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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앙코르 유적을 찾아서

까망쑤나 2008. 2. 24. 03:35

앙코르 유적을 찾아서...(1일차 - 따 프롬 외 6곳의 사원)

누구나 캄보디아하면 앙코르 왓이 머리에 떠오를 겁니다. 앙코르 왓을 떠나기 전에 앙코르왓 여행 관련 책도 사 보고 인터넷에서 여행기도 보았습니다만, 도대체 감이 오질 않았습니다. 역시 여행은 본인이 직접 가서 다녀 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인천공항에서 6시간 만에 도착한 캄보디아의 씨엠립 공항은 공항이라기 보다는 시골의 간이역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5달러면 입국 심사도 없이 프리패스라는데, 경험을 해 보려고 입국 비자 서류를 제출하고 입국 심사를 받아 보았습니다.

현지 비자비는 20달러로 알고 갔는데, 20달러와 서류를 제출하니 캄보디아 서류 심사를 하는 사람이 캄보디아 말로 비자 발급비 이외의 돈을 더 달라고 해서 1달러를 더 주었더니 입국 심사를 진행해 주었습니다.

 

뒤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5달러를 더 주면 여권을 호텔까지 가져다 준다고 합니다. 그래도 캄보디아 사람들은 순박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앙코르왓 여행은 대부분 인천에서 오후에 출발해서 씨엠림에 도착하면 저녁 늦은 시각으로 바로 호텔로 직행합니다.

호텔에서의 아침

씨엠립 현지 1일차.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호텔에서 수영도 할 수 있습니다. 아침 식사는 호쳉 뷔페식인데, 아래의 국수(이름은 잘 모름)가 너무 맛있어서 호텔에 머무르는 며칠 동안은 아침마다 다른 것은 안 먹고 국수만 몇 그릇씩 먹었습니다.

앙코르 왓 매표소

앙코르 왓을 여행하려면 매표소(위 사진)에서 입장권을 구매해야 하며, 3일권 이상 티켓은 양도를 금지하기 위해서 먼저 2명씩 매표소 창구에 서면 얼굴 사진을 찍어서 입장권과 함께 코팅을 해서 주면 목에 걸고 다녀야 합니다. 여행지마다 이 이름표를 확인하며, 이름표를 잃어 버리며 다시 구매를 해야 합니다.

앙코르 왓 여행은 대부분 3박 5일 일정이나 대한항공은 격일 운항으로 4박 6일 일정이었으며, 캄보디아 현지 4일간의 앙코르 유적지를 사진으로만 소개합니다.

쁘레아 칸

브레아 칸은 자야바르만 7세가 왕 위에 오른지 10년이 지난 1191년 승하란 자신의 아버지 토르닌드라바르만 2세를 기리기 위해서 건립하였다. 중앙 사당에는 그의 아버지를 상징하는 로케스와라(관세음보살)가 모셔졌는데 로케스와라는 마라야나 불교(대승 불교)에서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의 보살로서 자야바르만 7세의 치세 동안 높은 숭배를 받았다.

쁘레아 칸은 건축 당시의 명칭을 그대로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몇 안되는 사원 중 하나로 선립의 유래르 새긴 비석에는 산스크리트어로 사원 명을 '자야스리'로 표기하고 있다. 자야스리 또는 쁘레아 칸은 '신성한 검'을 의미하는 사원 명인 동시에 자야바르만 7세의 즉위 당시의 존명이기도 하다. 창건 당시 쁘레아 칸은 단순한 사원이라가 보다는 다양한 직종과 계층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하나의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또한, 고승이나 그들의 제자들이 불교의 교리를 배우고 수행하는 곳이기도 하다.

중세(앙코르 시대 이후)에 들어와 로케스와라(관세음보살)가 모셔진 중앙 사당에는 1기의 스투파(석조 소불탑)가 건립되었는데, 이는 불교의 교리를 각각의 불상의 모습으로 구현하는 것보다 탑을 통해서 보다 상징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닉 뽄

