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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성경, 개정판에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나?

까망쑤나 2011. 12. 6. 03:29

개역성경, 개정판에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나?


나 채 운목사
- 전 장신대 교수 -

Ⅰ.머리말

대한성서공회는 1998년 8월 31일 자로 개역성경 개정판을 출간하였다. 지금까지 거의 절대다수의 한국 교회가 예배시에 사용하고 있는‘개역성경 한글판’은 여러 우리말 번역성경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 사용되고 있는, 그리고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성경이라 할 만하다. 1938년에 출간된 이 성경은 올해로 꼭 62년이 되었거니와, 그 번역의 역사로 따지면, 89년의 역사를 가진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최초의 우리말 성경전서(소위‘구역’)이 발간된 1911년 그 해에 개정위원회가 조직되어 개역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후 1961년까지 약간의 개정 (어휘)이 있었고, 1972년에는 대한성서공회가 필자에게 위촉하여 신약만 처음으로 구두점 적용의 가로쓰기판을 내도록 하면서 소폭 개정 (전체 590 곳)을 하여 1979년에 출간한 바 있었으나, 거의 알려진 바 없이 지내다가 재작년에 대폭 개정하여‘개정판’이란 이름으로 내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이 역사적인 개역 개정판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하여, 먼저 개역 개정판까지의 우리말 성경 번역 약사를 언급하고, 다음으로 그 실제적인 개정내용에 관하여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나를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 교회는 성경 번역에 있어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그 나라의 성경이 번역되는 데는, 외국의 선교사가 들어가서 수년 동안 그 나라의 말을 배워서, 또한 그 나라 학자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쪽복음 한 권 정도를 번역 출간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1885년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라가 들어오기 3년 전인 1882년에 이미 만주 심양에서 로스 (John Ross) 선교사에 의해 누가복음이 출간되었고, 두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는 일본에서 한국인 학자 이수정 (李樹廷)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왔다. 로스 선교사의 번역은 그후 계속되어 1887년에는 신약전서가 ‘예수셩교젼셔’라는 표제로 출간되었는데, 이 번역성경은 그 당시 한글을 전용했다는 점에서 국어학사상으로도 큰 의의를 가진 기념비적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1911년의 성경전서 (소위 '구역'), 그리고 1938년의 개역성경 등이 선교사 주도 아래에 우리나라 학자들의 협조로 이루어진, 해방 전까지의 번역이다.
해방 후에는 대한성서공회가 출판한 것으로서는, 1967년의 새번역 신약전서 (박창환 교수 초역)가 현대말로 쉽게 번역 출간되고, 1971년에는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가 공동으로, 직역인 개역과는 아주 다른 원칙으로 의역 (意譯, 뜻으로 풀이해서 번역)을 하여 신야전서를, 이어서 1979년에는 성경전서가‘성서’라는 표제로 (가톨릭 교회 용으로는 외경 14권을 더 첨가) 출간되었다. 같은 해에 구두점을 부가한 최초의 개역성경 가로쓰기판 (전술)이 출간되고, 1993년에는 또 하나의 새로운 번역으로서, 현대어로 쉽게 바르게 번역된 표준새번역이 10년의 작업 끝에 출간되었고, 가장 가까운 일로 재작년에 개역성경 개정판의 출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개역성경의 개정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대한성서공회가 개역성경 개정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 일을 필자에게 위촉한 것은 1983년 9월의 일이다. 이리하여 제1차 개정작업이 1988년 4월까지 진행되고, 그 후 표준새번역 작업 때문에 일시 중단되었다가, 표준새번역이 출간된 1993년 2월에 제2차 개정작업을 시작하여 1997년 6월까지 (일시 개정 소위원회도 가동) 진행되었다. 그 동안, 먼저 개정작업이 완료된 신약성경 개정판은 1995년 11월 28일 대한성서공회 창립 100주년 기념예배시에 봉헌되었고, 한편, 1993년 8월에 18개 교단에서 파송된 구약학자 신약학자 국어학자들로 구성된 감수위원회가 가동되어 감수를 받게 되었는데, 이 감수작업이 1997년 6월에 끝나기까지 같은 기간에 필자는 제2차 개정작업을 수행하였다.


감수가 끝나자 성서공회는 동년 11월에 감수용 (비매품) 성경을 만들어 전국 2000 여 목회자 및 교계의 지도자들로부터 의견을 수렴하여,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몇 가지 주요한 점을 추가 개정을 한 다음에, 드디어 1998년 8월 개역성경 개정판의 출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 성서공회 측의 개정안 작성자와 감수위원들은 다 각기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거니와, 그러나 양측의 의견이 전적으로 일치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 제일의 성경인 개역성경이 처음 번역을 시작한 지 89년 만에, 사용된지 62년 만에 크게 개정되었다는 사실은 성서공회 역사상 하나의 큰 획을 그은 일이요, 한국 교회를 위한 큰 공헌이요 극히 다행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Ⅱ. 개역성경 개정의 범위 및 원칙

 

그러면, 이번 개역성경 개정판에서 변경(개정)된 범위는 어느 정도이며, 개정의 기본원칙은 무엇이며, 그리고 감수의 방법은 어떠하였는가?
먼저 감수위원회의 감수가 끝난 시점에서 조사된 개정의 범위는, 한 낱말이 여러 번 반복된 것까지 합하여, 신약성경에서 12,823 개 어구, 구약성경에서 59,889 개 어구로서 총계 72,712 개 어구이다. 약 7만 3000 개어구라는 숫자가 언뜻 크게 생각되나, 총 어휘수 40만 4천 여개 어휘에 비교해 본다면 그리 큰 숫자는 아니다 (이 숫자는 1989년 15년간 RSV 를 개정하여 발행한 NRSV 에 비하면 훨씬 적다). 그것은 이번의 작업이 개역성경의 개정작업이지 새로운 번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의 개정이 공동번역이나 표준새번역과 같이 문체를 달리하는 것 (구어체)이 아니라, 개역성경의 문체 (문어체)를 그대로 유지하여 문장의 종결어미가 같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 보이는 변경은‘가라사대’와‘가로되’가‘이르시되’와 ‘이르되’로 바뀐 것과, 수많은 제3인칭 단수‘저’와 복수‘저희’가‘그’와‘그들’로 바뀐 것이다. 그 이외는 많은 경우에, 한 문장 중의 한 두 어휘를 바꾸거나, 심지어 토씨 한 자를 바꾼 경우도 허다하므로 얼핏 보면 거의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음, 개역성경 개정의 기본원칙으로는 세 가지를 말할 수가 있다:
첫째, 틀린 번역으로부터 바른 번역으로의 개정이다. 이에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그 하나는 개역성경의 오역을 바로잡은 것이요, 다른 하나는 문법적인 잘못을 바로잡은 것, 즉 현행맞춤법을 적용한 것이다.
둘째는 어려운 말로부터 쉬운 말로의 개정이다. 개역성경에는 어려운 말, 특히 한자어가 많이 있어서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이번 개정판에서는 그러한 낱말들을 될 수 있는 대로 쉬운 말로 바꾼 것이다. 어려운 한자어 가운데에는 우리나라 말이 아닌 중국어도 있는가 하면, 우리말 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한자어도 적지 않다.
셋째는 싫은 말로부터 좋은 말로의 개정이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이며, 인도주의사상이나 인권사상이 거의 없었던 당시에 번역된 개역성경에 있는, 남존여비사상을 나타내는 말이나, 일부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일으키는 말들을, 듣기에 거북하지 않은 말로 바꾼 것이다. 그러한 말 중의 대표적인 것이 장애인에 관련된 낱말이다.
위와 같은 기본원칙에 입각해서 개정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1) 문법상 잘못된 것을 모두 바로잡는다. 예컨대, 맞춤법상의 잘못, 용언(풀이씨) 의 시상, 태, 법, 어미 등을 잘 못 쓴 것, 체언(임자씨)의 격, 수, 조사(토씨) 등이 잘못 쓰인 것, 구문에 있어서, 문장의 연결, 종결, 낱말의 배 열이 잘못 된 것 등.

2) 전 문장에 걸쳐 구두법을 적용한다. 즉, 종지부( . ), 구절점( : ; ,) 인용부(“ ” ‘ ’), 의문부( ?), 감탄 부( ! ) 등.

3) 어휘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 예컨대, 창 17:21의 ‘기한’을 ‘시기’로, 레 24:4의 ‘등대’를 ‘등잔 대’로.

4) 개역 당시 어휘의 선택 (또는 조어)이 잘못됨으로써 현재 그 의미가 바뀌어 있을 때는 오해를 막기 위하여 현대어로 고친다. 예컨대, 창 37:4의 “불평하였더라”는개역 당시의 뜻은 “평화롭지 못하였다”였으나, 현재는 “어떤 일에 대하여 불만스럽게 생각하거나 말함”이다.

5) 제3인칭 대명사로 쓰인 ‘저’와 ‘저희’는 각각 ‘그’와 ‘그들’로 통일시 킨다. 요 3:16의“누구든지 저 를 믿으면...”은 “...그를 믿으면...”으로, 마 2:20의 저희가 별을 보고...”는 “그들이 별을 보고...”로.

6) 모든 방언(사투리)은 표준말로 바로잡는다. 예: 왕하 19:28의 ‘자갈’을 '재갈’로.

7) 실질명사 등 뜻이 분명한 어휘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국어사전에 없거나, 현재 그 어휘로써는 다른 뜻으로 오해될 우려가 있는 것은 현재의 성경 독자들의 이해를 위하여 다른 말로 바꾼다. 예: 대하 3:13의 '외소 (外 所)’를 ‘내전 (內殿)’으로.

8) 준말은, 일반적으로 흔하게 쓰이는 것은 허용하되, 잘 쓰이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이해하기 어렵거나 어색한
것은 그 원말로 바꾼다. 예: 느 9:21의 ‘부릍다’를 ‘부르트다’로.

9) 같은 뜻을 가진 한자어와 고유어가 단지 그 음독 (音讀)을 달리할 때는 고유어의 음독대로 표기한다. 예컨대, ‘동리’(洞里)를 ‘동네’로.

10) 어려운 한자어로서 현재 널리 사용되고 있는 국어사전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어휘는 뜻을 알 수 있게 쉬운 말로 바꾸어 쓴다. 예컨대, ‘영채’(營寨)를‘진영’(陣營)으로(삼하 11:11).

11) 어려운 한자어로서 현재 널리 사용되고 있는 국어사전에 수록되어 있더라도 그 뜻이 정확하지 않을 때는바 른 뜻의 말로 바꾸어 쓴다. 예컨대, ‘부비’(浮費)를 ‘비용’으로(눅 10:35).

12) 개역 당시 통용되고, 현재에도 사전에는 수록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그러한 뜻으로 쓰이지 않거나, 또 는 들어서 오해될 우려가 있는 어휘는 이해할수 있는 쉬운 말로 빠꾼다. 예컨대, ‘발명(發明)하다’를 ‘변명 하다’로 (행 19:33).

13) 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로서, 당사자들에게는 심한 수치감을 주고, 말하는 이나 듣는 이에게도
혐오감을 유발시키는 말은 가급적 피하고, 그렇지 아니한 다른 말로 바꾼다. 예컨대, ‘문둥이’를 ‘나병환
자’로.

14) 본래 한자어인 지명이 한글로 표기된 것은 그 정확한 음대로 표기한다. 예컨대, ‘서바나’(西斑牙)를 ‘서 반아’(롬 15:28).

15) 예수께 대한 제2인칭 대명사 대신으로 쓰인 ‘주’(主)는 인칭대명사 그대로 나타내어 ‘당신’으로 쓴다.
예컨대, “주는 그리스도시요”를 “당신은 그리스도시요”(마 16:16)로.

16) 존칭의 사용은 예수 하나님 성령에게 국한하고, 그 외의 인물에게는 사용하지 아니한다(서술문에서).
예: “엘리야가 ...말씀하시거늘...”을 “엘리야가 ... 말하거늘...”로(막 9:4).

17) 개역에서 “...느뇨”와 “...느냐”로 혼용하고 있는 의문문 종결어미는 현대어 표현인 “...느냐”로 통일한
다. 예: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를 “...어디 계시냐”로(마 2:2).

18) 같은 낱말을 되풀이함으로 과잉표현이 된 것은 무용한 낱말을 제하여 단순한 표현으로 바꾼다.
예: “경주를 경주하며”를 “경주를 하며”로(히 12:1)

19) 개역본 번역 당시 통용된 문법이었으나, 현재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아니 하면, 현재 통용되는 말로 바
꾼다. 예: “하늘로서 내려오는”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으로(요 6:50), “세베대와 한가지로”를 “세베대 와 함께”로 (마 4:21).

20) 일반적으로 잘 쓰이지 아니하는 준말은 온전한 말로 바꾸고, 그 외에도 성경의 경전성에 어울리게 가급적 이면 준말을 쓰지 아니한다. 예: “살인치 말라”를 “살인하지 말라”(마 5:21).

21) 명사나 대명사에서 본문의 어휘가 복수형일 때, 의미 전달에 꼭 필요한 경우에는 그러한 표현을 분명하게
한다. 예: “그의 형제를 낳고...”를 “그의 형제들을 낳고”(마 1:2).


Ⅲ. 틀린 말에서 바른 말로의 개정

개정의 내용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틀린 말을 바른 말로 개정하는 것이다. 틀린 본문을 그대로 가지고 목회자는 설교를 하거나 성경을 그대로 가르치고, 교인들은 그대로 배우고 잘못 알게 된다면, 이것처럼 교인들의 신앙과 생활을 잘못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그 주요한 것을 들어본다.

