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를 통해본 선교
이 광 순(부교수: 선교학)
1. 들어가는 말
성경에는 '선교'(mission)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중세 교회에서 처음 유래된 이래로 현대에는 교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말 중의 하나이다. 선교가 일상 언어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면서 그 의미와 개념 역시 다양하게 정의되었다. 그러한 용어 사용과 개념 정의상의 다양성으로 인해 개념을 둘러싼 혼란과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선교학자들 간에는 일정의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미전도 족속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정의와 같은 핵심적인 몇 가지 점에서는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현대 선교 신학에서 합의하고 있는 이러한 선교에 대한 개념 정의는 성경에 비추어서 분석해보면 논란의 여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요나서는 현대 선교 신학에서 부여하고 있는 선교 개념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게 해주는 측면이 있다.
이 논문에서는 요나의 행적을 통해 선교의 의미와 개념을 되새겨봄으로써 현대 선교 신학에서 일반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선교 개념을 좀더 확장해보겠다. 따라서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은 논지를 따라 전개하겠다. 첫째는 요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 행적과 방식을 분석해봄으로써 요나서 특유의 선교의 개념과 대상 및 내용 그리고 목적 등을 논의해볼 것이다. 둘째는 요나서에서 제기된 선교 운동에 관한 논쟁점들을 현대 선교 신학의 입장들과 대비시켜서 논의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나서를 통해 새로이 부각된 선교의 의미와 개념을 현대 선교 신학에 접목시켜서 선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시도해볼 것이다.
2. 선교 개념을 둘러싼 논쟁
선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둘러싼 논쟁은 두 근원에서 유래하고 있다. 하나는 선교를 너무 좁게 규정하거나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데서 파생되며, 다른 하나는 선교를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광범한 개념으로 인식하는 데서 생겨난다. 예컨대 전자의 경우에는 일종의 배제 논법을 사용해서 선교가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가려내는 방법을 들 수 있다. 스티펀 닐(Stephen Neill)은 "만약 모든 것이 선교라면 아무 것도 선교가 아니다"라는 전제에서 선교가 아닌 것을 선별해서 배제하는 식으로 선교를 정의하고 있다. 그의 의도는 지나치게 포괄적인 선교 개념의 정의를 경계하는 것이지만 오히려 선교의 개념에서 모든 것을 제외함으로써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결과를 빚어냈다. 그런 논리에 의하면, 선교는 교회 부흥도 언약의 갱신도 교회의 교육도 아니며, 범교회적으로 자원을 나누어가지는 것은 선교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선교 개념을 자신이 설정한 잣대--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로 재어서 그것에 맞지 않으면 배제하는 방법으로 정의를 하면 시험을 통과하는 정의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를 지나치게 엄격하고도 좁게 정의하면 선교의 본질적인 요소 조차도 놓치는 수가 있다.
반면에 선교 개념을 포괄적으로 정의할 경우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이른바 교회가 하는 일은 모두가 선교이며, 선교는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개입하는 것까지도 포괄한다는 식은 선교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선교 개념을 확장시킨다. 대이비드 보쉬(David Bosch)는 포괄적인 선교 개념 정의를 따르면서도 그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우선 선교란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이라고 규정하고, 외국에 나가는 것을 위시해서 정치적 참여, 궁핍한 자를 위한 사역, 교육과 복음 전도 및 선포, 사회 경제적 발전과 해방,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에서 사역하기 전에 하는 일, 교회 간의 원조, 기독교화, 문명화, 문화를 보급하는 일, 교회 개척 등의 거의 모든 교회와 관련된 일을 선교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것은 이른바 포괄 논법을 사용해서 세상사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며 하나님의 선교적 행위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교적 의도에 맞추어 해석해서 선교 개념에 포함시키는 방법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선교 개념의 정의는 스티펀 닐이 그토록 위험시했던 것, 곧 모든 것이 선교라면 역설적이게도 아무 것도 선교가 아니라는 포괄적인 개념화의 한 형태이다.