12세기 말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세워진 닉 뽄(휘감긴 큰 뱀)은 한 변이 350m에 달하는 사각형의 인공 섬으로 거대한 인공호수의 중앙에 세워졌다. 오늘 날 사원의 이름인 닉 뽄은 중앙 사당의 원형 기단을 둘러싸고 있는 두 마리의 큰 뱀의 형상에서 유래되었다. 비문에는 "이 사원은 경내의 연못으로부터 은총이 솟아나와 섬에 접근하는 사람들의 죄를 정화해 주는 신성한 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연못은 모두 4군데이며, 연못의 물은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을 본 떠 만든 분수에서 공급되는 복잡한 배수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성수(聖水)가 지닌 불가사의한 치료 효능이란 항해 도중 조난당한 신앙심 깊은 선원들이 로케스와라(관세음보살)의 화신인 신마(神馬) 발라하에 의해 구조되었다는 설화를 구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유적을 둘러싸고 있는 3,500mx900m 면적의 인공호수는 원래 자야 따다까 또는 '자야[바르만 7세]의 연못'이라고 불려졌다. 근대 이후의 지명인 '위을리옷다(왕가의 호수 들판)'이라는 지명은 이 지역의 광대한 평지가 지금은 완전히 말라 초원이 되어 있긴 하지만, 원래는 바라이(왕이 건축한 인공호수)였다는 것, 그리고 이 사실이 시대를 초월해 앙코르 지역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분명히 남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따 프롬

따 프롬이란 '브라마의 조상'이라는 뜻으로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원이다. 폐허가 된 채로 방치된 인상적인 사원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이 어떻게 사원을 무너지게 했는지 그 과정과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마치 정글처럼 나무 뿌리가 사우너의 기둥과 지붕을 깜싸안거나 무너뜨려, 주변 어디를 돌아 보아도 자연이 만들어 낸 파괴와 융합의 이중성을 보게 된다. 때문에 사원을 처음 탐험한 사람이 느꼈을 감흥을 느낄 수도 있다.

따 프롬은 앙코르왓 유적 중에서는 비교적 큰 사원이다. 이 곳에서 발견된 산스크리트어 비문에 의하면 3천여 마을을 관할하고 8만 여명이 사원을 관리하였으며, 고승 18명과 관리, 인부, 무희가 5천 여명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사원의 재산 중에는 500kg이 넘는 황금 접시 한 쌍과 다이아몬드, 진주 등 귀한 보석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따 프롬의 담은 700mx1,000m 길이의 라테라이트로 되어 있다. 담 안쪽에는 단층으로 된 길고 낮은 건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중앙 성소에는 회랑이 있다. 이 곳 역시, 크메르 건축의 특징인 좌우 대칭과 반복적인 배치로 되어 있는데, 일부는 계획성 없이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따 프롬은 안쪽으로 들어 갈수록 파괴된 정도가 심하며, 통행이 불가능한 곳도 많다. 때문에 좁은 통로를 따라 돌아서 이동해야 되는 경우도 종종있다. 원래 동쪽이 정문이었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관광객이 차량 이용 등의 문제로 서쪽부터 관람한다. 이때는 서쪽 입구로 들어가서 파괴된 사원을 둘러보며, 동쪽 입구까지 갔다가 다시 서쪽으로 나가면 된다.

앙코르 왓을 가기 전에 캄보디아 여행 책자나 인터넷에서 앙코르 왓 사진을 보면서 제일 신기한 것이 위 아래 사진과 같이 큰 나무가 사원의 담장을 휘감고 자라는 사진이었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면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롤레이 사원

롤레이 사원은 현재 4기의 탑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창건 당시는 훨씬 복잡한 구성이었다. 서기 893년, 예아싸오바르만 1세는 왕의 선조, 특히 부왕에게 공양함을 목적으로 이 롤레이 사원을 건립하여 봉헌하였다. 이 사원은 예아싸오르만 1세의 부왕인 인드라바르만에 의해 건조되기 시작한 인더라따까 호수의 중앙에 위치한 인공 섬이다. 이 거대한 호수는 면적이 3,800mx800m에 달하며, 건조를 명한 인드라바르만의 이름을 빌어와 인더라따까로 불리어지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그 크기를 견줄 만한 호수가 없었다.

탑의 문설주 4군데에 새겨진 고대 크메르어는 서체 자체가 아름답고 극히 예술적인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은 이 사원의 봉헌이 결정된 경위, 각 탑에 봉헌된 선조의 이름, 작업을 분담하여 탑 제작에 수고한 신하 수백 명의 이름과 작업 내용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귀중한 문한 자료로 간주되고 있다.

사원 명인 '롤레이'는 '하레하라+알라이'라는 두 단어가 하나로 합쳐진 말이다. '하레하랄라이'는 9세기 경, 현재의 로루어 지역에 건설된 앙코르 제국 최초의 수도 명칭이었다. 예아싸오바르만 1세는 왕도에 인공 섬으로 된 이 사원을 준공한 후, 거기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프놈 바겡산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이 천도에 의해 탄생한 도성이 '예아싸오테아라(현재 우치은엉꼬 지역)'이다.