족보 → 계보
개역:“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마 1:1)
신약 개정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1995년)
개역 개정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1998년)
성서공회의 개정안에서는 ‘계보’였으나, 감수위원회에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1995년의 개정판에서는 개역성경의 ‘족보’를 그대로 두었다가 1998년의 개정판에서 다시 개정안대로 '계보'로 바꾸었다. ‘족보’란 말은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16절까지의 내용에 맞는 정확한 낱말이 못된다. 왜냐하면, 거기에 수록된 이름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모든 조상들의 이름이 아니라, 한 계통 (lineage)으로 이어진 조상의 이름만을 수록한 것이다. 예컨대, 아브라함 다음 대에서 이스마엘이 제외되고, 이삭 다음 대에서는 에서가 제외된 것과 같다. 원어 geneseos 와 영어의 genealogy 에 해당되는 우리말은 ‘세계’(世系)이며, biblos 를 포함해서는‘계보’(系譜)이다. ‘세계’라는 말은 한글로 적으면, 영어의 World 에 해당되는 ‘세계’(世界)와 혼동될 우려가 있으므로 쓸 수가 없다. 같은 개념의 한자어를 쓰는 중국어 성경과 일본어 성경에서도 각각 ‘가보’(家譜)나 ‘계도’(系圖)를 쓰고 있고, 개역처럼‘족보’(族譜)라고 쓴 것은 없다.

오늘날- 오늘 (마 6:11 외 여러 곳)


개역성경에는 주기도문의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을 비롯해서 ‘오늘’을 ‘오늘날’로 잘못 쓰고 있는 데가 너무나 많다.`*1 ‘오늘날’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semeron 으로서, 우리말의 ‘오늘날’이 아니고 ‘오늘’임은 물론, 모든 외국어 번역성경이 다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2 ‘오늘’과 ‘오늘날’의 차이는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잘 아는 바이지만, 국어사전의 정의를 보면, ‘오늘’은 ‘지금의 이 날 하루’라고 되어 있고, ‘오늘날’은 ‘지금의 이 시대’라고 되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은 ‘어제와 내일 사이의 24 시간의 하루’이며, ‘오늘날’은 ‘오늘을 전후한 여러 날, 또는 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오늘’에는 또 한 가지 뜻이 있는데, 그것이 곧 ‘오늘날’의 뜻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한국 교회의 오늘의 사명은...”이라고 할 때, 여기서의 ‘오늘’은 물론 ‘하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이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이란 말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24 시간의 하루를 가리키는 뜻이 없다. 주기도 가운데의 ‘오늘’이 하루를 가리키는 것은, 그 다음의 ‘일용할 양식을...’이란 말과, 누가복음의 주기도에서는 ‘날마다’로 번역된 것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오늘 8월 15일은 광복절이다”라고 해야 할 것을 “오늘날 8월 15일은 광복절이다”라고 한다면 어이가 없는 것처럼, 한국 교회 교인들은 아직도 잘못된 개역성경 때문에“오늘날 우리에게 ... ”로 어이가 없는 주기도를 하고 있다. ‘오늘’이‘오늘날’로 잘못되어 있는 곳은 개역성경에 수다하다(예, 눅 2:11, 히 3:7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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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눅 2:1의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수 24:15의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히 1:5의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에서의 ‘오늘날’도 다 ‘오늘’의 잘못이다.
*2) 영어의 this day 나 today 는 물론, 독일어의 heute, 불어의 aujourd hui, 중국어의 今天, 일본어의 今日 등.


오히려 (막 10:21 외 여러 곳)
이 낱말도 개역성경에서 잘못 번역되었는데, 개정판에서는 바로 고쳐졌다, 예컨대, 마가복음 10:21과 누가복음 18:22에서,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에서의 ‘오히려’의 원어는 eti 로서 ‘아직도’란 뜻인데, 그것이 개정판에서는 “네게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으니...”로 바로 고쳐졌다. 그 외에 구약 레위기 14:18의 “오히려 그 손에 남은 기름은...”이 “아직도 그손에 남은 기름은...”으로, 룻기 1:11의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가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로, 열왕기 상 20:32의 “아합이 이르되 그가 오히려 살아 있느냐”가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느냐”로, 욥기 36:2의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가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등과 그 외에도 여러 곳에 잘못 번역되어 있던 것이 다 고쳐진 것이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마 6:34)
개역성경에서의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가 개정판에서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로 바뀌었다. 지금까지의 개역으로는, 내일 일을 염려하되 오늘 하지 말고 내일에 하라는 말, 즉 염려하는 시간(날)에 관한 언급으로 이해되는데, 원문의 뜻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내일 일은 내일 자체가 염려할 것이니, 너는 도무지, 내일에도 염려하지 말라는 뜻, 즉 염려하는 주체(네가 아닌 내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3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도 “...그 날로 족하니라”로서 더 정확한 표현으로 바꾸었다.
*3) 영어성경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1989)에서는 for tomorrow will bring worries of its own 으로, 우리말 표준새번역에서는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로 되어 있다.

“주여 내니이까”- "주여, 나는 아니지요" (마 26:22, 25, 병행)
예수께서 제자 중 한 사람이 스승을 팔 것이라는 예언을 하셨을 때, 제자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하는 말을 개역성경에서는 “주여 내니이까”로 되어 있던 것을 이번의 개정판에서는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바로잡았다. 이 말에 대한 원어는 meti ego eimi kyrie 로서, 정확하게 번역하면 부정사를 써서 “주여 나는 아니지요”로 해야 한다. 개역의“주여 내니이까”는 헬라어 원어를 유의해서 보지 아니하고 영어성경(King James Version)의 “Lord, Is it I?”나 중국어 구역 “主 是我磨”를 보고 잘못 번역한 듯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모든 번역들은 부정사를 넣어서 분명하게 번역하고 있다: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에서는 “Surely not I, Lord?”로, 독일어역 Die Gute Nachricht 에서도 “Du meinst doch nicht mich, Herr?”로, 중국의 現代中文譯本에서도 “不是我把”로, 일본어성경 改譯과 新改譯이 다 “主 .......................
”로, 그리고 우리말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에서도 각각 “주여 나는 아니지요”와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등으로 바로 번역되어 있다.

고소 → 고발 (마 27:12)
개역--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개정--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
개역 본문의 '고소'는 그 내용으로 볼 때 고소가 아니고 고발이므로 개정판에서는 '고발'로 바로잡았다. '고소'와 '고발'은 다같이 법률용어로서 비슷한 말이기는 하나, 같은 뜻의 말은 아니다. 즉, 고소는 범죄의 피해자가 수사기관에 범죄사실을 알리고 그 수사와 처리를 요구하는 것을 말하는 데 대해, 고발은 피해자가 아닌 제 삼자가 수사기관에 범죄사실을 신고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의 경우에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어떤 일로 말미암은 피해자가 아니므로 고소가 아니고 고발인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 두 낱말을 잘 구별해서 설명해야 한다. 이번 개정판에서 개역의 '고소'를 '고발'로 바로잡은 곳은 이곳 외에도 막 15:3, 눅 23:2,14, 요 5:45, 8:6 등 여러 곳에 있다.

증거→증언 (요 1:7)
“그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 에 대하여 증언하고”
개역성경에서 ‘증거하다’가 동사로 쓰인 경우는 수다하다. 그러나 ‘증거하다’는 결코 사전에도 없는 틀린 말이다. 즉, ‘증거’는 명사로만 쓰이는 것이며, 거기에 동사 어미 ‘--하다’를 붙여서 동사가 될 수 없다. 원어 Martureo 에 대한 바른 번역은 ‘증언하다’이며, 이것은 이번 개정판에서 모두 고쳐졌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 영과 진리로 예배 (요 4:24)
개역--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개정--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개역 본문의 "신령과 진정"이 개정판에서 "영과 진리"로 바뀐 것이다. 이 원문은 en pneumati kai aletheiai 로서, 우리말의 "신령과 진정" (神靈과 眞情)은 합당하지 않고
"영과 진리" (靈과 眞理)가 바른 번역이다(영어성경에서는 예외 없이 in spirit and truth).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의 잘못된 예배관을 시정해 주는 말씀으로서,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의문적 (儀文的)이고 형식적이고 물질적인 제사를 부정 경계하는 것이며, 성령으로 예배한다는 뜻은 아니다(그러므로, 영어로 쓰면 대문자 S로 쓰지 않는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이방인들 (사마리아인 같은)의 거짓 신에 대립되는 참 신에 대한 예배를 뜻하는 것이다. 즉 예배할 장소와 예배할 때와 예배할 대상을 바로 알아서 참된, 진정(眞正)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여기 '진정'은 한자어 (국한문 성경에서)로 '眞正'이 아니고 '眞情'이니 더더구나 안된다. 이 본문은 목회자들이 많이 인용하고, 또 설교의 본문으로 삼는 중요한 구절인데도, 대다수의 설교자들이 개역성경 본문의 번역이 잘못되어 있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설교해 온 것이 사실이다 (주석서에서도 성경 본문의 번역의 잘못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 이제 설교자는 더 이상 지금까지의 개역성경을 쓰지 말고, 개정판을 씀으로써 우선 본문에서부터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 4:7-8)
디모데전서 4장 7-8절의 개역본문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로 되어 있는데, 이번의 개정판에서는 "…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 "으로 바로잡았다. 개역 본문의 '연습'은 전혀 잘못된 번역이므로, 이미 1967년의 새번역과 1971년의 공동번역에서는 다같이 '훈련'으로 번역하였는 데도, 설교자들은 거의가 아직도 '연습'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을 본다. 개역 본문은 헬라어 원어인 '김나제' (gymnaze)를 영어 (exercise)로 번역한 것을 따라 번역한 듯하나, exercise가 본 문맥에서는 우리말의 '연습'이 아닌 것이다.

권세있는 자 (마 7:28-29)
마태복음 7장 28-29절의 개역 본문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로 되어 있는데, 이번의 개정판에서는 "…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로 개정하였다. 이 본문에서 '권세'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 엑수시아 (exousia)는 영어로는 (authority)로 번역된 말로서, 개역의 '권세'는 바른 번역이 못된다.
이 말에 대해서도 1967년의 새번역과 1971년의 공동번역이 다같이 "권위…"로 바로잡았으나, 개역성경만을 보는 많은 목회자는 잘못된 번역 때문에 계속해서 잘못 알고, 또 잘못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개역성경에서 '권세'로 번역된 많은 경우에 그것이 잘못 번역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 몇 가지 예를 들면, 마태복음 6장 13절의 '권세'는 그 헬라어 원어가 뒤나미스 (dunamis)로서, '권세'이기보다는 '권능' (영어로는 power)이며, 이것은 1967년 새번역과 1971년의 공동번역에서도 고쳐지지 않은 것이 이번에 처음으로 고쳐졌다.
헬라어 '엑수시아' (exousia)에 대한 개역성경의 번역은 거의 '권세'로 일관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 문맥을 보면, 동일한 어휘는 동일한 어휘로 번역해야 한다는 원리를 적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번의 개정판에서는 그 문맥을 따라 가장 많은 '권세' 외에 적어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달리 번역하였다. 첫째, '권위'로서, 위에 예로 든 마태복음 7장 28-29절 외에도 마태복음 21장 23절의 "… 또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등 여러 곳이 있고, 둘째는 '권능'으로서, 마태복음 9장 6절8절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 등 여러 곳, 셋째는 '권한'으로서, 요한복음 19장 10절의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한도 있는 줄을…" 등의 경우이다.

거룩한 산 제사 (롬 12:1)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 →“너희 몸을 ... 산 제물로 드리라”
이 본문에서 개역성경의 ‘산 제사’는 잘못된 번역으로서, 이번의 개역 개정판에서 ‘제물’로 바르게 고쳐졌다. 이 낱말의 원어인 thusion 은 경우에 따라서는 ‘제사’가 될 수도 있으나, 이 본문에서는‘제물’인 것이 확실하다. 제사는 제물을 바치는 것을 포함한 행사를 말하는 것인데, 본문에서는 그러한 행사가 아니고 구약시대에 짐승의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그러한 정신으로) 우리의 몸을 바치라 (헌신하라)는 것이므로 ‘제물’이 옳은 것이다.

운동장에서 다 달아날지라도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 도”
이 본문 가운데에서 ‘달아날지라도’라는 개역의 잘못된 번역은 이번 개정판에서 ‘달릴지라도’로 개정되었다. ‘달아난다’라는 말은 도망친다는 말인데, 이는 개역 당시 번역의 주역이었던 선교사들이 우리말을 잘 몰라서 그랬는지, 혹은 한국인 조역자의 불참이나 부주의에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말을 바로 아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에게는 웃기는 말이기도 하다.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마 5:17)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개역의 본문은 문법상으로나 의미상으로나 잘못된 것을 개정판에서 바로잡았다. 부정적인 진술 (본문의 ‘...아니하고’)을 할 때, 그것에 상응하는 부사는‘반드시’가 될 수 없고, '결코’이어야 한다. "일점 일획이라도"에서는 토씨가 잘못 쓰였다.

의의 흉배를 붙이고 -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엡6:14)
에베소서 6장 14절과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의 '흉배'는 이번의 개정판에서 '흉갑'으로 바뀌었는데, 이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개역성경 에베소서 6장 14절은 성도들이 갖출 하나님의 전신갑주(완전무장)를 말하는 대목에서 "의 (義)의 흉배 (胸背)"라는 어휘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처음부터 잘못 쓰인 말이다. 흉배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가슴과 등을 가리키고 그것이 복장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조선왕조시대에 관복 (官服)의 가슴과 등 쪽에 수 놓은 헝겊의 조각으로 붙였던 표장 (標章)을 가리키는 것이지 결코 무장의 하나가 아니다.
에베소서 6장 14절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적군의 화살을 막기 위해서 가슴에 덧입는 무장으로서 호심경 (護心鏡)이라고 하는 것이다. 순 우리말로는 '가슴막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1967년의 새번역과 1979년의 개역성경 일부수정 및 가로쓰기판에서는 '호심경'으로, 1971년의 공동번역과 1993년의 표준새번역에서는 '가슴막이'로 바른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런데 처음 개역성경 신약 개정판(1995년)에서는 '호심경'으로도, '가슴막이'로도 하지 아니하고 '흉갑'이라고 했는데, 국어사전에도 없는 이 말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알 수가 없다. 본래 성서공회의 개정안은 '호심경'으로서 '가슴막이'(영어로는 breastplate)라는 쉬운 말을 쓰지 아니하고 '호심경'을 쓴 것은 개역성경의 성격을 살리기 위해서인데(이 말은 물론 국어사전에 있다), 개역성경 감수위원회에서 1995년 신약만을 개정판으로 내었을 때는 위의 두 가지 중 하나도 쓰지 아니하고 국어사전에도 없는, 따라서 아무도 알 수 없는 '흉갑'이라는 말을 (새로 만들어서?) 썼다가 1998년 개정판 성경전서를 내었을 때 개정안 그대로 받아들여 '호심경'으로 바꾸었다.

