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헌금제도에 목매는 교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교회의 헌금제도다. 우선적인 이유는 헌금이 자발적으로 행해지기보다 종교적 수탈행위에 가깝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요 다음으로는 용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헌금이 자발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행해지고 있다면 그리고 용처가 합당하다면 잡음이 일어날 리가 없다.
이 글을 접하는 분들에게 당부하건데 인용한 성경구절을 꼼꼼하게 읽지 않으려면 차라리 보지 말기를 바란다. 성경적으로는 결코 민감할 필요가 없는 헌금행위가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민감하게 비성경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 밖에서의 논의는 신앙적으로 의미가 없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말꼬리만을 붙들고 시비를 건다면 이는 자기방어를 위한 부정직한 행태일 뿐이다.
1. 헌금은 신앙 고백적 행위
헌금은 신앙 고백적 행위다. 다윗은 말년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성전건축을 당부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이 고백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자의 정신이 담겨 있다.
“이 몸이 무엇이며, 이 몸이 거느린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렇듯이 기쁜 마음으로 바칠 힘을 주셨습니까?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하느님 손에서 받은 것을 바쳤을 따름입니다.” (역대기상 29:14)
이어서 다윗은 구체적으로 ‘드림’의 원천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밝혔다.
“하느님 보시기에 저희는 저희 선조들처럼 이리저리 떠돌며 남에게 몸 붙여 사는 신세였습니다. 아무 희망도 없이 떠도는 모습은 마치 땅 위를 스쳐가는 그림자 같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는, 거룩하신 이름을 떨치실 성전을 짓는 데 쓰라고 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손에서 받은 것이기에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바울도 같은 맥락의 고백을 했다.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6:13)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로 매여 있었다면 우리는 죄와 심판과 죽음에 매여 있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해방과 생명을 얻은 것 같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은 예수로 말미암아 자유와 생명을 얻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생명은 예수로 말미암은 새 생명이며 따라서 생명과 함께 인생에 지닌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드림도 역시 다윗의 고백에 들어 있는 정신과 동일하다. 생명과 재산이 모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즉 그 중 일부를 돌려드리는 것 뿐이다.
2. ‘드림’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규례와 계명을 주신 목적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당신 즉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규례와 계명을 지킴으로서 그들은 자기들의 과거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다. 십일조와 여러 가지 제물을 바치며 그들은 자기들의 생명과 재산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상기했다.
“이 재산은 내 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은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거든, 너희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라. 하느님께서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당신의 계약을 이행하셔서 오늘 이처럼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여라.”(신명기 8: 17,18)
그러나 규례와 계명은 제도화되고 의식화되어 그 안에 들어 있는 정신이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앙정신을 분명히 밝혔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신명기 6:5)
예수는 이를 더욱 분명히 하여 계명의 완성으로 제시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오의 복음서 22:37-40)
드림 혹은 헌금에는 반드시 율법의 정신이 들어있어야 하며 그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요 그 증거는 ‘기꺼운 마음’이다. 혹시라도 종교적인 자기만족이나 자랑하는 마음, 혹은 공덕 쌓기 등의 의도가 내포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드림’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진 것이 없어서 구걸하시는 분이 아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이 드려도 스스로 만족할 수 없으며 또한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았으니 자랑할 것이 없고 공덕을 쌓을 것도 없다. 그러므로 '드림'은 하나님의 은덕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행해져야 한다.
3. 소유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속했음으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 취해야할 태도는 ‘청지기의 자세’다. 청지기는 ‘관리자’를 일컫는 말이다. 선한 청지기는 반드시 주인의 뜻에 따라 행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새 생명과 자기의 육체, 재물 등을 그 분의 뜻에 합당하게 관리해야 한다. 이 뿐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하여 지혜로운 판단과 의로운 행실로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내야 한다. 이런 모든 것들이 드림, 헌신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 경건생활을 하는 것도,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몸에 해로운 것을 삼가는 것도, 검소하게 살며 절약하는 것도, 세상사를 하나님의 지혜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도 모두 드림이요 헌신이다.
“각자가 받은 은총의 선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서로 남을 위해서 봉사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갖가지 은총을 잘 관리하는 사람(청지기)이 되십시오.”(베드로의 첫째 편지 4:10)
4. 신앙정신이 빠진 행위는 무가치하다.
이쯤에서 성경의 두 기사를 읽고 중요한 하나를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는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세리였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하고 기도하였다.
한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루가의 복음서 18:9-14)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왜 너는 나에게 와서 선한 일에 대하여 묻느냐? 참으로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하고 대답하셨다.
