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跡 1호 경주 포석정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따서 만들었다.
史跡 2호 水原 華城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과학기를 이용하여
실용적으로 쌓았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史跡 14호 부여 능산리 고분군
부여 능산리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이다.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 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일제시대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
(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다.
史跡 18호 경주 임해전지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史跡 20호 신라 무열왕릉
신라 제29대 무열왕(재위 654∼661)의 무덤으로,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본명은 김춘추이다.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661년 6월에 죽어, 죽은 왕에게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史跡 21호 김유신 묘
김유신(595∼673)은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 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史跡 41호 경주 황오리 고분군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70여 기의 크고 작은 무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대부분 파괴되고 지금은 10여 기의 무덤이 흩어져 남아 있다.
史跡 55호 소수 서원
조선 중종 36년(1541)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史跡 73호 수로왕릉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이라고 부른다.
史跡 104호 황산 대첩비지
고려 말에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군을 무찌른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가 있던 자리이다.
황산대첩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유명한 싸움으로,당시의 승리 사실을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 10년(1577)에 대첩비를 세우게 되었다.
史跡 105호 칠백 의총
임진왜란(1592) 때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700명의 병사들을 위한 무덤과 사당이다.
조헌(1544∼1592)은 의병장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예조좌랑, 감찰을 거쳐
보은현감으로 나갔으나, 여러 번 재등용되었는데 사직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남은 군사 700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그들이 전사한 후 조헌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시체를 거두어 무덤을 만들었는데,이것이 칠백의총이다.
史跡 112호 이충무공 묘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무덤이다. 아산군 금성산에 무덤를 만들었다가 16년 후인
광해 6년(1614)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앞에는 정조 18년(1794)에 세워진
어제비(御製碑)의 비각이 있다
史跡 114호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완도)
정유재란 때 (1598년)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과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의
군사들이 힘을 합해 왜군을 물리쳤던 장소이다.
史跡 116호 해미 읍성
해미는 태종 14년(1414)부터 효종 2년(1651)까지 군사의 중심지였는데, 이 성은 세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하여, 성종 22년(1491)에 완성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 1,000여 명을 처형시켰던 곳으로, 김대건 신부도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천주교인을 처형한 회화나무와 사형대 등이 남아 있는데,
이 회화나무에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매달아서 고문을 하였으며, 그 흔적으로 지금도
철사줄이 박혀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읍성으로는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어
대표적인 표본이 되며, 우리나라 천주교의 성지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유적이다.
史跡 118호 진주성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聖地)이다.
본시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金수: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동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성의 둘레는 1.7㎞이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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