너희의 유전으로 → 너희의 전통으로 (마 15:3)
‘유전 (遺傳)’이란 선조의 성질과 체질 등이 그 자손들에게 전하여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서, 원어의 paradidosis (영어의 tradition)에 맞는 번역이 아니다. 같은 한자를 쓰는 중국어역 성경은‘傳統’으로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다.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 아무도 타보지 않은 (막 11:2)
우리말의 ‘아무’는 대명사의 부정형 (不定形)으로서, 그것이 사물이나 처소를 나타낼 때는 불완전명사와라도 결합해야 하지만 (예, 아무 것, 아무 데 등), 그것이 인칭대명사로 쓰일 때는 ‘사람’이란 말을 더하지 않아도 되는데, 개역의 어색한 표현을 이번의 개정판에서는 우리말의 바른 표현법으로 바로잡았다.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요 19:2)
개역에서는‘면류관’이란 말을 처음부터 잘못 썼다. ‘면류’(冕旒)는 옛날 왕의 정장에 갖추어 쓰는 구슬 꿰미를 말하고 그 구슬꿰미가 달린 관을 ‘면류관’이라고 하는데, ‘면류관’을 단순히‘왕관’으로만 생각하여 어휘를 잘못 쓴 것이다. 가시로 구슬 꿰미를 만들 수는 없으므로 개정판에서는 ‘관’이라고만 하였다.

나를 해할 권세가 ... → 나를 해할 권한이... (요 19:11)
엄밀하게 말해서‘권세’와 ‘권한’은 다르며, 본문에 해당되는 것은 ‘권세’가 아니고 ‘권한’이다. 권세는 통치권자 등이 권력을 행사하는 세력을 가리키는 데 대해서, 권한은 그러한 권력 행사의 한계를 나타낸다. 개역에서 ‘권세’로 잘못 쓴 곳은 이 외에도 여럿 있는데, 마 7:29의 ‘권세’는 ‘권위’로 해야 할 것을 ‘권세’로 잘못 쓴 것이다.

그 다른 제자가 ... 더 빨리 달아나서 → ... 더 빨리 달려가서 (요 20:4)
본문에서 그 다른 제자가 한 행동은 달아난 (도망친) 행동이 아니라, 달려간 행동인데, 개역에서는‘달아나서’라고 잘못된 것을 개정판에서‘달려가서’로 바로잡았다. 2절에서는‘달려가서’로 바로 되어 있다.

베뢰아 사람은 ... 더 신사적이어서 → ... 더 너그러워서 (행 17:11)
개역의 "신사적이어서"는 원어 eugenesteroi 에 맞는 말이 아니어서 개정판에서는 "너그러워서"로 바꾸었다. 이 말은 어떠한 생활태도 (영국인을 신사라고 하는 것처럼)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자세, 즉 여기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관대함, 너그러움 (nobleminded, high-minded)을 나타내는 것이다. 영어성경 NRSV에서는 receptive (관용적) 로 되어 있다. 따라서 설교자는 원어에 충실하게, 그리고 개정판에서 이렇게 바뀌어진 이유까지 설명하면서 바른 설교를 해야 한다.

예수를 빙자하여 → 예수를 의지하여 (행 19:13)
원문의 문맥상 뜻에 맞지 않은 개역성경의 번역을 바른 표현으로 바꾸었다. 원문상으로는 '의지하여'에 해당되는 어휘가 따로 없고, ton 이라는 대격 관사로 그 뜻을 나타내고 있다.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행 19:21)
원어 etheto 의 뜻에 맞지 않은 개역성경의 번역을 바른 번역으로 바꾸었다.

알렉산더가 ...발명하려 하나 → 알렉산더가 ... 변명하려 하나 (행 19:33)
현재말로‘발명’(發明)이란, 첫째, 전에 없던 물건 또는 무슨 방법을 새로 만들어 내거나 연구하여 냄을 뜻하는데(둘째 뜻으로는‘변명’과 유사하게 쓰이기도 함), 여기서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쓰는‘변명’의 경우이므로, 개정판에서 그렇게 바로잡았다18.

안식 후 첫날에 - 그 주간의 첫날에 (행 20:7)
원어 te mia ton sabbaton 의 바른 뜻대로 개역의 잘못을 개정판에서 바로잡았다. 여기서는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으나, 마 28:1, 막 16:2, 눅 24:1, 요 20:1 등에서는 본문에서는 개역 그대로 두고, 그 바른 번역은 난하의 주(註)로 기록하고 있다. 단 행 20:7에서는 예외적으로 본문에 바로 번역되어 있는데, 감수위원회에서 누락한 탓인듯 하나 오히려 그것이 바로 된 것이다. 영어로는 on the one(first) day of the week 로서, 여기의 헬라어 sabbaton 은 '안식일'이란 뜻이 아니고, '주간'이란 뜻이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롬 1:14)
원어가 분명히 사람을 가리키므로 ‘야만’이 아닌 ‘야만인’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앞의 ‘헬라인’과도 상응한다.

하나님의 판단이 → 하나님의 심판이 (롬 2:2)
개역의 ‘판단’은 원어 krima (judgement) 에 대한 잘못된 번역이요, 또한 문맥으로도 맞지 않은 것이다.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롬 3:12)
오늘날의 말로 ‘한 가지로’는 한 종류라는 말이므로 본문에서 맞는 말이 못 된다. 원어 hama 는 영어로는 together 로 번역된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롬 4:25)
개역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문장상으로는, 마치 우리로 하여금 범죄하게 하기 위한 목적인 것처럼 오해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래서 개정판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의 원인이 우리의 범죄함에 있다는 분명한 표현으로 바꾸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롬 6:9)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언급이므로 ‘사셨으매’는 정확한 번역이 못 되고, ‘살아나셨으매’가 바른 번역이다. 13절의 경우도 같다. 예수님의 부활은 ‘살아나다’라고 해야 하는데, 이것을 ‘다시 살다’등으로 잘못 번역한 곳은 다른 본문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롬 7:2)
본문의 ‘벗어남’에 대해서는 어떤 과거의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리를 언급하는 것이므로 ‘벗어나느니라’가 문법상 옳다.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5)
본문의 Abba 는 아람어로서 어린이가 다정하게 아버지를 부르는 표현인데, 그것을 우리말로 나타내면‘ 아빠’이지 ‘아바’가 아니다.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 누가 자기의 약혼녀에 대한 행동이 (고전 7:36)
개역에서 ‘딸에’라는 낱말을 작은 글자로 표기한 것은 원어에는 없다는 것을 나타내거니와, 근래의 성경학자들의 연구의 결과로는 그 주체가 딸이 아니라 약혼녀라고 해석되어 많은 성경이 그렇게 번역되므로 이번 개정판에서도 그 해석과 번역을 따랐다.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5)
원문에, 개역의 ‘오히려’에 해당되는 말이 없으므로 개정판에서는 그것을 삭제했다.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 ...재물을 사용하고 (고후 12:15)
개역의 ‘허비’와 개정판의 ‘사용’은 거의 반대적인 개념인데, 원어의 뜻은 물론 ‘허비’가 아니고 ‘사용’이다. 영어로는 waste 가 아니고 spend 이다.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엡 3:10)
개역의 ‘정사(政事)’는 잘못된 번역이다. 원어 archais (영어 rulers)는 분명히 ‘통치자들’이다.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 → ...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 (히 9:2)
개역 본문의 "등대"의 원어 luchnia 는 결코 바닷가에 있는 등대가 아니고, 장막 안에 있는 "등잔대"를 말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말은 우리말 성경 번역자가 중국어 성경의 한자어 "燈臺"(등대)를 그대로 옮겼기 때문에 생긴 착오이다. 중국어로서는 지금도 이 말이 쓰이지만(중국어에서 우리말의 등대는 "등탑"이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전연 다른 말이 되므로 개정판에서는 "등잔대"로 바로잡은 것이다 (같은 한자를 쓰는 일어 성경에서는 "촛대"라고 쓰나 이것도 잘못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아직 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러한 용어 하나까지도 정확하게 써서 교인들에게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등대라는 말은 출 25:31-35, 레 24:4, 민 3:31 등 여러 곳에서 더 많이 쓰였고, 그 모든 것도 다 잘못 쓰인 것이나, 구약은 아직 개정판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히 9:26)
설명은 롬12:1 참조.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 5:7)
한자로‘권고 (勸告)’가 아닌 ‘권고 (眷顧)’라는 낱말은 어려운 한자어이며, 전자로 오해되기가 쉽다. 그래서 개정판에서는 쉬운 우리말로 ‘돌보심’이라고 바꾸었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개역의 하나님의‘신 (神)’은 원어의 뜻에 맞지 않으며, 바른 번역은‘영 (靈)’이다. 영어역에서는 spirit (소문자 s로)를 쓰거나, wind (NRSV)를 쓰고 있다. 히브리어 '루아흐' (ruach) 는 영도 되고 바람도 된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2)
개역의 ‘복의 근원’은 원어에 대한 정확한 번역이 아니므로, 정확하게 ‘복’으로 바꾸었다. 영어역에서도 You will be a blessing 으로 되어 있다.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 ...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창 16:12)
개역의 잘못된 번역은 중국어역에 유래된 것이며, 그것을 원어의 뜻대로 바로잡았다. 영어역에서는 live at odds with, 일어역에서는‘적대 (敵對)’라고 되어 있다.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 ...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창 19:32)
개역의 “인종을 전하자”는 아주 졸역 (拙譯)이므로 개정판에서 정확한 번역을 하였다.
영어로는 preserve offspring, 중국어역으로는 '存留後裔', 일어역으로는 “자손을 남기자” 등으로 되어 있다.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창 36:1)
개역의 ‘대략’(大略)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영어역의 descendants 나 중국어역의 ‘後代’도 개역과는 전혀 무관하고 개정판과는 근사한 번역이다.

그 산업은 그 형의 명의 하에서 함께 하리라 →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창48:6)
개역의 ‘산업’(産業)은 중국어역과 일치하나 원어와는 맞지 않다. 영어로는 inheritance 로서 개정판과 일치한다.


이제 이하에서는 지면 관계로 설명을 생략한다.

연년이 기한에 이르러 ... → 해마다 절기가 되면 ... (출 13:10)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 →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출 23:19)

판결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둘지니라 →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 (출 8:30)

속건제나 속죄제는 일례 (一例)니 → 속죄제와 속건제는 규례가 같으니 (레 7:7)

내 성소를 공경하라 →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레 19:30)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 그 오십년째 해는 너희의 ... (레 25:11)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되 →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되 (민 6:14)

십 세겔 중 금숟가락 하나라 → 열 세겔 무게의 금 그릇 하나라 (민 7:32)

등대의 제도는 이러하니 → 등잔대의 제작법은 이러하니 (레 8:4)

성읍은 영영히 무더기가 되어 → 성읍은 영구히 폐허가 되어 (신 13:16)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 흠이 있고 비뚤어진 세대로다 (신 32:5)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 ... 행한 것과 같았더라 (수 10:28)

...니이까 혹시 ...니이까 혹시→ ...니이까 혹은 ...니이까 혹은 (삼하 24:13)

소문을 듣고 오히려 애굽에 있는 중 → ...여전히 애굽에 ... (왕상 12:2)

등대 (燈臺) 열을 만들어 외소 (外所) 안에 두었으니 → 등잔대 (燈盞臺) 열 개를 만들어 내전 (內殿) 안에 두었으니 (대하4:7)

그 경영을 저희 (沮戱)하였으며 → 그 계획을 막았으며 (스 4:5)

소금은 정수 (定數) 없이 하라 - ... 정량 (定量) 없이 하라 (스 7:22)

수산 대소인민을 위하여 → 수산에 있는 귀천간의 백성을 ... (에 1:5)

사실 (査實)하여 실정 (實情)을 ... → 조사하여 실증을 ... (에 2:23)

범죄하여 시비를 바꾸었으나 → ... 옳은 것을 그르쳤으나 (욥 33:27)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시 30:7)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 → 죄를 짓고 다니는 자 (시 68:21)

행악자의 득의 (得意)함을 인하여 →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잠 24:19)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진함이라 (아 1:4)

원두밭의 상직막 (上直幕) 같이 →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사 1:8)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 →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 (사 3:9)

처녀 내 백성의 멸망할 때에 →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애 4:10)

팔을 벗어 메고 예언하라 → 팔을 걷어 올리고 예언하라 (겔 4:7)

너희는 눈을 드는 바 가증한 것을 → ...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을 (겔 20:7)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 그는 때와 게절을 바꾸시며 (단 2:21)

설혹 맺힐지라도 이방사람이 →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사람이 (호 8:7)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욜 1:4)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 약혼한 남자로 말미암아 (욜 1:8)

너희 이를 한가하게 하며 →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며 (암 4:6)

열국 (列國) 중 우승하여 유명하므로 ... 자들 →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 (암 6:1)

일어나서 그로 더불어 싸우자 → 일어나서 그와 싸우자 (옵 1:1)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욘 1:2)

대인 (大人)은 마음의 악한 사욕을 발 (發)하며 →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미 7:3)

나의 신 (神)이 오히려 너희 중에 →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학 2:5)

내가 너희의 종자 (種子)를 견책할 것이요 →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말 2:3)


소제목의 문제
이번 개정판에서는 독자들이 내용을 편리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개역 한글판에서는 없는 소제목을 달았다. 그런데, 그 소제목 중 몇은 외국어 성경에서나 이전의 우리말 성경(공동번역, 표준새번역)에서 붙인 것과 다르다. 그것은 그 소제목을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대로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아니하고, 그 실질적인 내용에 일치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1)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 (마 13:1-23)
본래의 개역성경에는 소제목이 없으나, 1995년 개정판 신약성경에서 소제목을 붙였다 (이미1967년의 새번역, 1971년의 공동번역, 1993년의 표준새번역에서는 소제목을 붙여 왔다). 그런데, 이들 소제목 가운데에서 그 본문의 내용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마13:1-23의 내용을 보면 결코 씨 뿌리는 사람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 네 가지 다른 땅에 떨어진 씨가 어떻게 자라는가에 관한 것이다.

