실로 옮겨지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수레바퀴를 다시 가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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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기독교인에게 그러한 역사 신학은 낯선 것이 되었다. 유럽의 모든 기독교 국가들이 하나님이 그들 편에서 투쟁한다고 선전하며 서로 악마시했던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 후에, 그때까지 여전히 전체적으로 기독교적으로 각인된 독일이 전 유럽에 확장시켰던 야수적인 민족 살해와 산업적인 유대인 멸종의 잔학함이 있은 후에, 특히 독일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역사와 연결시키고자 하는 데서 멀어져 갔다. 그들은 그 대신 개인적인,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면에 한정하여 기독교인의 구속에 관한 종교적이고 저 세상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이 관점의 문제는 국제정치와 세계사의 전 영역이 하나님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를 들면 신학적으로 전혀 숙고하지 않은 이 영역에서 모든 가능한 우상들은 냉전의 이름 하에서든, 지구화의 이름 하에서든, 잠을 깨고 준비하고 있다. 정치적인 통치자들을 하나님의 구원계획으로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은 당연히 아돌프 히틀러를 위한 우상을 섬기는 지도층의 종교 이후 매우 위험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제2이사야 집단이 감행했던 고레스와 다리우스를 동일화하지 않고는 골라 집단의 귀향이란 없었을 것이며, 유다에서의 새로운 시작도, 그와 함께 유대교와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다. 즉 신학적인 해석을 통해서만 변혁상황에서의 역사는 명료성을 획득하고, 이러한 명료성은 먼저 올바른 결정을 가능하게 하고 그에 대한 동의를 얻는다. 저 신학적인 역사 의미만이 어쩔 수 없이 흐르는 역사의 경과에 대해 비판적으로 되물을 수 있게 하고, 숨겨진 역사에서의 윤리적인 차원을 발견하게 한다. 그러므로 21세기의 기독교 신학이 세계사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를 진지한 신학적인 성찰의 대상으로 다시 획득하고, 역사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 악용되고 신학화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기준을 발전시키는 일이 필수 불가결하다고 본다. 여기에 포로기의 역사신학은 이바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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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제국신학의 좌절
정치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소국 유다는 포로기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 근동의 대 제국들처럼 - 다윗계의 왕이 무력으로 이방민족들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래 경배하게 할 것이라는(시2:6-12) 제국 왕정 신학을 발전시켰다. 동시에 그에게 야훼는 세계통치권도 넘겼고(시2:8; 72:10f.) 다윗 왕조에게는 영원한 지속을 약속했다(삼하7:11하-16; 시 89:27-38). 마지막 다윗계의 왕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597년과 587년에 폐위되고 사로잡혀 가게 되므로써 이 제국주의 신학은 거부되었다(애4:20; 시89:39f. 50). 다양한 포로 신학 집단들이 제기했고 그들에 의해 뜨겁게 논쟁되었던 질문은 왕정과 그 신학으로부터 무엇이 나왔느냐느 srjt이었다. 신명기적 역사가들이 군축제한과 왕과 신명기법과의 결속으로 만족해 하면서(신17:16, 19f.; 왕하 23:1-3) 달리는 여호야긴에게 계속 그들의 희망을 두었고(왕하 25:27-30), 에스겔 제자들은 왕정과 고위층에 대한 하나님의 정화심판 후에(겔34:1-22) 새 다윗이, 그러나 그의 힘의 기초는 매우 제한되고(46:16-18) 그의 관직으로부터 모든 성역이 제거되어야 한다는(45:16f.; 46:1-10), 새 다윗이 다시 등극하게 될 수 있음(34:23f.; 37:24f.)을 고대한 반면, 신명기적 예레미야는 다윗 왕정의 재건을 단호하게 부인했다. 예레미야가 여호야긴에게 가한 유죄판결은 다윗 왕정의 최종적인 성격을 지녔다(렘2:24-30).
제2이사야 제자들은 옛 왕정신학을 가장 창조적으로 다루었다. 즉 그들은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칭호와 야훼의 사랑받은 자의 칭호를 다윗 왕에게서부터 페르시아 왕 고레스와 다리우스에게로 옮겼다(사45:1; 48:14). 그리고 야훼는 이제 이방세계통치자에 대한 세계통치를 수행했다. 게다가 사로잡혀 간 이스라엘 자체로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법을 가져다주는(42:1-4) 그들을 위한 구원의 중재자로서 기능해야 할(49:6) 야훼의 종의 역할을 넘겨받았다고 한다.