그 젊은이가 "어느 계명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3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계명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 젊은이가 "저는 그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셨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풀이 죽어 떠나갔다.(마태오의 복음 19:16-26)
예수는 신앙정신이 빠진 십일조, 금식, 계명에는 조금도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자기만족과 자랑과 공덕 쌓기라는 계산된 의도가 내포된 바리사이파 사람(바리새인)의 십일조와 금식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 나름대로 영생에 대한 기대 혹은 확신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부자청년의 ‘계명에 대한 자신감’을 한 마디로 꺾어버렸다. 메시아라 불리는 예수에게 ‘영생에 대한 자기 확신에 대하여’ 확인을 받으러 왔던 청년은 풀이 죽어서 가버렸다.
5. 십일조의 기원과 의미
이제 십일조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십일조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중에서 가나안땅의 토지를 분배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전담하게 된 레위지파의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그 전에 아브라람이 제사장 멜기세댁에게 자기 소유의 십분의 일을 바친 적이 있고 야곱이 벹엘에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약속한 적이 있으니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이 전부터 개인적으로 행해지던 것이 가나안땅에서 부족공동체를 이루는 시점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도로 정착되어 신정공동체의 경제적 토대를 이룬 것이다. 십일조에는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 절기 행사용 십일조, 고아와 과부를 비롯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3 년에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가 있다.
야훼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백성이 차지할 땅에서 그들과 함께 나누어 받을 유산이 없다. 그들 가운데서 너에게 돌아갈 몫은 없다. 다만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네가 차지할 몫이요 유산이다. 내가 이제 레위 후손에게 줄 것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거둔 십일조 전부이다. 이것은 만남의 장막에서 예배를 보좌한 보수로 주는 것이다.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도 만남의 장막으로 가까이 가지 못한다. 가까이 가면 죄를 받아 죽으리라. 만남의 장막에서는 레위인만이 봉사할 수 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범접한다면 그것도 레위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 너희가 길이길이 대대로 지킬 규정이다. 레위 후손들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아무 유산도 상속받지 못한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께 떼어 바치는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유산으로 준다. 그러므로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그들이 상속받을 유산은 없다고 일러주는 것이다."(민수기 18:20-24)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붙이시고 당신께서 계시는 곳으로 삼으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가운데서 고르신 그 곳을 찾아 그리로 가야 한다. 너희의 번제물과 친교제물과 십일조와 흔들어 바치는 예물과 서원제물과 자원제물과 소와 양의 맏배를 그리로 가져다 바쳐야 한다. 그 곳이 너희 하느님 야훼를 모시고 먹으며 즐길 자리, 너희와 너희 식구들이 손으로 일해 얻은 모든 것,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복으로 주신 모든 것을 먹으며 즐길 자리다.”(신명기 12:5-7)
“너희는 삼 년마다 한 번씩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다 내놓아 성안에 저장해 두었다가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기 14:28-29)
십일조는 당시 신정공동체였던 이스라엘이 체제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재원이었다. 이스라엘의 왕정이 시작되기 직전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경고하기를 ‘왕이 십일조를 징수할 것(사무엘상 8:15)’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애초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통치를 위한 재원이었고 왕정시대부터는 조세에 해당하는 십일조가 - 명칭은 다를지라도 - 행해져서 왕의 통치를 위한 재원으로 추가되었다.
십일조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더불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특히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며 더욱 해이해졌다. 이에 말라기 선지자는 백성들의 신앙회복과 성전의 운용을 위해서 십일조를 강조했다. 이는 오늘날 목사들이 십일조를 강요하며 단골로 내세우는 대목이기도 하다.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주는지 갚아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말라기 3:10)
6. 십일조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과 교회에서의 위치
예수도 십일조에 대하여 교훈했다. 그러나 오늘날 십일조에 목매는 목회자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책망과 함께 언급되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 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마태오의 복음서 23:23)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루가의 복음서 18 장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
예수는, 의로운 삶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신의를 버리고 ‘자기만족과 자랑과 공덕 쌓기라는 계산된 의도’로 십일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강력하게 꾸짖었다. 신앙정신을 버린 것은 물론이고, 저들은 야생에서 채집한 식물에 까지 십일조를 확대 적용하여 백성을 수탈하였다. 원칙적으로 십일조의 대상은 토지의 소산물이다. 레위 지파에게 따로 토지를 주지 않은 대신 나머지 11지파가 토지의 소산 중 1/10을 각출해서 레위 지파에게 주도록 했기 때문이 다.
예수는 십일조도 행하고 신앙정신도 실천하라고 했다. 이 교훈은 오늘날의 교회들이 십일조제도를 지속시키며 강조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교회탄생 이전의 가르침이다. 예수의 죽음과 함께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지는 순간부터 성전의 존재가치가 사라졌고, 예수의 부활 승천 직후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함으로써 교회가 탄생하였다. 이 교회는 건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교회는 레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던 구약시대의 성전이 아니다. 따라서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초대교회가 십일조를 행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중요한 이유다.