2) 잃은 양의 비유 →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 비유 (눅 15:4-7)
본문의 내용을 보면, 결코 잃은 양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 잃은 양을 찾은 목자가 기뻐하면서 집으로 돌아와서 친구들과이웃 사람을 불러 모아 함께 기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결론으로, 그와 같이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는)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3) 되찾은 드라크마의 비유 → 잃은 드라크마를 되찾은 여인 비유 (눅 15:8-10)
이 본문에서도 그 내용으로 보아 드라크마의 비유가 아니라 드라크마를 되찾은 여인 비유이다. 그 여인은 잃은 드라크마를 되찾으면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할 것이라고 하였다.

4) 되찾은 아들의 비유 →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 (눅 15:11-32)
이 본문은 흔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자세히 보면 그 이야기의 초점이 결코 회개하고 돌아오는 탕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되찾아 기뻐하는, 사랑 많은 아버지에게 있는 것이다. 이 아버지는 물론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비유하는 것이다.


Ⅳ. 어려운 말에서 쉬운 말로의 개정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만민 구원의 말씀이기에 그 내용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어느 나라에서나 오랫동안 다른 글보다도 어렵게 번역되어 온 것이 전 세계적인 전통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성경 번역의 한 가지 추세는 쉬운 말로 번역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추세를 따라 해방 후에 발행된 성경(1967년의 신약 새번역, 1971년의 공동번역, 1993년의 표준새번역 등)은다 구어체로서 쉬운 번역이었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1911년에 시작된 번역으로서, 문어체를 채택함과 동시에 어려운 말로 번역된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개정판을 냄에 있어서는 개역 한글판의 어려운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쉬운 말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이제 그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마 9:3)
‘참람 (讒濫)’이라는 말은 상당한 한문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어려운 말이다. 이번 개정판에서 개역을 바꾼 것 중 하나가 어려운 한자말을 쉬운 말이나 더 익숙한 말로 바꾼 것인데, 본문의 경우는 그러한 것 중의 하나이다. 더욱이 우리말 성경 국한문판의 한자어를 보면, 사전에도 없는 말은 물론, 같은 한자를 쓰는 중국어성경이나 일본어성경에 없는 낱말도 많다 (예컨대, 패괴, 영채, 간권, 군축, 계한, 간칭 등).

상좌 택함을 보시고 →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눅 14:7)
청소년들을 위한 배려에서 ‘상좌 (上座)’라는 어려운 한자어를 ‘높은 자리’라는 쉬운 말로 바꾸었다.

토색한 일이 있으면 →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눅 19:8)
'토색' (討索)이란, 거의 사용되지 않는 한자어를 쉬운 말로 풀어서 나타내었다.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눅 19:23)
‘변리 (邊利)’라는 어려운 한자말을 더 쉬운 ‘이자’라는 말로 바꾸었다.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요 4:6)
개역성경의 어려운 말이나 표현을 될 수 있는 대로 쉬운 말과 표현으로 바꾼 개정원칙의 적용이다.‘행로’(行路)라는 말은 어려운 말로서 잘 쓰이지 않는다.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 →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 (행 1:16)
여기의 ‘지로’란 말은 한자어‘指路’로서 ‘길을 가리키다’인데, 너무 어려운 말이므로, 개정판에서는 그 뜻을 풀어 쉬운 말로 바꾸었다. 개역 성경 가운데에는, 오랫동안 성경을 읽고 또 설교를 들은 기독교인에게는 어렵지 않으나,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알기 어려운 낱말들이 많이 있는데, 이번 개정판에서 쉬운 말로 많이 바꾸었다. 성경은 결코 기독교인들만의 책이 아니라, 온 세상 만민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행 4:29)
‘하감 (下瞰)’을 ‘굽어보다’로 바꾼 것은 전항과 같이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바꾼 것이고, ‘저희’를 ‘그들’로, 어미 ‘...옵시고’를 ‘...시옵고’로 바꾼 것은 문법적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다 (전술 참조).

공궤를 일삼는 것이 → 접대를 일삼는 것이 (행 6:2)
‘공궤 (供饋)’라는 어려운 말을 ‘접대’라는 쉬운 말로 바꾸었다.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행 10:7)
‘종졸 (從卒)’이란 어려운 말을 쉬운 말 ‘부하’로 바꾸었다.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행 11:2)
더 어렵고, 잘 쓰이지 않는 '힐난' (詰難)이란 낱말을 더 쉽고 많이 쓰이는 '비난'이란 말로 바꾸었다.

헤롯이 ... 백성을 효유한데 - 헤롯이 ... 백성에게 연설하니 (행 12:21)
개역의‘효유’(曉諭, 잘 알아듣게 일러 줌)라는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바꾸었다.
(이하 어려운 낱말을 쉬운 말로 바꾼 것은, 지면의 제한으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급하지 않는다)

박수 엘루마 → 마술사 엘루마 (행 13:8)
박수는 남자 무당을 가리키는데, 개정판에서는 원어 magos 에 더 가까운‘마술사’로 바꾸었다. 영어성경에서는 sorcerer 또는 magician 으로 번역되어 있다.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 (행 28:2)
‘토인 (土人)’보다는 ‘원주민’이란 말이 더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므로 그렇게 바꾸었다.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고전 9:7)
개역의 ‘자비량 (自備糧)’이란 말은 너무 어려운 말이므로 쉬운 말로 대치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는 오늘날의 표현이 아니므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란 말로 바꾸었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 ... 인도하는 초등교사 (갈 3:24)
‘몽학선생 (蒙學先生)’이란 개역의 어려운 한자어를 개정판에서 쉬운 말로 바꾸었다. 같은 한자를 쓰는 중국어성경에서는 '啓蒙之師' '訓蒙之師傅', 일어성경에서는 '養育係' '養育掛' (양육자란 뜻)로 되어 있고, '蒙學先生'이 없는 것을 보면, 이 말은 우리말 성경의 조어 (造語)인 듯하다. 공동번역에서는 '가정교사', 표준새번역에서는 '개인교사'로 되어 있다.

손할례당을 삼가라 →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빌 3:2)
개역의 ‘손할례당 (損割禮黨)’은 어려운 말이고,‘손 (損)’이‘손 (手)’으로 오해될 가능성도 있으므로, 개정판에서는 그 뜻을 풀어 번역하였다. ‘몸을’을 작은 글자로 표기한 것은 원어에는 그것에 해당되는 말이 없음을 나타낸다.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골 2:14)
개역의 두 어려운 낱말‘의문 (儀文)’과‘도말 (塗抹)하시고’를 개정판에서 ‘법조문’과 ‘지우시고’로 바꾸 누구라도 알 수 있게 하였다.

우리의 권면은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살전 2:3)
‘궤계 (詭計)’라는 어려운 말을 ‘속임수’라는 쉬운 말로 바꾼 것이다.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 동정하지 못 하실 이가 아니요 (히 4:15)
개역의 어려운 낱말‘체휼’(體恤)을 쉬운 말로 바꾸고, 문장도 원문의 뜻에 맞게 바꾸었다.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 논난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 (히 7:7)
개역의 어려운 낱말 ‘폐일언’(蔽一言)을 '논난의 여지 없이'란, 문자적으로는 다른, 쉬운 표현으로 풀어 바꾸었다.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 멸망할 자가 아니요 (히 10:39)
개역의 어려운 낱말 ‘침륜’(沈淪)을 다소간 뜻이 다른 쉬운 말로 바꾸었다. 영어(NRSV)에서는 are lost 로 되어 있다.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요삼 10)
개역의 어려운 한자어 ‘폄론 (貶論)’과 ‘유위부족 (猶爲不足)’을 개정판에서 쉬운 말로 바꾸었다. '유위부족'이란 극히 한자투인 말로서, 그 뜻을 풀어서 표현하였다.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창 6:11)
‘패괴’(悖壞)는 우리말 사전에도 없고, 중국어 성경에도 없는 어려운 말이어서 ‘부패’라는 쉬운 말로 바꾸었다.

하나님이 노아와 ... 육축을 권념하사 → ... 육축을 기억하사 (창 8:1)
‘권념 (眷念)’이란 어려운 한자어를 '기억'이란 쉬운 말로 바꾸었다.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 하고 →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 (창 8:9)
‘접족 (接足)’이란 어려운 한자어를 문자 그대로 풀이한 쉬운 말로 바꾸었다.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창 17:8)
개역의‘우거 (寓居)’를‘거류 (居留)’로, ‘일경(一境)’을 ‘온 땅’으로, 각 각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바꾸었다. '일경으로'는 토씨도 잘못 되어 '온 땅을'로 바로잡았다.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창 27:34)
개역의 어려운 한자어 ‘방성대곡 (放聲大哭)’을 개정판에서 그 뜻을 풀어 쉬운 말로 바꾸고, '아비'라는 비속어를 '아버지'라는 일반어로 바꾸었다.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창 29:31)
개역에서 한글로 적은‘총’(寵)은 어려운 말이므로 ‘사랑’이란 쉬운 말로 바꾸었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 → ... 내 선조의 축복보다 ... (창 49:26)
개역의 ‘부여조’(父與祖)는 들어서도, 보아서도 알기 어려운 말이므로 '선조'라는 쉬운 말로 바꾸었다.

위와 같이 이번 개정판에서는 개역의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말로 바꾼 곳이 수없이 많아 이하에서는 괄호 안에 한자만 나타내고, 특별한 것 외에는 설명을 생략한다.

각 사람의 식량 (食量)을 따라 ... →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을 따라 (출 12:4)

장 (長)이... 광 (廣)이 ... 고 (高)가 ... → 길이는 ... 너비는 ... 높이는 ... (출 25:10)

영영한 응식 (應食)으로 주노라 →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주노라 (레 18:8)

상천하지 (上天下地)에 →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신 4:39)

사람이 만일 천자 (擅恣)히 하고 → 사람이 만일 무법하게 행하고 (신 17:12)

진실무망 (眞實無妄)하신 하나님 →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 (신 32:4)

그의 계자 (季子)를 잃으리라 →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수 6:26)

여차여차 (如此如此)히 행하였나이다 → 이러이러하게 행하였나이다 (수 7:20)

위선 (緯線)에 섞어 짜면 →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삿 16:13)

그 성읍의 비류 (匪類)들이 ... →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삿 19:22)

자기 백성을 권고 (眷顧)하사 →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룻 1:6)

반일경 지단 (半日耕 地段) 안에서 →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삼상 14:14)

년부년 (年復年) 삼년 기근 ...→ 해를 거듭하여 삼년 기근 ... (삼하 21:1)

담군 (擔軍)이 칠만 명이요 → 짐꾼이 칠만 명이요 (왕상 5:15)

두로 사람이니 놋 점장 (店匠)이라 → ...놋쇠 대장장이라 (왕상 7:14)

이제 채주 (債主)가 이르러 →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왕하 4:1)

일영표 (日影表) 위에 → 해시계 위에 (왕하 20:11)

살도 발(發하)는 자요 → 화살도 쏘는 자요 (대상 12:2)

네 수한 (壽限)이 차서 → 네 생명의 연한이 차서 (대상 17:11)

상고 (商賈)들이 떼로 정가 (定價)하여 → 무역상들이 떼로 값을 정하여 (대하 1:16)

주의 역사 (役事)에 담부 (擔負)치 ... →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 (느 3:5)

퇴락 (頹落)한 곳을 남기지 ... →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 (느 6:1)

칠일 칠야 (七日七夜)를 그와 함께 → 밤낮 칠일 동안 그와 함께 (욥 2:13)

공정한 간칭 (杆稱)과 명칭 (皿稱)은 → 공평한 저울과 접시 저울은 (잠 16:11)

내 마음에 궁구 (窮究)하기를 →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전 2:3)

그 신후사 (身後事)를 보게 하려고 → 그의 뒤에 이러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전 3:22)

반구 (斑鳩)의 소리가 우리 땅에 →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아 2:12)

네 눈을 들어 자산 ( 山)을 보라 →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렘 3:2)

성도를 위하여 신원 (伸寃)하셨고 →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단 7:22)

사위 (詐僞)와 살인과 투절 (偸 )과 간음 →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 (호 4:2)

아름다운 소식을 보 (報)하고 →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나 1:15)

여호와가 그들을 권고 (眷顧)하여 → 여호와가 그들을 보살피사 (습 2:7)

여호와께서 공장 (工匠) 네 명을 ... → 여호와께서 대장장이 네 명을 ... (슥 1:20)

Ⅴ. 더 합당한 말로의 개선

어떤 말이 맞는 말이냐 틀린 말이냐의 구별은 사전과 맞춤법 등으로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말이 맞는 말이냐 더 합당한 말이냐의 구별이나, 틀린 말이냐 합당하지 않는 말이냐의 구별은 때로 애매하고 어려울 때가 있다. 개역 성경 가운데는 반드시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표현에 있어서 합당하지 않은 말도 적지 않다. 이번의 개정판에서는 그러한 낱말을 더 합당한 말로 바꾸었는데 그 사례를 들어본다.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마 1:17)
직역 (이거)보다는 역사적 사실 (사로잡혀감)을 더 분명히 드러내는 의역을 택하였다.
''이거' (移居)는 스스로 옮겨 가서 사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그 실제의 역사는 그러한 것이 아니고, 바벨론에 의하여 사로잡혀 간 것이다.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마 7:7)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원어로는 분명히 다른 두 동사 zeteite 와 heuresete (영어의 seek 와 find)로 되어 있으나 우리말 성경에서는 모두가 같은‘찾다’ 동사의 활용형을 쓰고 있어 두 낱말의 차별성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 개정판에서는 ‘찾다’와 ‘찾아내다’로 두 낱말의 차별성을 나타낸 것이다.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막 14:23)
이 문맥에서 원어 eucharistesas 는 우리말의 ‘사례’가 아니고 ‘감사하다’이다. 그러나 구체적상황 (식사 때)으로는 단순한 감사가 아니고 감사의 기도이므로, 개정판에서는 ‘감사 기도’라고 하되, 원어상으로 ‘기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작은 문자로 표기하였다.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막 2:18)
‘혹이’(或이)는 ‘혹자 (或者)가’라는 말인데, 개정판에서는 그 뜻을 분명히 밝혀 ‘사람들이’또는 '어떤 사람이'라고 하였다.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요 1:25)
“세례를 받다”는 가능하나, “세례를 주다”라는 말은 어색하다. 마치, “은혜를 받다”라는 말은 가능하나, “은혜를 주다”라는 말이 어색한 것과 같다. 26절 이하 여러 곳에서 다 그렇게 바꾸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요 1:39)
우리말에서 “와 보라”는 한 가지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로 생각되기가 일쑤다. 그것은 “와 보라”의 “보라”는 독립적인 동사로보다는 거의 조동사로 이해되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결코 한 가지 동작을 말하는 하나의 동사가 아니고 “오다”와 “보다”의 두 동사의 순열이다. 원어가 erchesthe kai opsesthe 로서 두 동사 사이에 kai 라는 접속사가 있고, 영어로도 물론 Come and see 로서, 우리말로는 “와서 보라”로 해야 한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요 4:13)
“물을 먹는”이 “물을 마시는”으로 바뀌어 정확을 기하였다. 개정판에서는 낱말의 정확한 사용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물을 먹는다"는 말도 일상적으로는 통용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요 9:3)
본문에서는 맹인으로 난 사람이 그렇게 된 원인을 말하는 것이므로, 그의 부모의 범죄사실의 여부를 말하는 개역의 잘못을 바로잡고, 개정판에서는 그 원인의 소재 여부를 표현상 분명히 나타내었다.