그렇다면 선교란 무엇이며, 또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위의 두 가지 위험성을 피하면서도 선교를 분명하게 개념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좁은 개념화와 넓은 개념화를 절충해서 양 쪽의 결함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의 선교에 포함되는 것과 포함되지 않는 것을 선별해내는 방법을 시도해볼 수 있다. 선교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며, 따라서 선교는 교회나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며 하나님의 선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교에는 모든 것이 포괄되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요나서에서 하나님의 선교는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3. 요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
요나서는 하나님의 선교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하나님께서 선교의 계획을 세우시고 선교지와 선교 대상을 정하시고 그곳에 선교사로 보낼 사람을 선택하셔서 그곳을 구원하신다는 줄거리가 요나서의 내용이다. 따라서 요나서는 요나의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교의 주체가 되시어 어떻게 선교하시는가를 보여준다.
요나서에는 선교와 관련된 종래의 논의들과 대비되는 몇 가지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선교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선택된 대상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든 인간, 이를테면 이방인에게도 열려져 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언약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과 맺어진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도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에 있는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나서에서는 그러한 제한된 선교 대상을 벗어나고 있다. 니느웨라는 이방의 도시에 사는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신다. 이것은 신약의 새로운 언약의 한 실마리를 보여준다. 새로운 언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유태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받은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이 주어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선택된 백성에게 주어졌던 구약의 언약이 이방에게로 확장되는 한 모습을 요나서에서 보여주고 있다.
요나서 1장은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1:2)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으로 시작된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자 하나님께서는 되풀이해서 같은 명령을 내리셨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3:2)가 그것이다. 요나는 마지 못해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의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하리라는 소식을 전한다. 여기에서는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의도를 가지신 하나님의 반복적인 명령과 그것을 피해보려는 요나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이 대조적인 장면은 몇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첫째로 분명한 것은 구원을 베푸는 주체는 요나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구원의 역사인 선교는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 그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선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며 그 의도와 뜻을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영역에 속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선교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이해력을 벗어난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로는 인간은 자신의 지식과 이해의 범위 안에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계획을 국한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요나는 이방 도시인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그러한 계획과 뜻에 반감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신의 계획을 따르기로 작정하고 행동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었으며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설 뿐 아니라 인간의 반감과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셋째로는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계획을 인간의 뜻이나 불복종으로 인해 굽히거나 바꾸지 않으시며 끝까지 관철시키신다는 것이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성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고 그 일을 요나에게 맡겼다. 그러나 요나는 이방의 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끝내 니느웨를 포기하지 않고 원하지도 않는 요나를 억지로 명령을 따르게 하고 그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셨다.
그러면 요나는 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 얼굴을 피해 달아났는가? 그것은 니느웨가 이방의 성이었기 때문이다. 요나가 이해하는 한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지 이방의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이스라엘에게와 마찬가지로 베푸시려고 하셨다. 이에 대해 요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기로 한 것이었다. 요나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선교의 대상이 선택받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률히 여기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려고 하는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이 때 이미 분명해졌다.
위에서 논의했듯이 요나서에는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선교에 대한 모든 결정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하시며 그 뜻은 인간의 이해를 벗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특히 선교 대상과 선교지 그리고 선교사에 대한 결정권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임을 명확히 명시하고 있다. 선교 대상은 이방인이며, 선교지는 이방의 타락한 대도시인 니느웨이며, 선교사는 고지식한 유대인인 요나였다.
구체적으로 요나서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교 대상은 누구이며 선교지는 어떤 곳인가? 그것은 당시로는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던 큰 성읍인 니느웨와 그 곳 백성들이었다. 니느웨는 앗시리아의 수도였으며 문화의 중심지였지만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죄악이 가득한 패역한 도시였다. 무엇보다 니느웨의 걸림돌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사는 곳이 아니라 여호와를 알지도 못하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이교도들의 요새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니느웨는 세속적으로는 번영하고 호화로운 도시였지만 선교지로서는 전혀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다. 또한 그 곳에 살고 있는 백성들 역시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실만한 선교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가 저주를 받고 멸망하기를 바랬으며 여호와께서 그를 부르셔서 그곳으로 가도록 명령했을 때 거역하고 그 반대 방향의 다시스로 도망을 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니느웨 성이 하나님께서 요나를 선택해서 멸망을 선포하도록 명령했을 때 니느웨는 선교 대상 지역이 되었다. 여기에서 선교 대상은 부름을 받은 선교사가 택하거나 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곳이 이교도 지역이든 문화와 풍토가 다른 곳이든 불의와 죄악이 넘쳐나는 곳이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선교사를 보내기로 작정하시는 곳이면 그곳은 바로 선교 대상이 되며 선교지가 된다는 것이다.
