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시각에서 본 구약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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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속사”의 개념과 한계, 의의 우리가 “구속사”란 말을 할 때에는 언제나 “역사”를 전제한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2166 B.C.에 출생하여 75세 되는 때(2091 B.C.)에 하란에서 부르심을 받아 100세(2066 B.C.)에 이삭을 낳은 등의 이렇게 성경의 지평 내에서 사고하기보다는 “실제로 있었던 역사”에 그 관심을 두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 어떠한 활동을 해 오셨는가를 밝히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구속사이다. 그렇기에 성경의 세계에서 도출되었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성경의 내용 그 자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무엇-구속사-을 전제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구속사 개념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칼빈주의적 정통주의의 계열에서 상당히 발달하였다. Geerhardus Vos(성경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 역간 참조), Cornelis Vanderwaal(반더발 성경연구, 도서출판 연합 역간 참조), S. G. de Graaf(약속 그리고 구원, 크리스챤 서적 역간 참조) 등이 우리가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구속사 학파의 대표격 되는 사람들인데, 모두 네덜란드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성경의 통일성”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 문제를 구속사라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즉, 성경의 뼈대는 바로 구속역사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을 창설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그 가운데 두신 이후, 사람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속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기본적으로 성경을 “거룩한 역사책”으로 인식한다. 분명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장하시는 분임을 고백한다. 그렇기에 수천년 전부터, 아니 창세부터 하나님은 이 땅을 다스려 오셨다. 그리고 그 다스리심의 결과가 바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구속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그 역사를 재구성하고, 그 역사 가운데 우리의 위치를 찾으려는 노력은 매우 타당하고 좋은 일이다. 특히 구속사적 시각이 보수주의 계열에서 환영받았던 것은, 자유주의나 신정통주의 계열에서 성경의 지평과 현실의 지평을 분리하려는 태도와는 전혀 다른 입장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이 구속사적 시각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구속사는 “현실 역사”에 관심을 둠으로써 개혁주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수납하기에 좋은 시각을 제공한다. 또한, 성경을 “역사”라는 하나의 일관된 연속선을 따라서 보기 때문에, 성경을 통일되게 보는 시야를 제공한다는 것도 구속사적 시각의 장점이다. 그러나, 구속사적 시각에도 역시 한계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실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시각들에는 모두 한계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시각만을 고집하는 우매함을 범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구속사 시각을 창조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구속사적 시각의 한계는 바로 신학하는 자들로 하여금 “성경을” 연구하게 하기보다는 “성경을 통해서” 역사를 연구하게 한다는 데에 있다. 즉, 성경 그 자체의 논리를 따르고, 성경 저자의 메시지가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성경을 하나의 자료, 또는 바깥을 바라보는 창문으로 이해하여 세상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어떻게 구속의 은혜를 내려주시는가를 밝히는 데에 그 초점을 맞추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문제는 역사를 밝히는 데에는 별 도움이 안되는 책, 즉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등의 시가서, 지혜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며, 또한 선지서의 경우에도 그 선지자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그 선지자가 그렇게 외치게 된 영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어떠했는가에 관심을 더 기울이게 되는 한계를 지니게 된다. 결국 선지서 역시 역사서를 보조해주는 자료로서 가치를 얻게 될 뿐이다. 또한, 과연 오경이나 역사서는 과연 현대적 의미의 “역사책”인가 하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사실 오경이나 역사서 역시 그 가운데 메시지를 포함한 “선포”이다. 적어도 현대에서 말하는 실증적인 역사자료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는 것이다. 