쓰스라 하고 ...허메라 하더라 → 제우스라 하고 ...헤르메스라 하더라 (행 14:12)
'쓰스'와 '허메'를 원어 Zeus 와 Hermes 에 더 가까운 음역 (音譯)으로 바꾼 것이다.
개정판에서 개역의 고유명사의 표기는 그대로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나, 이 경우는 이 두 낱말이 이미 그렇게 널리 사용되고 있으므로 예외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고전 15:54)
개역이 지나치게 문자적인 직역을 하여 표현이 어색하므로, 그 앞의 ‘죽지 아니함’을 주어로 하고 ‘사망’을 목적어로 함으로써 전적으로 문장을 바꾸어 표현하였다.

의의 병기로 좌우 (左右)하고 →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고후 6:7)
개역 본문은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로 되어 있는데, 이번의 개정판에서는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로 바로 잡았다. 우리말에서 "좌우 (左右)하다"는 "좌지우지 (左之右之)하다"와 같은 말로서, 어떤 일이나 사람을 자기의 마음대로 이리저리 휘두르거나 다루는 것을 뜻하는데, 이 본문에서는 그러한 뜻이 아니고, 의의 무기를 좌편과 우편에 가진다는 뜻이다. 1967년 새번역에서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로, 1971년의 공동번역에서는 의역을 하여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를 들고"로 되어 있어 오해의 여지가 없으나, 개역성경에서는 "좌지우지"와 같은 뜻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설교자가 만일 그 뜻을 잘못 알아, "의의 무기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고"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한다고 할 수 있을까? 또한 '병기' (兵器)는 '무기'로 바꾸었다.

이와를 미혹한 것 같이 →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고후 11:3)
개역에서는 구약의 히브리어를 ‘하와’로 표기하고, 신약에서는 헬라어를‘이와’로 달리 표기했는데, 개정판에서는 동일인에 대한 고유명사를 달리 표기하여 일어나는 혼란을 막기 위하여 신약 (이 곳과 딤전 2:13)에서도‘하와’로 표기하여 통일을 기하였다.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히 11:17)
개역성경에서‘독생자’라는 말은 주로 예수님에 대해서 쓰이고,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이곳에서만 쓰였는데 (다른 곳에서는‘독자’또는‘외아들’ 등으로 쓰임), 이번 개정판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차별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본문의 ‘독생자’(이삭의 경우)를 ‘외아들’로 바꾸었다.

노아의 처와 세 자부가 →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창 7:13)
개정판에서는 가족의 신분에 관한 호칭을 개역의 한자어로부터 우리의 고유어로 바꾸었다. 본문 외에, ‘아비’ 또는 ‘부친’을 ‘아버지로, ‘어미’ 또는 ‘모친’을 ‘어머니’로, ‘시부’는 ‘시아버지’(창 38:13)로, '시모'와 '시어미'는 '시어머니'로 (룻 1:14, 마 10:35) 등으로 바꾸었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창 9:20)
‘농업’은 업종 (業種)을 말하고, '농사'는 그 업종의 일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 본문에 합당한 번역이 못된다. 개역에서는 비슷한 말 (유의어) 가운데서 정확한 어휘를 선택하지 못한 곳이 많은데, 이번 개정판에서는 그러한 점에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창 21:12)
본문에서는 여종이 근심하게 된 원인이므로 ‘위하여’는 맞지 않고, ‘말미암아’가 맞다. 영어역에서는 물론 because of 로 되어 있다.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창 22:5)
지금까지 개역성경의 구약에서는‘예배’라는 말이 전연 없었는데, 이번 개정판에서 개역의‘경배’또는‘숭배’를 28 곳에서‘예배’로 바꾸었다. 이것은 물론 구약시대에 히브리인들이 한 그 종교행사가 신약시대의 예배와 똑같음을 의미하지는 않으나, 큰 테두리 안의 의미에서 같은 어휘를 쓰도록 한 것이다.

레아는 안력(眼力)이 부족하고 →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창 29:17)
개역의 표현은 어색하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개역의 어색한 표현을 바꾼 곳도 많다. '안력'은 '시력'을 통속적으로 일컬어 흔히 높임말로 쓰이는 표현으로서, 일반적인 언어를 써야 하는 성경에는 맞지 않아, 개정판에서 '시력'으로 바꾼 것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창 47:9)
야곱이 바로 앞에서 한 말로서 자신의 연령에 관해서 ‘연세’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말의 어법으로는 심히 어색하다. 그뿐 아니라, 바로가 야곱에게 묻는 말로서 "네 연세가 얼마뇨" (8절)도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얼마뇨'는 낯춤말인 데 대해 '연세'는 높임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역의 번역자인 선교사들의, 우리말에 대한 지식 부족에 기인한 것인 듯하다.
에바 십분의 일과 찧은 기름 → 십분의 일 에바와 찧은 기름 (출 29:40)
본문의 '에바'는히브리 도량형 (度量衡)에 있어서 용량을 나타내는한 단위로서, 여기에서의 문제는 우리말로 용량을 나타냄에 있어서는 단위명을 숫자 뒤에 붙이는 법이므로 '십분의 일 에바'로 해야 하는 것이다. 개역본의 '에바 십분의 일'이란 표현은 중국어 성경 구역의 '伊法 十分之一'을 따른 것인 듯하다.

그 성욕의 때에 누가 그것을 ... → 그 발정기 (發情期)에 누가 ... (렘 2:24)
동물의 '발정'을 인간의 '성욕'으로 잘못 나타낸 것이다. 인간의 성욕은 정신적인 것인 데 대해 동물의 발정은 생리적인 것이다.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애 1:1)
여기 '본래'는 영어성경에서는 once (한 때)로, 중국어역과 일어역에서는 '옛날' (昔)로 번역되었는데, 우리말로는 그러한 뜻의 '전에는'으로가 더 합당하다. '본래'와 '이제'보다 '전'과 '이제'가 반의적 (反意的)으로 더 상응하는 말임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이다.

주의 날으는 살의 빛과 → 날아가는 주의 화살의 빛과 (합 3:11)
'날으는'이 정서법 (正書法)에 어긋나고, '살'은 인체의 부분인 살로 오해되기 쉬우므로 '화살'이란 분명한 낱말을 썼다. 개역 가운데는 이와 같은 경우가 더러 있어 그 뜻을 애매하게 하고 있다. 예컨대, 시 126:6에서는 '곡식단'을 그냥 '단'이라고 했는데, 개정판에서 '곡식단'으로 바꾸고, 단지 원어에 '곡식'이 없는 것을 드러내어 그것을 작은 글자로 나타내었다.

※ 참고 : 개역 성경 중의 중국어와 일어 어휘
개역성경 중에는 중국어 일본어의 어휘 및 표현이 더러 보이는데, 그것은 개역을 할 때 선교사들이 주역을 담당했으나, 한국인이 적극적으로 참여 그들이 중국어 성경과 일본어 성경의 어휘나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그 두어 가지 예를 들어본다.

1. 중국어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1) 출 30:23의 '유질' (流質)은 '액체'를 의미하는 중국어가 그대로 옮겨진 것인데, 우리말에서는 전연 '액체'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고, 법률용어로서, "전당 잡힌 물건이 기한이 넘어서 찾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말 국한문성경에서는 '流質'로 되어 있고, 한글판에서는 '액체'로 되어 있어 어휘의 통일성도 결하고 있다.

2) 개역성경의 '독생자' (獨生子) 란 말은 주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로서 '외아들'이란 뜻으로 쓰였는데, 이 말은 본래 우리말이 아니라, 중국어 성경에서 그대로 딴 것이다. 우리말에서 '한 아들'을 나타내는 데는, 고유어로서는 '외아들'이 있고, 한자어로는 '독자' (獨子)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독생자'가 우리말 성경에 쓰여 기독교 용어로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그후 우리말 사전에도 수록되어 우리말이 되었으므로, 이 말을 개정판에서 제외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2. 일어의 어법대로 쓰인 예
1) 민 25:7의 "회중의 가운데서"란 말은 전연 우리말의 용법이 아니고, 일본어 어법이다. 일본어 "회중의 가운데서"를 우리말로 옮기면 그저 "회중 가운데서"이지, "회중의 가운데서"라는 표현은 아주 어색하다.

2) 출 32: 17과 행 23:9에 나타나는 '훤화' (喧譁)라는 어휘는 우리말 성경에서는 '떠든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나, 이 어려운 한자어는 중국어 성경에서 따온 말이 아니고, 중국의 고전인 사기 숙손통전 (史記 叔孫通傳)이 그 출처인 듯하다. 그러나, 한편 이 말은 일본어로서는 '싸움' (겡까)을 뜻하는데, 싸움으로 떠들썩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일어에서 '시끄럽다' (야까마시이)는 말의 한자가 '喧'이기 때문이다.


Ⅵ. 문법문제

말에서나 글에서나 바른 문법을 적용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일에 속한다. 그 주에서 중요한 몇 가지는 첫째, 사전적인 어휘를 쓰는 것, 둘째, 표준말을 쓰는 것, 셋째, 맞춤법에 맞게 쓰는 것 등이다. 우리말 성경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 번역의 역사를 통해서 이 중요한 사항을 도외시 해온 것이 사실이다. 한글 전용에 있어서는 일반사회보다도 훨씬 앞섰던 한국 교회가 우리말 바로 쓰기에서는 아주 뒤져서 개역성경으로는 1998년에까지 이르렀는데, 지난번의 개정판 발행으로 비로소 개역성경에서도 적용되게 된 것이다 (그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서두의 개정의 기본원칙 항에서 언급하였다). 그 사례를 몇 가지만 아래에 들어본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 나라가 임하시오며 (마 6:10)
‘나라’다음에 본문에서만 유일하게 나오는 옛날 토씨‘이’를 오늘날의 바른 토씨‘가’로 바로잡았다. 이 잘못된 맞춤법‘나라이' 때문에‘나라에’로 주기도를 잘못하고 있는 교인들이 너무나 많다 (초 중 고 생의 75%, 청장년의 43%).
본래 '나라'는 중세국어에서는 '나랗'으로서, 그것에 ' ... 이'조사를 붙일 때 '나라히'로 썼고, 다시 '히' 조사가 없어지고 '이'를 썼는데, 그후 임자씨 (체언, 주어)의 받침 유무에 따라 '이'와 '가'로 구분되어 '나라가'로 쓰게 되었다. 개역성경에 나오는 모든 '나라'의 주격조사로 '가'가 쓰였는데, 오직 주기도에서만 '이' 조사를 쓰고 있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 이유는 교회가 예배시에 음송하는 주기도 본문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기도의 '오늘날'이 안 바뀐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 ...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요 11:32)
본문의 내용에서 보아, 마리아가 예수님께 온 것이 아니라 간 것이고, 예수님께 자기를 보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예수님을 만나 뵈온 것이 분명하므로 개정판에서 그렇게 바로잡았다.

나사로 까닭에 → 나사로 때문에 (요 12:11)
‘... 까닭에’와 ‘... 때문에’가 다같이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명사 (‘때문’은 불완전명사)의 활용형이나, 그 용법은 같지 않다. 명사나 명사형 다음에 이어질 때는 ‘까닭’이 될 수가 없고, ‘때문’이라야 하므로, 개정판에서 그렇게 바로잡았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요 16:28)
개역의‘... 께로’는 부사격 조사로서 향격 (向格, pros, 영어의 to)인데, 원어에서는 그 반대인 유래격 (由來格, ek, 영어의 from)이니, 그 잘못된 것을 개정판에서 바로잡았다. 개역에서도 하반절에서는‘께로’를 향격으로 바로 쓰고 있다.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갈 2:16)
‘...으로서’와 ‘...으로써’는 전연 다른 뜻인데, 본문에서의 정서법은 ‘...으로써’이다. 바로 다음의 “율법의 행위로서는”도 “율법의 행위로써는”으로 바로잡았다.