선교 대상과 관련해서 요나서에서는 또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니느웨 성은 최종적인 선교지로 선택된 곳이지만 사실상 선교 대상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다시스로 달아나는 선상에서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두신 선교 대상자들을 만났다. 그것은 온갖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이교도 선원들이었다. 그들은 이방인이자 이교도들로서 요나의 증거를 기다리고 있는 선교의 대상이었다. 안타깝게도 도망 중이던 요나는 그 기회를 잡지 못하고 놓쳐버렸다. 요나서의 이 장면에서는 선교사로 선택을 받은 사람은 설사 그가 선교지로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선교의 대상은 언제나 그를 따라다닌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교의 대상은 주변에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으며 온 세상이 선교의 장이고 선교지이다. 단지 선교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사명을 받은 자들이 이런 저런 핑계로 그 기회를 놓칠 뿐이다. 두려운 것은 요나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선원들은 요나를 통해서 구원의 길을 얻지 못하더라도 다른 경로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지만 선교의 사명을 감당치 않은 자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요나서의 쟁점으로 돌아가서, 요나 선지를 선교사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을 선교사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선교사의 자격 요건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선교사라는 칭호는 다음의 세 가지 요건을 갖춘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choosing), 둘째는 부르시고(calling), 셋째는 보내심을 받은(sending)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선교를 수행하는 사람이다. 요나 선지는 이 요건을 얼마나 충족시키고 있는가? 하나님의 선택의 표적은 일반적으로 계시의 말씀이 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요나를 선택하시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1:1)가 그것이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이 이어진다. 여호와께서는 요나를 부르시어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1:1-2)고 하셨다. 이것은 '부르심'이자 '보내심'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예언자(나비)는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이자 선교사이다. 무엇보다도 요나는 자발적으로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에 불만을 품고 거역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요나를 강제하셔서 선교사로 보내셨다. 여기에서 선교사는 선교사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사명을 부여하시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신약에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을 지닌 것은 사도(Apostle)이다. 그런데 때로는 초대 기독교인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을 가리켜서 보냄을 받은 자 즉 사도라고도 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세 가지 동사로 명령을 내리셨다. 곧 '일어나' '가서' '외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약의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사도'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요나는 이른바 니느웨라는 이방의 성에 하나님의 말씀--멸망을 포고하는 말씀--을 전할 사명을 띠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사도이자 선교사이다. 이처럼 요나서는 요나에게 선교사의 자격 요건을 부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결국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붸아서 니느웨를 회개시키는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선교사가 되는 것까지로 이어진다.
덧붙이자면, 요나가 도망간 '다시스'는 재미있는 은유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스'는 제련소(smelting works)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곳으로 가는 이유는 '은, 철, 양은, 납'과 같은 것을 얻기 위해서였다(겔 27:12)고 한다. 이를 은유적으로 해석하면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것은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며, 그 이유는 다시스라는 제련소로 그를 보내어서 달구고 두드리는 '제련'을 받게 하시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용광로의 뜨거운 시련으로 제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나의 다시스행은 선교 훈련, 그것도 고되고 험난한 선교 훈련의 행로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요나는 다시스행을 통해 선교사로 점차 성장해갔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같이 도망가는 길까지도 선교의 훈련 기회로 삼으심으로써 원대한 선교 계획을 완수하신다.