하나님의 세계통치의 질은 달라졌다고 제2이사야 제자들은 인식했다. 즉 그것은 핍박받는 자들의 해방과 약자, 먼저는 사로잡힌 이스라엘을(사40:29-31; 41:17; 42:22; 49:9), 다음으로는 정치적인 통치의 모든 희생자들을(42:6f.; 45:22) 강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미래에는 더 이상 군사력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 약자를 돕는(42:3; 51:4f.) 법을 수단으로 한 통치가 이루어질 것이다. 야훼의 유일신성은 모든 제국적인 절대권을 상대화시켰다(47). 세계가 야훼를 유일신으로 인정하는 것은 야훼가 다른 민족을 구원으로 초대(45:20상, 21-25)함으로써 관철될 것이다. 동시에 야훼를 위한 세계 앞에서의 증인의 과제는 이스라엘에게 적합했다(43:10, 12; 44:8). 이렇게 완전히 새로운 선교의 가능성이 옛 세계 통치권의 자리에 등장했다. 그러므로 후대의 제2이사야 제자들이 다윗 왕조에게 놓였던 약속들을 백성에게로 옮겼다면 그것은 논리적이었다. 즉 야훼가 백5성과 맺은 영원한 계약은 이제부터 모든 민족들의 순례에서 현실화 될 것이다(55:3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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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기 신학자들이 여기서 수행한 것은 다름 아닌 왕의 통치와 신의 통치의 일관된 분리이다. 그들은 왕의 직을 약화시키거나 부정했고, 거기서부터 그러나 더 이상 세계통치가 아니라, 법 중재권과 선교를 목표로 하는 보편적인 이스라엘을 위한 과제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야훼의 힘이 자기들의 권력에 대한 이해와 얽히게 될 때 주와 세상의 왕으로서 야훼의 명성은 깊이 손상된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의 신성을 인정하기 위해 누구도 권력을 수단으로 강요할 수 없고, 단지 말씀을 통해서만 설득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신학적인 명료성 앞에서 우리는 초기 유대교의 번창하는 선교의 열매들을 종식시킨 기독교가 어떻게 19세기까지 그 선교를 끊임없이 무력으로 그리고 식민지적인 관심을 관철시키기 위해 오용할 수 있었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선교 명령은 이렇다. “세상에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 내가 가르친 대로 그들을 가르쳐라!”(마28:19f.) 여기에도 정복에 대해서는 마찬가지고 아무 언급이 없다. 정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힘을 그들을 위해 사용하신다(18절). 기독교회와 나라들이 신적인 힘을 횡령하고 그들의 선교에 강요적인 수단으로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것은 신약의 뒤로 물러난 것일 뿐만 아니라, 이미 포로기에 이스라엘의 신학자가 명확하게 했던 것으로부터의 후퇴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들의 관심이 그들의 종교적인 과제로부터 멀리 있다는 것을 세심히 주의할 때만 믿을 만한 증언을 할 수 있다. 이 외에,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을 따라 교회도 국제적인 갈등들이 사욕이 없고 정당한 법을 통해 놓이는데 협조하는 임무를 지닌 제2이사야 학파의 이상은(사42:1-4; 2:1-5를 견주어 보라)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새로이 발견되어야 한다.
4.하나님의 영광과 삼권분립
포로기 이전 시대에 성전과 궁전은 공간적으로 한였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제도와 유사한 이음새을 통해 서로 연결되었다. 즉 예루살렘 성전은 동시에 다윗의 예배당이었고 왕국의 성전이었다. 왕은 성소와 제사장을 돌보았고 스스로 고도의 거룩한 기능을 담당했다. 제사장은 높은 서열의 왕국 관리들이었고 왕가와 사돈을 맺었다. 수도도 왕국 소유의 핵심에 있었다. 특히 유다가 비교적 큰 수도보다 더 낫지 않은 땅으로 구성된 상태였던 7세기에 큰 왕가, 왕정 관리, 군대와 제사장들은 도시 귀족주의로써 밀접하게 얽힌 힘의 엘리트층을 형성했고, 그들은 모든 실타래를 손에 쥐었다.