내가 너희에게 ... 알려 하노니 → 내가 너희에게서 ...(갈 3:2)
오늘날의 문법으로는 조사가 전연 잘못되게, 그것도 반대적으로 쓰이고 있다. 즉 원어 apo(영어의 from) 가 개역에서는 그 반대의 뜻인 ‘에게’(영어 to)로 되어 있는 것이 이번 개정판에서 바로 고쳐졌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 ... 미혹되지 말라 (살후 2:3)
본문의 문자적인 뜻은 “누가 어떤 방법으로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이나, 그 실제적인 뜻은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이므로, 개정판에서는 문법상 수동태로 하였다. 개역에서는 ‘너희’가 미혹하는 주체처럼 되어 있다.

Ⅶ. 아직도 아쉬운 점 - 문제점

다음으로, 이번 개역성경 개정판 (또는 감수용판)에서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점들을 짚어본다. 여기서 지적되는 문제점은 성서공회에서 제출한 개정안을 감수위원회에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개역성경의 본문을 그대로 둔 것과, 감수위원회에서 다르게 바꾼 것들로서, 그것들에 대한 다음의 비평은 결코 필자 혼자만의 의견이 아니고, 여러 사람의 의견까지를 포함한 것이며, 여기에 그 몇 가지만을 들어본다.

1. 세례 요한 (마 3:1)
헬라어 ho baptizon 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영어로는 the baptist 또는 baptizer 이요, 우리말로는 ‘세례자’임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성서공회가 제출한 개정안에서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했는데, 감수위원회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개역-감수용 개정판의 ‘세례 요한’은 이론상 성립될 수 없는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과학자 아인슈타인’이란 말을 영어로 ‘Einstein a scientist’라고 하지 않고 ‘Einstein a science’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어구를 우리말 개역성경처럼 번역한 성경은 그 어디서도 볼 수가 없다. 참고로 같은 한자를 쓰는 중국어 성경과 일본어 성경을 보면, 중국어 성경에서는 ‘施洗的’요한이라 하여 동사형 관형사를 쓰고, 일본어 성경에서는 최근의 新共同譯이 ‘세례자 요한’으로 나타내고 있다 (구역에서는 헬라어를 음역하는 것으로 그쳤다). 물론, 이것은 감수위원들이 원어의 정확한 뜻을 몰라서가 아니다. 다만, 오랫동안 써오던 말이라서, 비록 잘못된 것이라도 버리기가 섭섭해서였을까?

2.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마 4:3)

마태복음 4장 3절의 개정판 본문에서 우리는 약간 국어학적인 표현의 변화가 중요한 신학적 의미의 차이를 나타내어 주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말에는 어떤 경우에는 다른 나라 말이, 심지어 우리말과 가장 유사한 일본말까지도 도저히 나타낼 수 없는 표현이 있는데, 그 한 가지 예가 마태복음 4장 3절의 경우이다. 즉 개역 본문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를 이번의 개역 개정판에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일진대 명하여…"로 고쳤는데, 우리는 여기서 우리말에서만 볼 수 있는 표현의 묘미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헬라어 문법에서 가정을 나타내는 경우에, 미래적인 조건을 말할 때에는 에안 (ean)과 가정법 동사를 써서 나타내고, 현재나 과거의 사실을 조건으로 말할 떄에는 에이 (ei)와 직설법 동사를 써서 나타내는데, 본문의 경우에는 후자로서, 마귀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말하는 것이다.
마귀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확신하고 있는 사실은 야고보서 2장 19절에서도 잘 반영되어 있다. 즉 "네가 하나님은 하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한 말 가운데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도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개정판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마귀의 말을 미래적인 조건을 나타내는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나,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으로 하지 아니하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하는 표현으로서 "아들일진대"라고 한 것이다 (영어에서는 if로써, 일본어에서도 '모시'로써 두 가지 경우를 다 나타내므로 우리말처럼 이러한 구별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할 때에, 이 두 가지의 구별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 즉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마귀까지도 인정했음을 분명히 가르쳐 주어야 한다.

3. 여러 곳에 나오는‘떡’(마 4:4, 눅 14:1, 요 6:48 등)

이 낱말의 원어 artos 는 영어로는 bread, 독어로는 Brot, 불어로는 pain 등으로 번역된 것으로서, 개역성경에서는 거의가 (주기도에서의 '양식' 등은 예외) '떡'으로 번역되었고, 표준새번역에서는 '빵'으로 번역되었는데, 이번의 개역성경 개정판에서는, 성서공회의 개정안은 '빵'으로 번역되었으나, 감수위원회에서 다시 종전의 개역성경 번역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합당한 처리가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이 원어가 나타내는 그 당시의 실체가 유대인들의 주식인 빵이었지 유대나라에 있지도 않은 떡이 아니었다.
둘째, 오늘날 인간의 먹을거리를 대표하는 우리말도 오히려 '떡'은 물론, 주식인 '밥'도 아닌 '빵'이다. 예컨대, 인간이 사는데 있어서 가장 우선적이고 긴급한 문제가 먹는 문제라고 말할 때에, "인간이 해결해야 할 제일의 문제는 빵 문제의 해결이다."라고 말하지, "떡 문제의 해결……."은 물론 "밥 문제의 해결이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셋째, 이 artos 를 '떡'으로 번역해 놓으면, 예를 들어 누가복음 14:1의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에서, 마치 이 때 예수님께서는 보통 식사를 하러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특별히 별식인 떡을 잡수시러 들어간 것으로 오해가 될 수밖에 없다.
넷째, 실제적인 문제로서, 성찬식을 할 때에 빵을 사용하면서 말로는 '떡'이라고 하니 말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는 모순이 생긴다.
이 artos는 성경에서 일률적으로 번역되기보다는 그 문맥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번역될 수밖에 없다. 에컨대, 주기도문에서의 artos 는 '양식'으로, 요한복음 6:32-51에 11회 나오는 artos 도 '양식'으로, 전술한 누가복음 14:1, 15의 '떡 잡수시러'에서는 "음식을 잡수시러" 또는 "식사하러"등으로 하고, 마태복음 4:3-4과 같은 여러 경우에서는 '빵'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4. 당신의 이름, 나라, 뜻 (마 6:9-10)

우리나라의 대우법(경어법)은 네 계층의 구조로 되어 있거니와, 그것이 동사의 경우에는 네 계층이 다 있으나(∼해라, ∼하게, ∼하소, ∼하십시오), 제2인칭 대명사의 경우에는 극존대(아주높임)가 없다. 즉 '너' (아주낮춤), '자네' (예사낮춤), '당신' (예사높임)으로 세 계층은 있는데 그 위에 인칭대명사로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실제로, '당신' 이상의 극존대형으로는 가족관계, 사회관계, 직장관계 등을 나타내는 명사로 대신하여, '아버지', '어머니', '형님', '댁', '선생님', '어르신네', '사장님', '회장님' 등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서의 주기도 본문에서는, 초기 번역으로부터 개역성경 (1937년 번역)까지와 표준새번역 (1993년 번역)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제2인칭 대명사 (헬라어 , 영어의 thy 또는 you)를 생략하고, 그 외의 모든 번역에서는 '아버지'라는 말로 대치하고 있다. 단지 한 번 1961년 복음동지회에서 번역한 '새로 옮긴 신약성서' (마태의 복음서)에서만 '당신'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 또는 예수님에 대해서 '당신'이라고 부르는 데 있어서는 대체적으로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이 많은 편이나,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당신'을 쓸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제2인칭 대명사가 헬라어 원문에 있는 만큼,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번역을 해야 하며, 그 번역으로는 '당신' 이외의 말이 없다 (생략을 하는 경우에는 그 원문의 뜻을 그르친다).
둘째, '당신'이라는 말이 대우법상으로는 극존대가 안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기도문과 같은 문어체에 있어서는, 예의적인 용법 (courteous usage)으로보다는 문법적 용법(grammatical usage)을 더 중요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존대의 표현보다는 문법적 지시기능이 더 중요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에 대해서 '당신'을 사용할 때 무엇보다도 대화의 상대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근접감 (nearness)과 친밀감 (intimacy)을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의 '당신'은 단순한 비존대형으로서의 평칭 (平稱)이 아니라, 특별한 친밀감을 나타내는 친칭 (親稱)으로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사례로는 주기도문의 독일어 번역에서, 제3인칭 대명사로서 존칭 또는 의례적 호칭인 Sie의 속격 Sein을 쓰지 아니하고, 평칭인 동시에 친칭인 du 의 속격 dein 을 쓰고 있는 것이다.
넷째, 우리나라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기도에서 '당신'을 쓰는 추세가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거니와, 이러한 상황에서, 1991년 한글학회 발행의 '우리말 큰 사전'도 공동번역 성경에서 쓴 '당신'을 인정하여, 하나님에 대한 '아주높임'으로 '당신'을 쓸 수 있다고 했으므로 교회에서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섯째, 신약성경에서는, 대화의 상대자로서의 예수님께 대해서 '당신'이라고 쓴 사례가 허다히 많은데 (마 3:14, 12:2, 47, 9:14, 11:2, 15:2, 22:16-∼17; 막 3:11, 5:7, 8:29, 12:14; 눅 9:40, 20:2; 요 1:49 등), 교인들이 그러한 대목을 읽으면서도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시나 조사 같은 데서 부모나 스승에 대해서 '당신'이라고 부르는 경우에도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여섯째, 우리말과 같은 존대법이 있는 일본어에서 제2인칭 대명사의 용법은 우리말과 매우 흡사하여, '너'에 해당되는 '오마에', '자네'에 해당되는 '기미', '당신'에 해당되는 '아나다' 등이 있을 뿐, 그 이상의 극존대는 없는데, 성경번역에서나, 기도에서나 오래 전부터 '아나다' (당신)를 쓰고 있다는 것도 한 가지 참고적인 사실이다.

5.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9)