이와 같이 요나서는 하나님 중심적인 선교의 전형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선교를 주도적으로 행하시며 거기에 요나를 도구로 사용하신다. 특히 요나서의 선교 전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선교를 위해 필요한 것을 언제나 미리 준비해 주셨다. 이를테면 요나를 니느웨 선교를 위해 준비하셨고, 그가 도망을 갈 때는 큰 폭풍을 준비해서 그의 길을 막았다. 그리고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요나를 단련시키고 가야할 곳인 니느웨로 데려오도록 했다. 요나가 관망하고 있을 때 박 넝쿨을 준비하셔서 덧없는 그 그늘을 즐기게 했으며, 다음에 벌레를 준비하시고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셔서 요나에게 깨우침을 주시고, 요나가 선교 사역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권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선교를 위해 준비하셨고 또 그 선교를 철저하게 주도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계획을 이방에게 펼치셨다.
4. 요나서의 선교신학적 쟁점
(1)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
요나서에서는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계획과 요나의 특수주의가 대립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라는 선택된 백성을 넘어서서 니느웨의 이방인들을 구원의 계획 안에 포함시키고 그들을 위한 선교를 펼친다. 그래서 마침내 니느웨의 백성들 뿐 아니라 짐승들까지도 회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은 인간만이 아니라 양떼와 소떼 그리고 더 나아가서 피조물 모두에게까지 적용된다는 시사를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과 구원은 그 폭이 너무 넓고 또 그 깊이도 너무 깊어서 인간의 제한되고 이기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다. 요나는 바로 이러한 좁은 시야와 소견을 가진 인간을 대표한다.
요나서에 소개되고 있는 요나라는 인물은 호감이 가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되풀이해서 불복종과 불평으로 응답한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노력을 한다. 이러한 요나의 행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과 사랑에 대한 반항과 반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유대인만이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 사상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그외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대인의 특권 의식은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 자체가 못마땅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잘못된 처사라고까지 생각했다. 원수에게는 진노가 있을 뿐인데, 그 원수가 망하지 않도록 조처를 해주시는 하나님을 요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니느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간결하게 전했을 뿐인데도 온 성이 회개하고 화를 모면하게 되자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방관자적 자세를 취했다. 그는 니느웨 성이 회개하는 것이 싫었으며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러므로 요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확신에 차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다. 어쩌면 그는 너무도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에 감히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까지도 거역했을지 모른다. 선택받은 백성 이외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참을 수 없어했다. 그래서 그는 일관되게 하나님께 반항하고, 그것이 소용이 닿지 않을 때는 수수방관하거나 자포자기해버렸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나서에는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관과 인간의 이기적이고 편협된 구원관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 심지어 인간이 하나님께 반항하고 원망하는 양상으로까지 나타난다.
그러면 요나가 니느웨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을 거부한 것은 잘못인가? 물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요나의 행동에서 당시의 유대인의 시각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어쩌면 요나의 행동이 애국적인 것으로 비쳤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에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그 후의 모세와 맺은 언약 모두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유대인을 편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은 구약에서는 논의할 수 없는 것인가? 요나서에서 보여준 것은 예외적인 사례에 불과한가? 예외적인 것이라면 좁은 소견의 인간인 요나의 반응은 당연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요나는 아모스와 같이 선지자로서 니느웨의 죄를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논하면, 요나는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선택된 백성들에게 특별히 인자하셨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방에 대해 무자비하게 심판과 멸망을 주시지는 않았다. 구약의 곳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을 치셔도 씨를 말리지 않으셨으며 그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한 줄기 빛처럼 남겨주신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요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과 사랑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창세 때부터 존재하던 것을 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준 것일 뿐이다.