신약성경에는 유급성직자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이 없다. 전도자들에게 경비를 모아주긴 했지만 공식적인 급여제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곡식을 타작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라는 바울 서신의 기록을 통해 자유로운 형태의 부분적인 유급성직자가 존재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천막을 제조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가 전적으로 유급성직자에 의지하는 것은 심각하게 재고해야할 문제다.
어쨌거나 오늘날 교회에서 십일조를 강권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는 없다.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지어야하고, 이를 유지하고, 유급성직자와 유급봉사자를 고용하려는 세속적인 육심과, 자발적인 헌금을 하도록 신앙적인 동기부여를 할 수 없는 목회자들의 무능이 십일조를 강권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참고로 교회의 감독이나 장로 집사의 자격에 관해서도 성경은 십일조를 말하고 있지 않다.
7. 초대교회의 헌금
규례와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최소한의 지침이다. 그것은 제도나 의식을 통해서 행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제도와 의식 이전에 신앙정신에 기초하여 행해져야 했다. 예수는, 규례와 계명을 지키고 있다는 부자청년에게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줄 것을 명했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각자가 재산을 팔아서 넘치는 헌금을 했다. 십일조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십일조를 능가하는 규모였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께서 마케도니아 여러 교회에 얼마나 큰 은총을 내려주셨는지를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그들은 환난을 만나 큰 시련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기쁨에 넘쳤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많은 희사를 했습니다.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제 푼수대로만 희사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희사까지도 했습니다. 그리고 부디 자기들에게도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에 참여하는 특전을 달라고 자진해서 간청해 왔습니다.”(고린토인들게게 보낸 둘째 편지 8:1-4)
이로보건데 초대교회는 십일조에 대하여 권고하지 않았지만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풍성하게 드렸다. 결국 교회가 십일조를 제도화하고 강력하게 권고하는 이유는 기꺼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자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요 목회자가 교회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또한 교회의 씀씀이에 낭비와 사치가 심한 것도 중대한 이유다.
8.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과 헌금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조하며 거의 협박용으로 인용하는 것이 초대교회에서 발생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다.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삽피라와 함께 자기 땅을 판 다음 의논한 끝에 그 돈의 일부는 빼돌리고 나머지만 사도들 앞에 가져다 바쳤다. 그 때에 베드로가 그를 이렇게 꾸짖었다. "아나니아, 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 판 돈의 일부를 빼돌렸소? 팔기 전에도 그 땅은 당신 것이었고 판 뒤에도 그 돈은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오? 그런데 어쩌자고 그런 생각을 품었소? 당신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 이 말이 떨어지자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 거꾸러져 숨지고 말았다. 이 말을 들은 사람마다 모두 두려워하였다. 젊은이들이 들어와 그 시체를 싸가지고 내어다 묻었다. 세 시간쯤 뒤에 그의 아내가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들어왔다. 베드로가 그 여자를 불러놓고 "당신들이 땅을 판 돈이 이게 전부란 말이오?" 하고 묻자 "예, 전부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어쩌자고 당신들은 서로 짜고 주의 성령을 떠보는 거요? 자, 당신의 남편을 묻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지금 막 문 밖에 왔소. 이번에는 당신을 메고 나갈 차례요." 하고 베드로가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도 당장 베드로의 발 앞에 거꾸러져 숨지고 말았다. 그 때 그 젊은이들이 들어와 보니 그 여자도 죽어 있었으므로 떠메고 나가 그 남편 곁에 묻었다. 온 교회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이 말을 듣고는 모두 몹시 두려워하였다. (사도행전 5:1-11)
이 사건의 요체는 헌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속이고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를 파괴하려 했다는 데에 있다. 당시의 교회는 신자들이 재산을 팔아서 함께 통용하며 공동생활을 영위하였다. 이는 성령 안에서 하나 된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부정직한 행위는 성령을 속이고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할 뻔 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태어난 최초의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즉각적으로 심판 했다. 이는 성령 훼방죄(마태복음12:31)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가 되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사건의 핵심은, 때어 먹은 적은 헌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고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악의적이고 위선적 행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헌금을 강요하고 협박하기 위해서 이 사건을 인용한다면 바로 그 사람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9. 거룩한 것을 드리라. - 드림의 도덕성
드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 헌물은 반드시 흠 없는 것으로 거룩하게 드려져야 했다는 것이다. 거룩함의 원천은 재물을 취득하는 수단에 있다. 이는 돈을 버는 수단 즉 직업에 대한 높은 도덕성을 뜻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이에 대하여 무신경하다. 오직 액수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창기와 개 같은 자가 번 돈은 가져오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부정한 수단으로 번 돈을 의미한다.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신명기 23:18)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직업은 지극히 도덕적이어야 한다. 뇌물, 폭리, 투기, 탈세, 밀수, 사치품 거래, 저급 문화 등을 통해서 얻은 수입은 헌금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오늘날 이처럼 고도의 직업윤리를 따지는 교회가 있는가!