어쨌든 구속사적 시각을 사용하여 성경을 연구하려는 사람은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는 가운데에서 그 가치를 찾아야 한다. 2. “구속사”란 용어에 대한 오해 “구속사”란 단어가 시중 기독교 서점의 책들에서 상당히 자주 눈에 띄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책이 구속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D.L.Baker의 Two Testaments One Bible이 구속사적 성경해석학(엠마오)이란 이름으로 번역되었으나, 실제로는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을 뿐, 구속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Sidney Greidanus의 Sola Scriptura - Problems and Principles in Preaching Historical Texts는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학생신앙운동)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으나, 실제로 저자는 구속사적 설교의 한계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면 모두 구속사적 시각이라고 생각하는 피상적인 시각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며, 또한 워낙에 구속사적인 시각이 성경을 보수적 관점에서 제대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구속사적인 시각을 말하지 않으면 제대로된 신학자, 설교가일 수 없다는 식으로까지 국내 보수주의 신학계가 크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비록 구속사와는 관계가 없거나 오히려 비판하는 책이라도 그 표제만은 구속사적 시각을 가르치는 것처럼 써 놓아야 책이 잘 팔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어쨌든 실제로는 구속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표제에는 “구속사”가 들어가는 책들이 제법 많다. 그런 것 때문에 혼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3. 역사의 문제 - 사관 아직 본론에 들어가지 못했다. 우리는 역사를 이야기할 때, 언제나 “사관”이라는 문제에 마주치게 된다. 같은 역사적 사실을 보더라도 그 역사가의 입장에 따라서 전혀 다른 역사 서술이 나타나곤 한다. 그러므로 사관이란 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구속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어느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성경 저자가 가지고 있는 사관을 따라서 그 역사를 이해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역사가, 즉 성경 저자의 사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마다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제법 많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정통파 칼빈주의(정통신학이라기보다는 칼빈주의가 화석화된 형태 - 네덜란드에 이런 입장이 많다)에 있는 사람들은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에서 야곱이 선택된 것은 오직 그 둘이 리브가의 태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창 25:23)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럼으로 인해서 에서의 잘못과 야곱의 비열함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알미니안의 경우는 좀 다를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예지 예정을 주장할 수도 있다. 그것을 가지고 창세기를 풀어 나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수 있는 셈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진정 그 성경저자가 가지고 있었던 사관이 무엇이었는가를 밝히는 데에 있다. 그러다보니 구속사적 시각이라고 해서 성경을 해석한 결과물이 거의 일치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미리 이해해야 한다. 일단 우리는 “언약”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우리의 사관을 정립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언약신학은 청교도 전통에서는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틀로서 여겨져 왔으며, 또한 근래에 성경의 통일성을 이해하기 위한 틀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기도 하며, 또한 보수적인 구속사 학파들 역시 구속사의 중심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그리스도”라는 것을 중심으로 보거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보거나, “계시”란 개념을 중심으로 보는 등의 입장들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서로 배타적으로 자기 관점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이해할 필요는 있다. 4. 시대구분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시대구분이라는 것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세대주의에서 특히 이 시대구분에 대해서 민감하다. 세대주의는 무죄시대(창조-범죄), 양심시대(범죄-노아의 홍수), 인간통치시대(홍수-아브라함), 약속시대(아브라함-모세), 율법시대(모세-예수님의 탄생), 천년왕국시대(재림-흰 보좌 심판), 새 하늘과 새 땅(흰 보좌-영원)으로 이스라엘의 구속역사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예수님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예수님은 천년왕국을 이 땅에 도래시키는 것을 연기하시고, 그 사이에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는 교회시대(초림-재림)가 열리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각 시대마다 구원의 방법은 다 다르다. 무죄시대에는 당연히 구원이란 개념이 필요가 없고, 범죄 이후에는 그 사람의 양심을 따라 구원하셨는데, 그 ‘양심’이란 것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대가 타락하자 홍수를 일으키셔서 세상을 진멸하시고 노아의 가족만을 구원하셨는데, 결국 이들의 후손들은 바벨탑을 쌓는 등 하나님께 반역하는 인간통치시대를 연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아브라함을 부르사 약속(언약)을 허락하시고, 그 약속을 믿는 자를 구원하기로 하셨다가, 출애굽 이후에는 율법을 주셔서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 시대에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하기로 하셨고, 이후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짐으로 예수님의 통치시대가 열리게 되며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대주의적 시각은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했을 뿐 아니라 또한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언약”이란 것을 그 중심으로 삼는 사람들은 시대의 단절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첫 언약(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언약), 아담 언약(창 3:15 이하), 노아 언약(홍수 이후),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새 언약(그리스도의 언약)의 순서로 그 언약이 발전되어 왔다고 본다. O. Palmer Robertson은 이 언약에 대해서 “아담-시작의 계약, 노아-보존의 계약, 아브라함-약속의 계약, 모세-율법의 계약, 다윗-왕국의 계약, 예수-완성의 계약”으로 이름 붙이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각 언약을 맺으실 때마다 앞의 언약을 폐기하시고 새로운 약속을 가지고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래 목적을 보다 높은 실현의 단계로 이끌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었음을 볼 수 있다. 