(2) 요나서의 선교신학적 의의
구약은 일반적으로 구심적 선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이 선민으로서 열방의 부러움을 사고 하나님의 모든 관심과 보살핌을 집중받았으며 구원의 역사 역시 이들 언약의 백성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이방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도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모든 선교 역사는 결국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으로 연결된다. 구심적 선교는 이처럼 하나님의 선교가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로 향하고 집중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은 확실히 구심적 선교에 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나서는 구약에서 원심적 선교의 모범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책이다. 원심적 선교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고 열방으로 확대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원심적 선교는 이사야에서도 얼마간 나타난다. 예컨대 이사야 49장 6절의 "내가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와 이사야 60장 1절의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에서처럼 이사야의 후반부는 이방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원심적 선교가 구체적인 선교 사례로 나타난 것은 요나서이다. 요나서에서는 "일어나 가서 외치라"라는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에 이어서 도망갔다가 돌아온 요나에게 두 번째로 "일어나 가서 선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이러한 명령은 직접적이면서도 직설적으로 이방에게 구원을 선포하도록 한 것이다. 요나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니느웨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전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방에게 구원을 전한 원심적 선교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요나서는 이스라엘은 이방의 빛이 되고 이방에게 구원의 선포를 할 책임이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요나서는 구심적 선교의 전형을 보여준다. 요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자신이 가진 선민 사상과 특권 의식 때문에 거역하고 도망을 갔다. 그는 호된 단련과 훈련을 받은 뒤에 마지못해 니느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렇지만 그 때도 니느웨 사람들이 뉘우치고 화를 면하게 될까봐 걱정을 했으며, 그래서 아주 간단한 말로 니느웨의 멸망을 경고했다. 예상 외로 온 니느웨가 참회를 하자 오히려 그는 못마땅해서 다시 방관자가 되었다. 이 모든 요나의 행태는 전적으로 이스라엘만이 선택된 백성이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원심적 선교 계획과 그 명령을 거역하고 요나는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혀서 구심적 선교를 고집한 것이다.
이처럼 요나서에는 원심적 선교와 구심적 선교의 양면이 모두 담겨 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을 구심적 선교에 터하고 있다면 신약은 원심적 선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한다. 만약 이러한 단순한 일반화를 따른다면, 요나서에는 구심적 선교와 원심적 선교가 교차되고 있으므로 구약의 선교와 신약의 선교가 요나서를 통해서 만나고 통합될 여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바꾸어서 말하면 요나서에서 구약의 구심적 선교와 신약의 원심적 선교가 만난다. 그러나 내용을 보다 면밀히 분석해보면 원심적 선교에 더 큰 비중이 주어져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원심적 선교를 명하시고 요나는 구심적 선교를 고수하고 고집하는 일종의 대립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결국에는 하니님께서 계획하신대로 원심적 선교가 관철된다. 이러한 점에서 요나서는 궁극적으로는 원심적 선교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해주며 구약의 선교가 구심적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증을 제시한 셈이다. 더 나아가서 구약은 구심적 선교에 좀 더 큰 비중을 싣고 있으며, 반면에 신약은 원심적 선교를 더 중요시할 뿐이며, 신구약 전반에 걸쳐서 구심적 선교와 원심적 선교는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요나서가 입증해준다. 말하자면 선교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특권과 책임으로 표현되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선교적 책임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누가복음 11장 29-30절을 보면, 요나의 표적을 예수의 부활과 빗대어 설명한다. 요나의 표적을 통해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었듯이,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나의 니느웨 선교는 상징적으로 훗날에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할례받은 자나 할례받지 못한 자나 전 인류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선교를 예시해주고 있다.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롬3:29)에서 분명해졌듯이, 하나님은 더 이상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며 전 인류의 하나님이 되었다. 이 사실은 요나에 의해 구체화된 원심적 선교를 예수의 선교로 이어주며, 예수의 선교와 연결됨으로써 요나서의 원심적 선교가 완결된다. 따라서 요나서에 나타난 원심적 선교는 그 자체로서 완결된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를 통한 전 인류에 대한 구원의 확대 적용으로 이어졌을 때 완결되며 본래의 완전한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하자면 요나서의 원심적 선교는 예수의 선교와 연관되지 않고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요나의 선교는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예수의 원심적 선교와 이어졌을 때 완전한 의미와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3) 선포의 내용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외친 것은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는 간단한 경고였다. "사십일"은 멸망이 임박했다는 급박성을 암시하며,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멀리 있는 다른 도시가 아니라 지금의 이 도시가 당장 망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바꾸어서 말하면, 네가 사는 도시가 지금 곧 망할 것이다라는 내용을 선포한 것이다. 선교는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에서처럼 선교사가 전하는 말은 기쁜 소식이어야 하며 구원의 복음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요나가 선포한 것은 결코 기쁜 소식이 아니며 구원의 소식도 아니다. 그것은 멸망을 예고하고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멸망이 임박했으니 회개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일각에서는 요나가 선포한 것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요나의 선포를 선교로 간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선교사가 외치는 말이 기쁜 소식이 아니면 그것은 선교가 아닌가? 선포의 내용에 따라 선교로 간주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가?
