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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어떤 교회를 쓰십니까? / 이사야 42장 5-9절

까망쑤나 2011. 4. 11. 18:41

하나님은 어떤 교회를 쓰십니까? / 이사야 42장 5-9절

 

본문의 내용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사역을 알기 이전에 그 사역을 계획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예수님은 어떤 사역을 하실 것인가? 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성부 하나님은 항상 계획하시는 분, 성자 하나님은 실행하시는 분, 성령 하나님은 적용하시는 분으로 말씀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계획하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성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땅을 살다보면 많은 영적 침체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침체에 빠졌을 때 어떻게 벗어나야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영적침체에 빠지면 먼저 자기를 분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가 누구인가를 아무리 분석해 보아도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이기에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우리가 모든 것을 분석할 때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리고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 그 두 가지를 살펴보며 성령이 주시는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1.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5절을 보면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호흡을 주시는 하나님, 성령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내 삶의 문제, 내 삶의 고민이 대체 무엇입니까?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지면 절대로 두려움에 빠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에 빠졌을 때마다 “항상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반복합니다. 창16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굉장히 큰 번민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자손들을 많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자기는 늙은 몸인데도 불구하고 아들이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인생 가운데 그럴 때가 있습니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답답하고,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알려지면 도저히 창피해서 견딜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창15:5절을 보면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원래 하늘에는 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넷째 날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도 없는 별을 만드신 창조의 하나님, 그런 하나님께서 뭘 못하겠느냐,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너의 아들 문제를 해결 못하겠느냐. 너의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어떤 때는 염려하고 두려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로 어떤 일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저도 인생을 살다 보면 잘 안되는 일이 있고, 기다려지는 일이 있습니다. 저도 목사인데 새성전과 비전관 건축이 빨리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는 꿈이 왜 없겠습니까? 꿈이 있습니다. 빨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며 “언제 이루어지나”하고 그 일에 집착하고 있으면 시간이 되게 안갑니다. 여러분, 집착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 빨리 가게 하는 방법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힘입니다. 시121:1절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바라보며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여기에 참된 쉼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영적인 쉼입니다. 하나님 바라보십시오. 문제해결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초월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부르심을 입은 종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바라볼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해결하는 권능의 종들이 되기 바랍니다.
2.나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6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너”는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두 가지인데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입니다.
백성의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백성은 이것밖에 몰랐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 밖에 있는 이방인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막혀 있는 담을 헐어버리신 분이십니다. 교회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 되어서 예배드리는 공동체, 그것이 교회의 비밀입니다.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담을 넘고 벽을 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영이 임하면 이렇게 이방을 향하여 나아가는 힘이 있습니다. 마4:15절을 보면 이방이라고 여겼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본거지를 유대라고 생각하고, 갈릴리는 이방의 갈릴리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부터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변방을 향해서 나아가셨던 분이십니다. 유대라는 한계를 뛰어넘고 사마리아로 가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계를 뛰어넘는 그것이 예수의 영의 특징입니다. 7절을 보면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소경은 시각적인 한계의 제한을 받는 사람입니다. 갇힌 자는 공간적인 한계의 제한을 받는 사람입니다. 흑암이란 영적인 한계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역사하시면 이런 한계를 뛰어넘고 제한을 뛰어넘는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교회의 특징은 틀을 깨고 넘어가는 변방성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영이 역사하지 않으면 밤낮 관심이 교회 울타리 안에만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 역사하게 되면 교회 안에 있는 양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양이 보이기 시작하여 틀을 넘고, 선을 넘어버립니다. 그것이 교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참된 예수의 영은 항상 담을 넘어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가 예수의 영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새 신자가 들어와야 합니다. 살아있는 교회의 특징은 새신자들이 항상 넘쳐나고 그들이 가지고 온 변방의 소식으로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전부 다 경건한 사람만 있어서는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초신자들이 있어야 하고 연약한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런 사람도 믿는 사람일까?”라고 말할 정도의 사람들이 들어오는 교회, 어린 아이 같은 성도들이 있는 교회 ,그것이 변방성입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역사상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정말 제도권 안에 있는 안정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변방성이 없는 전부 유대인만 모이는 큰 교회였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설교를 했더니 3000명이 믿고, 그 다음에 설교를 했더니 5000명이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수가 최소한 5000명은 되었던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교회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변방성이 없습니다. 자기 울타리 안에 가두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핍박을 당하고 난 다음에 흩어졌을 때에 나왔던 안디옥교회를 봅시다. 안디옥교회는 출신 자체가 변방성이었습니다. 행11:20절을 보면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교회에는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증거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제한성이 있었지만,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아무 생각 없이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더니 그들도 믿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자꾸만 해 보아야 하고 부딪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단기선교를 갈 때는 “탐색만 하겠다”고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하여 10차까지 선교를 가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곁에 끊임없이 비전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붙여주셔서 생각보다 놀라운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도해 보았더니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시도할 줄 아는 능력, 이것이 교회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이 했던 일마다 다 성공했습니까? 아닙니다. 특별히 드로아에서 예수의 영이 막고, 성령이 막아서, 이쪽으로 가려면 여기를 막고 저쪽으로 가려면 저기가 막히고 맴돌고 있다가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유럽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계기가 무엇입니까? 무릎을 꿇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알려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시도해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께서 역사하시면 은사를 더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시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어놓은 선을 다 넘어가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주님 따라다니면서 “여기 넘어가면 안돼! 넘어가면 안돼!”라고 줄 긋는 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계속 넘어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넘으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성령의 참된 능력, 교회의 참된 능력, 예수님의 영성을 놓치고 있는 것아 저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밤낮 교회 안에서 우리끼리만 무엇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은 제한된 선을 넘는 능력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받은 말씀의 능력을 가지고 예수님과 같이 제한된 것을 뛰어넘는 믿음의 고현의 성도님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