세대주의와 언약사상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세대주의에서는 이전 시대의 것은 폐기되지만, 언약사상에서는 이전의 것이 지금까지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조의 언약은 지금 20세기에 부르심을 받은 주님의 백성들에게도 역시 유효하며, 우리가 마땅히 그 언약에 근거하여 살도록 요구와 격려를 받는다. 그에 비해서, 세대주의는 그 때 일은 그 때 사람에게 유효한 것이었을 뿐이다. 언약 개념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언약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사람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이란 것을 바탕으로 해서 사람과 관계를 가져 오셨다. 언약은 결혼관계와 비교될 수 있다. 결혼관계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특별한 관계(남편과 아내)에 들어가게 되며, 양쪽 모두에게 그 언약에 따르는 권리와 의무가 따른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언약을 맺으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선언을 하시는 것이다. 마치 “나는 당신의 남편 당신은 나의 아내” 식으로 말이다. 단, 하나님과 사람이 맺는 언약은 오직 하나님 편에서만 나오는 일방적 언약이다. 그리고 성경시대에는 이 언약이 주로 피로써 맺어졌다. 참고로, 역사적 관심에서 성경을 보지 않았을 경우에는, 이 언약들 중에서 실제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은 모세 언약과 다윗 언약, 그리고 새 언약이다. 왜냐하면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 세 사람은 모두 창세기라는 한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모세오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책이고, 창세기는 오경의 서론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는 책임을 생각해 보면, 결국 이 세 언약은 모세 언약의 중요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역사적 관점을 고수하여 언약의 변천을 논의해 보자. 5. 창조언약 아담과 관계된 언약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창조 이후에 주어진 언약이며, 둘째는 범죄 이후에 주어진 언약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 창세기 기자는 그 언약에 대해서 모세 언약만큼의 비중을 두어 설명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 언약이 어떠한 것이었겠는가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도록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아담과의 언약 이전에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과의 약정(언약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을 맺으시는 모습이 창세기 1장에 나타난다. 모든 만물은 그 법칙(규례)에 의해서 정리된다. 그리고 그 모든 하나님의 규례 가운데서 하나님의 만물의 주관자 되심을 대리하는 대리자(하나님의 형상)가 세워진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다. 하나님은 세상에게 규범을 허락하시고, 그 규범을 운영해 나갈 대리자를 세우신 후, 그 대리자와도 규범을 세우신다. 창세기에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그 본문의 문맥을 염두에 두어 볼 때, 아담과 세우신 언약, 즉 규범에는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계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담(사람)에게 주어진 “해야할 것”에는 노동, 안식, 결혼이 있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명령과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표현(창 2:2-3)을 볼 때, 그리고 이후에 나타나는 결혼과 안식일 법, 그리고 노동의 저주 등을 볼 때에 창조의 언약 가운데 이 세 가지가 중요한 것으로 들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모두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이었지만, 또한 인간에게 축복으로 주어진 것임을 볼 수 있다. 첫째, 노동이란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다스리는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전하시는 하나님의 역할을 나누어 감당해야 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안식이란 사람이 노동 가운데 매몰되지 아니하고 창조주를 기억하는 자로서 설 것을 요구받는 것이다. 사람은 6일간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간을 갖게 되었다. 셋째, 결혼이란 남녀가 한 몸을 이루어 교제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됨을 나타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율법에서는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것으로까지 발전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요구하셨고, 그것이 창조의 언약에서 중요한 “해야할 것”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창조의 언약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그 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선과 악을 알게 하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했던 것이 아니다. 