롤레이를 건설함과 동시에 천도를 도모한다는 왕의 계획은 일견 의아스럽게 여겨질지 모르나 반대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즉, 천도에 앞서 선조의 땅에 대한 숭배를 잊지 않고, 인더라따까의 중앙에 롤레이 건설을 결단한 것이다. 부왕을 애도하기 위한 공물로서의 롤레이 사원을 부왕 인드라바르만 1세에 의해 건조된 인더라따까의 중앙에 봉헌함으로써 이 곳이 가지는 의미 및 상징성이 더욱 깊어졌다고 할 수 있다.

쁘레아 꼬 사원

양쪽에 연못이 있는 쁘레아 꼬 사원은 바꽁과 롤레이의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원래 500mx400m의 큰 대지 안에 건립되었다. 다양한 목재로 지어진 최초의 건축물은 전혀 남아있지 않고 석조 건물 부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사원의 명칭은 힌두교의 <성스러운 '소'>에서 유래하며, 현대 크메르어로는 '쁘레아 꼬'라고 불려진다.

쁘레아 꼬 사원은 879년 인드라바르만 1세에 의해 축조되었다. 직사각형으로 되어있는 기단 위에는 6개의 탑이 2줄로 서 있는데, 이는 모두 인드라바르만 1세가 그의 선조들을 위해 봉헌한 사당으로, 당시에는 역대 선조들의 조각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특히, 앞쪽의 중앙 사당에는 크메르 민족을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시킨 자야바르만 2세의 상이 모셔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쁘레아 꼬 사원의 원래 명칭은 자야바르만 2세의 사후 존명인 '바럼머 메이 쏘(산스크리트어 바러메아스와라)'이며, 이후 대대로 앙코르 제국의 왕들은 이 전통에 준하여 사원의 건립을 반복하였다. 왕이 자신이 신봉하는 종파를 위해 사원을 건립하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6개의 탑은 창건 당초에는 가늘고 새하얀 치장 벽토로 덮혀 있었으며, 훌륭한 장식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현재에는 부분적으로는 이 조각이 남아있어 예전의 조각이 얼마나 섬세하게 이루어졌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빠꽁 사원

캄보디아 종교 건축사에서 바꽁은 확실한 층 단 형식으로 건립된 최초의 피라미드 사원이다. 그 형상 때문에 건축사학에서 '산형사원'이라고도 불려진다. 바꽁 사원은 쁘레아 꼬 건립으로부터 2년 후인 881년, 인드라바르만 1세가 스스로 신봉하는 힌두교의 신들에게 봉헌하기 위해 건립하엿다고 전해진다.

이 사원은 400mx300m에 이르는 라테라이트 벽과 해자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해자의 바깥쪽은 900mx700m에 이르는 또 다른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토벽과 석벽 사이에는 22개의 벽돌로 지은 탑이 있는데, 대부분은 식물과 가옥에 의해 가려져 있다. 이들 벽돌탑 중 일부는 건립 당시의 목제 상인방 창건 이래 오랜 세월을 견디며 잘 보존되어 있다.

해자를 빠져 나오면 5단으로 되어있는 큰 중앙 사원 주위에 위치한 여러 종류의 건축물들을 볼 수 있는데 중앙 입구로 향하는 길 양쪽에는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나가>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앙코르에서는 이 길이 난간에다 나가의 모습을 장식한 치초의 건축 구조물이다.

피라미드형 중앙 사원의 상부 기단 벽에는 설화에서 따 온 장면들의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본래에는 전면에 새겨져 있었으나 현재는 남쪽의 중앙 계단 근처 한 군데에서만 아수라의 일군을 묘사한 장면을 겨우 볼 수 있다. 한편, 사원 꼭대기에 축조된 당시의 중앙 탑은 전부 소실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건축물은 12세기 이후의 건물이다.

왓 트마이

왓 트마이는 사원 자체의 볼거리보다 해골을 모아놓은 탑 때문에 유명한 사원이다. 씨엠립 시내에서 북쪽으로 1.5km 정도의 거리로 앙코르 유적 입구 서쪽에 있다. 크메루 루즈에 의한 킬링필드 대학살 당시 씨엠립과 앙코르 유적 인근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 놓았다고 한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예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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