단순히 요나가 기쁜 소식을 전한 것이 아니라 멸망을 선포했다는 이유로 요나의 선포를 선교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선교의 여부를 가리는 것은 선포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선포를 통해 초래된 결과에 있기 때문이다. 선포한 것이 복음이든 멸망의 통고이든 간에 그 선포가 계기가 되어서 회개 운동을 일으키고 사망의 길을 가던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했다면 그것은 선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요나는 멸망을 선포했지만 그의 선포는 선교였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자 니느웨 성의 모든 사람들이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니느웨 성의 회개는 바로 요나가 선포한 무서운 경고에서 촉발되었다. 구약에서는 요나 이외에도 요엘이나 아모스처럼 회개를 촉구하는 선포를 한 선지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구약의 선지자들 뿐 아니라 신약의 첫 선지자인 세례 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고 선포했다. 심지어 세례 요한은 바라세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7)고 책망하면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인 것과 같이 심판이 가까이 다가왔으므로 회개하라고 촉구했다. 이처럼 요나의 선포가 멸망을 전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더욱이 요나의 선포로 인해 니느웨 성의 백성들이 모두 회개하는 일이 일어났으므로 요나의 선포는 그 내용과는 상관없이 선교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
(4) 회심과 구원의 관계
하나님의 선교의 동기와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자비를 베푸시기로 작정하시고 구원하시기로 하셨다. 하나님의 선교 목적은 따라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요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 목적도 니느웨 성 내의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12만 여명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요나가 화를 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자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4:11)라는 말로 하나님의 선교 목적을 밝히셨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회개를 전제한다. 요나서에도 니느웨 성의 12만 여명의 백성들이 참회하고 뉘우치는 회개의 운동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구원이 주어졌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 계획은 구원 계획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구원 계획에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요나서에는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 이외에도 몇 가지의 상이한 회개가 나온다. 사실 요나서에서는 회개라는 말 대신에 "돌이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 말은 선교학에서 회심(conversion)이라는 용어로 대신해서 사용하고 있다. 회심은 영어의 턴(turn)과 같은 뜻을 가지는데, 이것은 '돌아오다', '방향을 바꾸다', '역전하다', '전향하다', '이제까지의 태도를 바꾸다', '개종하다', '마음을 변화시키다' 등의 여러 가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요나서에 나오는 "돌이킴"은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동일한 단어이다. 그러나 세 경우 모두가 그 의미는 같지 않다. 이를테면 니느웨 사람들의 돌이킴은 당연히 회개와 회심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돌이키신다는 것은 회개나 회심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요나서는 대체로 세가지 유형의 "돌이킴"을 연쇄적으로 엮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을 가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돌이킴"이다. 둘째는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돌이킴"이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의 악독함을 벌하시기로 했던 뜻을 스스로 돌이키신 것이다. 위의 세가지는 모두 동일한 "돌이키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세 가지 돌이킴 모두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서로 별개가 아니라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의 돌이킴은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을 가다가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가리킨다. 만약 요나가 거짓 선지자였으면 이 경우에 요나가 회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 불순종한 선지자였다. 따라서 요나의 돌이킴은 일종의 전향 또는 역전이기는 하지만 개종이나 회심을 가리키기 보다는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돌아서는 것이었다. 불순종한 요나는 상징적으로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욥바로 내려가서 배 밑층으로 내려가고, 다시 바다에 던져지고, 큰 물고기의 뱃 속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내리막길을 달리는 요나를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시지 않으셨다. 요나를 삼킨 물고기가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당하다가 마침내 육지에 토해 올렸다. 여기에서 요나는 스스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불순종의 요나를 심판하시고 회개케하는 도구로 삼으셔서 그를 돌아오게 했다. 이 대목은 죄인을 회개하게 하는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께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요나가 스스로 뉘우친 것은 아니지만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물고기의 뱃 속에서 구출하시고 생명을 주셨다. 