이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담이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는 그 나무를 보고 그 나무의 실과를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실과를 먹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으로서 악이며, 먹지 않는 것은 선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가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계시이기도 하다. 아담과 하와는 그 실과 외에도 먹고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에도 뱀의 유혹에 의해서 그 실과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것이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죄를 짓지 않고도 얼마든지 누리며 그 가운데 즐거워할 수 있다. 그럼에도 죄에 탐닉하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이후에 “율법”으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참고로, “생명나무”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많이 제시된다. 이는 모세 언약의 틀에서 유추해서 짐작해 내야 한다. 율법은 그 자체로 생명을 주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다만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에게는 이 은혜로 나아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6. 아담: 구속의 계약 - 시작의 계약 창세기 3장에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가 먼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범죄하였다. 그로 인해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닫게 되고, 그 부끄러움을 가리려 무화과나무의 잎을 사용한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것이 위협적인 것이 되었다(창 3:8). 결국 ‘안식’의 파괴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아담이 하와에게 죄책을 전가하려 함으로 인해서 결혼, 즉 ‘하나됨’의 파괴가 나타난다. 그리고 하와는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자”로서의 지위를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 언약을 맺으신다. 하나님의 법도에 의해서 마땅히 사람의 다스림을 받아야 했을 뱀이 오히려 다스리는 자를 좌우한 것에 의해 하나님이 뱀을 저주하신다. 그러나 이미 죄로 인해서 생겨버린 뱀의 지위를 단번에 제거하시지 않고 ‘사람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권세를 뱀이 가지게 됨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사람은 그 머리를 상하게 함으로써 결국은 사람이 원래의 다스리는 자의 권세를 계속 유지함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완전한 상태는 아니다. 분명 다스림을 받아야 할 존재가 반항하고 공격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창 3:15는 이후에 나타나는 두 계보, 즉 악의 계보와 약속의 계보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결국 가인으로부터 시작하는 악의 계보와, 셋으로 시작하는 약속의 계보가 존재하며, 결국에는 약속의 백성들이 이기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혼’ 역시 파괴된 상태이지만 그대로 유지된다. 그러나 그 가운데 축복받아야 할 생명의 잉태는 가장 큰 고통으로 주어지게 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동등한 하나됨과 사랑함이 파괴된다. 이는 단지 가정 뿐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결국 사람들끼리 서로 불화하게 되는 씨앗이 잉태되었음을 가리킨다. ‘안식’ 역시 파괴된다. 안식은 노동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데, 일단 노동 자체가 파괴되었다. 뱀이 여자에게 반항한 것처럼, 땅도 인간에게 반항하여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된다. 그로 인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것을 먹기 위해서(안식) 이마에 땀이 흘러야 하는 것이다. 물론 안식함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죄에 의해서 안식함은 늘 위협을 받게 된다. 결국 창조의 언약이 파괴됨으로 인해서, 인간은 원래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없게 되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에 처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절망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하나님은 지으신 것을 유지하기로 하셨다. 그리고 언젠가 이 땅을 구속하실 계획을 세우고 계셨다. 그 표시로 하나님은 이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더 이상 에덴이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 주어지지 못하게 된다. 이 시작의 언약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서 취한 태도를 일단 인정하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전부터 주셨던 은총을 일부분이나마 받아 누릴 수 있게 하셨다. 신학적 용어로, 이를 “일반은총”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후에 노아 언약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7. 노아 언약 - 보존의 언약 아담의 범죄 이후, 그 후손은 “뱀의 후손”에 해당하는 계열과 “여자의 후손”에 해당하는 계열로 나뉘어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창 6:2)일이 벌어진다. 이로 인해서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게 되자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창 6:6-7)라고 하신다. 이는 죄로 인해서 세상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암시한다. 결국 홍수가 나고, 모든 것이 파괴된다. 