권력분배의 첫 번째 시도는 요시야 개혁에서 이루어졌다. 왕에게서 입법권이 없어졌다. 그 대신 왕은 직접 모세법(“원시명기”)의 권위에 종속된다(신17:14-20). 사사들은 왕정에 비해 자주성을 얻고(16:18-20), 지도층의 일반인들과 제사장들에 의해 파견되 s상법의 감독 아래 있었다(17:8-13). 그리하여 입헌왕정의 방향으로 첫걸음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요시야의 죽음과 개혁의 실패로 그 발전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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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야긴이 바벨론의 감옥에서부터 562년에 석방됨으로써 다윗가의 회복 가능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을 때, 사로잡혀 간 지도층 동아리에서 작업했던 신명기적 역사가들은 요시야로 끊어진 실타래와의 연결을 지지했다. 그것은 토라의 의무를 진, 입헌군주, 그러나 전통적인 국가 제의적인 노선의 진행을 의미했다. 성전과 제사장 제도와의 연관성은 계속되다가 여호야긴의 손자 스룹바벨과 520년의 귀환집단을 이끌었던 대제사장 요수아에 의해 분리되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예언자 에스겔 주변에서 형성된 포로기 개혁제사장단은 매우 근본적인 해결책을 대변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야훼의 영광이 포로 전에 성전을 떠나고 이로써 멸망하도록 성전을 내주었다(겔8-11)는 사실로부터, 야훼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새 성전은 건물 상 그리고 조직적으로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띠어야 한다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나왔다. 성전과 궁전이 건물로 연결된 것은 야훼의 위엄과 거룩을 손상시킨다고 그들은 통찰했다(43:1-13). 그래서 성전은 정치권 중심에서 완전히 분리되어야 했다. 그것은 수도의 물리적인 분리를 의미했고 일관된 제사장 자치를 의미했다(45:1-8). 왜냐하면 성전의 필요한 영광은 그렇게만 보증될 수 있었다. 에스겔 제자들은 게다가 성전의 포괄적인 경제적 자립과 제사장의 자생을 입안했다. 군주는 단지 백성 가운데 적은 액수의 성 전세금을 수금할 임무만 지녀야 했다(45:13-17). 그는 예배 시에 일반인들 가운데 명예로운 자리에만 있어야 하며 결코 더 이상의 거룩함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46:1-10). 성전과 궁전의 이러한 분리 외에 개혁제사장들은 또한 정치력의 분리를 옹호했다. 왕과 관리들이 왕지에 손대는 것을 제한하는 반면(46:16-18), 일종의 봉토지역으로 계획한 수도는 지파들의 봉사자에 의해 관리되어야 했다.(45:5; 48:15-18). 그러니까 이 개혁계획에 따르면 포로 전에 밀접하게 연결된 제도들, 궁전과 성전과 수도는 미래에 엄격하게 분리되어야 한다.
에스겔 학파의 입안은 그렇게 실현되지 않았고, 그러기에는 너무나 유토피아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포로기 이후 제사장단이 그들의 자립과 예루살렘 성전의 자치를 관철시키게 하였다. 동시에 다윗 왕조 회복의 실패는 그들(제사장단)에게 성과를 용이하게 해 주었다. 포로기 후의 공동체는 페르시아 행정관리의 지붕 아래서 제사장단과 장로회, 그리고 공회에 의해 다스려졌다. 즉 그것은 실제로 야훼의 영광에 더 합당하게 되로고 시도했던 힘의 분배 형태로 실현되었다.
우리가 이러한 발전을 바라본다면, 가까우 s과거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비호 아래 어떻게 다시 왕위와 종교가 그렇게 다양하게 연결될 수 있었는지 질문할 것이다. 독일 개신교 국교회가 제1차 세계대전 말에, 바이마르 헌법이 교회와 국가사이에서 수행했던 계속된 관대한 분리를 교회 적대적인 사회주의자의 음흉함으로 여기지 않고, 그들의 하나님의 위엄을 위해 신학적으로 필요하고 이미 오래 전에 임한 행위로 간주했다면, 그 다음의 독일 교회사는 다르게 흘렀을 것이다. 나아가 독일 목사들이 하나님의 위엄을 제대로 이해하느 srjt이 정치력의 분리를 불가피하게 뒤로 밀어놓는다는 것을 의식했다면, 바이마르 민주주의와 국가사회주의의 독재에 대한 이해는 다른 모습을 띠었을 것이다.
이로써 기독교가 유대교가 공공 책임을 느끼고 현대사회를 위해서도 성서전승의 유산이 계속 일깨워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참고문헌-
1.라이너 알베르츠 지음 배희숙 옮김 「포로시대의 이스라엘」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6
2.장세훈 「한 권으로 읽는 이사야서」 이레서원, 2004
3.P.R. Ackroya, Exil and Restoration The westminster Press Philadelphia,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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