신약에서는 많이 논난이 된 것 중의 하나는 주기도 본문 중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마6:9)이다. 이 구절은 참으로 번역하기도, 해석하기도 어려운 본문이다. 「표준새번역」의 문장을 검토하는 데 참여한 필자 자신도 주기도 본문의 번역 자체에는 다소간 불만이 없는 바 아니다. 번역자는 원문이 가지고 있는 내용상의 의미뿐 아니라, 그 구문상의 특징도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데, 「표준새번역」의 주기도 본문에서는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흠이 있다. 첫째 주기도 본문은 그 전체가 12행의 운율적인 문장으로 되어 있고, 둘째 그것은 ' ' 구조 (우리말로는 '당신'을 피한다면 '아버지'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원문상 분명하다 (헬라어 원문과 필자의 책, 「주기도, 사도신경, 축도」, 125, 126 참조, 「표준새번역」에서는 지면 관계로 13행이 되었다). 이 구조는 첫행에서 는 '아버지'라는 명사 호격으로 나타나고, 그 다음 하나님에 관한 기원 부분, 소위 thou-petitions 에서는 세 번의 제2인칭 대명사로, 그 다음 우리를 위한 세 가지 간구, 소위 we-petitions 에서는 숨은 주어로, 그리고 마지막 송영 (결론)에서는 다시 첫머리 (열한째 행, 우리말 번역에서는 마지막 행)에서 강조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번 개정판에서는 개역성경에서처럼 이 중요한 를 세 번이나 번역하지 않고 생략함으로써, 원문의 뜻도 약화시키고 그 아름다운 원문의 운율도 살리지 못하였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본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상으로나 구조상으로나 그 (주님)의 '아버지' 중심으로 되어 있는데 개정판이 「개역」의 전통을 따른다는 뜻에서 내용과 구조를 다 무시한 것은 비록 머리말에서 밝힌 번역 원칙 (둘째)에도 불구하고, 작은 것을 얻기 위해 큰 것을 잃어버렸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참고로 1967년의 「새번역 신약전서」와 1971년의 「공동번역」은 물론 (우리말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쓸 수 있는 극존칭의 제2인칭 대명사가 없어 "아버지"라는 명사로 대치하고 있다). 영어, 독어, 불어 등 모든 외국어 번역, 특히 우리말과 같은 경어법이 있고 구문이 거의 같은 일어역 성경에서는 우리말의 '당신'에 해당되는 あなた (아나다)를 세 번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의 문제는 기원의 실제적인 내용을 나타내는 원어 hagiasth t 의 번역에 관한 것이다. 우선 원어를 직역하면, 동사 hagiasth t 는 hagiaz (거룩하게 하다)의 제3인칭 단수 단순과거 수동태 명령형이요, 주어는 to onoma sou(당신의 이름)로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여지소서"이다. 이러한 원문을 번역할 때 「개역」과 「표준새번역」은 이 원문의 뜻에서 다같이 내용상으로나 문법상으로나 얼마간 벗어나 서로간에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고, 한편 동사(능동태)의 뜻풀이, 즉 해석에서 그 행위 (능동태로서 '거룩하게 하는')의 주체 (agent)가 하나님이냐, 인간이냐의 문제는 본 문장이 가지고 있는 내용상의 의미로나 문법상의 구조로나 그 어느 하나에 국한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먼저 본 문장에서 동사가 그 자체로는 수동태이고, 전체 기원문의 구조 안에서는 사역형(使役形)이라는 것을 알고서, 이 동사와 관련된 본 문장 전체의 구조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본문에서는 동사 hagiasth t 에 관련되는 주체가 넷 있는데, 그것은 기원자 (화자)와 동사의 주어와, 문장 구조 속에 숨어 있는 동사의 사역자 (使役者)와 행위자이다. 기원자는 주기도  첫머리에서 기도의 대상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한 구절 가운데서 '우리'요, 동사의 주어는 문장상에 분명히 나타난 대로 '당신 (아버지)의 이름'이요, 동사의 사역자는 기도의 대상이자 기도의 내용을 이루게 하실 '하나님' (아버지)이요, 행위자는 문장상으로는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논리적으로 연결시키면, 내용상으로는 "우리 (기원자)가 기원하노니, 아버지(사역자)께서는 당신의 이름 (주어)이 인간들 (우리를 포함해서 행위자)에 의하여 거룩하여지 (수동태)도록 하여 (사역형) 주소서 (기원형)"라는 문장이 성립된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의 실제적인 의미를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개역」의 본문과 「표준새번역」의 본문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역」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바른 번역이 아니다. 「개역」은 그 이전의 모든 번역 성경이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로 한 것과는 달리 처음으로 그렇게 번역하였는데, 그것은 그 이전의 모든 번역이 원문 hagiasth t 가 수동태인데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란 능동태로 번역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고 수동태를 바로 나타내기 위해서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의미상으로는 "거룩히 여겨지다"로서 수동태가 되지만, 형태상으로는 수동태가 되지도 않으며, "여김을 받는다"는 이 본문에서는 뜻을 그르치는 것이 된다.
우리말에서 "-여기다"는 불완전 동사로서 단독으로 쓰이지 못하고, 반드시 부사와 함께 쓰인다. 예컨대 "나는 …을 여긴다"라는 말은 성립될 수가 없고, 반드시 "나는 …을 …히(하게) 여긴다"와 같은 형식으로 쓰인다. 그리고 이 "-여기다"는 주로 능동태로 쓰이고, 수동태로 쓰이는 경우, 「개역」에서처럼 "-받는다"와 결합하여 쓸 때에는 그 표현이 극히 어색하게 느껴진다. 예컨대 "중요하게 여긴다", "경하게 여긴다" 등을 "-받는다"와 결합하여 "중요하게 여김을 받는다", "경하게 여김을 받는다" 등으로 수동형을 만드는 것은 문법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나 그 표현은 극히 어색하고 실제로 많이 쓰이지 않는다. 이상의 경우, 좀더 자연스러운 표현을 하자면 "중요시된다", "경시된다" 등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더 근본적인 문제는 본문의 헬라어 hagiasth t 가 우리말의 "거룩히 여기다"의 수동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것의 헬라어 동사 능동태인 hagiaz 는 결코 "거룩하게 여기다"라는 뜻이 아니라, "거룩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뜻은 결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도록 하는 기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도록 (받들어지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행위자가 누구냐에 관하여 이론이 분분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문제는 벌써 번역의 영역이 아니고 해석의 영역이다. 그런데 성경 번역에서 대개의 경우는 먼저 번역이 되고 다음으로 해석이 따르지만, 예외적으로 (번역 자체가 신학적인 문제를 가짐으로 극히 어려운 경우) 먼저 해석이 되어야 번역이 될 수 있는 경우도 있는데, 주기도에 대한 번역이 그러한 경우 중의 하나이다. 본문에서 거룩하게 하는 행위자가 하나님이라는 해석과 인간이라는 해석 간에 (그 해석에 따라 우리말로 각기 다른 번역을 하게 되기 때문에) 팽팽한 대립이 되고 있고, 양측이 다 많은 주석가들의 주석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주석가들이 다 헬라어 원문의 문장 구조에 대해 세밀하고 정확한 지식과 관찰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중에는 그런 것이 없이 이미 번역된 성경 본문을 가지고 단순한 개인적인 직관에 의해 해석하는 주석가도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행위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는 헬라어 원문의 문장 구조를 바로 관찰하면 결코 어렵고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본문의 구조는 필자가 앞서 보인 대로, 본문상에 문자로 나타났거나 나타나지 않았거나 간에 본 동사 hagiasth t 에 관련되는 네 기능자에 의해 형성되어 있으며, 그것은 "① 우리 (기원자)가 기원하노니, ② 아버지 (사역자)께서는 ③ 당신의 이름 (주어)이 ④인간들 (행위자)에 의하여 거룩하여지 (수동태)도록 하여 (사역형) 주소서 (기원형)" (굵은 글씨로 된 부분이 본문에 나타난 부분)이다. 그렇다면 그 행위자란 우선 제일차적으로 인간이며, 그것은 실질적으로는 동작자 (動作者)라는 뜻이며, 다시 본문을 신학적인 해석으로 확대시키면 넓은 의미에서의 행위자란 그 동작의 사역자 (causer)인 아버지 (하나님)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동작자는 인간인데, 인간은 그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거나 그렇게 하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더구나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아버지 (사역자)께서 그렇게 해주시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거룩하게 하는 인간의 동작에보다 인간으로 하여금 거룩하게 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중점을 둘 때, 그 번역도 주어인 하나님을 서술하는 동사를 수동태에서 능동태로 바꾸어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로 번역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hagiasth t 의 행위자가 하나님이냐, 인간이냐의 논난에 대해서, 해석으로서도 제일차적인 행위자는 실제적 동작자인 인간일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은 실제적인 동작자가 될 수 없으므로), 그러나 전체적 포괄적으로는 그 동작의 사역자, 즉 동인자 (動因者)인 하나님인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어느 하나를 고집하고 다른 하나를 배척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이러한 해석의 다름에 근거한 또 하나의 다른 번역을 "원문과는 정반대로 해석한 결정적인 오역"이라고 하는 것은 바른 비판이 아니다.

6. 시험에 들지 말게... (마 6:12)

개역성경의 주기도에서의 “시험에 들지 말게...”가 신약 개정판(1995년)에서는 “유혹에 빠지지 말게...”로 바뀌었는데, 그것은 바람직한 개정이었다. ‘시험’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peirasmon 으로서, 이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어 많은 성경에서 다양하게 번역되어 있다. 그 두 가지란 ‘시험’과 ‘유혹’이다. 영어성경에서는 temptation(유혹) 으로 번역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으나, test(시험) 나 trial(시련)로 번역된 경우도 다소 있다.*4 먼저, 우리는 peirasmon 의 두 가지 다른 뜻을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이나 시련이요, 다른 하나는 마귀로부터 오는 유혹이다.
하나님꼐로부터 오는 시험이나 시련은 그것이 인간에게 어려움을 주기는 하지만, 그것을 견디고 이기면 유익한 것이다. 예컨대,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창 22:1-19)이나 욥이 당한 시련(욥1:1-19) 등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으로서, 결국은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귀로부터 오는 어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련이나 시험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이러한 마귀가 하는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끔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한편, 야고보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 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 하시느니라”(약 1:13)고 천명하고 있다.
여기의 ‘시험’을 같은 한자를 쓰는 중국어 성경과 일본어 성경에서는 다 ‘誘惑’으로 쓰고 있고, 또 영어성경에서도 다 tempt 를 쓰고 있으며, 마태복음 26:41의 “시험에 들지 않게...”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더구나, 여기 주기도 본문의 이 낱말 peirasmon 에서는 그 전 후의 문맥에서 볼 때에도 마귀로부터 오는 유혹임이 분명하다. 즉 바로 앞에서는 우리를 위한 세 가지 간구 중 사죄의 간구가 있고, 바로 이어서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고 악으로부터 구해 달라는 간구가 있는 것이다. 과거의 죄 사해 주심을 간구하고, 앞으로는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만일 죄의 유혹에 빠진 경우에는 그러한 악한 데서 구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1998년의 완성된 개정판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이 부분이 다시 개역성경대로, 즉 "시험에 들지 말게"로 되돌아 갔다. 그 이유는, 주기도는 교인들이 바꾸기를 원치 않는 것이므로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바꾸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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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기도 본문 (마6:9-13)에 대한 여러나라 말의 번역은 나채운의 책 “주기도 사도신경 축도 (1988)을 보라.


7. 주는 그리스도시요... (마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본문은 개정판에서, 본문에서는 변경이 없으나, '주'라는 말에 난하의 주를 달아 헬라어 원문으로는 '당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이 성서공회에서 제출한 개정안에서는 본문에서 "당신은 그리스도시요……."라고 되어 있었으나, 감수위원회에서 개역성경 본문 그대로 두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8:29에서는 난하주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두어 가지 문제를 발견한다.
첫째, 마태복음 16:16과 마가복음 8:29의 본문에서 '당신' 대신에 '주'로 두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오래 전에 어떤 설교자가 마태복음 16:16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를 하는데, 이 대목에서 베드로가 좋은 신앙고백을 했는데 그것은 세 가지로서, 첫째는 주 (主)라고 고백을 하고, 둘째는 ……운운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원문은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우리말 개역성경에서 '주'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Su로서 제 2인칭 대명사 단수, 즉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로서, 신앙고백의 내용은 셋이 아니고 둘이다. (이러한 실수를 하게 된 원인은, 개역성경의 번역을 전적으로 옳다고 믿기 때문이요, 그러기 때문에 다른 번역성경 (원어성경은 물론, 다른 우리말 번역성경)을 전혀 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경만 보더라도 1967년의 새번역 신약전서는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선생님은 그리스도시오……." (여기서 '선생님'은 직업으로서의 교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호칭으로서 제 2인칭을 나타내는 명사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영어번역을 보면 물론 You 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서 '주'를 신앙고백의 내용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원문과는 다른, 잘못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된다. 이번의 개역성경 개정판이 그 본문에서 '당신'이라고 번역하지 아니하고, 성서공회의 개정안을 따르지 않고 '주'라고 함으로써 여전히 잘못 설교할 수 있는 소지를 남긴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호칭하는 제 2인칭 대명사로서 우리말로 '당신'을 쓸 수 있느냐 하는, 오랫동안 논란되고, 아직도 논란되고 있는 문제이다. 우리말의 언어 관습상으로 볼 때, '당신'은 최고의 존대가 안 된다고 하나, 성경원문의 제 2인칭을 정확한 뜻으로 전달 (번역)하는데 있어서는 존대법보다도 그 지시적 기능이 우선되어야 하고, 우리말 사전상으로도 이미 '당신'은 아주 높임에 쓰이는 말로 되어 있다.
1991년에 나온 한글학회 지음 우리말 큰사전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주 높임에 상대방을 가리키는 말. 예: 하느님이시여, 저희가 당신의 은혜를 무한히 감사하나이다." 우리 나라 문법에서는 기독교에서 이미 많은 교인들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에수님께 '당신'을 쓰고 있을뿐 아니라, 성경에서도 여러 곳에서 '당신'을 쓰고 있는 것 (예컨대, 마 3:14, 9:14, 11:3, 12:2, 47, 5:2, 막 3:11, 5:7, 8:29, 12:14, 눅 9:40, 20:2, 요 1:49, 7:20 등)을 사전에서도 인정한 것이다.
이렇게 일반사회에서도 인정하는 것을 우리 기독교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마치 1933년에 한국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37년에 번역된 우리말 개역성경이 그것을 수용하지 않은 것과 같이, 우리 기독교의 후진성을 또 한 번 드러내는 것밖에 안 된다(이 문제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나채운, 「주기도, 사도신경, 축도」97-103면을 보라).


8.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눅 16:9)

이 본문은 1995년의 신약 개정판에서는 "불의한 재물로도 친구는 사귀라"로 되어 있다. 이 본문은 흔히 난해의 구절로 생각되어 왔다. 이 본문에서 해석자가 알아야 할 것은, 여기서 초점이 불의한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사귀라는 데 있다는 것이다. 즉, 이 본문이 결코 불의한 일을 부추기는 데 있지 않고, 이왕 불의한 재물을 모았더라도 그 재물을 지혜롭게 선용하여 친구를 사귀는데 쓰면 이 다음에 그 친구들로부터 이득을 보니, 그것이 지혜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번역의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 토씨 하나가 달리 쓰이는 데 따라서 그 뜻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998년의 완성된 개역성경 개정판에서는 모처럼의 바른 개정안을 버리고 다시 개역의 본문으로 되돌아 갔다.

9. 표적 (요 2:11 외 여러 곳)

개역성경에서 '표적'으로 번역된 말은 단순히 '이적'이나 '기사'로 번역된 말과는 뜻을 달리한다. 이적이나 기사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데 비해서, 소위 '표적'은 그러한 초자연적인 사건이 단순한 사건으로만 그치지 아니하고, 그것이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메시야성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징표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의 신성을 고조하는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 가운데에서 그 표징이 되는 일곱 사건만을 엄선해서 진술하고, 그 사건들의 반응으로 신앙 또는 신앙고백을 기록하고 있다.
예컨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2:11),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일을 믿고… 자기와 그 온집이 믿으니라 (4:50, 53),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에 대한 병자의 신앙 (5:15),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에 따른 무리와 베드로의 신앙고백, 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를 고치신 사건에 따른 그의 신앙고백 (9:38),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에 따른 마르다의 신앙고백 (11:45), 예수님의 부활을 친히 확인함에 따른 도마의 신앙고백 (20:28) 등이다. 그리고 또한 '표적'이란 말이 쓰인 것도 세 공관복음서에 비해 요한복음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쓰였다 (16회로서, 세복음서 전체에 쓰인 것보다도 요한복음에 쓰인 것이 더 많다).
그러나 개역성경에서 헬라어 원어 세메이온 (semeion)에 대한 번역으로는 한 가지를 쓰지 아니하고 두 가지 즉 '표적'과 '이적'을 다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적' 보다는 '표적'을 많이 쓰고 있는 데, 복음서에서는 '표적'을 쓰고 (단지 막 13:22, 눅 23:8만 예외로 이적), 요한계시록에서는 '이적'을 쓰고 있으나 본문에 '표적'을 쓸 때에는 난하주에는 '이적'이라 쓰고 본문에 '이적'을 쓸 때에는 난하주에는 '표적'이라고 쓰고 있는 것이 개역성경의 전통이다. 그리고 이번의 개역성경 개정판에서도, 전적으로 개역성경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한편 개역성경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오스 (oth) (칠십인역에서는 헬라어 신약성경과 같이 세메이온[semeion」가 '표적'(출 12:13, 신 28:36, 시 74:4, 사 19:20)과 '표징' (창 17:11, 출7:3 등 15곳) 두 가지가 쓰였으나, '표징'이 압도적으로 많으 쓰여 신약보다도 잘된 번역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국어학적인 문제에 부닥친다. 즉 '표적'(表跡)은 한글학회 지음, 이희승 편, 신기철, 신용청 현저 등 그 어느 국어사전에도 없다. 그러나 국어사전에 있는 우리말로서 '표적'이라고 읽는 세 가지 말은 그 어느 것도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뜻의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번의 개역성경에서는 지금까지의 개역성경의 잘못을 바로잡아 그 말을 쓰지 말고 원어의 뜻대로 '표징'이라 썼고, 1971년의 공동번역에서도 일부에서 '표징'이라 썼으며, 영어성경에서의 sign, 독일어 성경에서의 Zeichen, 불어성경에서의 signe, 우리말과 같이 한자를 쓰는 일어 성경에서의 '徵' (시루시) 등이 다 '표징'의 뜻을 나태내고 있다.
성서공회의 개정안에서는 '표징'으로 바로잡았으나, 감수위원회에서는 이상과 같이 사전에도 없는 말, 잘못된 말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오래 써 왔다는 이유로 개정안대로 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둔 것이다.