노아의 가족과 그 방주에 탄 생물들만이 살아남는데, 이는 의인을 보존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창 6:18)라는 말을 통해서 이후에 의인을 보전하시겠다는 약속을 보여주신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지 않으시는”(창 18:23-25) 하나님의 모습인 것이다. 홍수가 끝난 후,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 내용이 처음 아담을 창조하신 이후에 하신 것과 거의 비슷하다(창 9:1-8).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보존하신 의인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명을 다시 맡기심을 보여준다. 이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의인들의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세상의 악행에 대해서 홍수로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다시 아담의 범죄를 연상시키는 실수를 저지른다. 노아는 ‘포도원’(우리 번역에는 ‘포도나무’라 되어 있다)을 만들고 거기서 포도주를 만들어 취하고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잠든다. 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포도원은 그 조상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범죄했던 것을 연상시키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는데, 특히 그가 ‘벌거벗었다’는 말을 통해서 창세기 저자가 노아가 아담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음을 보여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아직 유효하다. 하나님은 의인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보전하시고, 하나님의 형상됨을 지켜가는 자들을 세워 나가시게 될 것이다. 8. 아브라함 언약 창세기 11장은 각 족속들이 어떻게 다른 언어를 가지고 흩어지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일단 하나님은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죄악을 흩으셨다. 그러나 그 족속들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이 세상을 구원할 자가 나타나게 될 것을 보이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다섯 번 만나심으로 그와 언약을 굳건히 하셨다(창 12:1-3, 13:14-17, 15:1-21, 17:1-22, 22:1-19). 창세기 18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일로 만나실 때에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세우시기 위해서 주어진 기회는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아브라함의 지위가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는 여실히 나타난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상에 흩어진 모든 족속들의 구원을 이루겠다는 계획을 세우셨고, 그 계획에 의해서 의인들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불러모으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형상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에 의해서 세워지게 된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세워진 근거는 그의 믿음이었고(15장), 아브라함 언약의 징표로서 주어진 것이 할례였다(17장).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 되었다. 유대인들에게는 할례가 그 징표로 주어졌지만, 예수께서 오신 이후에 이는 세례로 주어지게 되었다. 9. 모세 언약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야곱에 이르러 70명 정도로 성장한다(출 1:5). 이들이 애굽에 들어가 430년을 지내며 남자들만 600,000이라는 숫자로 성장하게 된다(출 12:37). 하나님은 이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셔서 시내산에서 이들과 언약을 맺으신다(출 19장). 이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1단계로 성취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율법이다. 율법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것으로 주어졌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 언약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언약관계에 들어간 사람들이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했다. 아담이 먼저 에덴에 들어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이후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 것을 명령받은 것과 같은 순서이다. 다른 언약들에 비해서, 모세 언약은 언약의 형태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서 아주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될 자들을 부르시고(출 19:3-6), 그에 대해서 그 백성이 순종을 진술하며(8절), 하나님이 그 만남의 시간과 장소를 주선하신다(10-15절). 그 때와 장소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16-25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기 위한 규정들을 제시하신다(20-23장). 백성들은 이 규정들을 그대로 수납할 것을 맹세하고(24:3,7), 하나님이 그 백성의 대표들을 직접 대면하여 만나시고, 그들이 먹고 마신다(24:9-11). 이로써 언약이 맺어지게 된다. 언약은 맺어졌고, 이 언약을 기록하기 위한 계약서(?)를 교환하게 되는데, 그것이 두 돌판이다. 우선은 언약을 맺은 양쪽이 지내게 될 집을 지을 것과 언약의 예식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가 계획되고 있다(25-31장). 그런데 출 32장에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자마자 곧 그 언약을 파기했음이 기록되어 있다. 모세는 이로 인해서 두 돌판을 깨뜨리는데, 이는 언약이 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세는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언약을 갱신해 줄 것을 요청하며,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다시 세우시고 그 언약의 돌판을 다시 만드신다(출 34장). 