10. 교회의 헌금제도와 종류
자발적인 헌금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교회는 제도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헌금을 만들어서 강요하고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경악할 만 했다.
* 십일조, 주일 헌금, 부활절, 맥추절, 추수 감사절, 성탄절 등 절기헌금
* 내 집 마련 헌금, 전세 헌금, 건강 헌금, 차량 헌금,
* 십이조(앞으로 수입이 배가 되는 축복을 받고 싶은 사람들은 미리 수입을 계산하고 지금 십일조의 두 배를 드리는 헌금),
* 총 재산의 십일조,
* 악기 헌금, 교역자 성지순례 헌금,
* 건축 헌금,
* 사택 헌금 .
* 축복의 씨앗 헌금(앞으로 자녀들이 받을 축복을 위해 지금 헌금으로 씨앗을 뿌려라는 뜻의 헌금),
* 황소 헌금(자녀를 위해 구약에서 황소를 드리듯이 오늘날 돈으로 환산해서 자녀 1인당 약 400만원 정도를 헌금하는 것),
* 일 천 번제(솔로몬이 일 천 번제를 드리듯이 자녀를 위해 1,000번의 헌금을 드리는 것이다. 이 경우 최소한 한 번 헌금할 때 10,000원 이상은 해야 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래서 때로는 일 천 번제를 천 만원을 내는 것으로 정하는 경우도 있다),
* 수능 헌금, 면접 헌금, 논술 헌금, 취업 헌금, 결혼 헌금
* 생일감사헌금
* 선교헌금
* 구제헌금
이 외에도 더 많은 것들이 나열되어 있다. 최근에 입수한 믿을만한 소식에 의하면 강남의 한 대형교회는 환자가 목사(부목사 포함)에게 공식적으로 안수기도를 받으려면 20만 원의 헌금을 받는다고 한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참으로 당황스럽다.
11. 헌금의 사용처
헌금의 용처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도 교회가 불신 당하는 매우 중대한 원인이다. 오늘날 헌금의 용처는 예배당 건축, 건물관리, 성직자 급여, 평신도 봉사자 급여 등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초대교회가 예배당 건축을 비롯하여 위와 같은 항목에 돈을 썼다는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 구제비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교회가 선교비를 지출한다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목사의 치적 쌓기와 교회 홍보 전략 그리고 교인들에게 지기만족을 주기 위한 지극히 종교심리적인 목회전략의 일부일 뿐이다. 평신도의 봉사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성가대와 악기연주자들에게 까지 급여를 지급해야하는 현실은 참으로 한심하다.
교인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드릴 수 있도록 신앙적인 동기부여를 해주지 못하고 헌금을 제도화하여 교인들을 구속하는 것은 종교적인 수탈행위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선지자를 통해서 이를 경고했다.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목자들에게 그들을 쳐서 이르는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망하리라. 양을 돌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우어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주어야 하며 상처 입은 것은 싸매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그들을 다만 못살게 굴었을 뿐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먹히며 뿔뿔이 흩어졌구나.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 그러니 목자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내가 맹세한다. 나의 양떼는 마구 잡혀갔고, 나의 양떼는 목자가 없어서 들짐승에게 찢겼다. 그런데도 내가 세운 목자들은 나의 양떼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제 배만 불리고 양떼는 먹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에제키엘 34:2-8)
12. 결론
신약성경에는 드림이나 헌금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그 대신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예수를 닮은 거룩한 인격과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라고 가르친다. 일정 금액을 헌금하는 것과 거룩한 삶 중에서 어느 것이 우위에 있으며 어느 것이 인간적으로 더 어려운 일인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삶에는 재물도 당연히 포함되니 헌금은 크게 거론할 것이 못된다. 이것이 신약성경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2:1)
성경은 진실로 헌물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높이 계시는 하느님 야훼께 예배를 드리려면, 무엇을 가지고 나가면 됩니까? 번제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송아지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숫양 몇 천 마리 바치면 야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거역하기만 하던 죄를 벗으려면,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죽을 죄를 벗으려면, 이 몸에서 난 자식이라도 바쳐야 합니까?"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미가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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