10. 사형선고를 받은 줄...’(고후 1:9)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이 극심하였음을 언급함에 있어서, 개역성경 개정판에서는 성서공회가 제출한 개정안의“...죽음의 선고를 받은 줄로...”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개역성경의 “...사형선고를 받은 줄로...”를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여기의 ‘사형선고’란 말은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형선고란 말은 어떤 사람이 큰 죄를 지어서 그것에 대한 형벌로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헬라어 원어에서도 물론 ‘사형의 선고’가 아니라, ‘죽음 (thanatou)의 선고’이며, 따라서 모든 외국의 번역성경이 다‘죽음의 선고’로 번역하고 있다. 영어성경에서도 ‘사형’이라는 death penalty 나 capital punishment 라는 말을 쓰지 아니하고 death 를 쓰고 있으며, 우리와 같이 한자를 쓰는 중국어 성경과 일본어 성경에서는 모든 번역판에서 어느 하나도 ‘死刑’이란 말을 쓰지 아니하고 모두 ‘죽음(死)의 선고’라고 쓰고 있다. 실제로, 바울이 무슨 죄를 지어, 재판에서 사형의 선고를 받았다는 말인가? 본문의 문구는 바울이 죽을 만큼의 심한 고난을 겪었다는 말일 뿐이며, 그것은 그 바로 앞에서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란 말이 잘 증시하고 있다. 이 낱말에 대해서는 우리말 성경의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에서도 ‘사형선고’라고 되어 있는데, 표준새번역에 대해서는, 필자가 문장위원으로서 최종적인 검토의 책임을 맡았으나, 당시 필자도 개정에서 놓친 것을 여기서 밝혀 두며 죄송하게 생각한다.

11.“...있을지어다”(고후 13:13 등)

본문의 헬라어 원어에는 우리말 성경 개역본에서 ‘있을지어다’로 번역된 부분이 문자상으로는 전연 없다.즉 문장은 세 가지의 주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교통하심) 다음에 “너희 무리와 함께”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개역에서는 문장의 완결을 위해서 “있을지어다”를 첨가하되 그것이 원문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작은 글자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있을지어다”는 형태상으로는 명령형이므로 기원문인 축도 본문 (바울서신의 다른 기원문에서도)에서 그 종결어미로 삼을 수가 없고, 그것이 비존대형이기 때문에 우리의 언어관습에 있어, 실제적으로 목사가 성도들에 대해서 하는 축도의 본문에 적용할 수가 없다. 본문의 세 가지 주어에 맞는 동사의 기원법은 “...있어지이다”이다.*5 이번 개역성경 개정에 있어서, 성서공회에서 제출한 개정안에서는 “있어지이다” 로 바꾸었으나, 감수위원회에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개역의 잘못된 것을 그대로 두었다. 이 어미(語尾)는 주기도 본문 (마 6:10)을 비롯해서 눅 20:16, 행 21:14, 딤전 1:17 등에서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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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영어로 말한다면, May ...be 이다. 축도 본문의 번역상의 문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나채운의 책 “주기도 사도신경 축도”(1988)를 보라.

Ⅷ. 개역 개정판에 대한 소감

1. 개정안 감수위원회의 감수작업에서의 문제점

1) 개정에 대한 의지가 희박하다
대한성서공회는 개역성경의 개정의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하고, 1983년 9월에 개정작업을 시작하여 3차에 걸친 10년 간의 개정작업을 끝내고, 18명 (17개 교단 대표와 개정안 작성자)의 위원으로 구성된 감수위원회에서 3년 10개월에 걸쳐 감수를 하였으나, 그 진행절차를 보면 감수위원들 중에는 개정에 대한 의지가 매우 희박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어떤 문제에 논란이 있어, 개정안을 채택하는 여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18명의 위원들 가운데에서 단 한 명만 개정안을 반대해도 17명의 찬성을 묵살하고 개역으로 되돌아가도록 규정을 정한 것이다. 이 규정은 그 후 조금 완화되어 3명이 반대하면 14명 (개정안 제안자는 그후 불참)의 개정안 찬성자의 의견을 묵살하고 개역으로 돌아가도록 변경되었다. 단 한 명의 개정안 반대가 17명의 개정안 찬성을 묵살하고, 또는 3명의 개정안 반대가 14명의 개정안 찬성을 묵살하도록 한 감수위원회에 무슨 개정의 의지가 있는가? 지난 번 감수위원회에서 개정안인‘세례자 요한’과‘빵’이 묵살되고, 개역의‘세례 요한’과‘떡’으로 되돌아 간 것은 바로 위와 같은 1:17 또는 3:14의 묵살에 의한 것이었다.
참고로, 1989년에 미국에서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을 출간했을 경우를 보면, 개정위원회에서 어떤 문제를 두고 의견이 찬반으로 엇갈리어 합의점에 이르지 못했을 때에는, 23명이 다 함께 기도하고, 무기명 비밀 투표를 하여, 한 표라도 많은 쪽의 의견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따르도록 한 바가 있었다. 이 얼마나 공정하고 겸허한 결정방법인가?
2)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하여 알기 쉽게 번역/개정 하고자 하는, 성경 본래의 목적에 일치하는 의지가 희박하다.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 번역 또는 개정에 있어서도 최대한 정확무오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또 만민 구원의 그 말씀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번역어는 최소한도로 국어사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말이어야 하며, 사전에 없는 말을 쓸 수 없다는 것은 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지난번의 감수위원회에서는 개정안 제안자의 의견을 묵살하고 사전에도 없는 말을 택하여 개역에로 되돌아갔다. 예를 들면, 개정안인‘표징’(요 2:11)을 거부하고‘표적’으로 결정을 한 것이다. '표적'이 잘못된 것임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면 참조).

3) 감수위원회에서는 개정안에 없는 것을, 개정안 제안자의 의견을 조금도 들어보지 아니하고 독단으로 개정하여 도리어 오류를 범한 일도 있었다. 예를 들면, 창 1:1의 개역“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와, 요 1:1의“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를 감수위원회 단독으로 각각“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와 “태초에 말씀이 계셨느니라”로 변개하여 그대로 감수용 성경 (1997년 11월)으로 출간되었는데, 마지막 감수위원회 (1998년 5월, 동시에 제3차 개정작업)에서 그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개역의 바른 번역 (개정안 제안자의 의견)대로 되돌아갔다. ( 면 참조)

4) 교계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더 잘못 되어진 점도 없지 않다.
개정작업과 감수작업이 일단 끝난 다음에 성서공회가 감수용 성경을 출판하여 널리 교계의 의견을 수렴한 중에 좋은 의견도 있었으나, 그 중에는 성경과 성경 번역에 대한 이해가 없는, 수준 낮은 교인들(비 전문인)의 옳지 못한 의견도 있었는데, 그러한 의견 (거의가 개역으로 되돌아가는)을 받아들여 개정판을 출간함으로, 다시 한번 개역에로의 후퇴를 하였다. 이는 실로 소수의 잘못된 의견이 10년 간의 개정작업은 물론, 3년 10개월 간의 감수작업 (감수위원회에서는 개정안을 받아들인 것)까지도 묵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예를 들면, 마 4:3의 개역“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을 개정안에서“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일진대”로 한 것을 감수위원회에서도 받아들여 1996년 신약성경 개정판에서도 그대로 출판하였는데, 이번에 비전문가 (헬라어 원어를 모르는) 한 사람의 의견을 따라 다시 개역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눅 16:9의 개정안“불의한 재물로라도 친구는 사귀라”가 다시 개역의“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로 되돌아 간 것도 똑같은 경우이다.

2. 잘못된 성경 번역에 대한 사후대책 (해결안)
성경,‘책 중의 책’‘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번역이나 개정을 한다는 것은 너무도 조심스럽고 두려운 일이다. 제한된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으로 이 일을 완벽하게 한다는 것은 어느 나라 누구에게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을 맡은 사람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가운데에 최대한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이 일을 하는 데는 적어도 몇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1) 성경의 원어를 잘 알 것, 2) 우리말을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알 것, 3) 번역에 유용한 참고가 될 수 있도록 주요한 외국어(우리말 번역에서는 가장 중요한 중국어/한자와 일본어도)를 잘 알 것, 4) 성경의 어휘와 신학적인 개념을 잘 알 것, 5)문학적인 표현을 위하여 문장력이 있을 것 등이다.

이제, 한국 교회 제일의 성경인 개역성경이, 번역이 시작된 후로부터 87년만에, 그것이 사용된 후로부터 60년 만에 역사적인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지라 이번 개정판에도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성서공회는 바로 이 시각부터 또 다시 개정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그것은 개역성경이 1938년에 출간된 이래 1961년까지 부분적으로 계속해서 개정했던 작업과 같은 것이다. 성서공회는 지금까지 전국 주요 교단의 의견을 존중하여 감수위원회를 가동시켰고, 그 다음으로는 다시 감수용 성경을 출판하여 6개월 이상 여러 교계 지도자들의 의견도 수렴함으로 개정에 신중한 배려를 다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성서공회 자체에서 신뢰할 만한 한 두 사람의 전문인에게 위촉하여 현 개정판의 미흡한 점들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성의 있게 보완하는 작업을 서둘러서 해야 한다.

3. 개역성경(1961년판) 계속 출판 여부의 문제
잘못 번역된 개역성경을 대신하여, 그 잘못을 바로잡은 개역성경 개정판이 출간되었는 데도, 그 전의 개역성경을 계속 출판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길게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다. 일부 일간신문에서 잘못 보도한 것처럼, 개역성경과 그 개정판은 결코 어려운 낱말을 쉬운 낱말로 바꾼 데 그친 성경이 아니라, 첫째로, 잘못된 성경을 바로잡은 성경이다. 그렇다면, 바로잡은 성경을 내놓으면서 동시에 잘못된 성경도 보라고 내놓는 것은 실로 “병 주고 약 주고”식의 모순된 일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는, 상식 밖의 일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 성서공회는 혹시라도 개역성경을 계속 출판함으로 정오 (正誤) 동시 시행의 모순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목회자가 잘못된 성경으로 잘못된 설교를 하고, 교인들은 그것으로 성경을 잘못 알고, 나아가 잘못된 생활로 이어지는 기회를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

4.‘개역성경 한글판’이란 성경의 표제는 합당하지 않다.
대한성서공회에서는 1938년 출간한 성경의 표제를‘성경전서 개역 한글판’이라고 붙여서 지금에 이르고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한글판’이란 말을 덧붙인 것(1952년 이후)은 1933년에 제정된 한글맞춤법을 적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글’을 ‘한글 맞춤법’과 동일시할 수 없음은 물론, 한글맞춤법이 제정된 후에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당연한 것이므로, ‘한글판’이란 첨가는 없애야 한다. 이것과 유사한 것으로 1964년에 발간된 성경 가운데에는 ‘聖經全書 簡易 國漢文 한글판’이란 표제가 있었다. 여기서 ‘國漢文’이란 말과 ‘한글’이라는 말은 이중적인 반복을 나타내므로 ‘한글’은 전혀 필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國’이 바로 우리말 즉 한글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자의 지적으로 1984년부터 시정되어 ‘한글판’이 떨어져 나갔으나‘개역 한글판’의 ‘한글판’은 아직도 붙어 있다.

Ⅸ. 맺는말
이상으로 필자는, 지면 관계로 극히 제한적이지만 , 개역성경 개정판에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가에 대해 예시 정도로 살펴보았다. 그리스도인이 바른 신앙을 가지고 바른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또한 목회자가 설교를 바로 하고, 성경을 바로 가르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바르게 번역된 성경을 사용하는 일이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더 바르게, 더 쉽게 번역된 성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다수의 교역자와 교인이 (더욱이 공식예배에서) 개역성경을 선호하여 써 왔다. 그러나 이 개역성경에 잘못 번역되고, 어렵게 번역된 곳이 많아서 대한성서공회에서 새로운 개정판을 낸 것이다.
그러면 이제 한국 교회는 하루 빨리 더 이상 개역성경을 쓰지 말고 이 개정판을 써야 한다. 필자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개정판은 개역에서 잘못 번역된 것을 바로잡고,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싫은 말을 좋은 말로 개정하였는데, 더 이상 잘못된 개역성경을 쓸 이유가 없다. 더욱이 이제까지 개역성경의 본문이 잘못 되어서 잘못된 설교를 하고, 성경을 잘못 가르쳐 온 것이 없지 않은데, 이제는 개정판을 사용함으로 더 이상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예컨대, 마태복음 6:34로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를 할 때,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교역자들이 내일 일은 오늘 염려하지 말고 내일 염려하라고 잘못 역설해 왔는가? 그러나 이번 개정판에서는, 내일 일은 내일에도 너 자신이 염려하지 말 것을 본문 자체가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이상과 같이 틀린 말이나, 어려운 말이나, 싫은 말 등을 73,000여 곳을 바로잡은 성경이라면, 이제 모든 성도들은 하루 속히 이 개정판을 써야 한다. 더구나 지난해 각 교단 총회에서 이 개정판을 쓰도록 공식적으로 공포했을진대, 모든 목회자들을 이 개정판을 예배용으로 쓰고 교인들에게 권면도 해야 한다. 또한 대한성서공회는 더 이상 잘못된 개역성경을 출판하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개정판을 내 놓으면서 동시에 잘못된 성경도 내 놓는다는 것은 전연 논리에 맞지 않는 일이 아닌가? 이제 한국 교회는 개역성경 개정판 발행을 계기로, 모든 교역자와 교인들이, 좀더 성경을 바로 알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