이후에는 실제로 언약을 맺은 양측이 함께 지내게 될 집을 건축하게 된다(35-40장). 이 언약의 규정이 바로 율법이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자세히 기록된 율법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그 백성들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가를 구별하고 악한 일을 하지 않도록 지시받는다. 여기에는 아담에 의해서 깨어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하는 것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노동과 안식과 결혼이라는 세 가지가 발전되어서 정치, 경제질서의 문제와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 그리고 사회관계의 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깨어졌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방법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모세 언약은 그 자체로서 완전하지 않았다. 원래 완전할 것을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아담 이후로 파괴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그 갈등을 어떻게 이겨 나갈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율법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율법만을 주어서는 여지없이 범죄에 빠지는 모습이 출애굽기에 이미 잘 나타나 있다. 결국 이들에게는 모세와 같은 중보자, 곧 지도자가 필요했다. 여호수아, 사사기 등에 나타나는 여러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완전하지 못하였음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이제 하나님은 완전한 지도자를 향해서 그 구속의 역사를 진행해 가신다. 10. 다윗 언약 - 왕국의 언약 다윗이 그 왕국을 건설한 후, 자신은 왕궁에 있으나 하나님의 궤는 출애굽 시대에 만들어진 장막에 계속 거하심을 인하여 성전을 지으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그 일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그 왕위가 보존될 것을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이를 다윗 언약이라고 한다(삼하 7장, 대상 17장). 이는 모세 언약을 통해서 그 왕이 되실 것을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그 집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리하는 통치자가 되도록 하시겠다는 언약이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다윗 계열의 왕에 의해서 다스려진다. 이는 하나님이 그 통치를 그치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를 다스리는 참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메시아이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를 통해서 다윗이나 그 아들 솔로몬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완전한 지도자가 아님이 여실히 증명되었다. 이후에도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의 예표가 나타난다. 에스라, 느헤미야, 스룹바벨, 제사장 여호수아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그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지도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11. 새 언약 - 그리스도의 언약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 완전한 언약이 세워졌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되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제자들을 부르시고(아브라함을 부르심과 같이), 그 나라의 법을 제정하시고(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심과 같이), 직접 그 나라의 왕이 되셨다(다윗의 후손으로서). 그리고 그 언약을 제자들과 함께 맺으셨는데, 그의 몸과 피를 통한 언약이었다(성찬). 그리고 그 언약이 헛된 것이 아님을 드러내시기 위해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이전의 아브라함, 모세, 다윗 언약을 성취하셨다. 이제 다시 오심으로써 노아에게 보이신 것과 같이 의인들을 보전하시고, 아담에게 부여하셨던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교회는 지금 그 과도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12. 결론 지금까지 언약이라는 도구를 통해 구속사를 간략히 조명하였다. 처음에 언급했거니와, 성경을 보는 시각은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이 구속사적 시각은 성경의 진리를 통일성을 가지고 조망하는 데 상당히 큰 도움을 주며, 또한 우리의 현실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역하시고 계신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시야이다. 이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원한다면 우선 성경 본문을 여러 번 읽어서 거기에 친숙해지려는 노력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이후에 아래에 기록한 참고도서들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실 구속사적 시각으로 구약을 조망하려고 하면 그 양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그 뼈대 중에서도 일부만을 간추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팔머 로벗슨,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기독교문서선교회 그라아프, 약속 그리고 구원(총 4권), 크리스챤서적 반더발, 반더발 성경연구(총 3권), 도서출판 연합 토마스 맥코미스키, 계약신학과 약속, 기독교문서선교회 밴게메렌, 구원계시의 발전사, 성경읽기사 둠브렐, 언약과 창조, 크리스챤서적 |
http://cafe.daum.net/nokobo/L3gV/42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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