따라서 요나의 돌이킴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러한 돌이킴은 구원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의 돌이킴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선포를 듣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으며 자신들의 죄악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뉘우치고 회개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점에서 회개를 동반한 개종 또는 회심으로 풀이할 수 있다. 니느웨 사람들의 돌이킴은 집단적이고 총체적인 회개였으며, 일종의 회개 운동이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3:5)는 회개 운동이 도시 전체에서 일어났음을 가리킨다.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앉으니라"(3:6)는 회개 운동이 아래에서 위로 번졌음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 왕이 즉시 대신들과 함께 조서를 내려 니느웨의 회개를 선포하자 회개 운동은 다시 위에서 아래로 번졌다. 이와 같이 니느웨의 돌이킴은 아래에서 위로, 그리고 다시 위에서 아래로 확산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소떼와 양떼와 같은 짐승들과 모든 피조물이 돌이켰다. 이것은 모두가 뉘우치고 참회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를 수반하는 회심이 일어났으며, 그러한 회심은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어졌음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도 돌이킴은 하나님의 구원과 연관된다.
세 번째의 돌이킴은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고 하실 때는 그 진노하심이 니느웨를 멸망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처음의 뜻을 바꾸어서 니느웨 백성들을 벌하지 않으셨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한 번 정하신 뜻을 돌이키시기도 하는가? 하나님의 돌이킴은 어떤 것이며 어떤 경우에 그러시는가?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시는가? 니느웨의 백성들은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3:9)는 말로 하나님께서 용서의 응답으로 뜻을 돌이키실 것을 은근히 기대했다. 여기에서도 백성들의 회개가 먼저 있고, 그 회개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 사실 하나님의 이 돌이키심은 풀이하기가 쉽지 않다. 당연히 그러한 돌이키심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과 자비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뜻을 돌이키셔서 니느웨를 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궁극적으로 멸망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베풀고 구원을 주시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변덕스럽게 뜻을 돌이키시는 것이 아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는 하나님의 뜻이자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의 말이었다. 이 말을 뒤집어서 풀어보면, 회개를 하면 멸망을 면할 수도 있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본래의 뜻을 실행하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는 데는 인간의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의 회개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셔서 인간을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돌이킴 역시 인간의 회개가 전제되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구원으로 이어진다.
요나서의 세 가지 돌이킴은 언제나 선행하는 돌이킴에 이어서 다음의 돌이킴이 일어나는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요나의 돌이킴이 있자 니느웨의 돌이킴이 일어났으며, 니느웨가 돌이키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 만약 요나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니느웨의 회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니느웨의 회개가 없었다면 하나님께서도 뜻을 돌이키실 리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니느웨는 예정대로 멸망했을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무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돌이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물론 요나는 전적으로 자신의 능력이나 힘으로 돌이킨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돌이키게 하셨다. 니느웨는 요나의 평이한 선포를 듣자 놀랍게도--아마도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대대적인 돌이킴, 곧 회개 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응답해서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어 니느웨에 대한 진노의 시행을 돌이키셨다. 하나님의 돌이키심은 인간과 모든 피조물들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것이었다. 이처럼 돌이킴은 언제나 구원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5. 요나서의 선교를 다시 논하며
보쉬는 신학의 모체(the mother of theology)는 결국 선교라는 명제를 가지고 선교를 정의하고 선교 역사를 논한다. 그 점에서 그는 포괄 논법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식으로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役事)든 교회의 역사(歷史)든 신학적 논리든 이론이든 모두가 선교에서 유래하며 선교로 귀결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요나의 행적도 선교이며 요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도 선교라는 것이다. 그러나 요나서를 이러한 포괄 논법만으로 논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요나서에서 논란이 되었던 선교신학적 쟁점들 중에는 포괄 논법과 배제 논법 간의 논쟁인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나서에 나타난 선교는 한 가지 논법만으로 파악하기보다는 두 가지 논법을 조화시켜 논의하는 것이 한층 더 의미있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요나가 선포한 말이 복음이 아니라 멸망을 예고하고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요나의 선포를 선교로 간주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배제 논법을 따른 것이다. 전하는 말의 내용이 기쁜 소식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정해놓고, 그 기준과 부합하지 않는 것은 선교가 아니라고 배제하는 방법이다. 반면에 한 편에서는 선포한 말의 내용이 어떠한 것이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고 구원을 주시기 위해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은 모두가 선교라고 주장한다. 또한 자발적으로 또 사명감에 차서 구원의 소식을 전하든 아니면 강권으로 인해 마지못해서 선포를 하든, 그 선포로 인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선교라는 것이다. 요나의 선포도 비록 니느웨의 멸망을 경고하고 또 요나가 원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니느웨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선교로 간주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포괄 논법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에 배제 논법보다는 포괄 논법이 설득력과 타당성이 더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제 논법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배제 논법은 선교에 대해 좀 더 신중한 정의와 분석을 하도록 함으로써 선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는 인간의 지식과 예측을 넘어선다. 요나는 이방인에게 구원을 베푸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자신이 가진 좁은 가치관과 종교관 그리고 세계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교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불복종으로 맞섰다. 여기에서도 선교에 대한 두 시각이 대립된다. 하나님의 선교와 인간의 선교가 서로 대립하게 된다. 요나서는 선교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며 완성하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인간의 선교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의 편협함과 오만함 그리고 이기심이 개입될 소지가 크며 선교를 인간이 가진 가치관과 세계관의 한계 내에 가두어놓고 인간의 지식과 이해의 테두리 내에서 실행하려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요나서에서 요나는 단지 하나님의 선교 도구에 불과하며 선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손에 달려 있음을 명백히 하고 인간의 선교가 가지는 한계를 드러내주었다.
요나서에서 밝히 보여주듯이, 선교는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라면, 인간은 선교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의 선교에서 인간이 맡은 역할은 순종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우신 원대한 선교 계획에 따라 인간을 택하시고 사명을 주신다.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선택만 남아 있다. 설사 요나처럼 불순종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시련을 주고 단련시켜서 순종하게 만드신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순종하든 불순종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교는 계획대로 추진되고 실현된다. 요나가 하나님의 선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더라도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은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요나가 아무리 불평하고 방관을 하더라도 그 결과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요나는 하나님의 선교 계획에 쓰이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 인간은 판단하고 평가할 수 없다.
니느웨에서 요나가 한 일은 무엇인가? 그는 결코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가 한 일은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는 말 뿐이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그런 경고를 한 것도 아니며, 니느웨 백성들을 설득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또한 구체적으로 왜 그리고 어떻게 니느웨가 망할 것이라고 설명해주지도 않았다. 물론 요나가 이렇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니느웨가 멸망하지 않고 화를 면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전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온 니느웨 백성이,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일개 백성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선교의 중요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선교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과 지식 그리고 물질에 의해 거창하게 계획하고 벌이는 사업이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다. 설사 그 전하는 방법이 세련되지 않고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보태지도 빼지도 않고 그대로 전했을 때 효력을 발휘한다.
요나서에 나타난 선교는 예수의 선교로 완결된다. 요나서의 선교가 예수의 십자가로 인한 구원의 보편적 확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단순히 하나님의 선교 계획에 대해 끝없이 거역하고 저항한 선지자 요나의 무용담 정도로밖에 남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나서에서 니느웨의 구원을 놓고 하나님과 요나가 벌인 끝없는 줄다리기는 물론 당연히 하나님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것이 예수를 통한 전 인류에 대한 구원으로 이어지면서 완전한 하나님의 승리를 확정지었고 또 나아가서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을 완성한 셈이 되었다. 따라서 세계 선교는 요나서에서 구체화되어 싹이 텄으며, 예수의 십자가에 와서 세상을 뒤흔드는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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